國際

베트남에서 느낀 '중진국의 함정'

이강기 2015. 10. 31. 17:45

베트남에서 느낀 '중진국의 함정'

중앙일보

2015-03-21 22:39:39

지난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노이의 뜻이 ‘강 안에 둘러싸인 곳’라는 하내(河內)를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베트남 화장실에 붙은 ‘NAM(남)’이라는 표지판에서도 베트남이 같은 한자문화권임을 실감했습니다. 


 

지난 11일 하노이 풀먼호텔에선 한국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베트남 기획투자부가 공동주최한 경제발전경험전수사업(KSP) 보고회가 열렸습니다. KSP란 지식공유프로그램입니다. 국내 전문가들이 우리의 경제발전 경험을 베트남 실정에 맞게 연구해 베트남 측에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번 보고회에선 전자주민등록제도와 주택 선(先) 분양제도 등이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응웬 반 쭝 기획투자부 차관의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베트남 정부는 장기적으로 중진국의 함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한국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의 경험도 배우고 싶다.”

 

베트남차관.jpg

 지난 11일 KSP보고회에서 연설하는 응웬 반 쭝 베트남 기획투자부 차관[사진 KDI]
 

 ‘중진국의 함정’.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인데요. 갑자기 베트남의 국민소득이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봤습니다. 2013년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른 1인당 명목 소득은 1901달러, 물가를 감안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론 5295달러였습니다. 베트남은 2000년대 중반 8%가 넘었던 경제성장률은 최근 5%대로 떨어졌습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77달러였던 1982년의 성장률이 8.3%, 2179달러였던 1983년의 성장률은 무려 13.2%였습니다. 베트남이 중진국이냐, 아니냐를 떠나 현 시기에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울 것입니다. 장기 전략을 생각하는 베트남 고위 관료 입장에선 그런 고민을 할만 합니다.
 
현지에서 만난 베트남인에게 물어보니 근로자의 한달 평균 임금은 200~300달러 정도라고 했습니다. 하노이 시내를 다녀보니 애플 아이폰을 파는 가게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삼성 휴대폰을 쓰는 사람도 많았구요.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젊은 층은 최신 기기를 열망합니다. 이처럼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후발주자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기에는 저임금을 무기로 고속성장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금이 오르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중진국의 함정은 1~2년전까지 국내 언론에서 적지 않게 언급됐습니다. 전에는 남미처럼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샌드위치론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요즘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간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마침 지난 19일 전경련에선 “지금의 한국 경제는 2만 달러를 넘어선 후 10년 이상 4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한 스페인과 그리스 등의 전철을 밟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저성장 불감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내용을 발표했더군요. 여기엔 영국(2013년 3만9372달러) 역시 18년째 4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잘 살펴보면 위기론도 점차 수준을 높여간다고나 할까요. 

 


 

중진국의 함정과 유사한 얘기가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스스로를 선진국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아직도 중진국인가요? 투자의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주식시장은 아직 한국을 신흥시장(emerging market)으로 분류한다지만, 대부분의 국제적 분류로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입니다. 시기를 늦게 잡는다고 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원조를 하는 나라의 클럽인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2009년 이후엔 선진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부르기를 주저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직 정치·사회적인 성숙도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부족하고, 복지 수준이 낮다는 것을 꼽는 분도 있더군요. 또 1인당 명목 GDP 소득이 아직은 2만 달러대로 일본이나 구미 선진국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물가를 감안한 2013년 국민소득은 3만3791달러로 일본(3만6654달러)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가를 감안한 국민소득은 1~2년 안에 일본을 추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경련 얘기로는 ‘선진국=4만 달러’라는 것인데 이런 논리가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올해쯤엔 명목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재계가 현 정부가 주도하는 소득 주도의 성장 정책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전경련의 얘기를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자’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좀 바꿔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멀었으니 선진국 따라가자는 얘기가 좀 식상하기도 합니다. 과도한 추격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국민소득 4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가자’는 구호는 11.1%라는 청년실업률 앞에선 그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그대로 두고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숫자는 구체성이란 마력이 있지만 더 이상 몇 만 달러하는 숫자 자체만으론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런 수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대략 북유럽의 복지와 관용, 독일과 일본의 산업력, 미국의 기술과 창의력을 겸비한 통일국가 정도가 돼야 만족할 것입니다. 사실 어떤 나라든 꼭 중진국의 함정이 아니라도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극복 방법일 겁니다. 이미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노동시장 개혁이나 공무원연금 개혁 등을 실천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베트남 같은 후발 주자들이 한국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열심히 연구할 것입니다. 이런

베트남에서 느낀 '중진국의 함정'

중앙일보

2015-03-21 22:39:39

지난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노이의 뜻이 ‘강 안에 둘러싸인 곳’라는 하내(河內)를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베트남 화장실에 붙은 ‘NAM(남)’이라는 표지판에서도 베트남이 같은 한자문화권임을 실감했습니다. 


 

지난 11일 하노이 풀먼호텔에선 한국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 베트남 기획투자부가 공동주최한 경제발전경험전수사업(KSP) 보고회가 열렸습니다. KSP란 지식공유프로그램입니다. 국내 전문가들이 우리의 경제발전 경험을 베트남 실정에 맞게 연구해 베트남 측에 적절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번 보고회에선 전자주민등록제도와 주택 선(先) 분양제도 등이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응웬 반 쭝 기획투자부 차관의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베트남 정부는 장기적으로 중진국의 함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한국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의 경험도 배우고 싶다.”

 

베트남차관.jpg

 지난 11일 KSP보고회에서 연설하는 응웬 반 쭝 베트남 기획투자부 차관[사진 KDI]
 

 ‘중진국의 함정’.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인데요. 갑자기 베트남의 국민소득이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봤습니다. 2013년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른 1인당 명목 소득은 1901달러, 물가를 감안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론 5295달러였습니다. 베트남은 2000년대 중반 8%가 넘었던 경제성장률은 최근 5%대로 떨어졌습니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77달러였던 1982년의 성장률이 8.3%, 2179달러였던 1983년의 성장률은 무려 13.2%였습니다. 베트남이 중진국이냐, 아니냐를 떠나 현 시기에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울 것입니다. 장기 전략을 생각하는 베트남 고위 관료 입장에선 그런 고민을 할만 합니다.
 
현지에서 만난 베트남인에게 물어보니 근로자의 한달 평균 임금은 200~300달러 정도라고 했습니다. 하노이 시내를 다녀보니 애플 아이폰을 파는 가게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삼성 휴대폰을 쓰는 사람도 많았구요.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젊은 층은 최신 기기를 열망합니다. 이처럼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후발주자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기에는 저임금을 무기로 고속성장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금이 오르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일 겁니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중진국의 함정은 1~2년전까지 국내 언론에서 적지 않게 언급됐습니다. 전에는 남미처럼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샌드위치론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요즘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간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마침 지난 19일 전경련에선 “지금의 한국 경제는 2만 달러를 넘어선 후 10년 이상 4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한 스페인과 그리스 등의 전철을 밟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저성장 불감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내용을 발표했더군요. 여기엔 영국(2013년 3만9372달러) 역시 18년째 4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잘 살펴보면 위기론도 점차 수준을 높여간다고나 할까요. 

 


 

중진국의 함정과 유사한 얘기가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스스로를 선진국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아직도 중진국인가요? 투자의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주식시장은 아직 한국을 신흥시장(emerging market)으로 분류한다지만, 대부분의 국제적 분류로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입니다. 시기를 늦게 잡는다고 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원조를 하는 나라의 클럽인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2009년 이후엔 선진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부르기를 주저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직 정치·사회적인 성숙도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부족하고, 복지 수준이 낮다는 것을 꼽는 분도 있더군요. 또 1인당 명목 GDP 소득이 아직은 2만 달러대로 일본이나 구미 선진국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물가를 감안한 2013년 국민소득은 3만3791달러로 일본(3만6654달러)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가를 감안한 국민소득은 1~2년 안에 일본을 추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경련 얘기로는 ‘선진국=4만 달러’라는 것인데 이런 논리가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올해쯤엔 명목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과 재계가 현 정부가 주도하는 소득 주도의 성장 정책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전경련의 얘기를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자’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좀 바꿔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멀었으니 선진국 따라가자는 얘기가 좀 식상하기도 합니다. 과도한 추격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국민소득 4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가자’는 구호는 11.1%라는 청년실업률 앞에선 그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그대로 두고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숫자는 구체성이란 마력이 있지만 더 이상 몇 만 달러하는 숫자 자체만으론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런 수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대략 북유럽의 복지와 관용, 독일과 일본의 산업력, 미국의 기술과 창의력을 겸비한 통일국가 정도가 돼야 만족할 것입니다. 사실 어떤 나라든 꼭 중진국의 함정이 아니라도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극복 방법일 겁니다. 이미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노동시장 개혁이나 공무원연금 개혁 등을 실천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베트남 같은 후발 주자들이 한국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열심히 연구할 것입니다. 이런 나라들은 한국의 실패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게 될까요? 아니면 어려운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돌파해 간 성공의 모델로 남을까요. 그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라들은 한국의 실패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게 될까요? 아니면 어려운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돌파해 간 성공의 모델로 남을까요. 그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