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國, 韓美關係

태평양 전쟁과 미국의 미국계 일본인들에 대한 처우문제

이강기 2016. 1. 9. 10:05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Naver ilople (stoceo)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잊혀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미국의 32번째 대통령(재임 1933년 ~ 1945년)이다. 그는 임기 동안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경험한, 20세기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의 리더쉽은 뉴딜 정책을 통하여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에 동참하여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에 대한 미묘한 자세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의 결성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또, 미국인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상위에 위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
전 임
허버트 C. 후버
1933년 3월 4일 ~ 1945년 4월 12일 후 임
해리 S. 트루먼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의 강제수용을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주도한 관료들 대부분이 민주당원과 루즈벨트 정권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나는 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 "일본계 미국인들이 소유했던 집과 재산은 미국인들이 약탈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1942년 3월 재무장관 Henry Morgenthau Jr.의 질문에 대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대답 

 

 

철책에 몰려든 일본인 수감자들

 

우리는 나치 독일이나 소련이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여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일들이 나치 독일이나 소련과 같이 전체주의 체제에서만 있었던 일이었을까? 그러한 수용소들과 같이 학살을 하거나 강제 노동을 시키는 수용소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도 역시 2차대전 기간동안 무고한 수십만명의 민간인들의 토지와 집을 빼앗고 강제수용을 시킨 암흑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것도 시민들이 주도한 일이 아니라 미 정부각료들의 주도하에 생긴 일이었다.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 지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모여있는 진주만을 공격했다. 미국이 1940년 제2의 대공황이라고 불릴 정도의 높은 실업률을 극복하려고, 그리고 그들의 우방국인 영국을 도와주려고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일본을 압박하여 공격을 유도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 1942년 초부터 1945년 초까지 연방정부에서 약 10개의 격리수용소를 운영하면서 3년 동안 죄없는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억류하였다. 이 중 3분의 2 이상이 미국에서 태어난 토박이 시민이었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연방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더 이상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법을 준수하는 민간인들을 잡아들여 강제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다음날 아침 California 주지사 Culbert L. Olso과 법무장관 Earl Warren(훗날 대법원장)은 보안관 및 지방 검사들을 동원해 일본계 미국인 1세와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을 모두 공무원직에서 해고했다. 법률 및 의료 자격은 모두 취소되었고 어부들은 배를 탈 수 없게 되었다. 

 

 

서부 해안 지역 신문들 중에서 허스트 계열의 San Francisco <Examiner>지는 "국가 안보를 위해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 수용해야 한다"고 가장 목소리를 높였다

 

행정당국들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나섰고 서부 해안 지역의 언론, 특히 San Francisco에 본사를 둔 허스트 계열 신문들도 이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서부 해안 지역, 특히 California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아시아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미 서부 해안 지역에는 황인종들은 들어갈 수 없는 해안 지역까지 존재하고 있었고, 1882년 중국인 배척법과 1924년 이민법 등을 통해 이미 황인종들은 배척당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외에도 이민자들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차별적인 법륟들 때문에, 이민자들은 시민권을 취득하고 싶어도 외국인 체류자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과 전쟁이 터지자 이러한 인종차별적인 생각과 겹쳐서 정당화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적국이었고,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이었다. 따라서 이 김에 황인종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정서까지 겹친 것이었다.

 

 

Earl Warren, California 전(前) 법무장관이자 주지사,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을 주도했던 그는 이 일을 교훈삼아 미 대법원 판사로 있을 때 학교에서 흑백아동을 차별하는 것을 최초로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인종문제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Earl Warren 법무장관의 회고록 <The Memoirs of Earl Warren (1977)>

 

"황인종이었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을 추진한 것은 내 잘못이다. 그 이후로 나는 강제 이주 명령을 지지해던 것을 깊이 후회했다. 가정과 학교 친구들, 쾌적한 환경을 빼앗긴 무고한 어린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웠다. 동기가 좋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추진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California 법무장관 Earl Warren의 회고록 <The Memoirs of Earl Warren>의 일부 내용

 

 

일본인은 California 인구의 1%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지역 경제에 공헌한 정도는 상당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California에 있는 경작지의 1%를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야채의 약 40%를 그들이 공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소수 민족 거주지 안에서 생활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California 내에서 일본인에 대한 오랜 편견은 더욱 심화되었다.

 

 

California, 미국의 서부에 속하며 태평양 지역과 근접해 아시아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LA한인타운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Warren 법무장관이 그들의 자산을 동결시킨 탓에 은행에서는 그들의 수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보험회사들도 그들의 보험을 해지시키고 식료품점에서도 그들에게 음식을 팔지 않았다. California 주 정부는 "국내 안보를 위협하는 황인종들에 대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연방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1942년 2월 4일 의회에서 부사령관 Mark Clark 장군과 해군 참모총장 Harold R. Stark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과민반응이라고 의견을 내비쳤다.

 

 

 

부사령관 Mark Clark 장군과 해군 참모총장 Harold R. Stark 제독

 

 

"태평양 연안 주민들의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다. 일본계 미국인들의 습격 가능성은 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호언에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월 24일, 루즈벨트가 임명한 진주만 공습 조사 위원들은 "일본 공군이 하와이를 본거지로 하는 간첩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 간첩들 중에는 일본계 미국인들도 있다"고 보고했다. 이 주장을 입증해주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불과 며칠 전 Los Angeles Times 지는 "침착하고 온건한 대처를 촉구한다"고 했지만, 이제 Times 지는 "California에 있는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라며 주장을 번복했다.

 

 

 John De Witt, 중장으로 서부 해안 지역의 군 사령관

 

서부 해안 지역의 군 사령관 John De Witt 중장은 "이 지역의 모든 일본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상관들에게 요청했지만 군에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De Witt 중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California에서 아직 쟁의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하고도 분명한 암시다"

 

 

Walter Lippmann, 유명한 진보주의 칼럼니스트

 

유명한 진보주의 칼럼니스트 Walter Lippmann은 De Witt 장군을 인터뷰한 후 1942년 2월 12일자 Harold Tribune 지에 '서부 해안 지역에 관한 다섯 번째 칼럼'을 발표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연안 지역 전체가 전장이다. 전장에서는 누구도 거주하거나 일할 권리 등 헌법상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Westbrook Pegler, 보수주의 칼럼니스트

 

보수주의 칼럼니스트 Westbrook Pegler는 이렇게 주장했다.

 

 

"California 내의 일본인들은 당장 한 명도 빠짐없이 무장 경비대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는 인신보호 영장을 정지시켜야 한다."

 

 

Henry L. Stimson, 미 육군장관

 

육군 장관 Henry L. Stimson은 서부 해안이 습격당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이주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졌다. Stimson에게는 De Witt 장군과 California 공무원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는 대통령인 루즈벨트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루즈벨트는 이 문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교전구역이나 무기생산 등 더 큰 문제에 집중하려 하고 있었다. 2월 11일 Stimson이 찾아갔을 때 대통령은 일본인 이주 문제에 대해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Stimson의 일지에 따르면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방식에 따라 진행하라"라고 말했다."

 

 

 John J. McCloy, 육군성 차관보

 

이에 비해 육군성 차관보 John J. McCloy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인들의 이주가 군사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며, 이것이 국가의 안전이나 미국 헌법에 관한 문제라면, 어째서 내게는 그 헌법이 휴지조각처럼 느껴지는가?"

 

 

Stimson이 대통령과 면담한 후 McCloy는 San Francisco에 있는 제4군 본부로 이렇게 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사실상 대통령의 백지위임장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 대통령께서는,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지만 군사적 필요에 따라, 그러나 최대한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라고 당부하셨다."

 

 

Francis B. Biddle, 미국 법무장관

 

그러나 미국 법무장관 Francis B. Biddle은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충고했다. 그는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일이 경솔하고 불필요하고 잔인한 조치이며, 군대에게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전하지 않았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FBI(연방수사국) 국장 J. Edgar Hoover도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일본인 강제 이주는 절대적으로 부다아다"고 주장했다. Biddle 법무장관은 루즈벨트 정권의 믿을만한 법률 고문 3명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들의 의견이 이 조치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7장에 걸친 문서를 통해, "군사적 필요성이 발생할 시에는 시민들을 추방하는 일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게다가 루즈벨트 정부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Stimson 육군 장관은 De Witt와 McCloy의 압박으로 인해,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20년 후 Biddle은 이렇게 회고했다.

 

 

"Stimson은 이 대규모 강제 이주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면 대통령은 그의 조언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장관에게 부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게서 신참이었고, 원로 정치인들에게 내 의견을 고집하기가 어려웠다"

 

 

진주만 공습 3개월 후 루즈벨트가 발령한 대통령 9066호, 이 문서에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시민권을 유보하고, 육군 장관 Henry L. Stimson에게 군사적 제한구역을 지역을 지정하여 미국에 대한 배신행위나 불순한 의도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누구든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진주만 공습 3개월 후인 1942년 2월 19일, 루즈벨트는 대통령령 9066호를 발령하여 Stimson에게 '일본계 미국인들의 시민권을 유보하고,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적 제한구역을 지역을 지정하여 미국에 대한 배신행위나 불순한 의도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누구든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 후 3월에는 루즈벨트의 대통령령 9012호가 발령되어 전시 재배치국(WRA)가 설치되었다. 3월 21일, 육군성의 요청에 따라 의회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부 해안 지역에서 추방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의 강제수용을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주도한 관료들 대부분이 민주당원과 루즈벨트 정권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오른쪽에 붙어 있는 공고에는 'San Francisco 지역의 모든 일본계 주민들에게 수속을 위해 행정기관에 신고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다. 12만 명 중 대다수가 개인 재산을 처분하고 집과 농장, 일을 정리할 기한을 열흘 이상 얻지 못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의 배신행위나 쟁의행위, 미국에 대한 음모가 단 한 건도 보고된 바 없다"는 사실은 공직자들의 우려와 언론의 과잉 흥분 속에 조용히 묻어버렸다.

 

1942년 3월에서 6월 사이, 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은 집을 팔고,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학교에서 자퇴시키고, 수속을 위해 행정기관에 신고하라는 갑작스런 명령을 받았다. LA 항근처 Terminal Island의 주민들에게는 개인 재산을 처분하고 집과 농장, 이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3일도 채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지역의 일본인들에게는 열흘까지 기한이 주어졌다.

 

 

 미국내 수용소 분포도, 주로 서부에 위치해있다

 

1942년 여름과 가을, 이들은 California와 Arizona, Utah, Colorado, Wyoming에 세워진 WRA의 관리 하의 10개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처음 억류가 시작된 것은 California 주 관료들의 요구 때문이었기 때문에, 주로 태평양 연안의 California, Oregon, Washinton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일본계 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Hawaii와 나머지 지역에는 대부분 대통령령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 수용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Manzanar 수용소

 

Manzanar 수용소의 경우 6개월 동안 1만 명 이상이 504개의 가건물에 수용되었다. 약 36.6m 규모의 가건물은 약 35~45m²의 단칸방 6개로 나뉘어 있었다. 방 안의 설비는 군용 간이침대와 짚 매트, 전기 정도였다. 수용소에는 의무실이 설치되어 있었고, 15개의 가건물이 한 블록으로 정해져 욕실, 화장실, 식당, 세탁실을 공유했다. Owens Valley의 기온은 극과 극을 오갔다. 늦은 봄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여름에는 43도 이상의 더위가 계속되기도 했다.

 

 

강제수용소에서 성조기를 게양하여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

 

북부 California Tule Lake의 피억류자들은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매일 아침 모여서 국기를 게양했고 보이스카웃 고적대는 국가를 연주했다. 3년 도안 10개 강제수용소가 운영되었고 1942년 초에서 1944년 말까지 2,120건의 결혼과 5,981건의 세례, 1,62건의 장례가 치러졌다.

 

 

미군(감시병)에게 끌려가는 일본인들

 

일본계 미국인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면 경비대가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수용소에는 밤새도록 총성과 외침과 경비견들의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탐조등은 날이 밝을 때까지 수용소 구석구석을 훑었다.

 

 

일본인 2세 자원병 부대

 

1943년 1월 28일, 육군 장관 Stimson은 미국 군대에서 재미 일본인 2세 자원병을 받는다고 발표했을 때 2만 명이 자원했고 제442 보병대와 제100 보병대의 용맹은 유럽에서 전설적이었다. 일본계 부대 중 가장 유명한 제442 보병대는 이탈리아에 출정해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3,000개의 퍼플 하트 훈장과 500개의 청동 무공 훈장, 810개의 청동 성장, 47개의 수훈 십자 훈장, 그 외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용맹스럽게 싸운 이유는, 국가에 충성을 보이면 강제수용된 가족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계 미국인의 상점에 걸린 플래카드 "나는 미국인입니다"

 

1944년 말, 미국 대법원은 "정부가 배신행위에 대한 증거 없이 계속해서 태평양 연안의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수용하고 추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보관해둔 많은 물건들이 도난당한 상태였고, 집과 농장, 가게 등은 California 백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일본인 2세 군인들은 이발소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부당했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에 육군성의 홍보 활동으로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일본계 미국인들은 집과 재산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고, 연방정부는 공정가격을 지켜주거나 땅값을 보장해주거나 보관된 재산을 지켜주는 등의 지원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1942년 3월 재무장관 Henry Morgenthau Jr.에게 "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재산 손실 추정액은 1942년 당시 가치로 4억 달러 이상이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50억 달러에 달한다. 1948년, 의회는 난민 청구법을 통과시켜 3,700만 달러를 배상금으로 책정했다.

 

 

Tule Lake 수용소 추모비

 

배상 운동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냈다. 1976년, Gerald Ford 대통령은 대통령령 9066호를 철회하고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발표했다. 연방법원은 강제수용의 합헌성을 인정한 조항들을 모두 없앴다.

 

 

 

2차대전 당시, 미국 California Tule Lake 수용소 수감자

 

1988년 의회는 생존해 있는 강제수용 피해자 약 6만 명에게 2만 달러의 비과세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0년, 배상금 수표와 함께, 백악관 편지지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사과 편지가 전달되었다. 이 편지에는 국가의 사죄와, 강제수용 이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사의를 표현한 데 대한 어색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Aiko Herzig-Yoshinaga, Manzanar 수용소 수감자였다

 

1980년대에 Aiko Herzig-Yoshinaga는 배상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공식 기록을 찾던 중 "1942년 연방정부가 강제수용이 시작되기 전 일본계 미국인들의 배신행위 증거가 없다는 공식 보고를 은폐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도 일본계 미국인들의 파괴 행위나 간첩 행위가 입증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Francis B. Biddle, 미국 법무장관

 

Francis B. Biddle 미국 법무장관의 회고록 <In Brief Authority>

 

Biddle 법무장관은 훗날 회고록 <In Brief Authority>에 이렇게 썼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조치의 중대성이나 영향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 그가 헌법상의 문제 때문에 곤란한 입장이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전쟁 중의 어떤 대통령도 헌법을 크게 신경 쓴 일은 없다"

 

 

강제수용이 루즈벨트 행정부에 끼친 정치적 영향은 미미했다. 국가의 관심은 오로지 전쟁에 집중되어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들의 권리에 대한 동정은 거의 없었다. 군사적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무력이 동원된 운자폭탄 투하 못지않게, 무고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둔 일도 인권을 보호한다는 국가의 명성에 오래도록 오점을 남겼다. 현재는 강제수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미국인이 거의 없으며, 강제수용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대부분은 크게 가슴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Manjanar 수용소 수감자였던 존 타테이시의 회고록 <Last Witnesses: Reflections on the Wartime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존 타테이시의 마음속에는 강제수용소의 기억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그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Manjanar를 찾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는 <Last Witnesses: Reflections on the Wartime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라는 책을 쓰면서 이 때의 느낌을 '가시철조망 너머의 기억'이라는 장에 담았다.

 

 

"나는 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뚜렷이 기억난다) 나는 서너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지만, 감시탑 위에 서 있는 남자들, 그리고 멀리 고속도로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며 우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하얀 얼굴들과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어린 내게는 어쩐지 이 황무지와 감옥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그 고속도로의 차들이 모두 미국처럼 느껴졌다. 갑시탑 아래 가시철조망이 있던 자리에 다시 선 나는 문득 내가 이곳을 진정으로 떠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누구도 그곳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못한다." 

 

 

 

<참고자료>

 

<대통령의 오판>, 토머스 J. 크라우프웰(월스트리트저널 칼럼니스트), M. 윌리엄 펠프스(언론인이자 역사학자)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손세호(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The Memoirs of Earl Warren>, California 법무장관 Earl Warren의 회고록

 

<In Brief Authority>, 미국 법무장관 Francis B. Biddle의 회고록

 

<Last Witnesses: Reflections on the Wartime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Manjanar 수용소 수감자였던 존 타테이시의 회고록

 

Daniels, Roger. Prisoners Without Trial: Japanese Amercans in World War II. New York: Hill & Wang, 1993.

 

Harth, Erica, ed. Last Witnesses: Reflections on the Wartime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New York: Palgrave, 2001. 특히 John Y. Tateishi, "Memories from Behind Barbed Wire," pp. 129-151

 

Manchester, William. The Glory and the Dream: A Narrative History of America, 1932-1972. Boston: Little, Brown, 1974.

 

Smith, Jean Edward, FDR, New York: Random Hous, 2007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미국 뉴욕 주 북부의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1828 - 1900)는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며 유복한 지주였다. 루스벨트 가는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으로 이주한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Claes van Rosenvelt)의 후손들이다.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의 아들 니콜러스 루스벨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요하네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 둘째 야코부스 루스벨트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의 선조가 된다. 이에 따라 18세기에 루스벨트 가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가(19세기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됨)와 오이스터베이 루스벨트 가(공화당 지지)로 나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야코부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며, 오이스터베이의 공화당원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요하네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6대조 할아버지를 둔 12촌(fifth cousin) 형제관계에 있는 먼 친척이었다. 하이드파크와 오이스터베이의 루스벨트 가문들은 정치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교를 계속 나누었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의 일가 모임에서 아내를 만났으며, 또 프랭클린도 일가 모임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질녀 엘리너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본처 레베카 하워드에게서 이복 형인 제임스 루스벨트 주니어를 두었다. 그리고 제임스 주니어의 아들인 제임스 테드 루스벨트가 프랭클린보다 3년 연상이었다.

어린 시절

프랭클린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1854 - 1941)는 프랑스위그노이며, 그녀의 조상은 1621년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필리프 드 라 누아였다. 프랭클린은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이이며, 제임스는 프랭클린이 태어났을 당시 54살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사라가 프랭클린의 유년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훗날 프랭클린은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 생전 가장 무서웠던 대상은 어머니였다고 고백하였다.

그 시대의 귀족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답게 그 역시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의 교육을 통해 귀족식 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성장했고, 거의 매년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니며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프랭클린은 부모와 가정교사 등에게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 또래의 아이와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14살 때, 프랭클린은 사립명문 그라턴 기숙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청년기 및 결혼

루스벨트는 명문 사립고 그로톤(Groton School)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시절 그는 학업적으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훗날에 그는 "나는 대학 시절 경제학 과목들을 4년 내내 수강했으나 내가 배운 모든게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학업과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으나 활력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1903년 역사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다음 해에 컬럼비아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1907년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로스쿨을 중퇴하였다. (나중에 컬럼비아 로스쿨은 그에게 사후(posthumous) 법무박사(J.D.) 학위를 수여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908년 당시 월가에서 유명했던 로펌 카터 레드야드 & 밀번(Carter Ledyard & Milburn)에 입사하여 기업(corporate) 업무를 주로 맡았다.

1905년 3월 17일,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첫 선거전, 그리고 그 뒤의 큰 불행

1910-1913년, 뉴욕 주의 상원의원이 된 후, 민주당 진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3-1920년, 윌슨 대통령 아래서 해군 차관을 거쳐 1920년 선거에서 그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워런 하딩공화당에 패배했다. 그러나 선거 다음 해인 1921년, 캄포벨로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진 이후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걷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지체장애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는 달리 지체장애를 받아들여서,재활 치료를 받았다.

재임기간

1933년 자신의 첫 취임식에서

 

그는 1928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주(州) 수력 회사의 설립, 양로 연금 연제도의 확립, 농민·실업 구제 등 혁신적인 여러 개혁을 실행하였다. 두 번에 걸친 임기 중 '최고의 지사'라는 칭송과 함께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증명받고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낙관적인 경제론 때문에 최악의 인기로 허덕이던 허버트 C. 후버를 누르고, 대공황으로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뉴딜 정책을 선언, 압도적인 득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뉴딜 정책과 재선

그는 취임 직후 대공황에 대해 즉시 뉴딜 정책이라고 불리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적극적인 경제정책)을 행하였다. 뉴딜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부흥뿐 아니라 사회개혁도 포함하는 것으로, 실행을 위해서는 행정부의 권한이 필요한데, 의회는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그 정책 실행을 용이하도록 배려하였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어 자본가와의 교섭으로써 노동조건 및 사회적 지위향상을 이루어가는 권리(대한민국 헌법 33조)인 단체 교섭권 보장 같은 노동자의 권리 향상과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 등의 대규모 공공근로에 의한 실업자구제대책 및 사회 보장 충실 같은 정책을 실시하며 경제대공황 극복을 도모했지만, 좀처럼 성과가 오르지 않았다. 또 선린 외교 정책을 주장하여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경제 원조로써서반구 여러 나라의 결합을 강화하였다. 유럽 전체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방위에 진력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반대, 평화를 원했다.[1]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상승되어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37년 경기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여 후기 뉴딜로써 대처하였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의한 군수 증대 덕분에 미국의 경제는 회복하여 실업자도 격감했다. 뉴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고, 과연 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경제 침체를 완벽히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엇갈린다.(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참전하기 전까지, 미국 경제는 실업률이 15%를 상회하는 등, 체제 자체가 붕괴하는 대파국은 넘긴 상황이었지만 완벽히 경기가 회복됐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

1940년 선거에 출마해 웬델 윌키를 누르고 3선 되었다. 그는 그때 2번까지만 임기를 맡는다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깼다. 1941년 처칠과 대서양 회담을 한 후, 대서양 헌장을 작성하고, 전쟁의 궁극 목표를 명시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하여 부득이 참전하고, 전력을 기울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다시 4년 후, 그는 4선에 성공했지만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으로 조지 워싱턴의 전통이 계승, 강화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기 직전, 죽을 때까지 전쟁의 승리와 전후 세계질서의 구상에 헌신하였다.

1941년 진주만 습격제2차 세계 대전 선전포고 명령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대전 중

1941년진주만 기습 이후,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합동 군사 훈련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으나,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그는 끝내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한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주지도 않았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북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유럽 일부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스탈린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대답하였는데 "나는 스탈린이 그런 사람이 아니리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만약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준다면, 나는 아마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달라고 청할 수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라 그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나와 함께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이다."[2]:52

1943년 11월 28일,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3]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그는 소련에게도 도움을 청하였다.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구두로 더글러스 맥아더편에 전해왔고, 그는 소련을 참전시킨 것을 후회한다.

사망

63세이던 1945년 4월 12일 독일의 항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애완견 팔라와 공원을 거닐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여비서 루시 머서(Lucy Mercer Rutherfurd)는 그의 결혼 생활을 끝나게 했지만, 그가 숨을 거둔 그곳에도 함께 했다. 딸 애너 루스벨트(Anna Roosevelt)는 백악관에서 모친을 대신하여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죽음 직후 한때 스탈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중화민국국부천대 사건과 한국 전쟁 등으로 음모설은 묻혀졌다.

평가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의 지휘로 제2차 세계 대전미국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지만, 전쟁 전후 그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600만명의 유대인이 무참하게 살육되고 있는데도 외면하고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는 점과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등과는 달리 일본계 미국인들은 수용소에 격리수용한 인종차별정책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4] 국내 정치 경제 면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길거리 정치로 자유민주주의를 왜곡하고 건전한 기업풍토에 손상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루즈벨트의 재임기간과 그 이후 민주당 주도기를 미국이 가장 평등했던 기간으로 기억한다.

정책과 사상

얄타 회담의 루스벨트 대통령(가운데)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1월 6일, 그는 "네 가지 자유" 연설을 하였다.

1943년 3월 루스벨트와 국무장관 콘덴 헐이 워싱턴에서 영국 외상 앤소니 이든과 가진 회합 때 한국의 독립문제가 연합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최초로 논의되었다. 이때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소련 및 중국 등 3국의 '신탁통치'아래 두었다가 독립시킨다."는 의견을 처음으로 밝혔으며, 이들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5]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카이로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공식 논의하였다.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제3항에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 한국을 해방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1943년 11월 28일, 이번엔 중국의 장제스가 빠진 채 이루어진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6]

세계대전의 결과

1945년 8월 15일, 루스벨트는 비록 그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지만, 그의 제2차 세계 대전 미국연합군의 지도로 전쟁이 끝날 직전에 추축국에 속해 있던 일본핵무기 공격을 겪고 나서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그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 대전미국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기타

1933년, 미국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은 회의 중 시카고 갱단에 고용된 살인청부업자 조셉 쟁거라의 저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건졌다. 대통령 때문에 위통이 생긴다는 이유라고 설명했던 쟁거라는 표적을 잘 볼 수 있는 의자 위에 올라가 총을 쐈으나 엉뚱하게도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안톤 서맥을 죽였다. 그리고 쟁거라는 체포되어 전기 의자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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