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사에 보기 드문 ‘거물(巨物)’의 정치 인생
“YS는 국가전략가적 지도자가 아닌 혁명가적 기질의 정치인이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김영삼’)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중앙일보에 입사한 지 9년 차, 정치부 기자로는 4년 차가 되던 무렵이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1978~79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 이른바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과 정치권에서의 저항이 절정에 달하던 무렵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은 언론과 재야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했다. 각 언론사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 정보기관 요원들이 상주하다시피 할 정도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으로는 제도권 야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민당과 제도권 정당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반정부 투쟁을 정당보다 더 격렬하게 하는 이른바 ‘재야’가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독립운동가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재야의 대표 세력이었다. 그 밖에 또 다른 저항 세력을 꼽자면 바로 대학이었다. 학생들이 나서서 유신 철폐를 주장할 만큼 독재타도에 대한 국민적 염원은 대단했다.
“진정한 야당으로 거듭나자” 젊은 당수의 등장
1978년 12월 총선에서 공화당보다 약 1.1% 높은 득표율을 얻은 신민당은 이철승 총재 등 온건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김영삼은 신민당 내 비주류계 보스로서 선명야당론을 주장했으나 원내에서 이철승계가 자신의 지지세력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던 터라 뾰족한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와서 신민당에 큰 변화가 생긴다. 김영삼이 신민당의 당수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이철승 총재의 이른바 중도통합론과 김영삼의 선명야당론이 대대적인 격돌을 하게 된다.
정부와 대화하며 화합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철승식 온건 노선에 대해 김영삼은 “야당이라는 게 무엇인가?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야당이지, 무슨 타협이 있느냐?”며 강경투쟁론을 강조했다.
연은 바람을 타지 않고 바람에 맞설 때 가장 높이 오른다는 말이 있다. 원내 김영삼의 지지 세력이 이철승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으나 “진정한 야당으로 거듭나자”는 김영삼식 선명야당론은 변화, 그리고 변혁의 운명적 흐름에 촉매제가 됐다.
1979년 5월 29일 신민당의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DJ)이 을지로 4가에 위치한 중국음식점 ‘아서원’을 찾았다. 김대중은 아서원에서 단합대회 중이던 신민당 대의원 수백 명을 앞에 두고 “이철승은 ‘사쿠라(관제야당)’다. 그는 중도통합을 말하지만 유신의 길은 동쪽이고 민주의 길은 서쪽인데 어찌 왕십리 갈 사람과 신촌 갈 사람이 중도통합할 수 있겠느냐”며 김영삼의 강경투쟁론에 힘을 실어줬다.
엄혹한 시절, 누구보다 할 말 했던 남자
김대중이 어쩌면 평생의 불편한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김영삼의 손을 선뜻 들어준 데에는 당내에서 유신정권에 맞서 정면돌파를 할 인물이 그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 수긍할 정도로 김영삼이 보여준 강렬한 투쟁의 퍼포먼스는 이 같은 운명적 사건을 완성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결국 다음날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2차 투표 끝에 당권을 거머쥔다. 강경투쟁론이라는 기치를 내건 52세 당수의 등장에 청와대·공화당·유신정우회는 내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신정권은 김영삼의 대여 강경노선을 우려하며 그의 기를 꺾어놓을 방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그 무렵 ‘YH무역 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점거농성’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 여공들의 생존권 요구를 둘러싼 이 사건이 뜻밖에 유신정권으로 하여금 김영삼을 손보려 하는 첫 번째 빌미가 됐다.
1979년 8월 11일 유신정권은 신민당사 농성을 과격하게 진압한 동시에 김영삼을 옥죄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틀 후 8월 13일 신민당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을 회유해 김영삼과 총재단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도록 한 것이다. 법원은 정권의 손아귀에 있었다. 같은 해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이를 받아들여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을 신민당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신민당 의원들이 이 결정을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법원 판결에 관계없이 김영삼을 총재로 계속 인정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김영삼은 기다리는 승부사가 아니었다. 정면돌파가 그를 대변해주는 주요 수식어로 더 적합하다. 이를테면 그는 파도의 흐름에 맡기는 요트의 선장이 아니었다. 파도와 맞설 줄 아는 서퍼였다. 마치 서핑을 하듯 큰 파도가 몰려와도 이를 정면으로 맞서 운명적 흐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다. 주변 공격이 거세지면 그는 단정적 언변과 강경 행보로 이에 맞섰던 것이다.
김영삼에게 총재 권한을 빼앗았지만 그의 계속된 응전은 유신정권에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여권 내에서는 “김영삼을 아예 국회 밖으로 쫓아내자”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이 터진다. 김영삼이 9월 15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는 독재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빌미였다. 이를 두고 공화당은 외세를 끌어들여 국내정치를 혼잡하게 만드는 사대주의적 발언이라며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징계안을 냈다. 10월 4일 김영삼 제명 안건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10분 만에 날치기로 처리됐다. 이 과정에서 최형우 의원이 법사위원장에게 이단옆차기를 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영삼이 국회의원 제명을 당하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고난의 시기에 김영삼은 오히려 당당했다. 그 당당함은 화려한 구호로 표현됐다. 중요한 메시지를 짧은 문장에 담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능력은 김영삼을 따라갈 이가 없었다. 논리적인 접근성은 취약했지만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대중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원직 제명을 두고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오늘 살려고 발버둥 치면 영원히 죽는다”며 정치사에 길이 남을 어록들을 쏟아냈다.
의원직 제명 직후 신민당 내 주류 의원들이 흥분한 가운데에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영삼은 침착하고 의젓했다. “나는 쫓겨나지만 여러분들은 남아서 민주주의를 지켜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국회 밖으로 걸어나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국회를 떠나는 길목에서 그는 경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며 차분한 발걸음을 옮겼다. 돌이켜보면 김영삼의 정치 인생에서 내가 본 것 중에 그때가 제일 의젓하고 빛났다. 그때만큼 김영삼이 화려하고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사건은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터졌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마산(이하 ‘부마’)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것이다. YS의 의원직 제명 사태가 국민의 분기를 촉발할 소지가 있다고 봤지만 그처럼 격렬한 저항이 나타날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사자인 김영삼 본인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지역에 ‘계엄령’을 내렸고 공수부대가 급파됐다. 부마항쟁으로 정국이 혼돈에 빠지자 김영삼은 거의 노래처럼 예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절대로 오래 못 간데이.”
박정희 정권 절대로 오래 못 간데이.”
김영삼이 그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당시엔 그 누구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방아쇠에 의해서 박정희 독재 권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안개정국’의 종말… 전두환 시대 개막
국정에서 칼 같은 판단력을 보여왔던 박 대통령 특유의 장점들이 희석되는 과정을 목도한 김재규는 결국 시해를 감행, 10월 26일 박 대통령은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했다.
서울의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1979년 11월 3일 김영삼은 박 대통령의 빈소를 다른 이보다 좀 더 일찍 찾았다. 경건한 태도로 명복을 빌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곧 정권이 교체된다. 내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확신이 표정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고 군부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런 혼란 속에도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자신만만했다. 민주화 열기를 그 어떤 변수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이들의 확신이었다. 게다가 1980년 2월 29일 재야인사 678명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복권 조치가 발표됐다. 그중에는 김대중도 포함돼 있었다. 비로소 정치권의 지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김의 치열한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1980년 3월 1일부터 김영삼은 김대중을 신민당으로 끌어들이는 문제로 지루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김대중은 신민당을 상대로 이른바 문호 개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의 지분 절반을 요구한 것이다. 이미 김영삼 세력으로 똘똘 뭉친 당에서 자신이 실질적으로 할 일이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결국 협상 사흘 만에 양김은 분열하고 만다. 김대중의 한신대 강연을 시작으로 대중동원 정치가 달아오른다.
한 시절 권력을 주도했던 공화당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구심점을 잃은 공화당은 김종필 총재의 묵인 아래 ‘정풍운동’이 벌어진다. 박찬종, 오유방 의원 등 신진 세력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전 경호실장, 김진만 전 원내총무 등 구악(舊惡)을 내쫓아 쇄신의 명분을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듯 여야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4월 3일 미국 <뉴스위크>지에 도쿄특파원의 기묘한 칼럼이 실린다. 글라이스틴(Gleysteen) 주한 미 대사의 발언이 출처인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글에서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모두 지도자가 안 될지도 모른다. JP는 부패했고 YS는 무능하고 DJ는 과격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 내용을 국내 일간지들이 대서특필하자 권위주위 정권에 길들여진 보수 세력에서는 위기론이 불거져 나온다. 당시만 해도 북한에 김일성이 건재했기에 대북 요인이 크게 작용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3김’마저 지도자로서 불안하다는 시각이 나온 것이다. 이와 관련 <중앙일보>에서 처음으로 ‘안개정국’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안개정국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닌 바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었다.
1980년 초 서울에 봄이 오나 싶더니 정국은 점점 잔인한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5월 17일 밤 9시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김대중은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된다. 이에 광주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신군부로부터 가택연금을 당함은 물론 정계에서 은퇴해야만 했다.
가택연금 조치로 국내외 유수 언론매체들의 눈이 상도동으로 쏠렸고 그때마다 김영삼은 정치사에 길이 남을 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을 말이야, 이 마음을,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진 못해.”
“봤쟤? 김대중은 이런 거 못 한데이”
그 밖에도 23일간의 최장 단식을 벌이는 통에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의 ‘오늘만 살고 내일은 없다’ 식의 행보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자기만의 정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사조직 ‘민주산악회’를 결성해 매주 한번씩 20~30명의 지인과 산에 올랐다. 그는 산 정상에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목청을 높였다. 사실상 거친 말도 나오고 고함도 치고 정치토론도 하고 그야말로 화통한 등산이었다. 이렇듯 전두환을 향해 극도의 비난을 퍼부으면서 김영삼은 자신 특유의 ‘집단 최면’식 믿음을 신념으로 굳혀갔다.
곧 좋은 세상 온다. 독재 그거 오래 못 간데이.”
곧 좋은 세상 온다. 독재 그거 오래 못 간데이.”
직설·직관의 민주투사 김영삼으로 유명했지만 내가 접한 그는 막무가내식 천둥벌거숭이마냥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지혜로운 측면을 자주 엿볼 수 있었다. 일례로 김영삼은 김대중과 달리 감옥에 간 적이 없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경청하고 어울리면서 적절한 시기를 엿봤다. 승부를 걸어야 하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고는 그 즉시 행동으로 나설 줄 아는 승부사 기질이 아주 강했다.
민주산악회를 이끌 때에도 자신이 극한투쟁을 벌일 때가 아니라 판단하면 수그릴 줄도 알았다.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대신 그에게는 감옥에서 책 읽고 사색하는 김대중의 치밀함 같은 것은 좀 부족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기다리니 때가 왔다.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핵심으로 한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자연히 야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가장 큰 화제는 바로 ‘양김’의 단일화였다. 후보만 단일화되면 누가 나가도 이길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김영삼, 김대중 이들 양김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서로 “내가 나가야 당선된다”는 주장이 분명했던 탓이다.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대표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김은 역사적인 죄인이 됐다. 민주화를 확립할 수 있는 마지막 판을 개인적인 욕심으로 엎어트린 것이다.
이 대선에서 군정종식을 캐치프레이즈(선전)로 내세워 김대중을 앞선 2위의 득표를 차지했던 김영삼은 이듬해 1988년 총선에서 예상 밖의 좌절을 맛봐야 했다. 훗날 이 총선의 결과는 한국 정치지형에 대격변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하 ‘평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이 맞붙은 이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299석 중 125석을 얻어 제1당이 됐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이어 평민당이 70석,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을 차지했다.
김대중은 하루아침에 제1야당의 총재가 됐다. 김영삼은 충격에 휩싸였다. 속으로는 아마도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제2야당의 총재로서 원내에서 존재감도 없을뿐더러 뭔가 해보려 해도 김대중에게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 대선에서도 대통령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 게 분명했다.
평소 김영삼은 김대중에 대해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김대중의 박학다식함, 정갈한 논리성은 김영삼으로 하여금 언제나 크고 작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반면에 큰 문제를 보는 직관에 있어서는 자신이 김대중을 압도한다고 믿었다. 김대중보다 더 활동적인 건강도 김영삼의 자랑거리였다. 일례로 그는 김대중의 건강을 염두에 둔 치기 어린 표현을 즐겨 하곤 했다. 민주화 거리 투쟁 당시 경찰차에 갑자기 올라서서 내뱉은 말을 들어보자.
봤쟤? 그 사람(김대중)은 이런 거 못 한데이. (지팡이 짚고) 어째 이런 거 할 수 있겠노?”
봤쟤? 그 사람(김대중)은 이런 거 못 한데이. (지팡이 짚고) 어째 이런 거 할 수 있겠노?”
‘양김’은 말년에야 화해했지만 이렇듯 김영삼은 일생 동안 김대중을 두고 ‘거짓말쟁이’라며 미워하곤 했다. 여기에 대한 김대중의 대답도 재밌다.
“난 거짓말 한 적은 없다. 다만 약속을 못 지켰을 뿐이다.”
늘 결정적인 순간 김대중한테 속았다는 게 그 미움의 원천이었다. 일종의 피해의식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억지스러워 보이는 접근이지만 김대중 때문에 어쩔 수없이 3당합당에 동참해서 민주진영에게 한때 역사의 죄인으로 매도됐다는 아픔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분석과 유추가 있지만 나는 결론적으로 3당합당은 노태우와 김영삼의 ‘동상이몽’이 이해관계에서 일치된 사건이라 보는 쪽이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헌정사상 초유의 여소 야대 형국으로는 국정을 이끌어나갈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노태우는 기존에 알려진 바와 달리 처음 김영삼 측에 ‘3당합당’이 아닌 ‘정책연합’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오히려 김영삼은 “정책연합을 할 거면 차라리 신당 창당을 하자”며 통 큰 딜(deal)을 역제의했다.
싱겁게 끝나버린 YS와 ‘황태자’의 대결
김영삼은 이미 3당합당이 거론된 초기인 1989년 하순경 김종필과의 관계개선에도 나선다. 골프를 좋아하는 김종필과 친해지기 위해 그만뒀던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오래 손을 놓았던 골프를 다시 하면서 엉덩방아를 찍기도 했으나 김종필과 친해지려는 그의 집념은 강했다.
당시 김영삼은 이미 다음 대선을 내다보고 있었다. 87년 대선패배에서 김영삼은 사무치는 깨달음을 얻었다. 당분간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선거는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닌 지역 구도에서 결판날 것으로 내다봤다. 제1야당을 김대중에게 내준 상황에서 그로서는 충정권과 대구·경북(TK)을 한편으로 끌어 들이지 않은 싸움은 만년 패장을 보장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운명적으로 맞아떨어진 권력의 수레바퀴를 타고 헌정 사상 유례 없는 첫 정치실험이 이뤄졌다. 1990년 1월 22일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제2야당 민주당, 제3야당 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이 출범됐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이로써 김영삼은 제2야당에서 제1여당의 넘버투가 됐다.
김영삼과 노태우의 만남은 정치 9단과 일찍부터 정치를 가까이 지켜본 정치군인의 대결로 모습을 갖추었다.
노태우를 위시한 이른바 ‘민정계’는 김영삼을 과소평가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3당합당이 순조롭게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김영삼은 아스팔트 위에서나 힘을 쓰고 민주화 투쟁만 했던 인물이라는 게 이들의 선입견이었다. 야당 정치인으로서나 기고만장했지, 국가 정책을 운영·집행하며 인재를 관리하고 동원해야 하는 여당 총재로서 버티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김영삼이라는 ‘야생 동물’을 우리에 가두듯 거대 여당이라는 틀에 밀어 넣으면 ‘YS 길들이기’는 저절로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정치현장 경험이 부족한 군 출신 정치인들이 얼마나 판을 단순히 읽었느냐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태우는 김영삼의 파괴력과 투쟁력, 그리고 대국민 지지세를 과소평가했다. 결정적으로 대중정치인으로서 김영삼의 지지기반을 깨거나 따라갈 수 있는 대안 세력이 민정당 안에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뒤늦게 박찬종·이종찬·박태준 등을 투입해 김영삼의 대항마로 키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영삼이 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벌이는 승부수와 특유의 ‘땡깡’은 민자당 시절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바로 ‘6공(共) 황태자’ 박철언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 씨의 고종사촌 동생인 박철언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6공(共) 황태자’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정당국이 박철언에 대한 조사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면 같은 날 박철언 손에도 그 보고서가 들어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와대 관계자 다수는 박철언의 존재를 불편해 했다. 정책보좌관으로서 청와대 안팎을 누비며 보인 그의 권력행사는 대단했다. 일례로 청와대 출입기자가 박철언에게 “홍성철 비서실장에게 들은 얘기다”라고 확인을 요구하면 그는 즉시 기자들 앞에서 홍 실장에게 전화해 “실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하고 따질 정도였다.
노태우 면전에 던져진 ‘노란봉투’
독대에서 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최근 한 참모가 도에 넘는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 그거 박철언이 이야기지?”
‘내가 제대로 맞췄지?’라고 말하는 듯의 눈빛으로 노태우는 “그 친구(박철언), 똑똑하고 유능한 친구야. 사실 나 때문에 굉장히 손해 보고 있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신임이 그런데 그 면전에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황태자 박철언과 ‘정치 9단’ 김영삼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1990년 3월 20∼27일 김영삼이 통합 여당인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의 자격으로서 박철언 정무 제1장관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이들의 불화설은 처음으로 표면화됐다.
당시 북방정책의 접촉 창구는 박철언이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 당국 접촉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박철언을 실무자급으로 염두에 두고 수행 형식으로 데려가는 게 김영삼의 본래 의도였으나 박철언의 생각은 달랐다. 방문 과정에서 “나를 통해야 소련과 만날 수 있다”는 식으로 여당 최고위원인 김영삼과 시종일관 어깨를 나란히 하려 했다. 모스크바 방문 이후 김영삼은 언론에 박철언이 자신을 ‘수행’했다고 주장하고, 박철언은 수행이 아닌 ‘동행’이었다고 반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김영삼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짧은 만남에서 박철언을 배제시킨다. 그러고는 “한·소관계는 완전히 해결됐다”며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박철언 입장에서는 김영삼의 이런 언사가 야당 정치인 특유의 날탕으로 보였다. 귀국 후 박철언은 언론에 김영삼의 미진한 외교 대처에 대해 일일이 지적했다.
자존심이 강한 김영삼의 기질상 ‘가신’ 박철언의 이 같은 대처는 용서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도 즉시 노태우를 찾아가 “박철언, 쟤 안 되겠다. 당장 내 쫓아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9단’은 늘 그렇듯이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얼마 안 가 찾아왔다. 이른바 ‘노란봉투’ 사건이 터진 것이다. 1990년 4월 17일 안기부가 만든 내부문건 일명 ‘김영삼 길들이기-YS 견제계획서’가 김영삼의 손에 들어왔다. 그 즉시 김영삼은 청와대를 찾아 노태우 면전에 노란봉투를 집어 던졌다.
이노무 새끼들이 말이야. 이런 식으로 공작을 해? 나 (대통령) 안 해도 좋아. 온 세상에 (이 문서를) 공개할 거야.”
이노무 새끼들이 말이야. 이런 식으로 공작을 해? 나 (대통령) 안 해도 좋아. 온 세상에 (이 문서를) 공개할 거야.”
노태우는 황당했다. ‘저게 어떻게 김영삼의 손에 들어갔을까?’
“아직도 안기부가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느냐”는 김영삼의 질문에 노태우는 “단순 동향보고에 불과한 것”이라며 급조된 해명을 늘어놓았다. 이 건을 계기로 김영삼의 기세가 등등해질 무렵 이른바 내각제 합의문서 공개 건이 터진다.
노태우와 김종필은 3당 합당의 전제로 내각제 개헌을 제시했다. 김영삼으로서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그 합의를 당분간 비밀에 부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속셈은 국민과 김대중이 반대하는 내각제가 실현될 리 만무하다고 봤고 적당히 시간 끌다 폐기 처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비밀 약속이 민정계에 의해 조기에 공개된 것이다.
‘패거리’ 정치문화 시작했다는 오점 남겨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 했던가? 국민 모르게 내각제 합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궁지에 몰린 김영삼은 ‘당무 거부’라는 정면승부를 던진다. 문서유출은 공작정치의 전형이며 결국 군부세력의 본색을 드러냈다며 여당 대표최고의원이 당무를 거부하고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버린 것이다.
노태우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3당합당 할 때 같이 사인해놓고는 돌연 ‘내각제 포기’ 요구를 해대고 ‘독재정권’을 운운하니 피로함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대통령과 여당대표가 마냥 싸우는 모습을 국민 앞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노태우는 측근 김윤환을 마산에 보내 내각제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고 사태를 수습한다. 김영삼은 대통령과의 정례주례회동을 내걸고 내각제를 무산시키고 만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구축되자 김영삼은 민정 공화계 인사를 끌어들이며 당을 장악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 과정에서 박철언은 자연스레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영삼은 1992년 5월 민자당 대표로 재취임하면서 당을 자신의 1인체제로 재편한다. 고대하던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에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1992년 12월 18일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결과적으로 노태우는 김영삼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 그를 견제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정권 말까지 효율적인 대응책도 찾지 못했다. 박태준에게 언질을 주고 이종찬에게도 후계 준비를 시켜봤으나 이들 역시 김영삼 앞에서는 서툴기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김영삼의 실체는 ‘도전’이었다. 노태우는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 때문에 김영삼 평생의 숙원인 대통령직을 향한 ‘도전’의 관성(慣性)을 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김영삼의 정치력을 살펴보면 특히 그만의 친화력은 인정해줄 만했다.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은 본격적으로 민정계 및 공화계 의원들을 포섭하기 시작한다. 주요 국회직과 당직을 민정·공화계에 우대해 배분하며 실질적인 ‘당근’을 던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정 지지기반인 민주당 직계를 향해서는 “우리 큰 꿈을 위해 희생하자”며 혹시 모를 반발을 대의와 명분으로 제압했다. 매우 영민하게 사람을 다스렸다.
그의 저력은 일종의 ‘끌어당김’에 있었다. 초면임에도 사람을 굉장히 편하게 해줄뿐더러 논리력으로 사람을 제압하려는 게 없었다. 오히려 순진한 얼굴로 경청하기를 즐겼다. 위트도 있어서 무작정 듣기만 하지 않았다. 필요한 순간마다 핵심적인 답변을 툭툭 던지며 분위기를 달굴 줄도 알았다.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김대중과 달리 김영삼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김영삼과의 독대를 한 인사마다 “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보완해줘야겠다”고 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김대중을 만난 이들 중 대부분은 “이토록 논리 정연한 사람이라니…. 앞으로 저 사람 앞에서 약점을 잡히며 안 되겠다”며 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영삼은 끊임없이 지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자신의 결심을 굳혀가는 스타일이다. 평소 “건강은 못 빌리지만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하나회 척결도 대통령 되기 이전에 완성된 하나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이미 대선 후보 시절부터 12·12 사태의 피해자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교분을 갖고 군내 문제를 파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시원시원한 승부수로 개혁을 이뤄냈다는 평가도 받지만 ‘패거리’ 정치문화를 시작했다는 오점도 남았다. 절차를 거쳐 전문가를 고용하기보다는 소위 ‘보은’ 인사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무직에 전문가 이외에도 자신의 참모진을 앉히는 바람에 잡음도 있었다. 현재 새누리당 당대표를 맡고 있는 김무성은 문민정부 때 내무부 차관이었다. 당시 내무부에서는 김무성을 깔보는 관료가 많았다. 그들의 눈에는 깜이 안 되는 양반들이 정무직을 한 자리씩 꿰차고 앉아 있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았다”
김영삼 임기 초중반 나는 중앙일보 일본총국장으로 있다가 임기 후반에 편집국장으로 돌아왔다. 김영삼 정권 말 그와 만났다. 초승달 같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와 배짱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들이 구속됐고 대국민 지지율은 5%대로 추락했다. 대통령으로서는 반신불수인 상황이었다.
청와대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살펴보니 사람의 기가 다 죽어 있었다. 명색이 대통령과 기자의 만남이었음에도 현안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 그 화려했을 때의 회상만 늘어놓았다. 뭔가 쓸쓸해 보였다.
말년의 그림자는 초라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김영삼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해달라 한다면 ‘현대정치사에 보기 드문 거물’이라 말하고 싶다.
물론 운도 좋았다. 스물여섯 살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돼서 계속 잘되는 흐름을 타왔다. 민주화 투쟁에서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역할을 도맡았으며 독재 권력으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하고 단식도 해봤다. 김영삼은 그렇게 늘 주인공이었다.
종국에는 민주화도 성공시키고 꿈에 그리던 대통령까지 됐다. 태어나서 하고 싶은 건 다 해본 셈이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던 몇 안 되는 성공한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본질을 꿰뚫는 동물적인 혜안, 목표를 쟁취해야겠다는 투쟁력, 타이밍을 잘 보고 던질 줄 아는 승부사 기질…. 돌이켜보면 김영삼은 국가전략가적 지도자라기보다는 혁명가적 기질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인지 김영삼 정권의 업적을 두고 생각보다 후한 평가가 내려지는 분위기다. 아마도 김영삼이 걸어왔던 낭만의 정치, 명쾌한 직설을 통한 국민과의 대화, 그리고 ‘수컷정치’를 향한 국민적 그리움의 방증이 아닐까?
- 정리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