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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현지리포트-기업진출현황, 한국에 대한 인식

이강기 2015. 11. 1. 10:50

기획특집 | 현지 리포트① 한국기업의 엘도라도? 베트남을 가다 - 생산기지에서 소비 대국으로 경제시프트 

 

한국, 지난해 일본 제치고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 올라서… 실용적 사고와 근면성 강점, 현지 정서 이해가 성공의 밑거름 

 

 

월간중앙 2015년 1월호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이 마치 물고기떼처럼 일사불란하게 도시를 누빈다. 고층건물에는 어김없이 다국적기업들의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다. 거리 곳곳에는 우리에게 ‘월남 패망일’로 알려진 ‘사이공(남베트남) 해방’ 40주년(4월 30일)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화려한 조명으로 밤거리를 수놓고 있다. 베트남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전 인구의 3분의 2가 40세 미만이고,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외국인과 자본주의에 배타적이지 않은 곳. 최근 수년째 고도 성장을 이어가는 베트남의 경제의 저력은 여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해외 기업이 이곳에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황금의땅 엘도라도로 몰려든 대항해 시대의 유럽인들을 연상케 한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가장 적극적인 투자국 중 하나다. 월간중앙은 베트남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한국 기업들을 찾아가보았다. 이들이 겪은 시행착오와 성공의 발자국이 앞으로 베트남으로 향할 더 많은 기업에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치민시는 베트남에 몰려드는 외국 자본의 집결지다. 호치민 시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바이텍스코 타워(높이 206m)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사이공강 주변의 전경. 왼쪽 강 건너편에 신도시 건설을 위한 토지조성공사가 한창이다.
베트남 제2도시 호치민시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를 1시간 30분가량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빈증성.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와 같은 곳이다. 빈증에 들어서면 각종 외국기업의 대형 광고판이 마치 사열을 하듯이 줄지어 서 있다. 그중에는 한국 기업의 광고판도 곳곳에 눈에 띈다. 이곳은 베트남 산업의 전초기지 같은 곳으로 외국 기업의 대형 공장들이 밀집돼 있다. 사이공강과 메콩강을 이용한 내륙 수상운송과 해운에 유리한 입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남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이곳 빈증 일대에 몰려 있다.

빈증성 벤깥현 미푹3공단에는 금호타이어 베트남공장이 있다. 빈증성에 투자한 외국 기업들 중 가장 큰 규모다. 공장 부지의 길이만 1㎞를 넘을 정도다. 전체 면적은 31만5천㎡로 금호타이어 국내·외 8개 공장 중 광주공장(41만5천㎡)에 이어 둘째로 넓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고무냄새와 함께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컨베이어벨트로 연결된 거대한 기계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데 거의 모든 공정이 자동화돼 기계를 조작하는 인력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생산라인에서는 얇게 가공된 고무와 섬유 등 각종 원단이 포개지고 눌리며 타이어의 온전한 형태를 갖춰나간다.

금호타이어 베트남공장은 2008년 3월 가동을 시작했다. 2억6100만 달러가 투자됐다. 연간 330만 개의 승용타이어를 생산한다. 광주(1600만 개)나 전남 곡성(1500만 개), 중국(4개 공장 2850만 개)의 공장들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영업이익률은 월등히 높다. 인건비가 낮고 생산능률이 높아서다. 종업원 수는 불과 756명. 이곳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대부분 북미와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수출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국내 기업 중에서 대우그룹과 함께 이곳에 진출한 가장 오래된 한국기업 중 하나다.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1992년) 직후인 1993년에 아시아나항공의 취항을 통해서다. 개방 초기에는 기업들이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선입관과 위험부담 때문에 투자를 꺼렸다. 초기의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20년 넘게 꾸준히 투자를 해온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대해 베트남 정부가 갖고 있는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2011년 11월 9일 한국을 국빈 방문한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이 서울 신문로에 있는 금호아시아나 본사를 방문해 박삼구 회장과 환담을 나눴을 정도다. 두 사람의 만남은 2007년부터 이때까지 다섯 번이나 된다. 지난해 3월 12일에는 베트남 정부가 박삼구 회장에게 우호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민간기업이 베트남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은 처음 이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가 금호그룹에 이토록 각별한 애정을 쏟는 이유는 뭘까? 김현호(53) 금호타이어 베트남법인장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의리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트남인들도 중국의 ‘꽌시(关系)’처럼 의리를 대단히 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김 법인장은 “베트남이 처음 시장개방정책을 펴던 시기에는 외국 기업들이 반신반의하며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금호그룹은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에도 현지 투자를 유지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베트남 정부가 고마움의 표시로 일종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대우’를 베트남에서 여전히 최고 기업으로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3100여 개 한국기업 진출


▎(왼쪽)외국 기업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호치민의 위성도시 빈증성 관문의 조형물 옆으로 금호타이어의 대형 광고판이 서 있다.
현지의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기업활동을 하기에 베트남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김 법인장이 꼽은 베트남의 매력은 ▷안정적인 정치 구조 ▷낮은 생산원가 ▷잠재력이 큰 시장성이다. 베트남 정부는 1986년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경제 개방을 결정했다. 이른바 ‘도이모이(쇄신을 뜻하는 베트남어) 정책’이다. 이후 개방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정책의 일관성은 기업이 해외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중 하나다. 또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 노사 갈등의 요소들을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기 때문에 갈등 해결 비용을 줄이고 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의 인건비는 국내의 10분의 1 수준이다. 베트남 정부는 올해 최저임금을 월 315만 동으로 결정했다. 한화로 약 18만4천원이다.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현지인 근로자가 받는 급여는 이보다 꽤 높은 편이다. 그래서 베트남 근로자들의 충성도와 능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현지 영업과 관리를 총괄하는 김철환 상무는 “중국보다 인건비가 절반 정도로 저렴하고 손재주와 머리가 좋아 업무의 능률도 높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업들에 베트남은 중국을 대체할 해외 생산기지로 급부상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이 일본을 투자규모에서 앞질러 1위 투자국에 올랐을 정도다.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삼성전자는 2008년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홍강 델타 지역의 박닌성 옌퐁공단에 휴대전화 공장을 설립했다. 연간 1억2천만 대 생산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이어 지난해 2월부터는 타이응우옌성 옌빈공단에 최대 1억5천만 대 연산 규모의 공장을 추가로 가동하고 있다. 삼성전자 전체 휴대전화 생산량의 절반이 이곳 베트남에서 만들어진다. 지난해 11월에는 2공장이 있는 옌빈공단에 3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기로 결정했고, 남부 호치민 사이공하이테크파크 공단에는 2017년까지 가전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 호치민무역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국의 베트남 누적투자액은 372억 달러, 4110건에 이른다.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2007년44억62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국제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2012년까지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다 2013년부터 기업의 현지 진출이 다시 늘어나면서 지난해 투자액 61억2800만 달러, 투자 건수 505건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베트남 전체에 31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고,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 50%,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지역에 35%가 집중돼 있다. 코트라 호치민무역관의 홍석균 차장은 “베트남은 미국·중국·홍콩에 이어 우리나라의 넷째 투자대상국이며 아세안지역에서는 최대 투자대상국”이라고 말했다.

노동집약 산업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 중


▎국내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섬유가공산업이 베트남에서 활황을 맞고 있다. 세계 유명 패션브랜드에 납품하는 의류제조업체 FTN 베트남공장의 전현수 법인장(왼쪽)이 작업 과정을 지휘하고 있다
전통적인 노동집약산업에서도 한국 기업의 투자가 늘고 있다. 금호타이어 공장으로부터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봉제공장을 찾아가보았다. 길이 100m가 넘는 공장 내부에는 여러 갈래의 긴 작업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가 옷감을 재단하고 봉합하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한국의 의류 수출 전문업체인 FTN 베트남공장의 모습이다. 2006년 11월 가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든 의류는 버버리, DKNY, 캘빈클라인, 바나나 리퍼블릭 등 유명 패션브랜드의 상표를 달고 수출된다. 진출 당시 종업원 1천 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3200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국내에서 쇠락한 섬유가공산업이 이곳에선 활황을 맞은 것이다. 미국을 비롯해 12개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영향 때문이다.

베트남의 섬유산업은 TPP 최대 수혜업종으로 지목돼 한국 섬유업체들의 투자 열기에 불을 지폈다. 한세실업은 남부 띠엔장성의 기존 공장에 10만 평 규모의 공장을 신축하고, 한솔은 벤쩨성에 세 번째 공장을 짓고 있다. FTN도 중국 공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베트남의 생산시설을 30% 정도 증축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섬유업체는 약 500개. 그중 350여 개가 중남부에 몰려 있다. 이들의 현지인 고용규모는 모두 25만 명에 이른다. 베트남 중남부섬유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현수(52) FTN베트남 법인장은 “미국 의류업계의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물량의 70% 정도를 아시아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생산된 상품에 대해 바이어들의 만족도가 특히 높다”고 말했다. 전 법인장은 지난해 12월 제51회 무역의날 행사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의 활약과 베트남 시장의 높아진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베트남을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나라”라고 입을 모은다. 호치민 거리를 나서면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속에도 BMW, 벤츠 등 독일 고급차가 유독 많다. 상대적으로 자동차가 적어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이겠지만 거꾸로 그만큼 고급 승용차 수요가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중하위층이 많이 거주하는 벤탄시장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나 택시기사들이 아이폰 최신 모델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이폰은 베트남인들의 월급 두 세 달치와 맞먹는 고가품이다.

베트남 현지인들의 소비경향을 조사한 호주계 ANZ은행은 베트남인들의 높은 계층 상승 욕구가 소비행태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흥 소비계층인 젊은 소비층이 브랜드에 민감하고 소비 경험을 공유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베트남 인구는 9300만 명으로 세계 14위 규모다. 국토는 남북을 합친 한반도의 1.5배다. 평균연령은 28세로 한국(38세)보다 훨씬 젊다. 30세 이하 인구가 56%를 차지한다. 코트라 호치민무역관은 보고서에서 “베트남의 중산층 인구는 약 17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에 못 미치고, 전체 인구 중 34%만 도시에서 생활하는데 이는 그만큼 베트남이 소비시장으로서 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의 중산층 인구가 2020년까지 매년 200만 명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베트남인들의 소비 수요는 한국의 유통·문화산업 기업들에도 큰 호재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국 기업들의 현지화 전략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인 롯데리아는 지난해 9월 베트남에서 200호점을 돌파해 글로벌 브랜드인 KFC를 앞질렀다. 호치민 시내 곳곳에서 롯데리아 매장이 쉽게 눈에 띈다. 시장점유율도 49.6%로 선두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지하 5층, 지상 65층(높이 272m)의 복합빌딩 ‘롯데센터 하노이’가 지난해 9월 완공돼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입주해 있는 베트남 사업의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호치민에 대형유통점인 롯데마트 10호점이 문을 열었다. 사이공강 동남쪽 미개발지역에는 롯데자산개발이 2조원을 투자해 ‘에코스마트시티’ 건설을 추진 중이다. 호치민시 2군 뚜띠엠 개발지구인 이곳은 호치민시가 2002년부터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롯데가 개발하는 구역은 총 10만㎡ 규모로 백화점 등 상업시설과 호텔, 오피스, 아파트 등 주거와 상업이 결합된 공간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지금은 부지 조성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현지 정서 숙지하는 게 성공의 밑거름


▎베트남은 적극적인 외국 자본 유치정책을 통해 동남아에서 가장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호치민의 야경을 수놓은 마천루는 베트남 경제 부흥의 상징이다.
CJ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도 현지에서 고급엔터테인먼트 시설로 자리 잡았다. 2011년 7월 베트남 최대 복합상영관 체인 ‘메가스타’를 인수하며 현지 문화콘텐트 시장에 뛰어든 CJ그룹은 지난해부터 메가스타 대신 자체 브랜드인 CGV를 내세웠다. 한류열풍에 힘입어 한국형 멀티플렉스가 현지에서도 통할 것이란 확신이 있어서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CGV는 베트남 내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9월 기준 총 16개 극장과 110개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다. CJ는 한국영화 상영편 수를 확대해 한류 플랫폼의 이미지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김도훈 호치민 한인상공인연합회(KOCHAM) 전문위원은 “투자 내용이 과거에는 봉제·섬유 등 노동집약적 산업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졌으나 2013년 이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변화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베트남 시장 공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시장의 조건으로 볼 때 대기업의 경우 대체로 실패할 가능성이 작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잘 갖춰진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고, 중앙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확천금의 환상과 의욕만 갖고 뛰어든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가들에게 베트남은 무덤과 같은 곳일 수도 있다.

A중소기업은 베트남의 제도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현지 진출을 서둘렀다가 낭패를 본 경우다. A업체는 베트남 투자 열풍이 불던 2006년경 중국에 있던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했다. 값싼 노동력과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혜택에 매료돼 투자를 서둘렀다. 50년 임대 조건으로 토지사용권도 확보했다. 초기에는 꽤 높은 이익을 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영이 악화됐다. 결국 몇 년 만에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사용권을 획득한 토지의 가치가 높아져 임대차 비용을 정산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베트남 지방정부가 임대 이전 원형토지의 잠재 가치를 정산에 포함시키면서 오히려 돈을 더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결국 이 기업 대표는 공장 자산을 포기하고 야반도주를 택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체제 국가로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 공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다만 ‘토지 사용권’이란 용어로 개인의 소유를 어느 정도 묵인해준다. 부동산을 사고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개인, 그중에서도 베트남 국민에게만 허용될 뿐이다. 이런 점을 혼동해 기업을 일으켰다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피해가 종종 발생기곤 한다. 외국인 토지소유가 금지돼 있어서 현지인 명의로 토지를 확보했다가 나중에 철수 과정에서 차명 토지주가 협조해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주로 개인사업가들이 이런 일을 겪곤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베트남 정부로부터 어떤 구제도 받을 수 없다. 토지 차명사용이 불법인 데다 베트남 정부가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점포를 열었다가 아예 재산을 모두 떼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운영권을 빼앗기고 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이다. 호치민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막연한 기대만 갖고 베트남에 왔다가 사업에 실패하거나 현지 사업 파트너와 불화 때문에 재산을 떼여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 하고 이곳에서 숨어 지내는 한국인도 꽤 있다”고 전했다.

이런 문제가 비일비재하지만 한국 정부나 공공기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불법행위까지 보호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도움을 주려 해도 당사자들이 잠적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쉽지 않다. 사전에 주의사항과 현지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베트남에 진출하기 전에 스스로 시장조사와 준비를 철저히 하는 방법밖에 없다. 현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기업인과 교민들은 베트남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입을 모은다. 베트남에서 10년 넘게 섬유 가공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 B씨는 “베트남인들의 체구가 왜소하고 한국보다 가난해 얕잡아보거나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는 “동남아 국가들 중 베트남인들의 평균 IQ가 싱가폴에 이어 2위 수준이란 연구가 있을 만큼 지적 수준이 높다”며 “연중 기후가 따뜻하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환경 때문에 낙천적인 생활 방식이 우리가 보기엔 느린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B씨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보수적이어서 경영자의 도덕성을 높이 평가한다. 만약 현지인 직원들이 오너를 따르지 않고 기업운영이 잘 안 된다면 경영자 스스로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B씨는 자신이 경험한 일화를 소개했다. 베트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바이어를 접대하면서 유흥업소에 갔는데 다음날 매니저급 베트남 직원이 전날 밤 자신의 동선을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베트남 직원에게서 ‘사장님이 그렇게 행동하면 직원들이 말을 안들을 것’이라는 충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베트남인을 얕보거나 저급한 행동과 언행이 경영 리더십을 실추시킨다는 것이다. B씨는 그날 이후로 유흥업소 출입을 일절 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모든 일에서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열대지방 사람들의 낙천적 성격으로 짐작된다. 취재를 위해 5일간 호치민에 머무는 동안 뛰어다니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김현호 금호타이어 베트남 법인장도 “베트남에서 2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현지인 직원이 뛰는 걸 본게 딱 한 번 있었다”고 했다. 10여 년 전에 개발계획을 세운 사이공강 주변 호치민 2구역 신도시 개발사업도 이제서야 부지 조성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남부지방에 비해 기후가 춥고 환경이 척박한 북부지방은 다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어서 한국인의 정서와 좀 더 가깝다. 코트라 관계자는 “베트남인은 배타적이지 않지만 체면을 중시하고 자국인끼리 단결력이 강하다”며 “저들의 특성을 배려하고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리 추구 사고가 적극적 개방과 발전의 원동력


한국인이 베트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또 있다.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의 침략자에 대한 반감이 거의 없는 베트남인들의 정서가 바로 그것이다. 베트남 정부조차 10년 동안 전쟁 상대였던 미국과 한국 등에게 전쟁 중 자국민이 희생된 것에 대한 사과나 금전적 보상을 거의 요구하지 않고 있다. 대신 경제 교류 확대를 통해 자력을 키우는 길을 택했다. 2011년부터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정권 지도부의 면면을 보면 베트남 정부의 이런 의지가 대번에 읽힌다.

응웬 푸 쫑 당 총서기는 베트남전쟁이 발발했을 때 구소련에서 유학한 호치민 엘리트 출신이다. 그는 구소련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보며 경제체제로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명목상 행정부 수반인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은 당 경제위원장을 지내고 국가주석을 연임하며 당의 신뢰를 받고 있다. WTO 가입과 TPP 협상 참여, EU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협상 등이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이뤄졌다. 쯔엉 주석과 함께 유임된 응웬 떤 중 총리도 호치민시 수산회사 사장과 내무차관, 당경제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한 경제통이다. 간선으로 선출되는 국회의장에도 재무부 관료(건설은행, 투자국장, 재무부 장관) 출신인 응웬 싱흥 전 수석부총리가 포진해 있다.

베트남 정부는 연간 GDP 7~8% 성장 유지, 1인당 GDP 3000~3200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황성원 호치민 한인사편찬위원장은 “베트남인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천착하기보다는 미래의 이해관계를 중요시하는 실용적 정서가 강하다”고 평가했다. 과거 1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10세기경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스스로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선 먼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19∼20세기 차례로 침략해온 프랑스, 일본, 미국을 적대하지 않고 상대의 문화와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에서도 베트남인들의 낙천적이고 실용적인 국민성을 읽을 수 있다.

황 위원장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여서 과거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요구가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국민성이 베트남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높아지고 경제 교류가 확대 되면서 현지에 진출하는 한국인의 연령층도 다양해진다. 과거에는 중견 사업가나 인생 2막을 꿈꾸는 40대 이상 중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청년층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2011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을 목표로 베트남에 개설한 GYBM(Global Young 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은 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16년까지 500명의 연수생이 배출된다. 김우중 회장은 지난해 11월 <월간중앙>과 가진 인터뷰에서 “선진국에서의 행복과 우리나라의 행복은 다르다.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하던 모든 습관을 버리고, 현지여건에 맞춰서 생각하면 다 된다. 철저히 현지화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경영’을 꿈꾸는 이들이 준비해야 할 모든 것이 이 한마디에 녹아들어 있다. 한국을 뛰어넘기 위해 한국을 공부하는 베트남처럼, 우리에게도 베트남을 배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기획특집 | 현지리포트② ‘사돈의 나라’ 사람들의 한국사랑 - 과거는 가슴에 묻고 미래를 바라보다 

 

1천 년 넘는 인연, 한류(韓流)와 국제결혼 확대로 더욱 돈독해져… 불행한 현대사 딛고 양국 발전 모색하자는 정서 높아 

 

 

월간중앙 2015년 1월호


▎호치민시 떤빈군에 있는 롯데마트 앞으로 오토바이 행렬이 오가고 있다. 롯데마트 떤빈점은 베트남의 10번째 체인점으로 지난해 12월 18일 문을 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훤칠한 이마. 깃을 세운 셔츠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 기사가 딸린 중형 세단이 성공한 중년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베트남 변호사 응우옌(48·가명)을 만난 건 호치민 시내 상업지역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었다. 외모와 말투 모든 게 여느 베트남인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것은 한국말 솜씨가 농담을 곧잘 할 만큼 유창하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중에 태어난 라이따이한(來大韓), 한국계 베트남인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그의 성장 과정을 잘 아는 한국 교민들을 통해 미리 얘기를 들은 터였다. 한국인 아버지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한국 NGO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끝에 변호사가 된 라이따이한 중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에게 한국에 대한 생각을 직접 물었다. 그의 아픈 과거 때문에 증오가 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응우옌은 꽤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다.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도 독학을 통해 익혔다고 한다. 그와 나눈 대화를 나누며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와 역사적 인연, 음식문화 등 다양한 주제와 시간을 넘나들었다. 응우엔은 “한국은 부지런하고 정이 많아 베트남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의 기업과 투자자들을 주로 상대해 투자 관련법률 컨설팅을 해왔지만 앞으로 한국 파트너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대다수 베트남인이 갖는 한국에 대한 생각은 응우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트남전쟁 당시 서로 총부리를 겨눴으니 반감을 가질 법도 한데 현지에서 그런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에 호의적이고 한국의 문화와 경제 발전상을 동경하는 정서가 짙다.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에서 과거 전쟁의 그늘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의 인연은 역사적으로도 1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 길고도 깊다. 대표적인 사례를 찾자면 한국에 있는 성씨 중에 화산 이씨를 꼽을 수 있다. 화산 이 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Ly) 왕조의 개국 황제인 태조 이공온(李公蘊·리꽁우안)의 7대손으로 알려졌다. 이용상은 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를 피해 고려로 망명했다가 몽고군에 맞서 싸운 공로로 품계를 받은 인물이다. 정선 이씨의 시조 이양혼과는 종손과 증조부 사이다.

라이따이한의 아픔을 넘어


▎한국과 베트남은 한때 전장에서 총부리를 겨눴지만 지금은 ‘사돈의 나라’로 어느 나라보다 돈독한 교류국이 됐다. 베트남전쟁 당시 작전 중인 맹호부대원이 베트남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다.
이에 반해 현재 베트남에는 리 왕조의 대가 끊겼다. 화산 이 씨가 양국이 공인하는 유일한 직계 종손이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도무오이 당시 공산당 서기장을 비롯해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단을 환대해주었다.

두 나라는 정서적으로도 공통점이 많다. 유교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조상을 모시는 풍습이 그렇다. 여러 차례 외침을 받고 극복한 옛 역사는 물론 각각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당했다가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돼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근현대의 역사도 대체로 일치한다. 그래서 베트남 사회에는 한국에 대해 남다른 동질감과 애착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이런 인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호치민에서 확인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최근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식료품점에 가면 한국산 식료품들이 인기상품 목록에 여러 개씩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유통점 체인인 ‘Co,op’마트에는 한국 라면이 진열대의 4~5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트남 라면은 면발이 얇고 국물이 맑은 데 비해 한국 라면은 면이 굵고 매운 게 특징이다. 현지 무역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과거에는 일본의 우동이 인기를 누렸지만 최근 들어서는 한국 라면이 오히려 더 잘 팔린다. 마트에서 만난 베트남 여성 미얀 씨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라면을 알게 됐는데 조리가 간편하고 맛있어서 자주 해먹는다”고 말했다.

동남아의 여타 국가의 경우 한국 드라마나 영화, 가요를 보고 들으려면 중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입해왔지만 베트남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일찍감치 한국의 문화 콘텐트를 받아들여 친숙해졌다. 하노이와 호치민 등 대도시에는 한국산 화장품이 큰 인기를 누리고 한국의 성형외과 병원들도 성업 중이다. 한류가 베트남인들의 얼굴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의 방송국들은 공영채널과 민영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K팝 등 한국가요도 인기를 끈다. 베트남의 명문으로 꼽히는 호치민 인문사회대학과 하노이대 등 10여 개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학과와 한국학과는 대학 내에서도 인기학과로 손꼽힌다. 교수진만 100명이 넘고 학생 수는 2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가장 먼저 개설된 호치민 인문사회대 한국학과(1994년 9월 개설)와 호치민 외국어대 한국학과(1995년 9월 개설)는 학생 정원이 각각 300명 안팎에 이를 정도로 많다.

한국 남성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결혼 상대 중 하나다. 국내에서 베트남계 한국인의 비중은 꽤 높은 편이다. 2013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말 기준 국내 다문화가족은 75만 명 정도에 이른다. 결혼이민자와 귀화자가 28만 명이고 자녀가 19만 명이다. 2020년에는 그 수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 가운데 중국 동포 가정이 10만여 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이 6만8천 명, 베트남이 5만2300여 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

특히 베트남계 다문화가정 자녀 수는 4만9458명으로 조사 대상 11개국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산을 선호하는 베트남 여성들의 적극적인 성격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완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부의 2014년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초등학교 이상 다문화가정 학생의 16.5%는 베트남과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조사됐다.

개방적 성향이 열렬한 한국 사랑 낳아


▎베트남인들은 자국의 이익이 침해를 당했을 때에는 더없이 단호하게 대처한다. 지난해 5월 중국의 영해 침범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중국 지도부 퇴진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열정적인 사랑은 외국 문화에 개방적인 베트남인들의 국민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현지에서 느끼기에 베트남인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문화적 수준은 오히려 한국인보다 높아 보일 정도였다. 호치민 시내에는 프랑스 점령기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100년 전 점령자들의 사교 공간이었던 유럽식 고급 레스토랑과 오페라하우스는 옛 방식 그대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외국의 문물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해서 누리는 것이 베트남인들의 국민성이다. 외국의 다양한 문물을 수용하는 것을 자존심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재성 호치민한인회 사무국장은 “베트남인들은 이념적 편가르기보다 현재와 미래에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있다”며 “미국과 한국을 최고의 경제 협력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한국 문화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은 아니다. 특히 오랜 전쟁의 낳은 라이따이한 문제는 양국이 모두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전쟁 당시 태어난 라이따이한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밝힌 공식 통계는 없다. 하지만 그동안 양국의 인도적 교류와 지원사업에 앞장서온 민간 활동가들은 그 수를 600~1500명쯤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중에서 현재 베트남에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은 500명가량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돕기 위해 베트남 현지에는 적지 않은 한국인과 NGO가 아직까지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정부도 공적개발원조(ODA)나 NGO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들을 돕는다. 40여 년 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퇴역군인들도 자체 조직망을 통해 라이따이한들을 경제적으로 돕거나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주는 활동을 벌인다. 베트남 현지에 조직된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와 국가유공자베트남협의회,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호치민지회 등 여러 참전군인 단체도 마찬가지다. 국가유공자베트남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펼치는 인도적 활동에 대해 베트남인들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우리네 정서로 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도 있다. 베트남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관련 당사국들에게 사과를 촉구하거나 보상을 요구하기보다는 과거사를 묻어두고 한국의 자본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국민성이 그렇다. 이에 대해 황성원 베트남한국교민사편찬위원장은 “승리자의 시각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의 종전일(4월 30일)을 ‘사이공 해방 기념일’ 혹은 ‘전승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월남 패망일’로 말하는 것과 정반대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강대국들에 맞서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호치민 시내에 있는 전쟁기념관에는 전투기를 비롯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이 진열돼 있다. 특이하게 한국군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표현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 당시의 사진과 유물, 역사 기록 들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황 위원장은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싸움을 벌였는데 이긴 사람이 ‘없던 걸로 할 테니 앞으로 잘 지내자’며 악수를 청하면 진 사람이 손을 맞잡는 것으로 화해가 이뤄지지 않느냐? 베트남전쟁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자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에 의해 자국민이 피해를 당하거나 국익이 훼손될 때에는 더없이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지난해 5월 중국과 영유권을 다투고 있는 베트남의 동해(남중국해) 황사군도(중국명 시사군도)에서 양국의 해상 충돌이 발생하자 2만여 명의 반중국 시위대가 중국계 공장을 공격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현지인이나 여성을 희롱하는 행위는 금기시돼 있다. 호치민교민회 관계자는 “한국에서 가졌던 편견으로 현지에 와서 베트남 여성들을 희롱하던 한국인 관광객이 베트남인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한 적도 있다. 이들은 외국인이 자국민을 괄시하거나 특히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승자의 관용으로 과거보다 미래 지향

이는 베트남인들의 강한 자존심과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정착된 성평등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벌어진 베트남 이주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 소식이 베트남에선 큰 뉴스가 되기도 한다. 또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들의 폭력적인 장면 때문에 전체 한국 남성이 그런 것처럼 오해를 사기도 한다. 더구나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양국 남녀의 국제결혼은 서로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한다.

현지 교민들에게 들은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 실태는 이렇다. 우선 한국의 중매업체에 국제결혼을 의뢰하면 베트남 현지 업체와 연결해 신붓감을 물색한다. 남성은 베트남에 가서 후보 여성들과 차례로 맞선을 보는데 맞선이라기보다 ‘인간시장’에 가깝다. 상대 선택권은 오로지 한국인 남성에게 있을 뿐이다. 선택이 끝나면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기 위한 요식행위로 결혼식이 진행된다. 체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하루 이틀 만에 맞선부터 결혼예식까지 모든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혼 이민 수속이 끝날 때까지 베트남 여성은 한국의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교양강좌를 통해 기초적인 한국어와 김치 만들기 등 간단한 한국 관련 지식을 배운다. 이렇게 결혼식에 드는 비용은 1천만원 남짓이다. 체류비와 행사비, 중개수수료 등을 떼고 나면 신부의 집에 돌아가는 사례비는 100만~200만원에 불과하다.

이렇게 상대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만나는 탓에 갈등이 생기거나 불행한 결말을 낳기도 한다. 한국 남성에 의한 폭력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고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거나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서로의 피해를 막으려면 결혼의 전 과정을 공신력 있는 기관이 감독하고 조정하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현지에서 오랫동안 베트남의 문화와 정서를 지켜본 한국 교민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도 과거의 일보다 미래를 강조한다. 호치민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베트남인 여성 사업가 프엉 타오 맛트(40) 씨도 마친가지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억지로 사과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차라리 미안한 마음을 더 깊은 우정으로 바꾸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에요.” 프엉 씨는 한국의 식료품을 수입해 현지에 유통하는 업체를 운영한다. 종업원 수가 1천 명이 넘는 큰 규모다. 그녀는 2000년 한국어 통역을 맡았던 한 직원을 통해 라이따이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직원은 베트남전쟁이 끝나 갈 무렵에 태어났다. 한국인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현지에서 철수하는 미군, 한국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베트남 수교가 이뤄진 뒤로 자기를 찾으러 온 아버지를 만나 한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은 뒤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프엉 씨는 그때부터 라이따이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궁리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라이따이한 돕기 활동을 펼쳐온 활동가 이연실 씨와 함께 한국의 지자체와 기업들을 찾아 라이따이한의 자녀나 수교 이후 태어난 다문화가정 2세들의 한국 취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라이따이한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를 파고들고 한국에 동정심을 촉구하는 건 그의 관심 밖의 일이다. 프엉 씨는 “옛날에는 아버지가 없고 혼인신고가 안 돼 있어서 라이따이한들이 호적 등록도 못한 채 어렵게 살았지만 이제 그들은 ‘전쟁고아’가 아니라 일가(一家)를 이룬 어엿한 가장 세대가 됐다”며 “이제는 개혁개방 이후 새로 태어나고 있는 새 한-베트남 세대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베트남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면 두 나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니까 커서 양국 협력의 중추를 담당할 훌륭한 인재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도 ‘베트남 제대로 알기’ 붐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들을 돌보고 육성하는 건 두 나라 공동의 몫이다.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여성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수교 직후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과 베트남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지원사업을 펼쳐온 김영관(73) 목사도 “라이따이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20년 넘게 라이따이한들의 자립을 도와 현지에서는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로 불린다. 호치민에 정식 교육기관인 ‘휴맨직업기술학교’를 열어 베트남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사업을 벌인다. 휴맨직업기술학교는 1990년 호치민에서 라이따이한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2000년까지 10년 동안 라이따이한들을 수소문해 교육을 시키고 기술을 가르쳤다. 김 목사는 “90년대에 수교 직후 베트남에 건너와 전쟁 중에 태어난 한인 2세들을 찾아보니 1500명을 헤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트남 청소년들을 위한 기술 교육사업과 ‘부스러기사랑나눔회’라는 봉사단체를 통해 거리의 아동들을 돕고 있다. 김 목사는 “라이따이한의 나이가 벌써 40대를 넘어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며 “과제는 과거에 천착해 아버지를 찾거나 동정심으로 이들을 돕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베트남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양국 관계 발전에 고무적인 현상이다. 2013년 교육부의 국외 한국인 유학생 통계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에 유학 중인 한국인 대학생 수는 319명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다를 기록한 2011년(840명)에 비하면 절반에 못 미치지만 같은 기간 비영어권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중국·일본에 이어 셋째로 많았다. 또 2011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베트남 현지에 설립한 청년사업가 양성과정에는 매년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 청년들의 관심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9월 베트남을 방문해 ‘사돈의 나라’라고 칭했다. 쯔엉 떤 상 베트남 주석은 ‘사위의 나라’라며 박 대통령을 환대했다. 베트남인들과 현지 한국 교민들은 이 말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라이따이한이란 용어는 더 이상쓰지 말자는 얘기다. 그 대신에 ‘한국계 베트남인(Korean Vietnamese)’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혼혈아’라는 말 대신 ‘베트남계 한국인(Vietnamese Korean)’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일리 있는 얘기다. 라이따이한의 ‘라이(來)’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냉전의 시대에 피아를 구분하고 외세에 대한 적개심이 낳은 말이다. 베트남인들 사이에는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단어일 뿐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한국은 저들에게 분명한 아버지의 나라다. 우리 스스로 자식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부모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