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영 조선뉴스프레스 부장대우는 며칠 전 자신의 칼럼에서 영국 가디언紙를 인용, 이렇게 썼다.
在美 교포들은 '고발'을 노벨문학상으로 추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고발'은 프랑스 번역판이 곧 나올 예정이고 일본에서도 번역이 끝나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1>
馬牙木(마가목) 열매와 빨간 버섯
‘반디’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남한 사회와 지구촌에 던져준 무거운 숙제
金德圭(고발 감상문 공모전 가작 수상자)
<빨간 버섯>은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소설가가 국내에서 발표한 단편소설집 《고발》에 실려 있는 일곱 개의 단편소설 중의 하나이다.
흔히 體制(체제)를 비판하는 소설은 비록 문학성이 다소 결여되어 있더라도 그 주제가 주는 영향력, 상징성, 역사성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이 소설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주제가 다소 한정되어 있는 단점은 있지만 충분한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선 연상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였다. 이러한 연상 작용은 공산정권하에서 지상낙원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권력의 폭력에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마는 개인의 철저한 무기력을 다룬 주제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야기 진행에 앞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에 대한 敍景的(서경적) 묘사를 시도한 부분이 몹시도 닮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느낌은 이내 소설에 스쳐지나가는 ‘馬牙木(마가목)의 열매’라는 단어로 더욱 확인된다. 《의사 지바고》에 등장하는 그 무수한 배경에 대한 멋진 묘사들을 다 기억할 수 없음에도 유독 마가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그 부분만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단어의 생경함 때문에 아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마가목이 반디의 단편소설 <빨간 버섯>에도 등장하는 것이다. 반디는 《고발》 253쪽에 이렇게 서술하였다.
“사람들이 가을 새라고 불리는 때까치가 빨간 마가목(장미과의 낙엽 활엽 교목) 열매를 쫓느라 길가 덤불에서 푸드득거렸다.”
서가에 꽂힌 《의사 지바고》를 꺼내 마가목이 서술된 부분을 찾아 다시 읽어 본다.
“산마가목의 가지에는 피리새와 박새 등 엄한의 노을처럼 산뜻한 빛깔의 깃털에 싸인 작은 겨울새들이 커다란 나무에 앉아 열매를 하나하나 고르듯이 쪼아 물고 조그만 머리를 뒤로 홱 젖히고 목을 길게 늘여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박형규 역. 열린책들, 425쪽, 2013년)
공산체제를 비판하는 두 소설가의 시선에 이 나무가 함께 붙잡힌 것이 나로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마가목이 맺은 열매들이 굶주린 새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먹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도 춥고 긴 북녘 겨울을 지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식량과 땔감. 이 필수품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는 그 기막히고 절박한 상황을 이렇게 서경적 묘사로 암시해 둔 것일까.
두 번째로 받은 인상은 문장을 읽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북한 소설에는 처음 접하는 남한 독자들을 위하여 편집자가 생소한 단어의 뜻을 괄호 안에 넣어 표기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어휘와 표현들이 상당히 많았다. 다행히도 그러한 표현들이 난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수한 함경도 방언으로 쓴 鄭芝溶(정지용)의 詩(시)를 읽는 느낌을 주어 작가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였다.
<빨간 버섯>은 일곱 번째의 작품이다. 앞선 여섯 단편 소설들을 통하여 북한 체제의 추악상을 은연중에 묘사하던 작가는 이 소설에 와서는 더 이상 간접적인 방법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작가 심중에 감추었던 마음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큰 소리로 외친다.
작가가 피토하듯 외친 말들이 무엇이었던가. 겉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이나 먹으면 죽게 되는 빨간 독버섯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잔혹한 악마적 본성을 가진 북한 공산체제를 뿌리채 뽑아 버리자는 절규가 아닌가.
이 부분에 와서 반디는 스스로 작가라는 옷을 벗는다. 이제는 문학성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차라리 문학성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외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이 외침으로 말미암아 잃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생명을 무시하는 독재 체제를 하루 속히 허물어 달라고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반디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남한 사회와 지구촌에 던져준 이 무거운 숙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늘 가져왔던 질문을 또 해본다. 나는 지성인인가? 지성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고 있는가. 그 반응에는 행동도 포함되어 있는가. 포함된다면 그 행동은 무엇인가. 소설가 반디는 그의 목숨을 걸고 빨간 독버섯을 어서 뽑아달라고 한국과 세계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데.
다시 마가목의 열매로 돌아가자. 마가목 열매가 붉은 것과 독버섯이 붉은 것은 같다. 빨간 마가목 열매는 눈 덮인 산과 들판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한 겨울새들에게 생명을 주는 먹이이다. 허기진 이들의 눈앞에 드러난 붉은 버섯은 먹음직하게 보이나 그것은 결코 허기를 채워주지 않는다. 죽음을 줄 뿐이다.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무슨 생각을 더 해보아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빨간 독버섯을 먹고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여기저기에 있는데 어서 가서 빨간 독버섯을 뽑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네가 할 일이 아니다. 바로 내가 할 일이다.
(끝)
<2>
죽어야만 내려올 수 있는 ‘연극 무대’
<아프다 하하하> <간지럽다 엉엉>해야 하는, '웃음꽃이 피는 지옥'의 본질을 드러낸 '고발'을 읽고
裵예랑(고발 감상문 공모전 가작 수상자)
차가운 겨울을 담고 있는 책 표지와 어딘지 모르게 뜨거움을 내비치는 주홍빛의 ‘고발’이란 단어가 내 심장을 움켜잡는다. 피눈물에 뼈로 적은 글이라 했던가.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반디의 심정을 작게나마 느껴본다. 목숨을 걸지 않고 쓸 수는 없었으며, 목숨을 담보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1991년, 1993년.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난 해이다. 우리는 태어나주어 고맙다는 말.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축복 가운데 컸다. 그리고 우리는 배웠다. 모든 사람은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 존귀하다.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북한은 달랐다. 모두가 존엄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주어 고맙다는, 자유롭게 행복을 누려달라는, 그저 사랑한다는 축복은 오로지 위대하고 존귀한, 김일성 장군님을 위할 뿐이었다.
고난의 행군. 허기짐이 굶주림으로 바뀐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에 앉아 있던 동생이 죽는다. 굶어 죽는 것이 다행일까. 서로 물고 뜯는 감시와 비판 가운데, 억울하게 죄 같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것보단 나으리… 싶다가도, 어찌 죽음이 괜찮을 리가. 배고픔에 의한 죽음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죽는 죽음도,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죽음, 개죽음이다.
반디는 주인공들을 통해 감출 수밖에 없었던 눈물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탈북기>의 주인공 리일철은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살아간다. 아버지가 수령님의 랭상모를 죽였다는 이유다. 그로인해 집안 대대로 겪어야 했던 수모는 탈출을 ‘결심’하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출신성분은 한 개인의 인생을, 한 집안의 내력을 바꿀 만한 요소였다.
그렇다고 출신성분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유령의 도시>의 주인공 한경희는 리일철과 같이 ‘아버지 때문에’ 좋은 출신성분이라 당당했다. 그러나 창문에 커튼을 쳤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초상을 솥뚜껑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잡혀간다. 우리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울고 억울하다 화를 내며 당장 이 심정을 SNS에 올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다짐한다.
“이제라도 또 ‘어비’의 영이 내려지면 45분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라도 무조건 광장으로 모둠질쳐 대령을 해야 하리라고!”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출신성분에 따라 한 개인의 인생을 낙인찍는다. 그렇다고, 꼭 출신성분을 따라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것도 아니다. 북한 주민 개인의 인생은 오직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에게 달렸다. 모든 사건을 통해 또 다시 충성을 다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북한이다.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이라니! 그에겐 ‘자애’라는 표현보단 ‘잔인’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얼핏 북한 선전용 포스터가 떠오른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세상에 부럼 없어라!” 고된 노동에 피곤함과 배고픔이 절정에 달할지라도, 그들을 웃게 한다.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같은 표정, 같은 몸짓을 하고 수령님 사진을 바라본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다. 화가 난다.
나에게 가장 묵직하게 다가온 한 작품은 <무대>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씨름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체제와 反체제의 싸움이었으며,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었다.
청년인 아들 경훈은 알아버렸다. 아파도 아프지 않다 해야 하며 배고픔도 배고프지 않다 말해야 하는 곳.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경훈의 <아프다 하하하> <간지럽다 엉엉>을 보고 눈물 나게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저 조의장에선 벌써 석 달이나 배급을 못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꽃을 꺾으려고 헤매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들의 눈물이 진실이란 말입니까?”
경훈이 말하는 ‘진실’이다. 진실은 그의 아버지 귀에 맴돌다 마음에 꽂혔다. 나에게도 강하게 내리 꽂힌다. 그들의 감정대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가. 그들은 김일성 앞도 아닌 김일성 동상 앞에서 그렇게 울어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작가 반디는 경훈의 입을 통해서 마침내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 냈다. 자신이 바라보는 진실과 자유를 외쳤다.
“진실한 생활이란 자유로운 곳에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구요. 얼마나 처참해요. 백성들을 이렇게 지어낸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명배우들로 만들어 버린 이 현실이 무섭지도 않은가 말입니다.”
무섭다. 이 현실이 무섭고, 이 현실이 그리 멀지 않은 우리 북녘 땅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이 무섭다. 철저히 통제되기에 거짓과 가식이 난무한다. 그것을 반디는 ‘무대’라 칭했다. 삶도 죽음도 모든 게 ‘무대’에서 벌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대 탈출은,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그들의 욕망은, 죽음을 뜻한다.
내가 청소년 시절에 했던 고민들, 20대가 되어서 하는 고민들, 인생의 위기라고 느껴졌던 그 순간마저 감사하게 된다. 나는 그래도 나의 인생을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며, 나를 위해 울 수 있었고 웃을 수도 있었다. 가벼웠던 자유가 무겁게 내 마음을 누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통일을 직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외친다. 누구는 국가적 이익이 어마어마함을 강조하며 통일은 대박이라 말한다. 또 누구는 한민족이기에 우리는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통일을 외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나는 자유를 외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자유를 위해 통일을 이루고 싶노라고. 내가 누리는 이 자유, 그들도 마땅히 누려야겠노라고. 나에게 당연했던 축복, 그들도 당연히 받아야겠노라고. 통일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다.
날이 많이 추워졌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 사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애꿎은 하늘만 쳐다본다. 저 멀리 태극기가 펄럭인다. 그 아래 사람들은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냉정한 바람이 괜히 서럽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심장마저 얼려버릴 기세로 달려든다. 그러나 심장은 ‘나는, 살겠노라!’를 외치며 더 뜨겁게 뛰는 듯하다.
차가운 김일성 동상 아래 반디의 뜨거운 호흡이 느껴진다. 암흑천지의 북한에서 이내 남한에 흘러들어온 반디의 희미한 빛이 더욱 반짝인다. ‘나는, 꺼지지 않겠노라!’
(끝)
<3>
행복의 강요에 맞서 노래한 悲劇
《고발》 속 비극은 ‘인간성 해방’이란 자유를 누린 기쁨의 노래였다
金昌大(고발 감상문 공모전 가작 수상자)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작가보다 먼저 자유의 대지에 도착한 《고발》. 원고(原稿)는 발을 땅에 내딛자마자 고래고래 비극의 통곡을 쏟아 놓았다. 자유를 맛본 감격에 취해 흥겨운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건만, 외침의 시작과 끝은 온통 비극과 고통,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저 유럽의
옛 털보는 주장하기를
자본주의는 암흑천지요
공산주의는 광명천지라 하였거늘
암흑천지에서만 빛날 운명인
광명천지의 나 반디는
만 천하에 고발하노라
그 암흑이 그믐밤이라면
천만길 먹물 속인
털보의 그 광명천지를>
고발의 머리글이다. 머리글부터 마지막 장까지. 기쁨은 찾기 힘들어 보인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에서 승리했지만, 승자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다. 자유를 얻은 기쁨을 꺾을 만큼 무엇이 그토록 한탄스러웠을까. 무엇이 그토록 서러워, 기쁨을 삼킨 입에서 비극을 토해냈을까.
작품 속 비극을 관통하는 한 가지 소재가 있다. 인간의 가장 큰 슬픔,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에선 꼭 누군가가 죽거나 죽음을 가까이 한다.
적대군중(당에서 역적으로 보는 계급의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쇠도장 때문에 어머니의 뱃속이 무덤이 된 아이. ‘어비’의 정체를 깨닫게 된, 평양에서 추방당한 한경희. 느티나무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나무에 달린 훈장을 요절내고 심장마비로 급사(急死)한 설용수. 법보다 무서운 질서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김명철. 대합실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영감과 손녀. 그들을 병간호 하는 공산당의 선전선동 소재 오 씨. 무대의 실체를 알게 되자 그 누구보다 연극무대의 막을 빨리 내린 홍영표.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직무태만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처형을 당한 고인식.
낙태부터 총살까지. 남한에서의 죽음은 굉장히 낯선 광경이지만, 반디가 그린 북한에서의 죽음은 다채롭고 익숙하기까지 하다. ‘죽음’이란 소재가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을 의미하기에 쉽게 쓰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고발》에선 죽음만큼 쉽게 쓰인 소재가 없었다. 죽음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을 가장 많이 사용했기에, 《고발》에 나오는 ‘죽음’의 의미(意味)는 더욱 심장(深長)해진다.
현세(現世)의 슬픔을 이기기 위해 현세를 마감해야 하는 나라.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인 죽음만이 현세의 고통에서 자유케 할 수 있는 나라. 죽음을 통해 비극을 노래했기에, 얼핏 보면 반디의 작품은 기쁨과 거리가 멀어 보이고, 자유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발》만큼 자유와 관계 맺은 소설이 없고, 《고발》만큼 기쁨을 노래하는 비극이 없음을 알 게 된다.
알고 보니 작품 속 비극의 향연(饗宴)은 진정한 기쁨의 노래였다. 자유가 주는 큰 기쁨 중 하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만 하는 억압. 그로부터의 자유, 해방. 반디가 살았던 ‘슬픔을 허용하지 않는 땅’은 비극도 허용하지 않았다. 복마전(伏魔殿) 이야기처럼 슬퍼도 웃어야 하는 땅이기에, 비극적인 문학은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다. 북녘에 태어난 스스로가 너무나도 불쌍한데, 행복한 척 웃어야 하는 문학가들. 그들의 직업은 인민의 입을 대변하기에, 빨간 마귀의 가장 강력한 마법에 묶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디는 마법에 맞서 실상(實狀)으로 대답했다. 행복의 강요에 맞서 비극을 노래했다. 행복해야만 한다는 거대한 억압에 당당히 맞서 그의 단편소설 《고발》로 통곡했다. 자신의 나라를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국민의 집을 칼날 위에 짓게 하고, 인민을 감시의 단두대에 누워 생활하게 하는 북한 정권에 대항하여 펜으로 응수(凝水)했다. 반디는 단편소설마다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웃음이 넘치는 유토피아의 실상을 고발했다.
인간으로서 억압에 당당히 맞설 자유, 비상식적인 시스템과 부조리를 고발할 수 있는 자유. 반디의 억눌렀던 인간성을 해방시킨 자유. 마법에서 해방된 반디이기에, 그의 책 《고발》이 토하고 있는 비극의 통곡은 비극의 슬픔만을 담고 있지 않다. 원고를 써가며 흘렸을 반디의 눈물엔 기쁨의 눈물이 섞여있었다. 자유를 누린 기쁨의 눈물. 반디는 분명 자유를 누렸다. 자유를 누린 작가는 그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흘렸던 기쁨의 눈물을 잉크에 담았을 것이다.
이것이 책 《고발》의 비극 속에 기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반디의 작품이 자유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며 알차게 맺은 열매라 느껴질 만큼, 《고발》은 자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아직 설익었지만, 자유주의 진영에 있는 나에게 반디가 노래한 자유의 기쁨은, 그 어느 노래보다 강력하고 그 어느 소설보다 뚜렷하게 다가왔다. 죽음을 통해 노래하는 자유. 원색적인 반디의 기쁨은 기쁘면서도 슬프다. 억압에 땅에서 위대한 자유의 목소리가 외쳐져 기쁘지만, 죽음을 소재로 노래할 수밖에 없음에 흘리는 눈물. 너무도 하드코어(hardcore)한 반디의 자유가 부드러워 졌으면 하는 안타까운 바람이 든다.
북녘의 땅이 극단적이기에, 자유도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하루 빨리 부드럽고도 따뜻한 자유의 바람이 북녘에 흘러 들어가길 바라는 작은 소망을 품는다. 반디의 책 《고발》을 덮으며.
(끝)
<4>
북한정권의 선전 뒤에 숨겨진 진짜 ‘인민’들 이야기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고발》을 읽고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 통일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文康恩(고발 감상문 공모전 가작 수상자)
‘북녘 땅 50년을 말하는 기계로,
멍에 쓴 인간으로 살며
재능이 아니라 의분(義憤)으로,
잉크에 펜으로가 아니라 피눈물에 뼈로 적은
나의 이 글
사막처럼 메마르고 초원(草原)처럼 거칠어도
병인(病人)처럼 초라하고
석기(石器)처럼 미숙해도
독자여!
삼가 읽어다오‘
표지에 적혀있는 한 편의 짧은 시가 이 책을 읽게 했고, 이 시를 통해 작가 ‘반디’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고발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에 적힌 ‘잉크에 펜으로가 아니라, 피눈물에 뼈로 적은 나의 이 글’이라는 문구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고발》은 제목 그대로 북한의 차별과 폭압이라는 사회의 비리와 수령 독재체제가 불러온 사회적 모순 등을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다. 7개의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고발》은 각각의 단편소설 속에 북한사회를 규율하는 계급차별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탈북기>에서는 북한의 차별과 폭압 속에서 탈북이라는 소극적 저항을, <유령의 도시>에선 아기가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막아 보려고 덧커튼을 달았다가 평양에서 추방당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준마의 일생>은 공산체제가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다가 좌절, 아끼던 느티나무를 찍어버리고 죽는 마부의 이야기, <지척만리>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여행 제한과 기차 운행의 결함으로 결국은 임종을 하지 못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복마전>은 길을 가다가 김일성을 만나 선전자료로 이용당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무대>는 보위부원의 눈에 비친 북한체제의 연극이, <빨간버섯>에서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친다.
이중 <무대>라는 북한체제에 대한 연극을 다룬 작품이 가장 색다르게 다가왔다. 북한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연기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기서 자감(自感)이라는 단어는 ‘배우가 인물의 사상 감정과 주어진 정황을 그대로 믿고 느낌으로써 역(役)인물의 생활 속에 스스로 깊이 잠기는 것, 또는 그러한 창조적 상태’를 의미한다. 연극은 무대가 끝나면 무대의 막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배우는 극중의 역할을 마치고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북한은 연극의 막이 내려와도 자신의 감성을 숨기고, 북한이라는 거대한 세트장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당해야 한다.
<무대>를 읽다보면 조지 오웰의 《1984》가 떠오른다.
“자네는 빅 브라더를 사랑해야 해, 복종만으로는 안 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해.”
북한주민들은 김씨 일가의 지독한 악행과 고통, 억압 속에서도 그들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자감’이다. 그들은 연극이 아니라 생활을 넘어 내면까지 김씨 일가를 사랑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실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무대>에서, 감독이자 감시자 역할을 맡아온 홍영표는 자감연극에는 성공했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갈 의욕을 잃고 자살을 택한다. 감시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홍영표의 자살이 바로 북한체제에 대한 흔들림이라고 생각한다.
반디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라는 북한의 문인단체 소속이라고 한다. 언론의 자유, 문학의 자유 등을 잃고 오직 김씨 일가에 대한 찬양과, 북한체제의 대한 찬양만을 위한 글을 쓰는 조직에서 목숨을 걸고 《고발》을 집필했다. 이런 행위가 발각되면 3대가 멸족을 당하며,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디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을 지나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았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참상을 목도하고, 그 모습을 보며 작가로서 자신이 살아왔던 북한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배고픔과 체제 모순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과 먹고 살기 위해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탈북자 교육, 북한 실태교육, 여러 자료를 통해 북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고발》처럼 북한의 실상(實狀)에 대해 사실적으로 적은 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북한은 ‘김정은 수령 체계’가 탄탄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을 보면 북한정권의 선전 뒤에 숨겨진 ‘인민’들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아직 형태는 안 보이지만 그들의 체제가 밑바닥부터 점점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소대장으로써 북한의 실상에 대해 교육할 때 북한이 어떤 곳인지, 북한주민들이 어떠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만 이 책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고발》을 읽고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 통일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끝)
<5>
김일성의 거짓 낙원을 찬양하는, 철없는 남한 사람들을 향한 고발
진짜 낙원에 사는 우리는 실낙원의 북한주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姜瑜華(고발 감상문 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김일성의 ‘낙원’과 반디의 ‘실낙원’
김일성의 북한이 낙원이라면 반디의 북한은 실낙원이었다. 반디가 ‘피눈물에 뼈로 적었다’는 소설 《고발》은 북한 주민들의 애달픈 실낙원을 그린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도 책을 놓지 못했다. 반디는 북한의 동서남북 모든 땅이 김일성과 그의 새끼 돼지들만을 위한 거대한 낙원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단편 <복마전>은 김일성의 낙원과 북한 주민의 실낙원 사이의 간극을 분명하게 그린다.
<복마전>의 주인공은 오 씨 할머니다. 오 씨 할머니 내외는 딸을 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갈아타던 중 ‘1호 행사’를 듣게 된다. ‘1호 행사’란 김일성, 김정일 현재는 김정은이 직접 참가하는 행사를 말한다. 행사가 진행되는 곳은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해도 오직 김씨 일가만 이용할 수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1호 행사’로 오 씨 내외와 많은 사람들이 역 대합실에 갇히게 된다. 봉쇄 32시간, 남아 있던 식량은 바닥을 보였다. 늘그막에 찾아온 배고픔은 오 씨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해산을 앞둔 딸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데려온 손녀가 옆에 있었다. 오로지 손녀가 배를 곯을까 걱정이었다. 결국 오 씨 할머니는 자신의 입이라도 덜고자 길을 떠난다. 곧 해산할 딸을 위해 이웃집에 부탁해 둔 멧돼지 열(쓸개)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다. 마침 이웃집이 역에서 멀지 않았다.
길 떠난 오 씨가 도로에 나서자마자 알게 된 것은 ‘1호 행사’가 두 군데에나 내려졌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기찻길에 내린 1호 행사로 자신들이 감금되어 갖은 생고생을 한 것인데 도로에 내린 1호 행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김일성이 둘이라도 된 단 말인가’ 라는 푸념을 한다. 그러던 중 그녀 앞으로 김일성의 승용차가 나타난다. 그토록 들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잔뜩 겁을 먹어 사시나무 떨 듯 하던 그녀에게 김일성은 선뜻 오 씨를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에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차에 탄 오 씨 옆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1호 행사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기뻐할 세도 없이 그녀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틀이 지나도록 대합실에 갇힌 인민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이유.
<오 씨는 이제 와서야 철길에 내려진 ‘1호 행사’는 뭐고 도로에 내려진 ‘1호 행사’는 뭔지를 똑똑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알고 보니 김일성은 지금 철길도 도로도 동시에 이용하며 이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철길 쪽이 좋을 때는 열차를 타고, 해안 경치가 아름다운 이런 데서는 승용차를 이용하면서….>
오직 김일성의 여행길을 위한 희생이었단 말인가? 오 씨의 머릿속엔 김일성을 원망할 시간도 없이 1호 행사가 끝나고 대합실에서 일어날 일들이 떠오른다. 서로 먼저 대합실을 나가겠다며 문이며 창틈이며 할 것 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대합실. 인파속에 밀려 엎어지고 밟히는 머리가 허연 영감과 토끼 같은 손녀. 김일성이 보고 즐긴 북한 전역(全域)이 그녀에겐 복마전이었다.
오 씨의 상상대로 전쟁터 같은 대합실에서 영감은 허리가 휘고 손녀는 제비 다리 부러지듯 가냘픈 다리가 꺾였다. 그 시간 자신은 편하게 차를 타고 있었단 사실로 자책에 빠진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김일성의 마술이었다. 기자들의 성화로 자신의 편의를 봐준 김일성을 치켜세우는 말 몇 마디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오 씨의 목소리는 김일성의 낙원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당한다. 그녀의 찢긴 가슴 사이로 자신의 목소리가 박힌다.
<”이렇게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저를 끝내 승용차에 태워주시고서야 길을 떠나셨습니다.” (중략) 드디어 오 씨의 목소리는 끝났다. 그러자 이번엔 열기 띤 방송원의 목소리가 영감, 손녀의 상처 앞에 새로운 칼을 빼들고 나섰다.
“듣고 있습니까, 청취자 여러분! 우리 수령님, 우리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다함없는 이 감사의 목소리를! 정녕 어버이 수령님의 이런 사랑의 품이 있어 이 땅 하늘과 바다 그 어디에나 우리 인민이 불편을 모르는 행복의 여행길 활짝 열려 있고, 그 여행길 위해 오춘화 노인 같은 행복의 웃음소리 높이높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김일성이 말한 낙원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그저 사악한 마술이었노라고 고발한다. 무시무시한 동산, 사람의 감정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 마술의 동산. 슬픔을 기쁨으로 아픔을 행복으로 바꾸어 버리는 마술. 김일성의 낙원은 감정을 상실한 북한 주민들의 실낙원이었다.
<그러니 글쎄 생각 좀 해보시우. 그 동산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디가 아프거나 슬퍼서 엉엉 울어도 그것이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만 되어 나왔으니 세상에 그처럼 악한 마술이 어디 있고 그처럼 무시무시한 동산이 또 어디 있겠수.>
김일성의 ‘초(超)현실’과 반디의 ‘지독한 현실’
김일성이 꾸며낸 낙원은 초(超)현실 세계였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에게 김일성이 약속한 것은 낙원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일제의 지독한 식민통치보다 더 지독한 공산사회였다.
<준마의 일생>은 공산주의의 환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물이 나온다. 설용수! 그를 통해 광복 후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던 까닭을 알게 되었다. 배고팠던 조선민족에게 쌀밥과 고깃국이 기다리는 사회를 선물하겠다던 공산주의자들의 외침. 설용수 또한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어보겠다며 공산당에 입당하는 날 느티나무를 기념 나무로 심었다.
<“그럼! 이제 저 나무가 저기 저 장공장 시멘트 굴뚝만큼 높아질 때면 말이다, 나무에 사탕이랑 과자랑 별거별거 다 열린단다.”
“피, 꽝포( 꽝 소리만 요란한 대포라는 뜻으로 ‘거짓말’을 이르는 말).”
“정말이다, 정말. 큰아버지가 꽝포 쏘디 원!”
“그럼 운동복도 달리나?”
“운동복뿐이겠냐, 입쌀에 고기에 비단옷에 기와집도 달리지!”
“야! 좋다!” 영일은 짜락짜락 손뼉을 쳤다.>
공산사회가 이룩되는 날이면 천지에 쌀밥과 고깃국, 비단옷이 널려있을 줄 알았던 순수한 설용수. 그는 김일성이 목 놓아 부르짖던 인민의 낙원을 믿었고 자신의 평생을 김일성과 당을 위해 바쳤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혹독한 겨울을 나게 해줄 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과 추운 겨울바람을 고스란히 머금은 당의 훈장만이 남은 지독한 현실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어느새 내 눈에는 꼬마냇물이 생겼다. 엉엉 울고 싶었다. 그들의 빼앗긴 희망을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더 무서운 것은 공산주의 환상에 빠진 북한 주민이 아니었다. 이제는 환상도 남지 않은 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였다. 그들은 김일성의 초(超)현실 낙원을 위해 초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령의 도시>에 등장하는 북한사람들은 초인 그 자체였다. <유령의 도시>는 마르크스와 김일성 초상화를 두려워하는 어린 아들을 위해 집의 커튼을 쳤다는 이유로 도시에서 쫓겨난 ‘한경희’ 가족이 나온다. 한경희의 집 창가 어디에나 김일성과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보였다. 소설 속 배경은 북한의 국경절 행사 전후다. 국경절 행사 당일 ‘한경희’는 아이가 아프단 이유로 행사에 제외되어 집에서 밖을 내다본다.
국경절 당일 아침부터 북한 전역(全域)엔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한경희는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거센 비가 정시 행사 불가능이란 말처럼 보였다고 회상한다. 행사 45분 전에 그친 비, 그침과 동시에 주민들에게 내려진 명령. “시민들에게 알린다. 행사는 정시에 진행한다. 각 단체들과 행사 참가자들은 자기들의 집결 장소에 무조건 도착하라!” 정확히 40분 만에 광장에 모인 100만 군중, 단연코 그 순간 광장을 매운 사람들은 ‘초인’이었다. 그들은 왜 초인이 되었는가? 어떤 힘이 100만 군중의 기적을 만든 것인가? 한경희의 마지막 독백이 가슴을 찌른다.
<이제라도 또 ‘어비’의 영(令)이 내려진다면 45분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라도 무조건 광장으로 도둠질쳐(급하게 모이다) 대령을 해야 하리라고!>-‘유령의 도시’中-
‘어비’, 김일성 어버이의 영(靈)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그 영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북한에 세워진 3만 8천개의 김일성 동상이 그의 영이 아닌가? 인간의 생명보다 사회적 생명이 귀하다고 가르치는 북한. 생명은 부모가 주지만 사회적 생명을 주는 분이 위대하신 영도자 김일성 어버이라고 가르치는 북한.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자행되는 감시와 폭력 앞에 북한 주민은 초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초인이라고 한들 100만 군중에게 남은 시간이 5분이었다면 어찌됐을까? 마음이 아려온다.
진짜 낙원을 위해
반디가 소설을 통해 알린 북한의 끔찍한 현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까지 묻는 연좌제 사회. 이름이 아닌 반동분자의 자식으로 불릴 것이 안타까워 소중한 생명을 지워야 하는 여자가 수두룩한 사회. 말일(末日)이 되면 배급받은 양식이 부족해 자신의 밥은 남편의 점심으로 남겨놓고 자신은 개밥 같은 것을 끓여먹어야 했던 아내. 김일성 동상에 바칠 꽃을 따기 위해 독사에 물려죽은 자식을 둔 부모가 김일성의 동상 앞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하는 곳. 눈물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곳. 모든 것이 현실을 뛰어넘어 버린 초(超)현실 세계, 북한.
반디가 책을 통해 고발한 곳은 북한이었지만 어쩐지 그 고발은 우리 사회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유명한 모 소설가는 김일성 동상과 그 옆에 놓인 꽃을 보며 “우리가 체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꽃송이에 담긴 인민의 순결한 마음 그 자체야 왜곡할 건덕지가 없지요”라고 했던가? 어쩌면 반디의 고발은 김일성이 말한 거짓 낙원을 찬양하는 철없는 남한 사람들을 향한 건 아닐까?
반디는 김일성의 낙원이 실은 실낙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에게서 사지(死地)와 생지(生地)가 다르지 않다며 목숨을 내놓으라 하던 이순신이 떠오른다. 반디는 체제비판 소설《고발》을 쓰며 스스로 사지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가 생지라 생각한 대한민국으로 소설을 보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진짜 낙원에서 하하 호호 웃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그저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기 위해 진실을 적었고. 진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엔 북한과 비교할 수도 없는 진짜 낙원이 펼쳐져 있다. 진짜 낙원에 사는 우리는 실낙원의 북한주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끝)
<6>
김일성 지옥을 만든 공범자는 시인과 작가들이다
북한주민이 보내온 독후감: 이 소설은 김일성을 우상화한 시인과 작가들을 고발한다.
刀盡(고발 감상문 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암흑의 땅 북녘에서 보냅니다
나의 감상문에서는 남한,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그리고 고발 책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여기에서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책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사진처럼 찍힌 것이라고만 이야기하겠다.
반디의 고발을 세 번째로 읽어본다. 읽어볼수록 그 의미가 깊은 소설이라는 게 안겨온다.
얼핏 보고 나면 고발은 7편으로 된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계층들의 단면적인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로 북한 실상에 대한 고발로 느껴진다.
수령만을 위한 독재체제에 분노로 사람보다 먼저 소설을 탈북시킨 탈북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읽고 또 읽어 보노라면 소설에는 북한 실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철학이 담겨져 있다. 반디의 소설을 북과 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읽어보게 된다면 독자들의 생각은 각기 다를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독자들인 경우 우리가 당하는 실상 그대로 담은 작품 . 목숨을 내건 탈북으로 출판된 항거의 소설로 인식될 것이다.
남한의 독자들인 경우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데도 있는가? 소설로 북한 실상을 세부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였다.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걸 다시 한번 감사히 생각한다.”
반디의 소설은 남한 독자들에게는 수령독재에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왜 들고 일어나 싸우지 못하느냐? 3달째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면서도, 남편을 수용소에 보낸 안해도 어버이 수령님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하는 그런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왜 들고 일어나지 못하느냐? 왜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느냐? 북한에는 무지렁이들만 모여있단 말인가?”
이것이 남한 독자들의 안타까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북한에 살고 있는 나도 늘 하는 것이다.
반디의 소설을 곱씹어 읽어보면서 철학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거대한 집단 최면술에 걸린 것과 같은 북한 2천만 주민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정신적 근원이 어디 있는가를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통해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수령만을 위한 사회 그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자기의 감성마저 죽은 수령을 위하여 억제당하는 독재체제는 처형과 수용소라는 공포통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령독재체제도 인민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2천만 인민이 여기에 마취되었기 때문이다.
반디는 복마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합치면 구천에도 차고 넘칠 그 고통의 아우성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밖에선 지금 저처럼 행복의 웃음 소리만이 누리에 울려가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결국은 량쪽 손톱을 동시에 뽑히는 듯한 고통을 당한 오씨를 선창자로 하는 행복의 웃음 소리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 그 어떤 잔악한 마술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뭇 사람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행복의 웃음으로 둔갑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
김일성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철학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척만리의 주인공과 함께 분노로 주먹을 틀어쥐었던 려행증 제도도 김일성이 고안하여 만든 것이다. 홀어머니 계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림종마저 지켜드리지 못하게 만든 (방침제대 ) 무리배치도 김일성이 고안한 것이다. 무자비한 처형과 지옥의 수용소도 김일성이 착상하여 실천한 것이고, 1948년 9월 리씨 왕조와 같은 세습군주제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인민들에게 약속하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그 약속을 저버리고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해 놓고 죽은 것도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없었다면 김정일도 없었을 것이고, 300만의 大餓死(대아사)도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없었다면 오늘의 3대 세습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사는 이 땅의 암흑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주민의 90%는 이런 생각을 못 가지고 있다 <김일성은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다, 락후했던 식민지 반봉건 국가였던 우리나라를 경제강국으로 올려 세워 놓았던 위대한 수령이고,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였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이 꼴이 된 것은 김정일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정치를 기대해볼 게 없지만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이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김일성처럼 정치를 잘 하면 이제라도 바로 잡힐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있어 그렇듯 참혹한 인권유린 속에 신음하면서도 순한 송아지 마냥 눈물만 흘릴 뿐 (뿔질) 한번 없는 것이다. 이 인식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기대하기 어렵다. 김일성과 같은 (인민의 수령)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디는 소박하고 꾸밈새 없는 단편 이야기로 여기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하였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에서 이렇게 썼다.
<저 마르크스가 내놓은 모든 리론 중에서 가장 위대한 리론이 뭔지 아오? 그건 자본론도 과학적 공산주의 건설 리론도 아닌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이요,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이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토영삼굴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요.>
한 마디의 말이지만 한 생에 걸쳐 깨달은 반디의 인식관이 집약되어 있다. 공산주의 리론은 모든 사람들이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후려잡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은 계급투쟁을 말한다. 계급투쟁에는 원쑤의 구분을 국가나 민족단위로 정하지 않는다. 재산과 지식의 유무(有無)나 사상이나 리념의 차이가 원쑤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같은 민족이라도 같은 마을 사람이라도 다 죽이겠다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는 시점이 공산주의라고 정의한다.
결국 공산주의는 투쟁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투쟁대상이 없어질 때까지 자기들끼리 싸워야 한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마르크스가 내놓은 리론을 김일성이 실현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결국 김일성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그 누구든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라는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휘여 잡는 악마의 통치철학에 대하여 까밝히고 있다.
반디는 단편집의 구성 마지막 부분 <빨간 버섯>에서 ‘저 빨간 버섯을 뽑아 버리라’고 절규한다. 반디의 고발은 北주민 대다수가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니 北주민 대다수가 생각하려 하지 않는 불행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소박한 이야기로 잘 깨우쳐 주었다.
우리가 김일성을 받들어 모신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2천만의 北주민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암흑의 땅에 민주화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을 받들어 모시지만 않았어도 김정은의 채찍 밑에서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단된 내 나라가 벌써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반디의 소설이 우리에게 이것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한다. 2천만 北주민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는 교과서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나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유가 있다. 김일성이 이 나라와 인민 앞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백성들이 떠받들어 주어야 하나? 언제부터 민족의 영웅이 되였나? 누가 먼저 민족의 령수로 떠받들자고 선동했느냐? 따지고 보면 이 나라의 작가들이고 시인들이다.
반디의 소설은 북한의 수령전체주의 실상을 폭로하였다는 데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김일성의 인자함의 본질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수령독재가 3대째 이어올 수 있은 것은 물론 무자비한 처형으로 인한 공포정치에도 있다. 그러나 기본은 김일성의 위대함과 인자함을 인민들의 머리 속에 심어놓은 그 정신에 있다. 北 주민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을 절대로 김일성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치제도는 모든 것이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정신적 기초가 지금까지도 인민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이 한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여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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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 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에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 듯 고르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 해지는 이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저어하는 이 절경
세월의 류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 올리라
어느 해 어느 때 이 나라 빨찌산들 이곳에 올라
천심을 떠받들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이제 항일의 의로운 전사들이 사선에 올랐던 이 나라에
재생의 백광 가져왔으니 해방사의 혁혁한 대로
두만강 물결을 넘어왔고 백두의 주름 주름 바로 꿔여
민주조선에 줄곧 뻗치노니 또 장백의 곡곡에 얼룩진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력력하노니
내 오늘 맘 놓고 여기에 올라 삼천리를 손금같이 굽어보노라
오 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 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 나간 그 토막 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아왔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 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 머리에 섰느냐?
쉬위 바위 우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뻗치고 남쪽 하늘 바라보다
<<따응>>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시련 듯 톱을 들어 <<따응>>
그리곤 휘파람 속에 감추인다
바위 호올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여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 있는 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 소리 들릴지 산천을 뒤집어 떨치는
그 노호소리 다시금 들릴지!
바위! 바위! 내 알리 없어라 정녕코 그 바위일 수도 있다
빨찌산 초병이 원쑤를 노렸고 애국렬사 맹세의 칼 높이 들었던 그 바위
빨찌산 용사 이 땅에 해방의 기호 치던 장백에 솟은 이름 모를 그 바위
또 내 가슴속에 뿌리박고 솟았거니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 헤쳐 마음대로 말 하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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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詩의 감화력은 자못 크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천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시에 넋을 빼앗긴 사람은 석달째 배급을 못 받고도 수령님 하고 눈물을 쏟게 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이밥에 고기국에 비단옷이라는 거짓말에 한 생을 속아 살면서도 거짓말을 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이 제도에 절대 반항하지 않는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독재에 신음하는 인민들을 처형하면서도 절대 죄의식을 느낄 줄 모르게 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3대 세습을 응당한 것으로 여긴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온갖 허위 날조된 력사도 그대로 믿는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독재자를 위하여 동족상쟁에 뛰어들 각오에 넘쳐있게 된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독재자 가문이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시인 조기천을 고마워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기들이 이 나라 인민들의 정신을 마취시켰기에 손쉽게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 독재의 칼날 밑에서 고통 받는 인민들의 신음소리가 그대들의 귓전에는 들리지 않으며, 매문 문필가로써 자기들의 삶 또한 자유롭고 편안했던가?
반디의 비판정신, 항거정신을 따라 배워야 한다
반디의 작품은 이 땅의 매문 문필가들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습독재 하에서 신음하는 2천만 인민들에게, 독재정권의 창시자이며 봉건 조선을 재건한 김일성의 실체를 바로 알려주는 투쟁의 시작을 말이다.
암흑의 땅 북녘에서 刀盡(도진) 올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