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신사임당은 굿 와이프였나

이강기 2016. 9. 7. 11:14

신사임당은 굿 와이프였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1504~1551). 초상화 속 근엄하고 현숙한 표정이 그녀의 전부였을까.
천재 화가로 불렸던 그녀 또한 사랑하고 욕망했으며 좌절하고 신음했던 여인이자 예술가이지 않았을까.
최근, 신사임당에 대한 활발한 재해석은 ‘이 시대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조선일보

입력 : 2016.09.06 18:27

[Story: 21세기 좋은 아내, 좋은 엄마의 진짜 얼굴은?]
 

딸만 다섯 둔 반가(班家)의 둘째 딸이었다. 여인의 재능은 미덕이 아니라 저주라 여겨지던 시절 사자 소학과 논어를 줄줄 외고 안견의 산수화를 똑같이 그려내 어른들 탄성을 자아냈다. 아들 소원하던 어른들은 그를 ‘개남이’라 불렀지만 ‘나는 항상 나’이고 싶어 스스로 ‘항아(恒我)’란 이름을 지었다.

5만원권 화폐에 들어간 이종상의 작품 ‘신사임당 초상’. /조선일보 DB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 평생 그 남자 품을 온 세상으로 알다가 죽어야 행복한 거야” 하시던 어머니 말씀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 봉양, 자식 부양에 온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온화한 낯빛으로 화 한번 안 내고, 팔자 타령 한 적 없는 어머니는 과연 행복하실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떠나보내면서는 몸부림쳤다.

“이대로 어찌 평생을 산단 말인가. 이 꽉 막힌 수틀이 웬 말이고, 고상연한 그림은 다 무엇이며, 금수 같은 마음으로 글은 읽어 무엇하나.”

자연대로,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삶은 죽은 삶이라 믿은 그녀는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꺼내 오른손 손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이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사임당, 신사임당(1504~1551)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바로 그녀! 그러나 작가 권지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여인의 전혀 다른 면모를 소설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로 그려낸다. 그 당당한 ‘파격’은 사임당이 남긴 시(詩) 한 수에서 시작됐다.

‘밤마다 달을 향해 비는 이 마음/살아생전 한 번 뵐 수 있기를.’ 율곡의 ‘선비행장’에 전하는 이 시를 읽고 작가는 “그녀가 이토록 그리워하는 이가 어머니가 아니라면?”이란 물음표를 던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상화 속 근엄하고 현숙한 표정이 그녀의 전부였을까요?천재 화가로 불렸던 그녀 또한 사랑하고 욕망했으며 좌절하고 신음했던 여인이자 예술가 아니었을까요?”

사임당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드라마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10월 SBS에서 방영할 예정인 ‘사임당, 빛의 일기’ 역시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는 신화 속에 묶어두지 않는다. 전통 시대 남성 지식인들이 강요했던 여성상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와 스스로를 사랑했고, 예술을 꿈꿨으며, 고뇌와 갈등으로 울고 웃었던 ‘살아 숨 쉬는 진짜 인간’으로 그려낼 예정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심사임당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하다. 왼쪽은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새로운 사임당의 모습을 보여줄 배우 이영애. 오른쪽은 최근 종영한 ´굿 와이프´에서 열연한 전도연.

5만원권 지폐 인물로 선정될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던 사임당에 대한 최근의 활발한 재해석은 ‘이 시대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굿 와이프’에 30~40대 여성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법연수원을 수석 졸업했지만 남편 출세를 위해 15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한 주인공 전도연이 뒤늦게 자신의 삶과 사랑에 눈떠 그 길로 당당하게 걸어간다는 줄거리다. 사랑과 헌신이 더 이상 ‘21세기 굿 와이프’의 절대 덕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 키우고 돈도 벌어야“
수퍼우먼이 굿 와이프?

당신도 굿 와이프인가요


 

드라마 굿와이프의 전도연. /CJ E&M 제공

야심찬 검사 남편은 아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요구했다. 자신이 저지른 교통사고도 아내의 과실로 넘겼고, 외도와 비리로 추락하는 순간에도 아내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너만 눈감아주면 우리 아이들, 가족의 미래는 다시 탄탄대로가 될 거야.” 사랑과 헌신만이 행복의 비결이 아니라는 걸, 아내는 생업 전선에 뛰어들고 나서야 깨닫는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기 전 나의 삶, 나의 능력, 나의 행복을 추구했어야 한다는 걸 결혼 15년 만에 알았다. 사랑이냐, 가정이냐 기로에 선 아내는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살기로 결심한다. 사랑은 사랑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지키는 묘안을 짜낸 그녀는 악녀(惡女)인지, 선녀(善女)인지 모를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당신도 굿 와이프인가요?”


“아내의 맞바람 통쾌했다!”

“헌신만 하면 헌신짝…
자신의 행복 위한 맞바람 이해한다”

남편은 자기 ‘팬’을,
아내는 자기 ‘편’

바란다는 점 명심을

최근 화제 속에 종영한 드라마 ‘굿 와이프’는 30~50대 부부 사이 설전을 벌이게 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온라인쇼핑몰업체에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는 전미선(가명·38)씨는 “한마디로 통쾌했다”고 말했다. “전도연이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포기하고 남편을 위해 그저 참고 살았다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거든요. 뒤늦게라도 자기 삶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과 사랑이 깨진 지 오래라면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새로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학생 아이를 둔 출판사 대표 김동연(50)씨는 조금 달랐다. “남편이 잘못했지만 부부라는 게 서로의 허물을 덮고 용서해가면서 돈독해지는 것 아닌가요? 진심으로 가정과 자식을 지킬 생각이었다면 아내가 맞바람을 피워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테이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더 테이블이 20~60대 성인 남녀 200명에게 ‘굿와이프 주인공 전도연(김혜경 변호사)은 좋은 아내인가?’ 묻자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10명 중 6명이 “좋은 아내라곤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과 사랑을 찾아 떠난 전도연을 이해할 수 있다”(62.5%)고 답했다. 또 10명 중 2명은 “좋은 아내다”(20%)라고 단정했고, “나쁜 아내다. 가정을 끝까지 지켰어야 한다”는 응답은 3%에 불과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정성우(34)씨 역시 “잘한 결정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라며 지지했다.

자식 잘 키우는 아내가 최고?

그렇다면 ‘좋은 아내’의 기준은 뭘까. 10명 중 6명이 ‘자녀를 똑똑하고 건강하게 잘 키우는 아내’(61%·복수응답)를 압도적인 1위로 꼽았다. 2위는 “능력이 있어 돈 잘 버는 아내”(26%)였고, 다음이 “시댁 식구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아내”(20%)였다. 밥 잘하고 살림 알뜰하게 하는 고전적인 아내는 17.5%에 그쳤다.

‘좋은 아내, 하면 떠오르는 유명인은 누구?’라는 질문엔 “사랑과 자애로 아이들 잘 키우는 정혜영”(52%·복수 응답)이 가장 많았고, “일과 가정을 양립하며 돈도 잘 버는 수퍼우먼 김희애”(39%), “신사임당처럼 지혜롭고 아름다운 이영애”(25.5%), “쿨하면서도 자기주장은 합리적으로 하는 김남주”(21.5%) 순으로 꼽혔다. ‘국민엄마’로 불릴 만큼 남편과 자식에 헌신적인 배역을 도맡아온 고두심은 9.5%에 그쳤다.

40대와 60대 여성은 돈 잘 버는 김희애를 최고의 아내로 꼽은 점, 30~40대 남성들까지 돈 벌어오는 능력자 아내를 좋은 아내로 꼽은 점은 세태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진형(43)씨는 “요즘 ‘최고의 내조는 맞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보기엔 없었지만 일부 20~30대 싱글 여성들은 소유진과 박지윤처럼 야무지게 살림도 잘하고 자기 커리어도 가진 여성들을 ‘좋은 아내’ 상으로 꼽았다. 잡지사에 다니는 5년차 기자 이연주(30)씨는 “살림하고 요리하는 걸 즐기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남편 기 살려주고 아이들 도시락도 예쁘게 싸주면서 틈틈이 자기 일까지 야무지게 해내는 그녀들이 진짜 고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21세기 新현모양처는 존재할까?

‘굿 와이프’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 요즘, 베테랑 호텔리어였다가 하우스와이프로 돌아온 이주희씨가 앞치마를 맨 채 두 딸과 오붓한 오후를 즐기고 있다. 그녀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1년간 육아휴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종합하면, 신사임당처럼 자식 교육에 성공하면서도 돈도 벌어오는 능력자 아내를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좋은 아내’로 꼽았다. 대학입시가 여전히 출세의 향방을 좌우하고, 나라 경제는 점점 어려워져 앞날이 불투명한 한국 사회 세태를 반영했다. 그렇다고 남편들이 고전적인 아내상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회계사 이우창(42)씨는 “아내가 날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하기를 원하진 않는다”면서도 “아침에 따뜻한 밥을 지어줄 때, 퇴근하고 오면 ‘수고했어요’라고 말해줄 때 좋은 아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성우진(38)씨 역시 “자식만 잘 키워주면 남편 기는 저절로 산다”면서도 “회사 일로 힘들어할 때 ‘당당하게 사표 써’라며 기 살려주는 아내가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결국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은 ‘수퍼우먼’을 원하고, 이는 부부 갈등의 끝없는 원인이 된다. 자식도 잘 키우고, 돈도 잘 벌고, 남편 기도 살려주는 아내가 몇이나 될까?

이남옥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은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무엇이냐엔 정답이 없다”며 “드라마 ‘굿와이프’처럼 착하고 희생적이기만 한 아내가 오히려 나쁜 남편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부부 사이 센스 있는 대화 11가지’ 저자 김규현씨는 “좋은 부부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면서 “남편은 아내가 자기의 ‘팬’이 되어주길 바라고, 아내는 남편이 자기의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걸 잊지 말라”고 말했다.


惡妻는 남편이 만든다… 추석때 칭찬하세요

‘좋은 아내가 되라’는 주위의 압력은 명절에 특히 심해진다. 이남옥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은 “세태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며느리는 일손, 아들은 주인, 딸은 손님이란 인식이 여전히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배려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쁜 남편이 나쁜 아내를 만들죠. ‘1년에 두 번밖에 없는 명절인데 왜 이리 불평, 불만이야?’라고 할 게 아니라 ‘명절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나도 알아’ 위로해주세요.” ‘부부 사이 센스 있는 대화 11가지’의 저자 김규현씨는 “명절을 앞둔 아내는 고 3 수험생과 비슷한 심리를 지닌다”면서 “‘힘들었을 텐데 내색 안 하고 잘 치러줘서 고마워’라는 말로 위로하라. 아내는 남편만큼은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부부 사이 금실을 돈독히 해주는 대화 팁.

●칭찬부터 하라. 구체적으로 하라.
●화가 날 때는 그 자리를 피하라. ‘1시간 후 다시 얘기하자’는 말로 상대의 분노를 존중하고 있음을 내비치면서 피하라.
●감정과 표정(비언어)은 최대한 부드럽게, 논리는 차분하게!
●평소에 “너 아니면 누가 나를 거들떠보겠어?” 같은 말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라.
●카톡이나 문자는 짧고 강렬하게! 긴 대화는 오히려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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