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도올 김용옥- 지식 대중스타인가, 행동하는 철학자인가

이강기 2016. 4. 30. 19:33

[원희복의 인물탐구]도올 김용옥- 지식 대중스타인가, 행동하는 철학자인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경향신문
도올 김용옥 / 김창길 기자

도올 김용옥 / 김창길 기자

오래전, 기자는 도올 김용옥과 조그만 ‘인연’이 있었다. 그는 <주간경향> 연재물 필자였고, 기자는 그 담당기자였다. 매체에 글을 잘 쓰지 않는 그의 연재물은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런데 회사 인사로 편집장이 바뀌었다. 사실 도올이 <주간경향>에 원고를 준 것은 편집장과 대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데 편집장이 바뀌니 도올이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인기 있는 연재물이기 때문에 도올에게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강연을 앞둔 도올을 만나 원고를 계속 줄 것을 사정, 아니 읍소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기자는 강연이 끝나면 다시 사정할 요량으로 강연장 한구석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도올은 강연을 하다 말고 손가락으로 기자를 가리키며 “저기 내 원고를 받으러 온 기자가 있는데, 나는 유능한 편집장을 바꿔버린 회사에 원고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중은 일제히 기자를 쳐다봤다. 기자는 속으로 “공개적으로 기자 망신을 주는 도올, 성질 정말 더럽다”고 생각했다. 결국 연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올에 대한 인물탐구를 결정했을 때 기자는 이 ‘악연’이 생각났다. 사실 그는 보통 ‘성질’의 소유자가 아니다. 욱하는 성질로 교수직을 던져버리고, 방송강의에서 육두문자를 내뱉고,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 하야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그다.

이후 거의 잊고 있던 도올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요즘 그가 JTBC에서 <차이나는 도올>이라는 강연 프로그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나 중용과 같은 중국 고전만 전문인 줄 알았던 도올이 신해혁명 이후 지금까지 중국현대사를 빠른 흐름으로, 핵심 인물을 찔러가며 하는 강의는 매우 유익했다.

게다가 도올의 새로운 모습까지 발견했다. 지난 4월 24일 방영된 프로에서 도올은 정지용의 시 ‘향수’ 노래까지 불러가며 해설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그는 “천재시인 정지용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었다”고 언급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요즘 이는 TV(공중파 방송)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또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소개하면서, 금서인 이 책을 “공항에서 몰래 숨겨가지고 들어와 울면서 읽었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리랑>은 1920~30년대 중국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한 조선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보도연맹 사건이란 1949년 4월 정부가 좌익(진보) 정치·노동·청년운동 전향자들을 관리하거나 지도하기 위해 보도연맹이라는 일종의 관변단체를 만든 것에서 시작된다. 보도연맹원은 처음에는 좌익활동 전향자 위주였지만, 배급 혜택을 준다고 해서 일반 서민들도 많이 가입했다. 그러다 보니 연맹원이 30만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6·25가 나자 정부는 이들을 소집하거나 연행해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집단학살했다. 현대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대략 20만명이 학살된 현대사의 비극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보도연맹 사건은 보수언론은 물론, 요즘 공중파 방송에서 금기시되는 단어다. 공영방송 KBS 이사장과 MBC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사들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광복절 대신 이승만의 건국절을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이승만 정권의 참극을 언급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KBS의 경우 최근 전경련과 어버이연합 관련 의혹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달한 기자를 갑자기 교체해 방송이 불방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정도다.(<미디어오늘> 4.23)

도올의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보도연맹사건으로 천재시인 정지용이 죽었다는 주장은 사실 논란거리다. 정지용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납북설’ 등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차이나는 도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이상현 CP는 “정지용 시인의 생애에 대해 다양한 설 중 간단히 언급한 것”이라면서 “강의 내용은 전적으로 도올 선생이 정하고 우리(제작자)와 협의하지 않고 우리도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CP는 “간간이 현실을 비판하는 대목이 있지만 양념처럼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JTBC니까 이런 프로가 TV에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도올은 필화(筆禍)나 설화(說禍)가 많은 인물이다. 방송 중 돌출적 행동과 거친 입담, 특히 정치적 발언 때문이다. 그래서 2011년 교육방송(EBS)에서 <중용> 특강을 하다 갑자기 중단을 통보받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을 반환경적·반문명적 토목공사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때 도올은 “나치 검열과 다를 바 없다. 저급하고 비열한 꼼수”라며 세종로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도올이 ‘이승만의 보도연맹사건’을 언급하고, <아리랑>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과거 그를 알던 것과 다른 측면을 보게 됐다. 그는 권력자에게 바른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지식인이었지 이렇게 ‘이념적 단편’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도올을 리버럴리스트, 즉 자유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던 기자에게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김용옥은 1948년 충남 천안 출신이다. 고려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공부하고, 다시 고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중화민국 타이완대학에서 <노자>로 석사, 일본 도쿄대학에서 또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올은 1982년부터 모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1986년 때려치운 뒤 방송 강연, 연출가, 극작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심지어 기자(<중앙일보>와 <문화일보>)는 물론, 나이 40세가 넘어 한의대에 진학해 한의사까지 했다. 이 기간 동안 순천대·중앙대·한신대·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및 객좌교수, 최근인 2014년 연변대학 객좌교수를 지내 교수라는 직함도 계속 이어왔다.

도올은 유·불·도·서양철학·신학 등 폭 넓은 강연과 80여권의 책을 썼다. 도올은 인문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폭 넓음’과 ‘해박함’ 때문에 솔직히 그를 ‘탐구’하고 ‘평가’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다방면에 걸친 그의 철학적 주장과 이론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과 반론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도올에 대한 탐구는 일상적이고 대중적 인물 도올에 한정할 수밖에 없다.

2011년 EBS로부터 방송 하차를 통보받은 김용옥 교수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1년 EBS로부터 방송 하차를 통보받은 김용옥 교수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그는 일본 도쿄대와 미국 하버드대 등 세계적 명문대를 나오고 영어·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한다. 무엇보다 그는 어렵다는 철학과 중국고전, 신학 등을 쉽게 설명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자신 있게 내놓는다. 그의 천재적 해박함은 문학·음악·연극·미술 등 예술분야까지 넘나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자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우주의 보물이라는 ‘우주보(宇宙寶)’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에게서 겸손함은 발견하기 어렵다. 게다가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방송에서도 육두문자를 구사할 정도로 독설가다.

사실 생존 인물치고 도올처럼 다양하고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도 별로 없다. 이는 도올이 지식으로 무장한 대중스타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 최고의 천재’ ‘조선이 낳은 희대의 인물’ ‘최고의 스승’이라는 극찬이 있는 반면, ‘사이비 학자’ ‘개그계의 황제’라는 조롱도 있다. 또 해당 분야 전문가가 볼 때 도올의 지식은 ‘가벼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아예 단행본 <도올 김용옥 비판>을 통해 그를 ‘인문학계의 황우석’이라고 혹평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정신분석가 아들러의 이론을 동원해 그가 형제들과 달리 소위 SK(명문고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콤플렉스’가 작용해 유명 외국대학 학위에 천착했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중요한 요인은 도올의 겸손함 부족과 상대에 대한 독설이다.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입고 다니는 한복이다. 도올이 한복을 입는 것은 자신이 선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선뜻 선비라고 부르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통적 선비상답지 않게 겸손하거나 점잖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학문적 지식과 다른 차원이다. 여기에는 그의 천재적 해박함에 대한 시기나 질투도 작용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그의 정치성 깊은 발언이다. 현실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노빠’(노무현 지지자)적 요소가 많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극찬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비판했다) 도올은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의 천안함 침몰 발표를 단 0.001%도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해 우익단체로부터 고발까지 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단군 이래 이렇게 야비하고 나쁜 X’이라고 표현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근혜여! 그대가 진실로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라고 공개 하야를 요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한겨레신문> 2014.5.2)

이에 대해 보수매체인 <미디어펜>은 “천안함 사태에 이어 이번 세월호 참사까지 최근 보수정부 집권 기간에 일어난 주요 사건 때마다 온갖 요설로 대중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다.(<미디어펜> 2014.5.13) 그래서 일부 보수단체는 그를 고발하고, 심지어 ‘종북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사실 그의 행적을 좇다 보면 의외로 진보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2005년 EBS에서 제작한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에서는 ‘김일성은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한 항일투사’라는 점과 ‘항일운동가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관념의 유희가 이나라 절망 속 절규’라는 시각을 유지하려고 한다.

도올은 지식으로 무장한 대중스타지만, 실제는 철학자답지 않은 철학자다. 그의 철학은 혼자 조용히 사색하는 그런 철학이 아니다. 도올의 철학은 항상 도발적이며, 행동적이었다. 그는 ‘지식인의 사명은 비판에 있고, 인간의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봐야 하며, 그런 비판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지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철학자인 도올을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봤다. 역학자인 하월산은 그의 관상을 목(木)형이라면서 “학자이기는 하지만 청수하고 고매한 학자는 아니다”라고 평했다. 하월산은 “나무 목형은 머리털과 눈썹이 가지와 잎을 의미하는데, 도올은 눈썹이 정연하지 못하고 눈도 삼각형으로 한 길로 가지 못하고 성격도 모질다”고 비판적으로 평했다. 하지만 “법령선(코 옆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선)이 길고 턱이 좋아 오랫동안 활동하고, 말년운도 좋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올은 <차이나는 도올> 프로그램에서 앞으로 대(大)고구려 패러다임이라는 역사 얘기를 다룰 예정이다. 우리가 한반도 남단에 갇힌 이른바 ‘신라 패러다임’을 넘어 광활한 고구려를 포괄하는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식민사관에 대한 도전이고, 또 현 정부의 통일 주장과 궤도를 달리하는 것이어서 흥미와 논란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도올은 이번 <차이나는 도올>에서 논란거리가 될 만한 발언을 할 때마다 힐끗 PD 쪽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발언이 ‘너무 나갔나’를 체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예전 같지 않은 도올의 ‘약한’ 모습이다. 도올도 늙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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