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중국은 적인가, 친구인가

이강기 2016. 9. 23. 14:07

집중기획 | 중국은 적인가, 친구인가

中 막무가내 애국주의 韓 정서엔 ‘꼴통’


한국인-중국인 ‘정체성 케미’ 분석

신동아 2016년 09월호



  • “中, 국익이라면 상식, 논리도 포기”
  • ● “중화사상은 가장 극심한 국수주의”
  • ● “소수의견 냈다간 사회적 매장”
中 막무가내 애국주의 韓 정서엔 ‘꼴통’
‘이웃사촌’이라 했다. 가까운 이웃이 멀리 있는 친척보다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웃 나라끼리 관계가 늘 좋았던 사례는 정말 드물다. 이란과 이라크,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스와 터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이웃들이다. 한때 거의 한 나라나 다름없이 사이좋게 지낸 스칸디나비아 3국 정도가 예외적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지금 서로 협력하면서 유럽연합을 주도하지만 마음속엔 상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언어만 봐도 그렇다. ‘프란췌지쉐 피쉬’라는 독일어는 ‘바퀴벌레’라는 의미로 프랑스인을 비하한다. 프랑스 사람들도 독일인을 ‘돼지’라 한다.   

‘중화민족’ 입에 달고 산다

中 막무가내 애국주의 韓 정서엔 ‘꼴통’

[동아일보] 


중국에서 일의대수(一衣帶水,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관계)로 불리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고대에 중국으로부터 한자, 유교 등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져왔다. 최근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이런 심리 상태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유교문화의 전통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역사적 경험을 함께한다. 짧은 기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라이프스타일도 닮아가고 있으며, 상대 국가를 자주 찾는다. 서양인이 보기엔 생김새도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엔 다른 점도 많다. 한국인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린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다양한 찬반 의견을 웬만큼 용인한다. 특히 대통령과 정부를 마음껏 비판한다. 이념적으로 진보와 보수로 심하게 분열돼 있다. 국가와 민족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국수주의로 흐르는 것에 마냥 동조하진 않는다. 보편주의, 합리주의, 법치, 인권, 평등, 반제국주의(1국 1주권), 관용의 정신을 어느 정도 지향한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평화주의를 받아들인다.   

반면 중국에선 관변 언론매체와 사회주의 1당 독재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대체한다. 다양한 여론이 용인되지 않는다.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난은 실세계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를 분열시키지 않을 행정적 통제력을 중시한다. 중화사상은 세계에서 가장 심한 국수주의로 꼽힌다. 중국인은 집단적으로 단일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1국 1주권과는 거리가 있는 신흥대국론을 곧잘 주창하며 사드나 남중국해 문제에선 호전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정체성에서 이른바 ‘케미(화학적 궁합)’가 잘 맞다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지금 중국에선 내셔널리즘이 과도하게 분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교과서와 역사서가 ‘중화민족’ 운운한다. 한국도 단군이나 한(韓)민족을 언급하지만, 빈도에서 중국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몇몇 한국인이 남북통일을 이야기하지만, 중국인들은 아예 (타이완과의) 통일을 입에 달고 산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질리도록 ‘하나의 중국’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사드 참견 말자’ 했다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지난 7월 중국과 필리핀이 벌이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판결에서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중국 전역에선 문자 그대로 ‘극단적’ 내셔널리즘이 들끓고 있다.  

필리핀을 지원하는 미국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치킨 체인 KFC의 중국 매장은 횡액을 당했다. 분노한 중국인들이 전국 각지의 KFC 매장 앞에서 “KFC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조상 볼 면목이 없을 것”이라는 요지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매장 안으로 진입해 손님들을 둘러싸고 야유를 퍼부었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더 심하다. 미국 제품 불매, 필리핀 등 동남아 여행 보이콧 같은 국수주의 주장이 판치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을 부수는 동영상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이런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2013년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이 격화됐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성난 군중이 도요타 자동차를 부수기도 했다.  

중국인의 이런 극단적 애국주의는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다. 적지 않은 한국인은 “중국인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상식과 논리도 포기하는 것 같다. 막무가내로 나온다”고 말한다.

사드 논란에 대한 시각에도 한중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사드 배치 찬반을 비롯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진다. 한국의 일부 전문가는 사드 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글을 중국 언론에 기고했다.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국 매체들은 사드 배치를 철회하지 않으면 한국을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협박성 보도를 일삼았다. 오직 ‘사드 반대’ 논조밖에 없다. 중국인이 중국 언론에 ‘사드에 참견하지 말자’는 글을 썼다가는 당장 반역자로 매도될 분위기다. 사드에 관한 한 언론뿐만 아니라 지식인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교포 김모(47) 씨는 “속된 말로 ‘꼴통’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혀를 찼다.  

‘만고의 역적’

물론 중국에서도 현안에 대해 다수 의견과 상반된 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곧장 내셔널리즘의 거센 파도에 파묻힌다. 욕 먹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은 기본이다. 재수 없으면 감옥행이다. 심지어 간첩이라는 끔찍한 주홍글씨를 안은 채 비극적 최후를 맞기도 한다.  

사례는 무수히 많다. 주(駐)한국 대사를 지낸 L씨,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수행했다는 주북한대사관의 전직 참사관 Z씨, 신화통신 고위 간부였던 Y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중국 주류의 일원이었으나 내셔널리즘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가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 Z씨는 고위 간부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듣던 인재였으나 간첩 협의를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에 대해 중국인 변호사 반모 씨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 사회는 언로가 막혀 있다.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지 못한다. 중국 관련 국제 현안이 많이 터지는 요즘 들어서는 더 그렇다. 정부의 기본 입장이나 대중의 정서에 반하는 발언을 하면 ‘만고의 역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인들 사이에선 극단적 개인주의가 횡행한다. 배금주의, 물질주의, 출세지향주의가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다.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도 별로 없다.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인도 개인주의가 강하지만, 그래도 언론이 사회지도층의 윤리적 타락상을 적극 파헤친다. 대중이 이를 용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오히려 더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편인지 모른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 만든 주역인 마오쩌둥도 “중국인들은 ‘나’만 알지 ‘우리’를 모른다. 모래알이 그럴까 싶다”고 토로한 바 있다.  

중앙 정부는 가끔 국민 계도용 ‘젠이융웨이(見義勇爲)’라는 말을 거론한다. ‘논어’에 나오는 ‘견위수명(見危授命)’과 비슷한 의미로 ‘의로운 행동을 필요로 하는 위기상황을 보면 용감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한국엔 이렇게 행동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남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흉기에 찔려도 잘 도와주지 않는다.    

“원수 안 갚으면 사내 아니다”

중국인은 특히 인권에 대한 인식에서 한국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각종 사고로 비명횡사하는 중국인의 ‘목숨값’은 저세상으로 가기 억울할 만큼 형편없다. 중국의 사정기관에서 구타는 기본이고 고문은 옵션이다. 중국인은 경찰서나 검찰청에 가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눈물부터 흘린다는 말이 있다. 다소 과장됐지만 현실과 괴리된 얘기가 아니다.  

재판은 2심뿐이며 사형수의 장기(臟器)는 당국의 묵인 아래 적출돼 유통된다. ‘인권’은 중국에서 입에 올리기 민망한 단어다. 베이징 사회과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오종 씨는 “중국은 왕조에서 국공내전을 거쳐 사회주의로 넘어왔다. 인권 보호를 부각할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또한 중국엔 잔혹한 형벌 전통이 있다. 명나라 환관 위충현은 무려 1만 번 가까이 칼에 베이는 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과잉을 걱정해야 할 처지인데, 중국은 정당이라곤 공산당과 위성 정당 8개가 있을 뿐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라는 이름의 의회가 존재하지만 3000명 가까운 대표들은 사실상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대부분이 공산당원이다. 시진핑 주석 1인으로의 권력집중이 더 강화됐으며, 요즘은 과거엔 관행적으로 결정돼온 주석 임기를 10년에서 그 배로 늘릴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거의 100%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의 수준 역시 이 상황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매체는 공산당의 입장에 반하는 논조를 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자해행위다. 사드 배치 논란이 현안으로 떠오른 요즘 ‘런민일보’나 자매지인 ‘환추시보’가 조폭 같은 논조를 펴는 것도 다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으면 서로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양측은 동북공정이나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놓고 부딪쳤다. 이번 사드 논란은 훨씬 심각한 사안이다.  

한국에도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지만, 중국인은 복수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한 번 척을 지면 복수의 화신처럼 두고두고 괴롭힌다. ‘30년이 지나도 원수를 갚지 않으면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중국의 이런 문화를 말해준다.

감정적 자극 피해야

예상대로 중국은 군사적 행동까지 언급하고 있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해선 안 된다. 중국은 최고지도자가 결심하면 의사결정이 빠르다. 사드의 X-밴드레이더가 자국의 군사행동을 손금 들여다보듯 한다는 확신이 서면 언제든 결정을 내릴지 모른다.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더라도 한국을 압박할 여러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의 젊은 세대는 한국 문화와 잘 교감한다는 점이다. 몇몇 중국인은 “한족 정권이 한반도 정권을 별로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를 침입한 당나라는 돌궐족이,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는 몽골족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고, 한반도와 우호관계를 맺어온 송나라나 명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였다는 것이다. 

사드 문제가 원활하게 풀리려면 한중 양측이 서로를 감정적으로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사이버 세계에서 중국인이 한국인을 ‘가오리방쯔(高麗棒子, 몽둥이로 때려야 할 고려인)’로, 한국인이 중국인을 ‘짱깨’로 비하해선 안 된다. 이런 인종차별적 호칭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 한셴둥 중국정법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양측이 강(强) 대 강으로 충돌하면 곤란하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는 일도 피해야 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케미가 맞지 않다’는 점이 이번 사드 논란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케미가 맞지 않는 이웃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사드 논란 전까지 양측은 실제로 잘 지내왔다.  

입력 2016-08-23 11:07:34





집중기획 | 중국은 적인가, 친구인가

반미정서 + 사대주의 ‘적(美)의 적(中)’은 친구?

한국 진보는 왜 親中일까

  • 이종훈 | 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 ● ‘중국에 굴종해야 생존’ 논리 전파
  • ● 사회주의 국가 동경
  • ● 속으로 ‘북한 핵무기’ 지지
반미정서 + 사대주의  ‘적(美)의 적(中)’은 친구?
한국 사회의 진보세력은 친(親)중국이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논란을 거치면서 분명해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어렴풋하게나마 보수 진영이 친미국 성향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과 그 전신인 한나라당, 신한국당 출신 대통령과 대통령후보가 모두 미국을 가장 중시했다. 보수 단체가 서울시청 앞에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집회를 하는 장면도 쉽게 연상된다. ‘보수=친미’ 등식은 한국에선 거의 틀림없는 사실인지 모른다.

우리는 진보 진영이 친중국 성향일 것이라고는 쉽게 예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사드 논란을 통해 ‘진보=친중’ 등식이 확실히 성립되고 있다.

반대하지만 표 때문에…

사드 배치 찬성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억제하는 데 동의한다는 의미다. 미국과 한미 군사동맹에 대한 신뢰가 근저에 깔려 있다. 사드 배치 반대는 중국이 사드 배치에 반대하니 중국을 위해 사드 배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니 중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논리다.

사드 배치 반대는 미국보다 중국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태도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단순화한 논리이긴 하지만, 사드 배치 찬성은 친미에 가깝고, 사드 배치 반대는 친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7월 8일 사드 배치 선언 이후 이를 적극 추진하거나 지원하고 있으니 친미 성향임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야권과 진보 진영은 대체로 사드 배치에 반대하니 친미보다는 친중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사드 배치에 대해 명확한 반대 당론을 천명했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 지식인, 유명 인사들도 같은 태도를 보인다. 연예인 김제동이 사드 배치 예정지인 경북 성주에 내려가 “대통령도 외부세력”이라고 말한 게 좋은 예다.  

야권의 맹주인 더불어민주당은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의 지시에 따라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더민주당은 “국민이나 야당과 사전에 충분한 논의 없이 졸속적으로 결정하고 발표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 그러나 사드 배치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며 양다리를 걸쳤다. 이렇게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재밌다. ‘집권하기 위해서’란다. 속으론 사드 배치 반대인데, 중도 성향 유권자의 표를 얻어야 하니 적어도 외형적으론 이도저도 아닌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더민주당의 속마음이 사드 배치 반대라는 것은 쉽게 확인된다. 이 정당의 실질적 대주주인 문재인 전 대표는 개인 성명에서 “국익의 관점에서 볼 때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결정이라고 판단한다. 재검토하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사드 배치 반대를 천명한 셈이다.  

“손혜원의 뻘짓거리”

더민주당의 주류인 친노무현 그룹도 기다렸다는 듯 같은 행보를 보인다. 차기 당 대표 후보들도 모두 ‘반대’를 외친다. 추미애 의원은 페이스북에 사드 배치를 강행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올린 데 이어 야당의 반대와 국회의 동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밝혔다. 김상곤 전 혁신위원장은 아예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이 정당의 초선의원 6명이 성주를 방문해 반대시위에 참여하더니 ‘중국에 이용당할 것’이라는 청와대의 만류에도 중국 방문을 강행했다. 더민주당 원내대표가 방문 결과 보고서도 못 내게 할 정도로 성과는 미미했던 것 같다.   

문재인 전 대표의 부인 김정숙 여사의 중·고교 동창으로 대표적인 친문재인계 인사인 손혜원 의원도 이들 6명 중의 한 사람이다. 손 의원은 ‘사드 반대 10만 명’ 서명을 받아 미국에 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문 전 대표의 인재영입 1호인 표창원 의원은 “더민주당이 그동안 사드 배치 반대를 제대로 못 하고 겁쟁이가 돼 있었다”고 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더민주당 역시 실제 성향으로는 ‘사드 배치 반대 및 친중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사람의 진면목은 평상시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에 드러난다. 사드 논란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여권과 보수 진영은 친미라는, 야권과 진보 진영은 친중이라는 자신의 진면목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손혜원 의원의 10만 서명 전달 운동은 도가 지나친 ‘뻘짓거리’ 같다. 더민주당이 참고 참았던 본색을 이제야 드러내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진보는 왜 친중일까. 이런 의문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여러 지식인의 의견에 따르면, 한국의 진보가 친중인 것은 ‘반미(反美)정서와 사대(事大)주의의 결합’에 따른 산물이다.  

중국에 경도된 NL계

반미정서 + 사대주의  ‘적(美)의 적(中)’은 친구?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 8월 8일 중국 베이징대에서 베이징대 교수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의 상당수 인사는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미국을 싫어하는 성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비친다. 친노·친문계의 뿌리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이다. 1980년대 전반기 운동권과 후반기 운동권은 성격이 다르다. 후반기 운동권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좋게 보는 NL(민족해방)계열이 주도했다. 종북 논란의 주사파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성향의 운동권이 친노·친문계의 주축이 되다 보니 친노·친문계는 줄곧 종북 논란에 휩싸여왔다.   


친노·친문계는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킬 때 선거운동 실무 라인을 담당하면서 이른바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참여정부’의 산파역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 대거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사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북한의 핵 보유 논리에는 일리가 있다며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인도의 핵 보유는 용인하면서 북한은 왜 안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국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불안하다고 느끼냐며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다 해도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진보 진영은 대체로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논리를 가졌는데, 노 전 대통령도 이를 그대로 반영한 것 같다. 지금도 진보 세력은 이 논리를 자주 들먹인다.  

북한이 미국을 적으로 여기기에 북한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NL계 출신들도 미국을 적으로 여겼다. 이들 운동권은 한반도에서 몰아내야할 대상을 ‘미 제국주의자’로 규정해왔다. 이런 뿌리의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은 지금도 마음속으론 반미정서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이들의 관점에서 중국은 ‘적(미국)의 적’에 해당한다. 적의 적은 친구이니, 이들은 쉽게 중국에 경도될 수 있는 것이다.  

진보 진영의 상당수 인사들은 중국이 자신들이 젊은 시절 동경해 마지 않던 사회주의 체제 국가라는 점 때문에 친중 성향을 갖기도 한다.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이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중국과 북한 등 몇 나라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레닌에 심취한 1980년대 운동권 출신이 주축인 한국 진보 세력들은 아직도 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지 모르겠다.   

‘대국론’의 허상

반미정서 + 사대주의  ‘적(美)의 적(中)’은 친구?

7월 16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진보단체와 시민들이 집회를 가졌다. [동아일보]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이 중국의 시각을 대변하면서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논리는 ‘대국(大國)론’이다. ‘중국은 한국에 이웃한 대국이니 한국은 중국의 뜻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것을 연상시키는 사대주의의 연장선이다.

진보 진영은 “중국이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가하면 한국은 경제위기에 빠질 것이다” “중국이 무력을 사용하면 한국은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면 의외로 대중에게 잘 먹혀든다.  

이어 진보 진영은 ‘중국에 어느 정도 굴종해야 한국은 생존한다’는 논리를 전파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설령 사드 배치가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한국의 생존권 확보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하필 대국인 중국의 핵심 이익에 반하므로 한국은 당연히 중국에 양보해야 하는 것’이 된다.  

진보 진영은 한국 대중을 미국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친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공포심, 불안, 생존욕구를 교묘히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주의는 가장 봉건적이고 퇴행적인 적폐라는 점에서 진보적 가치와는 상극이다. 한국 진보 진영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있는지 모른다.

진보 진영을 비판하고 심지어 불신하는 몇몇 이론가는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이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친중 성향을 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묻는다.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은 결국 ‘북한을 이롭게 해주기 위해’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친중 성향을 보이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이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친중 성향을 보이면 한국은 남남갈등에 휩싸인다. 이것만 해도 북한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만에 하나 사드 배치 반대 여론이 드높아져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이 철회되면 이것은 북한에 결정적으로 이로운 일이 된다. 북한 핵·미사일의 효용성은 훨씬 커지고 한미 군사동맹은 크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北 돕기 위해 사드 반대?

반미정서 + 사대주의  ‘적(美)의 적(中)’은 친구?

경북 성주군 사드 배치 예정지. [공동취재단]

진보 진영 인사 상당수는 노무현의 발언에서도 확인되듯이 속으로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옹호하고 북한의 자주권을 지켜주는 데 열성인지 모른다. 이런 그들이 실제로는 북한을 도와주려는 목적에서 사드 배치 반대에 나선다고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론으로 돌아가서, 더민주당 대표 후보들은 왜 사드 배치에 반대할까. 문심(文心)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 표밭인 친노·친문계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부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민주당 지지층의 다수(65.9%)도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

많은 국민이 보수 정권 10년에 실망했다. 만약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이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이겨 집권하면, 이들은 과연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까. 친노·친문계와 진보 진영의 반미·친중 편향성이 사실이라면, 심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


                  


집중기획 | 중국은 적인가, 친구인가

“사드는 외교적 약속 수권정당은 약속 지켜야”

‘야당 야단치는 야당’ 김종인의 일갈

  • 이정훈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hoon@donga.com
  • ● 한소·한중수교로 본 강대국의 생리
  • ● “중국은 절대 북한 포기 안 해”
  • ● 퍼싱-2 배치 후 통일 이뤄낸 서독의 지혜
  • ●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 필요하다”
“사드는 외교적 약속 수권정당은 약속 지켜야”

[조영철 기자] 

지난해 김종인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되자 “결국엔 팽(烹)당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가 많았다. 그의 보수 색채가 강했기에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념적으로 맞지 않는 정당에 들어갔는데도 칩거를 비롯한 정치 투쟁을 통해 4·13총선에서 승리했다.  

퇴임을 앞둔 그의 사무실을 찾았더니 각 언론사 막내급 기자 수십 명이 진을 쳤다. 그의 일갈을 받아 적으려는 것이다. 그들을 뚫고 들어가 그를 만났다. 상의 왼쪽 깃에 태극기 배지를 단 게 눈에 띄었다. 더민주 의원이라면 노란 리본을 달아야 할 텐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기자도 캐묻고 따졌다. 그와의 대화는 결국 일문일답의 인터뷰가 아니라 토론이 돼버렸다. 이 토론에서 그가 설파한 내용은 정치(精緻)했다. 김 대표의 허락을 받고 그의 구술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정부 초기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일하다 1990년 3월 대통령 경제수석을 맡았다. 경제수석이지만 국정 전반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느 날 노 대통령에게 북방정책에 대해 물어보니 “틀은 짜였는데, 진행이 잘 안 된다”고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후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했으나 ‘대어’를 낚지 못한 것이다.

한소 정상회담 전야

나는 대통령에게 “소련, 중국 같은 거대 국가를 상대하려면 노련하고 능숙한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며 소련 붕괴의 기반을 닦은 조지 슐츠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슐츠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에 대통령에게 “대소(對蘇) 외교를 이끈 슐츠 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1990년 5월 어느 날, 내 의중을 잘 아는 슐츠 씨가 “다음 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이 스탠퍼드대 총장과 나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강연하기로 했다. 한국에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힌트를 줬다. 며칠 후 1962~1987년 주미 소련대사를 역임하고 고르비의 외교고문이 된 아나톨리 도브리닌이 비밀리에 서울로 날아왔다. 내 소개로 노 대통령을 만난 그는 “6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면 고르비를 만날 수 있다. 다만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게 조건”이라고 했다. 

또한 도브리닌은 “경제협력을 해줄 수 있는 사안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소련과의 경제협력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언론에는 엠바고를 요청해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는데, 한 매체가 이를 어기고 대통령의 미국행을 보도했다. 중인환시(衆人環視)가 된 상황에서 우리는 한소 정상회담을 기다렸다. 소련 측은 사전 보도가 된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상견례 때 고르비는 내가 준비해 간 경제협력 파일을 연필로 가리키며 “(파일이) 너무 얇다”고 농담을 던졌다. 노 대통령은 준비한 문서에 있는 말을 읽었지만, 고르비는 자신감에 넘친 듯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줄줄 풀어놓았다.  

꿈쩍 않는 베이징

한 달여가 지난 7월 20일 소련 측이 “8월 2일 모스크바에서 경협회담을 하자”면서 “외교관은 오지 말고 경제 관계자만 와달라”고 통지해왔다. 내가 회담 준비에 들어가자 외교부는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슈퍼파워 대응방안’ 등의 자료를 만들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양국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제협력을 시작한 후 수교하는 것으로 합의했으나 나는 유리 마슬류코프 부총리에게 “수교 후에 경협을 해야 한다”면서 “양 국민이 서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끼리 무슨 돈거래를 하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경협은 2차 서울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킬 것을 약속한다. 한국이 슈퍼파워인 소련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부연한 후 고르비의 답을 받아와서 회담을 계속하자고 버텼다. 다음 날 마슬류코프는 ‘한소 수교를 경협보다 먼저 해도 좋다’는 고르비의 답을 갖고 회담장에 나타났다. 그해 9월 말 양국은 뉴욕에서 수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고 나서 전력을 기울인 것이 중국과의 수교인데, 베이징은 꿈쩍하지 않았다. 훗날 정부 고위관료를 지낸 인사를 비롯해 국내 경제학자 몇몇이 수교 전 중국을 방문해 ‘한국 경제개발 모델을 설명했다’며 한중 수교의 가교 노릇을 한 것으로 자임한다. 하지만 중국은 그들 때문에 한국과 수교한 게 아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선택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싱가포르를 벤치마크로 삼고자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리콴유는 덩샤오핑에게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민주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해도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준 것이다. 

그 후 중국은 암암리에 박정희 모델을 연구하며 개혁·개방을 추진해 성공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기에 추가할 것이 있는지, 한국 경제학자들을 초청해 의견을 들어본 것이다. 중국에 박정희 모델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기에 1992년 중국이 한국의 경제개발을 배우기 위해 한국과 수교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끝까지 북한 배려한 중국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직후 노 대통령이 나를 불러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鄧樸方)이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을 초청했는데, 그 일행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에 다녀오라”며 “나와 비서실장만 알고 있겠다”고 했다. 나는 ‘중국이 나를 지명한 것은 내가 한소수교에 깊이 관련된 것을 알고 수교 과정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베이징에서 나는 덩샤오핑과 함께 원로회의 멤버로 경제 문제를 주로 담당해온 보이보(薄一波)를 만나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한국이 중국에 접근하는 방식은 베이징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쳐도 비는 내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베이징은 건조한 지역이라 천둥 번개가 쳐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가 많다).

급하게 추진해서는 한중수교가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국이 잘 살게 됐다고 중국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들렸다. 보이보는 중국과 북한이 혈맹관계임도 강조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노 대통령에게 “한중수교를 서둘지 말자”면서 “당분간 냉각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 이뤄졌다. 퇴임이 가까워진 노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북방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덩샤오핑과 장쩌민(江澤民)이 결심하지 않으면 한중수교는 불가능했는데, 두 사람에게 노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슐츠 전 장관이 덩샤오핑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들렀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슐츠와의 면담에서 “중국과의 수교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슐츠는 “그러면 대만은요?” 하고 물었다. 노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한 다른 나라들처럼 단교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슐츠는 내게 전화를 걸어 “오는 11월 서울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외무장관 회담을 하죠? 그때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선물을 들고 갈 거요”라고 했다. 11월 서울에 온 첸지천은 노 대통령 단독 면담을 요청하더니 노 대통령에게 “한중수교 실무회담을 해도 좋다”고 했다. 중국은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으니 한국과 수교해도 북한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그렇듯 중국은 북한을 의식하고 자극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 했다. 1992년 봄부터 실무회담에 나서 같은 해 8월 중국과 대사급 수교를 맺었다. 

강대국의 생리

“사드는 외교적 약속 수권정당은 약속 지켜야”

김종인 의원은 “사드 배치는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조영철 기자]

내가 한소·한중수교 뒷이야기를 처음으로 밝힌 까닭은 강대국의 생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강대국의 생리를 알아야 그들을 상대로 외교를 할 수 있다. 그들은 국익에 도움이 되거나 명분이 있어야 움직인다.  

한중수교 24년이 지난 지금 양국 간 교역은 2274억 달러에 달한다(2015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한국은 중국의 네 번째 무역국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중국을 잘 다루려면 그들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꿰뚫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자신을 환대해주니 중국을 너무 우호적으로 본 것 같다. 중국이 립서비스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는 것과 그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해 제재에 동참했으나 외교·안보상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중국의 속내를 읽으려면 그들의 전략이 드러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은 일본을 어떻게 항복시킬지 고민했다. 그러다 주목한 게 만주국에 주둔한 100여만 명의 일본 관동군이다. 관동군은 노몬한 사건 등을 통해 소련 극동군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1941년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 때문에 소련군과 전투를 하지 않아 전력(戰力)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미국은 관동군이 일본 본토로 옮겨와 방어선을 치면 일본을 항복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소련에 관동군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꾀가 많은 스탈린은 일·소 중립조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자,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극동군을 만주로 진입시켜 항복한 관동군을 무장해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소련은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를 체포해 하바롭스크에 수감하고 관동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는 옌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군에 몰래 공급했다. 스탈린은 이 무기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밀어붙여 북중국을 차지할 것을 기대했다.

러·中에 꼭 필요한 북한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켜야 장차 중국을 다루기 쉽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毛澤東)은 운이 좋았는지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대륙에서 밀어내고 통일을 이뤘다(1949).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거만하고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련은 이런 중국을 견제하려면 만주국을 부활시키는 게 낫다고 보고, 1950년 푸이를 석방해 중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속셈을 간파하고 돌아온 푸이를 체포해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했다. 푸이를 중심으로 만주족이 세력을 모을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마지막 방법으로 스탈린이 선택한 것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전쟁을 도발케 하는 것이었다. 유엔은 미국의 주도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사상 최초로 유엔군을 결성했는데, 이는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진하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게 했다. 스탈린의 기대대로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기회를 잡은 것이다. 6·25전쟁에서 중국군 36만여 명이 희생됐으나 중국은 힘을 잃거나 분열되지 않았다. 당시 위구르와 티베트 등의 독립 노력은 미약했고, 확전을 두려워한 미국은 대만의 반격을 억제했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는 터라 나는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때 중국이나 러시아가 가장 먼저 접수해야 할 지역이 북한일 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장악해야 바다를 활용해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러시아가 북한을 차지하면 베이징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핵무장을 해도 절대 북한을 괄시하지 않는다.

이런 속셈을 가진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 같은 환경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외교·안보를 정말 잘해야 한다. 외교·안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기에 전문가들이 책임지고 해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드 배치를 놓고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잘못됐다.

사드 배치는 외교적 약속

한국엔 정말로 노련하고 똑똑한 외교장관이 필요하다. 통일, 통일 하는데, 통일한국이 친미국가로 있으면 중국이 좋아할까. 반대로 통일한국이 친중 노선을 걸으면 미국이 발끈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그런 불편을 초래할 수 있는 통일에 찬성하지 않는다. 중국과 미국을 아우르는 노련하고 똑똑한 외교장관이 있어야 우리는 통일을 할 수 있다.

사드 배치는 한국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이뤄진 ‘약속’이다. 국내 문제가 아닌 외국과의 ‘약속이므로 우리 정부는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국을 상대로 이러한 약속’을 놓고 국내에서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다. 약속을 어기면 우리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수권(受權) 정당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경솔해선 안 된다.

우리는 중국과 미국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중국은 ‘피를 나눈 너희도 못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풀지 못한 우리 문제를 외부인 중국이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중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그러한 중국을 다룰 수 있는 친구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반미를 외치면 많은 국민이 지지할 것으로 보는 정치인이 적지 않은데, 일본의 변신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패전의 역사를 지닌 일본 엘리트들은 가슴 깊은 곳에 반미를 하고픈 욕망이 숨어 있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세계 최고를 구가하자 일본에서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는 등 반미 정서가 노골화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에 환율 조작국 시비를 걸어 일본 경제를 일거에 멈춰 세웠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략을 제대로 수정하지 않다가 중국이 G2로 부상하는 위기를 맞았다. 중국은 팽창 의지를 내비치며 아시아를 냉전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한 때 아베 신조 총리가 나타나 반중(反中)을 위한 친미를 선택하자, 비로소 미국은 환율 문제 등을 풀어줬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아베노믹스’인데 잃어버린 20년이 너무 길었던 데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겹쳐 일본은 불황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을 보며 우리의 대미 외교를 점검해야 한다. 

나는 독일에서 공부했으니 독일의 사례도 들어보겠다. 1972년 미·중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러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미국과 협의해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 

그 바람에 미국과 소련이 진행하던 중거리핵전력협정(INF)과 관련한 협상이 중단되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슈미트 정권은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퍼싱-2와 사드

박근혜 정부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사드 배치를 결정했으니 이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다. 2018년에 더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약속임을 잘 알아야 한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한국 안보와 번영의 근간인 한미동맹이 무너질 수 있다. 퍼싱-2 사태를 겪은 서독이 결국 통일을 이뤄냈듯, 사드 사태를 치른 대한민국도 얼마 후 통일을 이뤄낼 수 있다.  

현재 북한 경제는 취약한 상태이며 중국은 거듭된 성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국제정세라면 그 속에서 우리의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경제민주화’로 상징되는 조화(調和)경제를 주창한다. 민주주의가 중우(衆愚)정치로 가지 않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덕분이다. 시장경제는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런데 완전경쟁은 승자독식, 약육강식을 초래하므로 힘이 없는 이들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자유 속에서도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도 완전한 평등을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포용적 경제를 하자고 주장한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정도의 경쟁은 허용하되, 그 경쟁이 지나쳐 싸움이 일어날 정도의 자유는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까지의 자유와 경쟁은 용인하되, 그 이상은 있는 자가 내놓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프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어 독일을 통일하고 숙적 프랑스를 격파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를 독일 황제로 끌어올린 이가 비스마르크 총리다. 그는 프러시아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노련한 안목으로 국제정치를 주물렀다. 그가 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황태자가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한다”고 고해바쳤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그가 나보다 더 잘하니 놔두자”며 기다려줬다. 그의 안목이 독일 통일과 독일의 영광을 만들었다. 

지금 독일이 잘나가는 것은 2차대전 후 독일 체제를 만든 콘라드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덕분이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 밑에서 경제담당 장관을 지냈는데,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나빴다. “에르하르트를 자르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아데나워는 “그가 경제를 잘 운영하고 국민이 그를 원하는데 어쩌겠나…”라며 기다렸다. 덕분에 전후 독일 경제는 부흥했고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의 후임 총리가 됐다. 사람들은 에르하르트가 무소속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기민당의 아데나워는 당적(黨籍)이 아니라 능력을 보고 에르하르트를 선택한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안목이 이래서 중요하다. 

수권정당 되려면 변해야

한반도는 평화가 아니라 휴전 상태다. 경제가 발전했다고 안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한미동맹을 잊는다면, 통일은커녕 우리의 미래도 암울해진다. 외교와 안보는 국민이나 야당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다. 외국이 상대다. 그러한 외교·안보 문제를 놓고 너무 오랜 시간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대가(大家)다. 그런 대가가 있어야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우리 더민주당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이를 알아보는 인물을 대표주자로 내놓아 국민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 나서 정립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알아야 우리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의 정치 구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치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안으로는 포용적 경제로 경제민주화를 이뤄 단합하고 밖으로는 외교를 잘해 통일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통일은 예고하고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온다. 그 기회를 혼란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 당은 외교와 경제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진 이를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