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노신(魯迅), 친일 한간문인일 가능성 십분 크다

이강기 2016. 12. 26. 21:08

   
 
미국 조선족 네트워크



[유순호, 뉴욕조선족 통신 대표, 재미 조선인 작가]


  들어가며


   ‘남방주말’(南方週末)에서는 일찍 예술가 황종영(黄宗英, 赵丹夫人)의 “내가 직접 모 택동과 나직남의 대화를 들었다”(我亲聆毛泽东与罗稷南对话)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고 전 사회적으로부터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이 문장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1957년 7월7일, 반우파운동이 방금 시작된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모 택동은 상해에서 30여명의 문교공상계인사들과 만났다. 번역가 나직남(罗稷南)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주석님, 만약 노신선생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 가요?”
  “허허, 노신 말이오? 아마도 감방에 갇혀서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쓰던지, 아니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겠지요.”
  이것이 반우파투쟁 시절, 모 택동이 노신에게 내렸던 그 유명한 평가였다.
  중국말 원문은 이러하다. (鲁迅嘛, 要么被关在牢里继续写他的,要么一句话也不说) 어찌나 놀랐던지 좌중의 지식인들은 모두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당시 상해의 지식인들이 적지 않게는 노신과 일면식을 가지고 있었거나 또는 노신과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나직남은 황종영에게 모 택동이 노신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어찌 저리도 노신의 위인 됨을 아주 잘 아는지 모르겠다며 감탄했다는 후설(後說)이 있다.



  1. 노신의 미스테리 일본 유학생활



  노신의 본명은 주수인이 아니라 주장도(周樟寿)이며, 1881년 9월 절강성의 소흥에서 태어났다. 주수인은 후에 고친 이름이다.
  노신이라는 필명은 191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1살 때인 1902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던 노신은, 당시 일본에서 아무런 가정적 경제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또 다른 돈 버는 재간도 없었으면서 일본인 하녀까지 고용하여 집안 일을 시키면서 유족하게 살았다는, 노신 본인의 회고담이 전해지고 있다.
  요즘의 시체말대로라면 ‘거액의 재산 來路不明罪’에 해당하는 셈이다. 노신의 동생 주건인은 형 노신이 어디서 돈을 구해다가 썼는지 알수가 없으며, 동생들의 학비까지도 모조리 책임지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신이 당시 유학생들속의 추근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 혁명가들과 전혀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함께 놀지않았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유학생들속에서 청나라 정부를 뒤집으려고 하는 젊은 유학생들을 감시하였고  유학생들속에서 적지 않은 밀정들을 배양하기도 하였다. 노신이 그 밀정들의 한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더욱 엄중한 것은 일본경찰들로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아가면서 그들에게 유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일을 했다는 소문들이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때 일본 정부는 청나라 정부의 요청으로 반청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불량학생들을 퇴학시키기 위하여 “청국유학생취체규칙”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는데 추근, 진천화 등이 이 규칙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의분을 참지 못한 나젊은 혁명문인 진천화(陈天华)가 칼로 자기의 배를 찌르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자 추근 등은 7. 8백여 명의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귀국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가장 앞장에서 이것을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노신과 허수상(许寿裳)이었다.
  호한민의 회고는, 만청정부의 관비유학생이었던 노신은 정부에서 우리들을 큰 인재로 키우려고 돈까지 들여가면서 공부시키고 있는데 정부를 배신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떠들다가 추근에게 “만로(满虏, 만주족, 호로)에게 투항하고, 친구를 팔아 영달을 구하며, 한족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나의 칼을 받게 될 것이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쓰고있다.
  실제로 노신을 질책하였던 추근의 원문 내용은 훨씬 더 삼엄하기를 이를 데 없다.
  원문은 이러하다. “投降满虏,卖友求荣,欺压汉人。吃我一刀!”
  이것이 바로 역사기 기록하고 있는 노신의 또 다른 모습이고, 실제의 모습이다.
  만약 지난 반세기도 넘는 시간동안 중국의 정부 관방에서 출간한 교과서와 그리고 노신에 관한 책들만을 보면 우리는 얼마나 황당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2. 추근의 죽음에 쾌재를 부른 노신과 그의 소설 “약”(藥)



  정부 관방의 선전대로라면, 노신은 어려서부터 부패한 청나라 봉건통치자들에 대하여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암흑한 통치하에서 가난에 허덕이고 병마에 시달리는 자기 민족과 동포들을 의술로 구하겠다는 신념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모조리 날조에 불과하며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청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다시 또 노신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문학으로 방향을 전향하게 된 것도, 의술로써 한 두 사람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문학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 전체 중국 국민들의 병을 치유하겠다는 雄志를 품게 되었다는 것도 역시 날조였다는 것은, 노신의 동생인주건인의 직접적인 회고에서 밝혀지고 있다.
  노신은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학습 성적이 아주 나빴다.
  이런 사실들은 일본에서 공개하고 있는 사료들에서도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한바, 일본 센타이 의학전문학교 당안을 뒤져보면 노신의 학습 성적은 윤리학에 83점, 독일어와 물리, 화학은 겨우 60점을 맞았고 지노(藤野)교수가 가르쳤던 해부학은 59. 3으로 불합격이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 내 서점들에서 비록 구경하기는 힘들어도 처음 노신에 대하여 쓰고 있는 일본 학자 케이스께 나가 타(永田圭介)교수의 "추근 — 경웅녀협전"(秋瑾 — 竞雄女侠传)과 같은 책을 별로 규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중국 국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일본학자 가다오가 마시코(冈正子)의 “鲁迅 — 在日本这个异文化的国度中”이라는 책도 얼마던지 구해서 읽을 수가 있는데, 당시 자비 유학생이었던 추근과 만청정부의 관비 유학생이었던 노신의 사이에 얼마나 깊은 사상의 갈등이 존재하여 있었는지는, 일본의 중국유학생들이 거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여협객이었던 추근에게 비해 노신은 언제나 안일하고 명철보신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깍쟁이로 소문났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홍콩의 “봉화위성”에서 제작한 학자 호적(胡適)에 관한 다큐멘터에서도, 당시 북경대학에서 재직하였던 사람들의 입을 빌어 노신이 얼마나 돈에 집착하는 깍쟁이었던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적은 학생들이 와서 돈을 뀌어달라고 하면 1백원이고 2백원이고 한번도 거절 한 때가 없이 쉽게 뀌어주군 했고, 한번도 그것을 되받으려고 하지않았는데 노신은 단 돈 1원이나 5십전을 뀌어주었다가도 기한내에 돌려주지 않으면 편지를 보내거나 만나면 인상을 쓰면서 화를 벌컥벌컥 내군 했다는 일화들로 유명하다.
  누구던 노신을 건드리고 노신에게 불쾌한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글로써 보복을 했는데, 노신의 유명한 소설 “약”(藥)이 바로 그중의 한 편이다. 이 소설에 대하여 과거 정부 관방의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간략하면 이렇다.
  “노신의 이 소설은 다방집 주인이었던 화로전부부가 아들 소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피에 절은 만두를 사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혁명을 진압하고 인민들을 우롱하였던 봉건통치계급의 죄행을 폭로하였으며 혁명자 하유영의 영용 불굴의 혁명정신을 노래하였다”
  여기서 하유영의 원형인물은 바로 추근이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중국 문학비평계의 권위적인 학자들이 이 소설에 대하여 내리고 있는 평가는 과거 교과서의 평가와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 노신의 이 소설이야말로 1907년 7월15일 만청정부를 뒤집는 활동에 종사하다가 불행하게도 체포되어 절강성의 소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던 추근에 대하여, 그의 죽음에 쾌재를 부르고 그를 죽인 만청정부에 대항하는 짓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항거를 해봐야 당시 중국의 민중들이 얼마만큼이나 무지하고 무능하며 미개한가를 보여주기 위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다방집 주인 부부인 화로전(华老栓)과 하 씨네 셋째 할아버지(夏三爷), 그리고 형장에 몰려들었던 구경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추악한 군상들에게다가 노신은 성씨를 달 때 전부 중화(中華)라는 화(華)자, 또는 화하(華夏)라는 하(夏)자를 가져다가 달아붙여주었던 것과 달리  "건강’"健康),  "강태"(康泰)와 같은 이름자들은 전부 혁명자를 죽이고 있는 회자수에게다 쓰고있고, 나아가 중화민족의 전통 미덕을 상징하는 “인”(仁)자,  “의”(義)자와 같은 글자가 들어있는 이름들은 전부 만청 정부 감옥의 옥졸들에게다가 쓰고 있다.
  노신을 비판하고 있는 학자들은, 노신이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하여 만청 정부를 뒤집어엎기 위하여 손중산을 필두로 하는 중국의 나젊은 근대혁명가들이 한창 궐기하고 있었던 시대를 가리켜 중화민족은 구제가 불가능한 민족으로 매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 원한과 폭란을 조장하는 나쁜 문장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



  결국 1949년 이후 모 택동에 의해 근대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높이 받들리면서 지난 반세기동안 중국의 중소학교 교과서를 독점하다시피 등재되어 중국의 청소년들을 부식하였던 “약”과 같은 이런 나쁜 소설들이 드디어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맞고야 만 것이다.
  “약”에 못지않게 몇 세대의 나어린 청소년들을 나쁘게, 틀리게 오도한 노신의 문장들 속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 바로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이다.
  이 문장도, 지금 놓고 보면 정부관방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입에 담기가 아주 부끄러운 입지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 화진이라는 젊은 북경사범대학교 학생을 살해하였던 당시의 정부는 바로 북양군벌 단 기서가 최고집정자로 있었던 시대인데,  이 단기서가 요즘은 아주 괜찮고 멋진 사람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 화진 등 젊은 대학생 40여명이 살해 당했던 1926년 3월 18일에 발생한 "3. 18 참안"도 단 기서는 정부 청사 대문을 지키고 있었던 군경들에게 학생들을 향하여 총을 쏘라고 지시한 적이 근본 없었다. 이는 시위대의 배후에서 이 대소 등 공산당인 들이 학생들에게 직접 몽둥이나 혹은 철근 같은 무기를 들고 직접 군경들의 총을 빼앗으라고 사촉한 탓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사료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示威者有人执带铁钉的棍子并抢士兵的枪,《临时执政令》则称游行者“闯袭国务院,拨灌大油,抛掷炸弹,手枪木棍,丛击军警。各军警因正当防卫,以致互有死伤。”当场死亡47人、伤200多人,包括两名便衣警察、一名卫兵在内。死者中为人们所熟知的有北京女子师范大学学生刘和珍,李大钊和陈乔年也负伤."

  이 사건 발생 뒤에 우리는 단 기서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알게 되면 입이 벌어진다. 단기서 본인이 직접 참안 현장에 달려와 무릎을 끊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일로 당시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 전원이 사퇴하였고 그 이후로 평생 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던 단 기서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까지 북경성 안팎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노신이 단 기서정부의 치하에서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를 쓸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에는 단기서정부가 그동안 정부 관방에서 선전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정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중국의 군인들 속에서도 북양출신의 군인(관방에서는 줄곧 북양군벌로 호칭함) 정치가들 속에는 멋진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일부는 중국의 역사에 마멸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운 공신으로 사책에 기재되기도 하는데, 그 첫째가는 인물에 바로 단 기서가 있다.
  단 기서는 “장훈 복벽”을 막아낸 중국 역사상의 뛰어난 군인 정치가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민국시절 중국 정부의 최고 집정자로 있을 때 바로 유 화진 등 대학생들이 살해당한 참안이 발생했지만 오늘의 역사가들이 함부로 단 기서에게다가 죄를 묻지 못하는 원인이 있다. 첫 째는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던 적이 없고, 둘째는 정부 청사 대문을 지키던 군경들의 오발사고로 학생들이 죽게 되자 내각전원이 책임지고 사퇴한 것과 셋째는, 정부의 최고집정자였던 단기서 본인이 직접 수난자들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석고대죄를 한 것은 오늘과 같은 21세기의 발전한 민주국가들에서까지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 모범적인 처사였다.
  더구나 단기서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시위 결사의 자유를 백프로 허락하고 있었던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단 기서정부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노신의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와 같은 문장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단기서정부의 그와 같은 덕분 때문이었다.
  우리는 단기서 이후의 국민당의 중화민국과 모 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단 한 사람의 단 기서같은 국무총리를 구경할 수가 없음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럽기를 그지없다.
  1989년의 6. 4동란까지 겪어오면서 우리의 당과 정부는 시위대 배후에서 손에 흉기나 또는 무장을 들고 군경에게 대들도록 사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일률로 흉악한 테러범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니던가.
  "3. 18참안"도 따져놓고보면 바로 이 대소 등 공산당인 들이 군경들의 무장을 빼앗으라고 사촉한데서 일어난 불상사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지난 1979년 10월29일에 인민일보(人民日报)에서 발표되었던 이 대소의 아들 이 보화의 회고문장(回忆父亲李大钊的一些革命活动)에서도 증명된바 있다.
  분명하게 평화적인 시위에서 시작하여 평화적인 시위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학생들이 살해당하게끔 만든 것은 이 시위대의 배후에서 평화적인 시위행동을 폭란으로 만들어놓은 이 대소 등 사람들의 책임져야 할 몫이었다.
  관방에서 발행한 ‘문사자료선편’(文史资料选编) 제28집 ‘야마모도의원과 노신’(山本医院和鲁迅, 참안이 발생한 뒤 노신은 바로 이 야마모도의원으로 몸을 피신했고, 여기서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를 썼다.)이라는 사료에는 이 참안의 실책이 이 대소 등 북경의 공산당인 들에게 직접적으로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문제추궁하고 비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노신이  “유 화진군을 기념하여”라는 그 문장에서처럼 단기서를 비난하고 매도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데모를 조직하고 데모대로 하여금 무장을 한 군경들에게 맨손으로 달려들어 무장을 탈취하라고 사촉한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유 화진 등 죄 없는 순수한 젊은 대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 아니냐고 도리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 문장의 마감 결미에서 노신이 내뱉은 유명한 구절이다.
  "침묵 속에서 폭발하지 않으면 침묵 속에서 멸망하리라." (原文: 沉默呵,沉默呵!不在沉默中爆发,就在沉默中灭亡.)
  이것이야말로 모두 일떠나 정부와 싸우라는 호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런 호소가 그렇게 불안하고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두말이면 잔소리다. 참안을 일으켜놓은 실제 장본인이 누군데, 그 장본인의 과실에 대한 추구는 한마디도 없고 다만 정부가 학생들에게 총을 쏘았으니 이런 정부를 뒤집어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제정신이 바로 박혀있는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은 여기서 멈추겠다.



  4. 일본간첩 우찌야마 간조와 함께 보냈던 밀월의 시간들



  다시 돌아가,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 동경에서 보냈던 노신의 생활은 상당하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잠깐 언급한바 있다. 노신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그러나 그는 아주 풍족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둘째 동생의 학비까지도 모조리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셋집에 일본인 하녀까지 고용하고 함께 살았다는 노신 본인의 친필 일기를 읽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노신의 돈은 어디서 온 것일까? 누가 준 것일까?”
  노신에 대하여 다시 연구하고 있는 비판론자들은 과거 레닌이 짜리 러시아와 싸우기 위하여 독일 황제의 돈을 받아가면서 독일정부의 간첩노릇을 하였던 사례와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던 주은래가 공산국제당의 책임자 지미트로프로부터 돈을 받고 밀정노릇을 하면서 프랑스의 중국인 유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군 하였던 사례를 예로 들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학생들 속에는 자국정부의 대사관이나 또는 당지의 특무기관, 혹은 경찰들로부터 생활비를 보조받으면서 유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노신이 동경을 떠나 상해로 돌아온 뒤인 1932년 1월28일 "송호 항전"(淞沪抗战)이 폭발하자, 노신이 일본군의 포격을 피해 급기야 옮겨갔던 피신처는 바로 일본 특무기관의 비밀거점의 하나였던 상해의 우찌야마 서점이었다.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서점주인 우찌야마 간조(内山完造)와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었거나 아니면 일본 특무기관으로부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노신에게 제공되어 있었던 피신처나 다를 바 없었다.      
  지난 반세기동안 정부 관방에서 만들어 발행하였던 중소학교 교과서는 물론하고 모든 노신과 관련한 이야기책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인 벗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우찌야마 간조였다. 일본이 투항하고 다시 중국과 일본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우찌야마 간조는 중국 정부 관방에서 가장 반가운 일본인 우호인사로 둔갑하게 되지만, 국가 정보부문에서는 우찌야마가 상해에서 서점을 운영하면서 명색은 버젓이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듯이 위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정보를 절취하고 한간들을 포섭하는 일을 전문 해왔다는 사실을 언녕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노신도 우찌야마가 일본 특무기관의 간첩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노신의 문장 "위자위서 - 후기"(伪自由书 - 后记)를 보면 노신 본인도 우찌야마가 일본 간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1934년 5월 상해의 “사회신문”(社会新闻)이 노신과 우찌야마 간조의 관계가 각별히 밀접한데 대한 의문을 제출하면서 노신을 가리켜 중국말로 “乐于作汉奸矣”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우찌야마 간조가 비단 상해의 우찌야마 서점뿐만 아니라, 남경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뒤에는 상무인서관까지 모조리 관리하고 있었고, 일본이 투항 한 뒤에는 곧바로 상해의 일본인 협회 교민수령으로 활동하게 된다.
  우찌야마가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에 수감된 자국의 전쟁 범죄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을 빼내오기 위한 활동에도 아주 열심이었던 자료들을, 우리는 노신이 위대한 사상가 문학가로 미화되고 있었던 나날에 단 한조각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노신이 작고 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살았던 우찌야마 간조의 행적을 추적했던 사람들이 남긴 증언이다. 불투명한 이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모든 자료들은 중국 정부 관방에 의해 철저하게 봉인(封印)되어 있었고 지난 반세기 남짓한 세월동안 아무도 그것을 함부로 관람할 수가 없었다.  
  노신과 우찌야마 간조 사이의 친일 일화들은 아주 많지만 여기서 멈추겠다.



  5.  항일지사를 일본헌병에게 팔아버린 노신의 편지  
      “트로츠키 파에게 답함”(答托洛茨基派的信)



  1915년 구라파의 열강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분망한 나날에 일본은 원세 개를 핍박하여 매국적인 “21조”를 체결하게 되었을 때, 여기에 선참으로 나서서 “조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한다.”는 사인을 남긴 사람들의 명단 속에도 노신의 큰 이름이 들어가 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이 조약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조약이었고, 이 매국조약을 혼자 사인하기가 무서웠던 원세 개는 나중에라도 죄목을 혼자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부의 공무원들이 모두 나서서 집체적으로 사인할 것을 지시했고, 사인을 거부하는 자는 바로 그길로 사표를 내라고 내리 먹였다. 이때 노신은 사표를 낼 대신에 이 매국조약에 부리나케 서명을 남기었는바 노신과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문인 진 원(陈源, 卽陈西滢)은 다음과 같이 노신을 조소하고 있다.
  “노신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노신이 사랑하는 나라야말로 일본이 아니겠소!”
  원문은 이러하다. “鲁迅爱国?他爱的是日本国吧!”
  노신의 문장들은 중국인의 국민성을 파헤치고 그의 열근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하고 조소하였으나, 그런 문장들은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내세웠던 주장들과 맞먹어들고 아주 흡사하게 어울리는 부분이 많았다.
  일본의 문화간첩들의 사촉을 받은 중국의 한간 문인들이 일본정부의 대동아공영권(大东亚共荣圈)을 노래하고 선전할 때에, 그것의 필요성의 하나로 중국인의 깨지 못한 우매함을 근거로 잡았고, 여기에 가장 앞장에서 맞장구를 쳐댄 것이 바로 지난 반세기도 넘는 세월동안 중국인들을 부식해왔던 노신의 문장들이었다.
  우찌야마 간조 같은 일본의 노회한 문화간첩들은 이런 노신의 문장들이야말로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중국인들이 실제로 확실히 깨지 못했으며 우매함의 정도가 말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는 백방으로 노신을 도와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도 노신을 비호하는 학자들은, 우연의 일치를 말한다. 자기 국민에 대한 노신의 비판은 국민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줄곧 노신의 열렬한 철두철미한 숭배자였던 나도 일본은 다만 우연하게 그것을 이용하였을 뿐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해에서 비밀리에 중경의 국민당정부를 위하여 정보수집활동을 하고 있었던 항일열사 진기창(陈其昌, 트로츠키파계열의 공산당원)의 신분을 세간에 흘려, 결국 진 기창으로하여금 일본헌병의 손에 잡혀 살해당하게 만들었던 것은, 입이 열개라도 변명이 불가능한 노신과 팽 설봉의 작품이었다. 일설에 이는 노신이 한 짓이 아니고 공산당원 팽설봉이 노신의 이름을 빌어 한 짓이라고 하지만 최근에 발굴된 자료에서 보면 노신이 사망 직전에 직접 입으로 구술하고 팽 설봉이 그것을 베꼈던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공산국제조직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던 진 기창은 사사건건 중국 공산당의 의사결정을 좌우하고 있었던 스탈린의 작법에 부동의 의견을 냈던 탓에 트로츠키파로 몰렸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적은 편지를 노신에게 몰래 보냈는데 노신이 그에게 보내는 답신을 통하여 이 사실을 세상에 공개해버린 것이었다.
  노신의 1936년 6월9일의 그 유명한 “트로츠키 파에게 보내는 답신”(答托洛茨基派)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답신이 공개간행물을 통하여 상해에서 발표될 때 주석(註釋)에다가  “이 편지는 선생(노신을 가리킴)이 구술하고  O.V가 받아 적었다”고 밝혔는데,  이  O.V가 팽설봉이었다는 호 풍(胡风)의 회고담이 사료로 발굴되었다.
  같은 공산당원으로써 팽 설봉이 사상 상의 이견 때문에 동지였던 진 기창을 일본헌병의 손을 빌어 제거하였다는 설도 아주 많으나, 어쨌든 노신의 이 “트로츠키 파에게 보내는 답신”은 노신으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의 벗으로, 혁명의 동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노신을 비판하고 있는 학자들 속에서도 이 문장은 노신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팽 설봉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만, 어쨌든 노신과 편지를 주고받곤 했던 공산당원들이 당시 여럿 되었던 상황에서 유독 진 기창에게 보내는 답신만은 세상에 공개하여버린데서, 진 기창이 일본군 헌병에게 잡혀 살해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6. 노신이 사랑했던 나라는 과연 중국일가? 아니면 일본인가?



  이와 같은 사실들 외에도, 노신은 일본정부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 살아가고 있던 한간들에 대하여 한 번도 날카로운 필봉을 날렸던 적이 없었던 대신, 노신으로부터 개니(狗)、발바리(叭儿狗)니、개다리(走狗)、물에 빠진 개(落水狗)니 하는 욕설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한간이나 매국역적이 아니었다. 예하면 장 사쇠(章士钊)、양 음유(杨荫榆)、호 적(胡适)、양  실추(梁实秋)、임 어당(林语堂)、서 지마(徐志摩)、진 원(陈源)、이 사광(李四光) 등 당시 중국의 가장 유명한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모두 노신에게 개로 몰리고, 뜯기며 얻어맞아야 했다.
  비록 노신이 일본 간첩과 친형제같이 밀접하게 지내면서 직접적으로 비호를 받고 지원받으며 살아갔던 증거들은 아주 많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일본 간첩에게 자기의 동포를 팔아먹고 대가로 돈을 받은 증거, 예하면 영수증이나 또는 돈을 받았다는 친필사인같은 것들이 발굴되었다는 소리는 아직 없어서 그나마도 숭배자들에게는 일말의 위안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만 가지고도 그동안 줄곧 정부 관방에서 올리추켜세웠던 대로 따라 믿고 推仰해왔던 노신의 진실한 모습 앞에서 경악하지 않을 사람들이 없다. 이를테면 노신이 친필로 남겼던 일기들 속에서, 일본군이 상해로 쳐들어오고 있을 때(송호항전을 가리킴) 노신은 조계 지안에서 일본 기생을 끼로 술과 담배로 밤을 지새웠던 사실과,  1936년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노신이 마지막까지 간절하게 만나고 싶어 했고, 또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중국인 동료나 문우들이 아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병든 몸을 이끌고 그동안 자기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 친구들을 방문하려 다니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에 만난 사람은 일본인 의사 지토오(须藤)는 물론 일본인 노회한 문화간첩 우찌야마 간조와 도르 테 와타루(鹿地亘)였다.
  노신을 친일 한간 문인으로 몰아가는 것 까지는, 그동안 줄곧 노신에게 빠져있었고, 또 숭배해왔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겠지만, 노신이 아주 열렬하게 친일하였던 문인이라는 사실만은 덮어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중언부언하지만, 항상 일본에게 감격하고 일본을 좋아하였던 노신은 일본군의 군함과 장갑차가 상해를 짓밟고 들어오던 1932년 제1차 “송호항전”의 기간에도 조계 지안에서 일본기생을 끼고 밤을 보냈다는 그 본인의 친필 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나, 그가 침략자 일본의 상해침공을 비판하고 규탄하는 문장을 어디에 발표했다는 기록이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 이럴 때 나온다. 만약 어디에 단 한 조각이라도 그런 문장이 있다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노신이 항일투쟁을 하고 있었던 중국 혁명가들의 편에서 일본을 비판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면, 오늘날 이렇게까지 시비와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7. 신단(神壇)에서 내려올 때가 된 노신, 당과 정부가 앞장에 서야한다



  과거 정부 관방에서 노신의 혁명성과 그가 중국공산당의 친밀한 벗이며 동지라는 사실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꾸며내었던 많은 일화들 가운데 하나로, 노신이 작가 모순(矛盾)과 함께 2만 5천리의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중국 공산당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중국의 희망”(原文:在你们身上,寄托着人类和中国的将来) 이라는 축하 전문을 보냈다는 사실도 근 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말로써, 전부가 정부 관방에서 고의적으로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들이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전보 전문의 내용은 양 상곤(杨尚昆)의 문장에서, 양 상곤이 다른 몇몇 친구들의 말을 인용하였던 것을 토 하나 바꾸지 않고 모조리 통째로 베껴낸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만청 정부의 시대로부터 일본이 중국의 침략을 진행하여 가던 1930년대 중반까지 살아오는 동안, 노신은 만청 정부를 뒤집어엎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던 추근 등 근대의 혁명가들에 대하여 모독하는 소설을 써왔고,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만든다는 명분을 내걸고 중국을 침략해 들어올 때 내세웠던 중국 국민들이 무지함, 미개함, 고로 일본이 와서 중국인들을 교육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주 고약하기를 이를 데 없는 나쁜 선전을 돕는 나쁜 문장을 가장 많이 써온 한간 문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신이  친일은 했을지언정 절대로 한간문인으로까지 갈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황 종영의 회고문장 말고라도, 주 해영(周海婴)의 “나와 노신의 70년)을 읽어봐도 그렇고 “수필”(隨筆)잡지 2008년 제1기에 발표되었던 장 서산(张绪山)의 “毛泽东棋局中的鲁迅-从“假如鲁迅还活着”라는 문장을 읽어봐도, 노신이 한간문인으로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결코 모 택동 본인이 스스로 “중국의 가장 뼈대가 굵은 사나이”라는 평가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며, 그것을 누구보다도 모 택동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노신이 살아생전에, 장차 모 택동으로부터 그 토록이나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이 떠받들 리울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자괴감(自塊感)에 빠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모 택동은 자기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경우라면 어떤 나쁜 자들이라도 그들의 나쁜 경력을 모조리 숨겨두고 얼마든지 높이 기용할 수 있는 독재자였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진짜로 반역자, 특무의 경력을 가진 강청이나 장춘교 등은 높이 기용했던 반면에 진짜 순수했던 혁명가들에게다가 거꾸로 반역자 특무의 모자를 덮어씌워 때려잡곤 했던 것은 오늘의 중국의 인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친일파 한간 문인이었을 가능성이 십분 큰 노신은 직접적으로 어느 정당에 신분이 가입되어 있은 문인은 아니지만, 그는 절대적으로 일본침략자와 싸우고 있었던 국민당이나 공산당의 편은 아니었다. 그는 백프로 중국보다 일본을 더 좋아했고 중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을 더 좋아했으며, 중국인을 미개하고 무지하고 그래서 그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대동아의 공영 권을 만들겠다는 일본군국주의 자들의 선전선동책에 백프로 호흡을 같이 했던 문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국민당의 선각자들인 추 근, 송 교인, 호 한민 등이 만청정부와 싸우고 있을 때 만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노신은 백프로 만청정부의 편이었다. 1932년 9. 18 만주사변 이후 동북의 공산당인들이 일본관동군과 싸우고 있을 때도 노신이 공산당의 항일투쟁을 지지하고 선언하는 문장이나 호소문을 발표했다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일본침략자들의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노신은 일본의 편이 아니었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들고 나오는 선언문이나 또는 부분 서명(署名)자료들에 들어가 있는 노신의 이름자들은 당시의 발기자들의 노신을 이름을 빌었던 것뿐이고 여기에 노신이 직접 참여했거나 또는 앞장에서 선도했다는 어떤 기록이나 또는 연고자들의 회고자료를 단 한편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가며
  

  나는 노신의 절대적인 철두철미한 숭배자의 한 사람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문학공부를 시작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던 나는 노신의 문장들이 중국의 학교 교과서들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중국 국내에서 한창 “노신지우기”(去魯迅化)가 시작되고 있을 때, 미국에 왔던 나는 강택민과 호금도 시대의 교육부 관계자들에게 의견이 적지 않았었다. 그 토록이나 노신에 대한 나의 숭배는 거의 맹목 적에 가까웠었다. 비록 어려서부터 노신의 문장이란 문장은 모조리 읽었었지만, 솔직히 노신의 문장이 무엇을 썻고, 무엇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내가 중학교에서 배웠던 교과서의 내용과 해석 그 수준에서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해외에 있다 보니, 중국 내에서 함부로 발행할 수 없는 많은 자료들과 만날 수 있었고, 또 중국의 정부 관방에서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신격화해왔던 노신의 또 다른 모습을 철저하게 파혜쳐놓고 있는 적지만은 않은 사료들과 만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오늘의 중국에서 노신의 문장들이 중소학교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된 원인의 하나로, 정부 관방에서도 노신에 대하여서는 알만큼은 다 알고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모 택동이 직접 치켜세우고 그 기치에 따라 당과 정부에서 반세기도 넘게 올리불어왔던 노신을 단 순간에 한칼로 잘라낼 수는 없고 하여 점진적으로 슬슬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노신의 문장들이 자라나고 있는 중국의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인 정면의 교육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어려서부터 원한을 부추기고 반란을 조장(助長)하는 부정적인 면이 더 큰 것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예하면 노신의 명언들 가운데 “물에 빠진 개는 호되게 족쳐야 한다.”는 것과 같은 주장들은 오늘날 전 세계의 인류문화가 다 함께 선호하는 인간 박애주의 정신과도 위배되고 또 따져놓고보면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유교문화와도 부합하지 않는 다.
  내가 더욱 경악(驚愕)하였던 사실은 또 있다. 노신의 연보(鲁迅年谱)에 보면, 1906년 26세였던 노신은 일본에서 유학생활 도중에 절강성 소흥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가 맺어주엇던 주안(朱安)이라고 부르는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1922년까지 노신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부부와 함께 북경의 한 사합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생 부부와 세간을 나고 갈라지게 된 원인으로, 동생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다가 발각되어 동생과 대판 멱살잡이가 일어난 사건을 다룬 이야기를 담은 문장이 ‘북경춘추’에 실린 것을 읽게 되었다.
  이것이 지난 몇해동안 내가 노신과 관련한 모든 책들과 자료들, 그리고 사책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일이 뒤져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결정적인 첫 단추가 되었던 셈이다. 나는 자기의 형에 대하여 회고한 노신의 동생 주건인(周建人)의 책과 문장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또 주건인의 말만 믿을 수 없겠다싶어 일본인들이 노신에 대하여 썼던 책들로 구할 수 있는대로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노신의 문장들과 관련되는 시대의 인물들, 예하면 단 기서, 추 근, 진 천화, 송 교인 등 사람들과 관계되는 문장들도 찾아 읽었고, 그들의 인간상,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인 문화 환경에 대하여 다시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일괄하게 노신으로부터  ‘개’로  ‘망나니’로 몰렸던 노신과 동시대에 함께 살면서 이름을 날렸던 문인들에 대해서도 읽을 때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참동안씩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조선족이 자랑하는 학자 김 문학교수를 가리켜 친일파 학자라고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나는 언제인가 기회가 닿을 때 적어도 김문학교수를 노신에게 비하면, 자기 민족과 자기 동포에 대한 김문학교수의 비판은 그래도 신사적이고 많은 경우 체면을 차린데 가 있다고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김문학교수가 어느 한편의 문장에서 노신이 굉장히 친일적이었다는 말을 했다가, 조선족 문인들 속에 전문 문장까지 써서 반발하는 것도 보았던 적이 있다. 불쌍한 우리의 중국의 조선족 문인들이 이 방면의 지식이 별로 없고 또 많은 경우 직접적인 자료들과 쉽게 만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는 너그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제라도 중국의 정부 관방에서 노신에 관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는 자료들이 있으면 다 공개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고, 그 자료들 속에는 노신이 친일 한간 문인은 결코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liushunhao@hanmail.net)



                                                                                   2014년 5월28일 서울에서




손님   - 2014/05/29 10:23:20
이런 세상에 살다살다 ㅠㅠㅠ
남정수   - 2014/05/29 10:50:29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작가님의 새문장입니다. 이렇게 충격으로 안겨올줄은 물랐습니다.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아름찹니다. 그렇다고 믿지않을수도 없군요.
남정수   - 2014/05/29 10:53:11  
어쨌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력사사실들일
이렇게 모두 거짓말이고 진실과 위배되여 있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로신까지고 진실을 베일을 벗기고보니
이런 형상으로 다시 안겨온다는것이
실감이 나지않을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로신의 문장들을 교과서에서 모조리
지우기 시작했을때는 역시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로신의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것을
감지하고 수습하기 시작한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언제가야 이치럼 확실하게 진실한 정보와 증거들을
대중들 앞에 공개하고 신단에 높이 모셔져있던
위조된 모습을 진실한 모습 그대로 환원시켜줄지
막연하게나마 기대해보지만 별로 기대도 하지는 않습니다.
진실은 어차피 이렇게 우리에게로 다가오고있으니까요.
남정수   - 2014/05/29 10:53:30  
정말 충격 그자체였습니다.
어문교사   - 2014/05/29 11:13:16
류화진군을 기념하여- 이 문장은 제가 중학교에 달닐때 어문교과서에서 아주 주요한 과목의 하나였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봐도 그렇고 또 유순호선생님의 이 칼럼문장을 읽어봐도 확실이 오늘의 사회현상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데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증오와 원한을 부축이고 키질하는 면이 었는것도 사실이고 더욱이는 력사사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분은 엄중한 문제가 아닐가요. 모르던것을 너무 많이 배우게 되여 감사합니다.
재한조선족   - 2014/05/29 11:18:04  
작가님, 작가님의 이 문장이 드디여 인터넷에 올랐네요.
작가님의 큐큐에서 먼저 읽고 혼자만 읽었다고 무척 흥분했었는데 ㅋㅋ
언제나 진실의 편에 서계시고 세상에서 무서운것이 없으신 작가님의
력사문장을 읽으면 한권의 새로운 력사교과서를 모조리 읽어버린
그런 기분이 들군합니다.
그럴때의 심정은 너무 행복하기도 하구요. 과거의 저희들이 받았던 력사교과서가
얼마나 황당하게도 많이 왜곡되여 있었고 진실은 숨겨져있었던것인지
한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재한조선족   - 2014/05/29 11:20:59  
로신이 일본에서 류학시절 보여줬던 추근과의 일화라던가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군이 상해에 침략하여 들어올때 상해의 민중들과 애국적인
학생들이 모두 전선에서 우리 군을 돕고있는데 로신은 조계지에서
일본기생을 끼고 술이나 마시면서 보냈네요 ㅠㅠ
이런 문인이 과연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였던 위대한 사상가 문학가 로신이 옳은것인가요?
이렇게 위장하여 신격화시킨 사람들이 너무 가증스럽습니다.
늦게나마 진실을 밝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던 우리 독자들에게 너무 좋은 지식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샌프란시스코   - 2014/05/29 11:26:41  
get over one's shock ...
金永艶   - 2014/05/29 11:28:52  
中华民族要复兴,必须对鲁迅的真实面有清醒认识
金永艶   - 2014/05/29 11:30:53  
毛澤東對魯迅的評價:

二十年来,这个文化新军的锋芒所向,从思想到形式(文字等)无不起了极大的革命。其声势之浩大,威力之猛烈,简直是所向无敌的。其动员之广大,超过中国任何历史时代。而鲁迅,就是这个文化新军的最伟大和最英勇的旗手。鲁迅是中国文化革命的主将,他不但是伟大的文学家,而且是伟大的思想家和伟大的革命家。鲁迅的骨头是最硬的,他没有丝毫的奴颜和媚骨,这是殖民地半殖民地人民最可宝贵的性格。鲁迅是在文化战线上,代表全民族的大多数,向着敌人冲锋陷阵的最正确、最勇敢、最坚决、最忠实、最热忱的空前的民族英雄。鲁迅的方向,就是中华民族新文化的方向。
金永艶   - 2014/05/29 11:31:58  
可以說, 鲁迅从未“唤醒百姓”,恰好完全相反。它把阴暗和剧毒强加给他的迷信者,造成文革红卫兵的疯狂。红卫兵把鲁迅奉为精神教父进行打砸抢,证实鲁迅的愚民之处。
궁금   - 2014/05/29 11:34:24
그런데 김학철옹도 생전에 로신의 숭배자였다고 하는데요?
이 문제는 어떻게 리해를 해야죠?
항일투사 작가가 친일 한간 문인일 가능성이 십분 큰 로신을 숭배하고
스스로 로신의 제자이고 학생처럼 간주했던것이 아닌가요?
유순호작가님은 어떻게 보시는지 한번 들어보고싶습니다.
효화   - 2014/05/29 12:33:51  
놀랍기도 하고 의아 하기도 한 전혀 몰랏던 로신에 관한 이야기.
단지 일본을 숭배 했던거에 지나치지 않은 ....
효화   - 2014/05/29 12:34:22  
다시 한번 읽어 보고 갑니다
분노   - 2014/05/29 12:34:39
송호항전에 관한 드라마가 최근에 많이 나왔고 상해의 대학생들이 항일하는 군인들을 도와 싸우는 장면들도 아주 많았는데 로신선생은 조계지에 숨어 일본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면서 항전을 나날들을 보냈다는 사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늦게나마 로신의 위장이 밝혀져가고 있고 중소학교 교과서들에서도 그의 독초가 사라져가고 있다니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정부는 로신을 다시 재조명하게 해야한다. 친일한간문인의 진면모를 세상에 밝혀야 한다.
효화   - 2014/05/29 12:34:55  
유작가님 역시 대답합니다
연변독자   - 2014/05/29 12:50:58  
믿을래야 믿을수도 없고... 믿지않을래야 믿지 않을수도 없고 ... 참 복잡하네요.
강송월   - 2014/05/29 13:35:08
赤裸裸的真相让人震撼,对作者肃然起敬。
강송월   - 2014/05/29 13:38:29
相信与不相信之间,仿佛还有令人沉吟的深度。
샘터   - 2014/05/29 18:28:57  
재가 이런
글 한편을 퍼왔슴다. 이 글과 같은 주장이라는 뜻에서가 아님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중국조선족에서 력사전기인물 창작을 많이 하신 분임다.
그렇지만 로신에 대하여 보는 시각을 보십쇼.
이것이 중국조선족학자들의 시각과 한계가 아니겠슴니까!
샘터   - 2014/05/29 18:29:15  
로신선생이 친일행적이라고?



이즘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김문학씨가 2013년 6월 17일 조글로 관련코너에 “로신과 리광수”란 한편의 글을 버젓히 올리였기 때문이다. 글의 시작부터가 중국의 위대한 문호 로신선생과 친일작가 춘원 리광수를 비교하면서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행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고 로골적으로 횡설수설하면서 리광수를 극력 변호하는 대신 로신선생은 그 희생양으로 끌어들이며 어벌이 크게도 친일로 몰아붙인다.

사실로 말해 필자는 한가한 틈이 없는 사람이다. 술상을 즐기는 동료들이 술상에 앉는 시간도 아까와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장소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다. 하물며 한번의 시시비비에 나서면 깊이 빠져들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니 말이다. 몇번이고 마음이 욱하다가도 눌러버리군 했는데 마음이 그토록 편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로신선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과한다는것이 도저히 지성인의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로신과 리광수”,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두편의 글만은 반론아닌 반격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딱 두편의 글만이다. 그외는 누가 뭐라해도 나서지 않을것이다. 그럴 시간과 겨를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여 둔다.

김문학씨, 당신도 인간이면 가슴에 손을 얹고 필자의 글을 정면으로 주시해 보시라, 당신이 로신선생이 자진하여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이른바 리광수씨처럼 자진하여 친일을 하는 행위를 보았는가, 아니면 그런 연구자료와 결과라도 보았단 말인가? 그런 자료라도 있다면 먼저 필자를 간략이나마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필자는 오늘까지 우리 겨레력사에 깊숙히 몸담그며 겨레력사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중국 강남땅에 잠시 삶의 무대를 옮긴 근 10년 간에도 “로신선생과 조선사람(한국사람)”, “로신선생과 조선문학(한국문학)”을 주선으로 연구하면서 중국내 로신선생이 생활한적이 있는 절강 소흥, 남경, 항주,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를 모두 현지답사하면서 로신선생의 발자취를 전면 추적하여 보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깊은 연구와 돌파로 연구저서를 준비하며 이면의 연구에서는 한국을 망라하여 중국내에서도 으뜸 계열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로신선생의 상해생활이 친일과 직결된다는 그어떤 행위도 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김문학씨의 글을 보면 로선선생을 아주 익숙히 알고있는 모양새인데 사실은 당신은 로신선생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먼저 로신선생 생평부터 들어가 보면 로신선생 인생발자취는 소흥 (1881년 9월~1898년 5월), 남경 (1898년 5월~1902년 3월), 일본 (1902년 4월~1909년 8월), 항주-소흥-남경 (1909년 8월~1912년 5월), 북경 (1912년 5월~1926년 8월), 하문 (1926년 9월~1927년 1월), 광주 (1927년 1월~1927년 9월), 상해 (1927년 10월~1936년 10월) 로 이어진다. 인생의 마지막 시절은 1927.10-1936.10 상해시절이 아니던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것 같다. 로신선생이 상해로 오기전 정착지는 이 나라 남녘땅--광주이고, 광주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것도 몇달 아니고 사직이다. 광주 먼저 하문대학 시절도 로신선생은 대학이란 직장이 자기의 바램이 아니라더니 중산대학에서도 결연히 사직하고 만다. 그러나 광주도 리상적인 삶의 자리는 아니였다. 로신선생이 보는 그 시절 광주는 “생활비가 너무 비싸고”, “볼만한 간행물이 없으며”, 글을 쓸만한 곳도 아니였다. 글을 써도 팔아먹을 수가 없으니 생활비를 벌어들일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보아낸 것이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도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옮겨져 서점만 해도 40여 집이니 상해에서 글로 살기는 문제 없을것 같았다. 이런 연유로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짐을 꾸려 가지고 1927년 9월 27일 배편으로 광주를 떠났고, 10월 3일에 상해에 이르게 되였다.

상해의 발전사를 보면, 상해는 워낙 장강삼각주에 위치한 하나의 모래불(滩头)에 지나지 않았다. 상해탄(上海滩)이라는 말은 그렇게 생겨난것 같은데 1843년 11월 상해 황포강에 부두를 앉히며 개방하며 그젯날의 자그마한 어촌은 점차 변모해 간다.그럴만치 황포강에 부두를 앉혀 반세기 남짓한 변천속에 20세기 20년대 초에 이르더니 동방의 국제성 대도시로 탈바꿈한다.

보다 적절히 말하면 20세기 20년대의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 정치의 중심이였다. 또, 20년대 후반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많고많은 지식인들이 상해로 몰리더니 30년대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중국의 문화중심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그런 시대적 물결에 휩싸여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상해에 들어섰고, 상해에 집결한 엽공초(叶公超), 문일다(闻一多), 호적(胡适), 곽말약(郭沫若), 심안빙(沈雁冰), 장광자(蒋光慈), 성방오(成仿吾), 소군(萧军), 소홍 (萧红)등 허다한 일대 문인들과 어울린다. 중국의 제1류 수준의 문화정예들이 거의 다 상해에 모이니 그들은 “어사”(语丝), “현대평론” 등 전국성 영향력을 가진 간행물을 꾸리며 그들 생평중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써내였다. 1932년 3월 2일에는 중국좌익작가련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속의 로신선생은 중국 제1류 문화정예의 한 사람이였다.

다시 로신선생의 상해이주 시절로 돌아오면 로신선생은 상해에 이른후 여러개 대학의 강연과 명류들과의 접촉속에서 상해는 진정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임을 피부를 느끼게 되였다. 광주에서 심한 문화고독감, 문화침묵감에 시달리던 로신선생으로 말하면 삶의 질적 변화였다. 상해란 이 동방대도시는 번역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로신선생에게 더없이 리상적인 생존환경이였다.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린 로신선생에게 둘도 없는 일본 벗이 생기였다. 상해에서 생활한 로신이 친일행적을 갖고있다면 일본 벗이 생겼으니 더구나 친일이 아닐까? 먼저 결론을 내리지 말자.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로신선생은 상해에 가서 사흘째 되던 날, 부근 북사천로(北四川路)의 우찌야마 서점(内山书店) 으로 책사러 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문 서적을 주로 경영하는 특색있는 서점이였다. 이에 끌린 로신선생은 1927년 10월 한달 사이만도 선후 9차나 우찌야마 서점에 가서 50여원어치 25권의 책을 사들이였다.

로신선생의 두번째 서점 출현은 서점주인--우찌야마의 주의를 끌었다. 책을 고른 후 로신선생은 쏘파에 앉아 주인의 안해가 권하는 차물을 마이면서 숙련된 일본말로 이 책을 아무아무곳에 보내달라고 청들었다.

“존함은요?”
“주수인이라고 부릅니다.”
“아, 당신이 로신선생이예요?”
우찌야마는 반겨마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과 서점주인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깊은 우정을 맺으며 로신선생의 상해 10년 생활에로 이어졌다. 서점의 위치와 주인의 댁이 로신선생의 선후 몇곳 주숙처와 가까이여서 서점은 로신선생이 사회활동과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 로신선생한테 오는 편지들도 흔히 서점을 통하여 로신선생에게로 전해지고,이 서점에서 국내외 벗들과 생면부지 혹은 특수신분의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우찌야마와 로신선생과의 우정은 서점주인의 중국과 중국사람에 대한 정감을 크게 개변시키면서 그의 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와 로신과의 10년 우정은 그로 말하면 “일생의 행복”이였다. 그후 일본으로 귀국한 우찌야마는 새중국이 세워진후 수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일중친선활동에 전력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돌 경축활동에 참석했다가 병으로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유체는 로신선생이 처음 안치되였던 상해 만국공묘에 모셔졌다. 친일행위가 아닌 실로 흔치않은 두 사람의 심후한 우정이라 하겠다.

그러면 상해 실생활속의 로신선생은 어떠했을까, 역시 력사사실 한두가지로 개략적으로 말하기로 하자.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심양에서 “9.18사변”을 일으키고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으로 아주 빨리 동북 전경을 점령하였다. “9.18사변”이 일어나 3일만에 로신선생은 “문예신문사의 물음에 대답”이란 글을 써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죄행을 적발하였다. 로신선생의 글은 욱달부 등의 짧은 글과 함께 “문예신문”이 개설한 전문란에 게재되였다.

1931년 이해 12월에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을 반대하면서 남경청원에 나섰다가 국민당 당국의 체포와 학살을 당하였다. 12월 20일에 로신선생은 저명한 “우방경타”(友邦惊詫)를 써서 25일 좌익작가련맹의 간행물 “십자가에서”(十字街头)에 발표하면서 국민당 당국의 부저항 매국정책과 애국학생운동 진압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대가 상해에서 “1.28”전쟁을 발동하면서 로신선생의 저택 맞은켠이 일본해군륙전대 사령부로 되였다. 이튿날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일본군의 수색이 시작되였다. 우찌야마는 일본점원을 급히 보내여 로신일가가 서점 2층에 급히 피하여 옹근 한주일을 지내도록 조건을 지어주었다. 서점 일대가 일본군의 전구(战区)인데서 우찌야마는 또 로신일가와 동생 주건인일가를 상해 삼마로(三马路) 영국조계지의 우찌야마서점으로 옮기여 절대적 안전을 담보하여 나섰다.

이것이 상해시절의 로신선생이고 우찌야마서점의 주인 우찌야마선생이다. 로신선생은 상해 10년 세월 내내 글로 일본침략자와 맞서 싸우고, 일본에 부저항하며 선량한 항일군민을 탄압하는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김문학씨, 오늘은 일제에 의한 "7.7"사변 76돌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어떤 날인가를 잊지 마시고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10년을 생활한 로신선생의 친일행위를 어디 말하여 보시라. 그토록 정정당당하다면 중문으로 써서 중문 신문과 잡지, 인터넷에 올리여 보시라. 당신이 며칠이나 견딜수 있을까.이 글을 더 이상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찌 자진하여 친일에 나선 친일작가 리광수를 중국의 로신선생에 비하며, 로신선생이 일본군의 통치구에서 생활하였다하여 어찌 친일행적으로 몰아가리오? 당신의 론리대로면 일본의 식민지, 반식민지 중국땅에서 생활했던 사람들, 일본의 조선총독부 철제아래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망국노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다 친일행적을 가지고 있을까. 당신은 견해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돌았도다. 이 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한 하늘아래서 의좋게 살아갈 인간이 아니도다.

2013년 7월 7일
샘터   - 2014/05/29 18:34:29  
이분의 글속에 이런 구절이 있슴다.

남들이 잘 모르는 깊은 연구와 돌파로 연구저서를 준비하며 이면의 연구에서는 한국을 망라하여 중국내에서도 으뜸 계열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로신선생의 상해생활이 친일과 직결된다는 그어떤 행위도 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로신의 친일행적은 강변의 자갈돌만큼이나 다닥다닥하게 많은데 하나도 보아내지 못했다면서
자기자신은 이 방면의 연구에서 으뜸계열에 속한다고 자부하심다.
이것이 바로 야랑자대형이 아님 무엇임까.
샘터   - 2014/05/29 18:40:20  
그러나 다른 조선족학자님의 로신에 관한 글 한편을 보면 로신이 친일파였고 아주 일본인이 되지 못하여 안타깝기라도 한것처럼 노력한 흔적들인 류학생시절에 충분하게 보아낼수 있슴다.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유학생활은 그에 있어서는 과연 생애의 황금시절이였다. 22세부터 29세의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큰 컬쳐쇼크를 받게 되고 일본적인 서구문명에 개안한다. 일본에서 그는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잘 신었는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의 중화요리집에서 중국훠투이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산적이 없다.”

“동경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마루야마 노보루 《로신》 1965년)

노신이 평생기른 수염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는 일본에서부터 기른 수염양식을 죽을때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철저하게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 하는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세계의 높이로 승화시킨다.

노신이 가장 존경한 사람 역시 일본인 스승 후지노선생이였고 평생 친구로 사귄 외우 역시 우치야마 간조였으며 아들과 자신이 수진한 의사 역시 일본인이였고 지어 그가 죽기직전 남긴 절필도 일본어였다. 그는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으며 그런 친일적경향은 모두 일본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런 성향은 그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사생활이므로 지탄 할바 못되지만 일본의 삶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다.
샘터   - 2014/05/29 18:42:56  
문장 전문은 이러함다.

방환하는 노신/김문학

중국 근대의 언어, 문학을 개척한 위대한 문호 노신이 주수인에서 노신으로 되기까지는 사실 기나긴 방황과 사색의 터널을 거쳐야 했다.

노신 년보를 보면 그가 7년간의 일본유학을 접어두고 귀국하여 항주, 절강 양급사범학당의 생리화학교원으로 되는 때가 1909년 8월 해빛 따가운 한여름이었다.

이로써 노신의 문학생애에서 긴 침묵과정을 통해 “주수인”으로부터 “노신”으로 비약하기 위한 조주단계에 들어선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노신이란 인물은 중국 근대사 그리고 일본의 근대와 떼어버릴수 없는 상관관계에서 삶을 영위해온 중국의 대표적인 국민작가일뿐만아니라 보다 보편적 의미에서 근대정신사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인물상은 간단하게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라는 장식어로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적 성격을 띤, 국경을 뛰여넘은 그는 우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갖춘 “세계인” 그것이다.

노신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도 최근들어 활발해지고 있으며 신예학자들에 의한 “노신비판”역시 예리한데 있지만 노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작가로 높이 떠받드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심도있다고 해야 할듯하다. 원노신박물관 관장이며 노신연구의 중견학자인 손욱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한적 있다.

필자가 노신을 통해서 관찰된것은 하나는 노신이 왜 일본유학을 중도 하차하고 귀국한 뒤 소침해지고 침묵을 지키며 갈팡질팡 정신적으로 방황기를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각골통한의 정념으로 중국, 중국인의 국민성의 열악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또한 시종 이것을 그의 성스러운 사명으로 삼았는가?

이런것들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도 정확히 말해서 중핵을 찌른 그 확답을 못찾고있다. 이데올로기나 혁명가 정신 차원으로 기울어져 표피화되고 또 그것은 하나의 규정짓는 고정적 틀이 되여버렸다.

그렇듯 노신은 그 깊은 속을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귀국이후의 노신의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의 장장 7년반동안 일본유학의 삶에 대해서 비교고찰하기로 하자.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유학생활은 그에 있어서는 과연 생애의 황금시절이였다. 22세부터 29세의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큰 컬쳐쇼크를 받게 되고 일본적인 서구문명에 개안한다. 일본에서 그는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잘 신었는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의 중화요리집에서 중국훠투이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산적이 없다.”

“동경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마루야마 노보루 《로신》 1965년)

노신이 평생기른 수염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는 일본에서부터 기른 수염양식을 죽을때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철저하게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 하는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세계의 높이로 승화시킨다.

노신이 가장 존경한 사람 역시 일본인 스승 후지노선생이였고 평생 친구로 사귄 외우 역시 우치야마 간조였으며 아들과 자신이 수진한 의사 역시 일본인이였고 지어 그가 죽기직전 남긴 절필도 일본어였다. 그는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으며 그런 친일적경향은 모두 일본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런 성향은 그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사생활이므로 지탄 할바 못되지만 일본의 삶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본체험을 다룬 연구를 보면 노신이 “국민성 개조”에 뜻을 두게 된것은 시초 일본에서 아스.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 비판서나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의 데모크라시 열풍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서양학설, 철학서를 로신은 많이 접했다. 노신은 중국일본유학생이 창간한 《절강조》, 《하남》 등 잡지에 《마라시력의 설》(1907년) 발표하여 유럽에 대한 중국의 갭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호소했다. 젊은 노신은 동생 주작인과 함께 외국번역소설도 내고 잡지도 창간하다가 실패하지만 그는 언설적, 문학적 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런데 귀국한뒤 노신은 “적막”과 소침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실제적으로 일본류학에서 학사나 석사, 박사따위 학위라는것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홍문학원과 센다이의학교의 학력증명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기에는 학력부족이였다.

1912년부터 1926년사이 북경정부의 교육부 과장직으로(공무원) 친구 서수당의 알선으로 취직한다. 유학시절과 대조적으로 1918년 5월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기까지 그는 거의 무명의 주수인으로 통했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을 정리하는것이 그의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국민을 각성하겠다고 센타이의학전문학교시절 결의했던 그답지 않게 그는 너무 의기소침, 방황에 자신의 신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지나 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의 비교연구 끝에 찾아낸 답안은 이러하다.

그때의 노신은 본국 동포들에 대한 “후진성”에서 무한한 절망감과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형성된 “국제인”이다. 국제인의 심중에는 언어나 복수문화체험의 기억적 장치가 있는데 상대도 그런 장치가 구비되지 못할때에는 상대에게 큰 절망과 실의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경계를 사는 “경계인”이기도 했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였다.

그가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후진된 모습은 아마도 역적인 컬쳐쇼크를 초래했을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중국을 바라보는 프리즘에는 “열등”, “후진”, “추루”, “아큐” 등 비판적인 개념과 이미지로 충만되어 있어 다른 이미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즉 일본인의 눈으로 중국인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서거 수일전에도 일본조계지에서 그는 일본 벗 우지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은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의 중국인에 대한 절망감은 국제인의 안목을 갖춘 노신자신의 큰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부각시킨 결정적 장본인이기도 했다.

김문학
감탄   - 2014/05/29 18:53:36
단기서 정말 멋진 인물이였네요. 완전 감탄입니다. 이런 정치인은 21세기 오늘에도 정치인들이 본받을데가 많은 인물인것 같습니다. 국민의 앞에 무릎을 꾾고 석고대죄하는 모습을 배워야 하지 않을가요!!!
일가견   - 2014/05/29 19:08:45
보시다싶이 력사라는 로인을 우롱해서는 안된다.
말이 없고 늙었다고 아무나 제멋대로 조작하고 위조하는 방법으로
력사의 진실을 덮어감출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리석다.
력사는 반드시 심판을 내린다.
그 심판은 잔혹하다.
장석준   - 2014/05/30 00:32:17  
충격에 또 충격을 더하는 유작가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이런 역사관련 문장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 독자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위장되고 왜곡되어 왔던
중국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 마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노신을 신단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모택동의 신화도 중국의 인민들이 스스로 깬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일본의 자료들을 보면 노신의 일본유학생활은
노신이 친일파 문인 (한간문인이었다는 견해에는 보류합니다)이었을 가능성이 아니라
백프로 친일파적인 문인이라는것을 넉넉하게 확인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로 진실을 모르고 지냈던 우리 독자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백프로 찬성입니다.
작가   - 2014/05/30 00:52:31  
우리 중국에서는 모택동에게 버금가는 또 다른 신으로써 모택동이 직접 치켜세원 신 로신을 신단에서 끌어내리는것은 시대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의의가 있는 장거라고 보고싶다.
유순호작가의 문장속에서도 지적하다싶이 원한을 조장하고 폭란을 부축이는 로신의 나쁜 문장들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오로지 정쟁을 부축이는 투쟁철학을 신조로 삼아왔던 모택동의 인생관과 어주 부합하였다. 이로써 볼때 모택동이 로신을 그토록이나 세상에 좋다는 단어는 다 써가면서 올리불었던것은 리해가 가는 일이다.
로신의 투쟁정신-이것은 듣기좋게 표현하는것이다. 사람을 공격하고 물어뜯고 모독하는 문필은 모택동의 구미에 아주 맞았던것이다. 그러나 이런것들이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국가주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호금도와 온가보의 시대에는 지극히나 불편한것들이였음은 의심할바 없는 일이다.
로신의 문장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중소학교 교과서들에서 모조리 사라지기 시작한것은 바로 호금도주석의 시대때부터였다.
작가   - 2014/05/30 01:01:17  
또한 습근평주석과 리극강총리의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중국꿈 실현을 국가주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는 때에 더욱 로신의 독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이것은 력사발전의 필연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민국시대로부터 모든 문인 재사들이 모택동의 횡포와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정책하에서 모조리 스러지고 사라져버렸지만 유일하게 신처럼 받들리워 존속해왔던 로신이라는 이 신도 드디여 력사의 쓰레기속으로 버림받게 되는 운명에 처하여 지게 되였다고 본다.
로신과 비슷한 의미의 또 한 사람의 신 뢰봉 역시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이 두 신은 모두 모택동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이다.
그런데 로신보다도 뢰봉은 순진한데가 있다. 그것은 뢰봉은 중화민족에게 끼친 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신은 다르다. 그는 일괄하게 우리 중화민족을 헐뜯고 모욕하여왔으나 그것을 모택동은 중국민족의 우매한 렬근성을 파헤친것으로 보며 그의 기저에는 중국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있었다고 변호해주었다.
그런데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로신은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민족을 사랑하였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일본화되였고 일본을 숭상하며 일본의 애오라지 일본인으로 태여나지 못한것을 안타까워하듯이 행동해왔던 철저한 친일 문인이였다.
그에게 한간문인이라는 명사가 따라붙는것도 무리가 아니며 원인이 있다.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올때 그 침략의 선전전동정책에 보조를 맞췄기때문이였다.
일본이 욕하고 싶어하는 중국인을 로신이 모조리 대신해서 욕해주었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리유와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의 필요성을 로신이 제일 앞장에서 선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작가   - 2014/05/30 01:07:38  
로신을 버릴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속에 민국시절로부터 전해오고 있는 로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였던 대학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모두 로신 한사람만을 살려서 치켜세우고 있었던 독재자 모택동으로부터 공격당하고 기시를 받았던 인물들이였다.
더도 말고 모택동 본인이 젊었던 시절에 그토록 열렬하게 숭배하고 높이 모셨던 호적같은 학자 한사람만 례로 들어보아도 좋다.
어떻게되여 호적같은 대가들의 학문적 사상은 전세계가 인정하고 만인이 모두 우러르는 지경에 있는가?
왜서 모택동이 수억 중국인민들을 동원하여 기편하는 방식으로 그토록이나 호적을 공격하고 매도하였는데도 호적의 학문은 죽지않고 계속 살아서 빛을 발하는것인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작가   - 2014/05/30 01:14:53  
로신을 지우는것은 여러가지의 원인이 있다.
로신이라는 이 인위적인 신 때문에 로신보다 훨씬 더 훌륭했던 학자들의 사상과 지식을 배우는데 걸림돌이 되였던것을 빨리 지워버리지 않으면 안되기때문이다.
언제까지 우리의 젊은 후대들이 <침묵속에서 폭팔하지 않으면 침묵속에서 멸망하리라>와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시시각각 사사건건 싸우고 대들고 여차하면 들고일어나는 나쁜 씨앗을 머리속에 간직해야한단말인가.
류화진과 같이 공부에는 마음이 별로 없고 걸핏하면 나가서 구호나 웨치고 데모나 즐기는 불량 학생들을 우리 시대의 최우수 지식젊은이로 받들어가면서 그런 정신이나 배우라고 말할수있단말인가.
열심히 공부 잘하고 정치에는 관심이 적었던 참다운 좋은 학생들은 그러면 모두 어디로 갔단말인가. 왜 그런 학생들을 따라배우라고 가르치지 못한단말인가.
작가   - 2014/05/30 01:18:24  
그런데 로신지우기가 시작된지 오래되였지만 정작 로신이라는 이 신을 신단에서 당당하게 끌어내리지 못하고 있는 당과 정부에 한마디 권고하고 싶다.
집을 짓는 일이 아주 힘들지만 강제적으로 파가이주시키고 쩍하면 잘 무너뜨리지도 않던가.
로신이라는 이 큰 신을 무너뜨리는것도 그런식으로 해야한다.
비석을 하나 만들어세우기도 쉽지않지만 이제는 필요없어진 비석을 무너뜨리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된다. 두루뭉실히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깨끛이못하고 뒤탈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기가 만들어 씌운 위장을 자기의 손으로 철저하게 벗겨내는 작업을 펼쳐야 한다.
????   - 2014/05/30 02:03:46
좀 부실하고 배우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하자.

평상시에 계속 그 아이를 부실하고 배우지 못하고 머저리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저 머저리 아이는 자꾸 욕해주고 부실하다가 질타하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강도가 와서 그 아이를 때리고있다.

아이가 맞아서 코피 터지고 얼굴이 묵사발이 되였는데도 계속 때리는 강도의 곁에서

강도와 함께 아이를 왜 이리두 부실하냐? 너 바보구나고 비난하고 욕을 퍼붓는 행위는...

강도보다 더 나쁘다.

로신이 그렇지 않았던가???

일본침략자의 대동아공영권 선전선동에 발을 맞춘 로신의 자국민에 대한 욕질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다.
????   - 2014/05/30 02:05:29
모택동과 우리 당은 왜 로신을 그렇게나 올리 불고 하늘높이 치켜세웠는지 리해가 안된다.

결국 다시와서 친일 한간문인으로 다 까밝혀질것을 미리 짐작못했나?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험하게 곤두박히는 법....

강선옥   - 2014/05/30 06:06:13
도저히 믿을수가 없네요. 그런데 작가님의 말씀에도 마디마디 도리가있다고 여겨지니 너무 곤혹스러워요. 어느 말씀을 믿어야할지?
참고용   - 2014/05/30 10:46:00
90년대 이후 출현한 《좋은 한간》론
김 관 웅
2006-08-29 00:00:00
이른바 《좋은 한간》론의 출현은 지난 90년대 초반의 중국문단의 괴상한 현상이 아닐수 없다. 그 《좋은 한간》의 대표가 바로 로신의 동생 주작인이다. 그래서 한 때는
인의 문집이 로신의 문집보다 더 많이 출판되여 수많은 서점의 서가에 진렬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것도 로신을 폄하하고 주작인을 올리추면서 말이다.

이 괴이한 현상을 두고 저승에서 주작인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고 로신은 아마도 이마살을 찡그렸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한 어미 배에서 나온 것도 오롱이조롱》이라는 말이 있다.

로신-주수인과 주작인은 동부동모의 친형제간이다. 그러나 그 인간성향은 완전히 딴판이다. 로신은 모택동의 말대로 중국에서 뼈마디가 가장 억센 사람이라면 그 동생 주수인은 연골(軟骨)의 인간이다.

항일전쟁시기 주작인(周作人)은 일제에 투항하여 화북정부위원회 총독판(總督辦)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러나 중국의 지식인들이 다 주작인 같은 연골은 아니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중국 현당대의 유명한 화가 제백석(齊白石)이다.

항일전쟁 후기 괴뢰정권의 관할하에 있었던 국립예술전문대학에서 제백석을 예술전문학교의 교수로 임용하려고 한다는 초빙서를 보내여 왔지만 그는 초빙서봉투우에다 《제백석은 이미 죽었음》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지식인들의 절개이다. 다들 주작인처럼 연골인간이라면 중화민족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제백석 로인이 괴뢰정부의 초빙서를 돌려보내던 그 나절에 주작인은 아마도 위독찰관의 신분으로 사탄에 있는 북경대학 홍루를 시찰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북경이 일제에게 함락된 후 제백석 같은 지조 있는 지식인은 은퇴를 하고 매란방 같은 예술인은 수염을 기르고 공연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일부 문인들이 주작인이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친일을 선택했다고 두던하는 것은 당시 력사사실과 맞지 않는다.

아무리 주작인에게 일제에게 투항하여 한간노릇을 한데는 아무리 말 못할 고충이 있었다고 해도 적을 애비로 삼고 한간노릇을 한 이상 좋고 나쁨을 론할 수 없다. 무조건 나쁜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친일파들은 어쩔 수 없어 친일을 했다면서 그 책임을 나라나 민족이나 그 시대적인 상황에만 돌리고 개인의 잘못은 따지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바로 괴이한 현상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다가 요즘에는 신친일파의 속출을 맞게 되지 않았던가. 오선화, 김문학 같은 신친일파들은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망언까지 서슴없이 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연변에서는 이런 극악한 친일파를 몇년 동안이나 불세출의 지성인이라고 칭찬하면서 지면을 할애하여 독소를 퍼뜨리게 하고 초청강연을 시키고 책을 출간하여 주면서 지극정성을다 하였지만, 친일파 김문학의 독서(毒書)를 비판하는 정의지사는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들씌워 필화를 조작하여 타격하고 모독하고 타격하였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전의 절실하게 잘못을 반성하고 오선화, 김문학 같은 친일파를 작살을 내는 데로부터 시작하여 친일파청산을 착실하게 해야만 한다.

오선화, 김문학 같은 신친일파를 작살을 내는 방법이 많기는 하겠지만 당년에 중국의 항일용사들이 주작인을 징벌하던 방법도 있기는 하다. 비록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참고로 제공한다.

《1939년 1월 4일, 천진의 항일살간단(抗日殺奸團)에서 총으로 항일을 하지 않는 문인 주작인을 저격했다. 사전에 북평 항단의 송현용 등 사람들을 찾아 탐문하여 주자작인이 북평 청화원내에 살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1월 4일, 리여붕과 조이인은 총을 휴대하고 학생의 명의로 주작인을 례방하였다. 주작인이 살고있는 집은 사합원이였는데, 주작인이 북쪽방문 아래의 계단으로 걸어서 내려오고 있을 때 리여붕은 권총으로 사격하여 주작인을 쓰러뜨렸다. 주작인의 경호원이 리여붕을 잡으려고 하자 조이인은 그 경호원을 향해 총 두방을 쏘았다. 경호원이 쓰러지자 두 사람은 신속하게 현장에서 사라졌다. 사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주작인은 총알이 혁띠의 빤또에 맞는 바람에 죽지 않았고 경호원은 당장에서 죽었다.》

주작인은 다행으로 이 날 목숨은 살았지만 아마도 십년감수는 했을 것이다.

김관웅(평론가, 연변대학 교수)
불쌍   - 2014/05/30 10:48:58
연변의 작가들 학자들 교수들 참으로 불쌍하다.
배운것이 너무 없고 읽은것이 너무 없다.
배웠다는것은 다 엉터리고 읽었다는것도 다 엉터리뿐인것 같다.
그렇기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진실을 이야기한다는것은
어쩌면 소귀에 경읽기가 될지도 모른다.
안타깝다.
부끄럽고 창피하겠지만 여기와서라도 배우기 바란다.
현영   - 2014/05/30 20:21:29
추천드려요 ^^

모르던 력사 새로운 발굴된 사실의 진실을 보게하여 주셔서 감사 ~

화이팅 ^^
지성   - 2014/05/31 00:54:08  
이런 글이 올랐다고 알려주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들려봤더니 아니나 다를가 이번 이 글의 내용은 쇼크수준입니다. 해외에서 우리가 모르는 자료들을 쉽게 접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있는 유순호선생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지성   - 2014/05/31 00:56:33  
저도 유순호작가님과는 같은 바램입니다.

이제라도 중국의 정부 관방에서 노신에 관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는 자료들이 있으면 다 공개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고, 그 자료들 속에는 노신이 친일 한간 문인은 결코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효화   - 2014/05/31 11:55:25  
우데 작가네티즌님의 말씀이 정말 옳으신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김선화   - 2014/05/31 12:58:06  
아저씨 오늘까지 읽은 아저씨의 글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온 세상에는 정말 진실이라는것이 진정 있기나한지 의심스럽네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왔던 교육자체도 너무 실망스러운데 이렇게 허무하게 하나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진실 자체가 사람을 더 허무하게 만드는것 같아요. 이제 우리는 더는 무엇을 믿어야하는건가요?
싱거운자   - 2014/06/01 04:25:06
싱거운 질문을 하나 던지고 가겠습니다.

중국 조선족 문단의 평론가들이 김학철옹을 노래하실 때 김학철옹은 로신계보의 작가라고 칭송하시던데...

지금 유순호작가님의 이 문장대로라면 무엇이 됩니까?

친일 한간문인의 계보작가라는 말씀이 되는것이 아니신지????

굳이 답변을 주지않아도 됩니다.

샘터   - 2014/06/05 02:24:54  
지금 보면 로신도 뢰봉처럼 특정 시대 특정 정치인이 목적을 가지고 분명하게 치켜세웠던 신기루에 지나지않는다고 봐야할것 같슴다. 로신이라는 신기루는 모래성에 쌓지않고 돌덩어리우에 쌓아서 좀 더 오래가고 쉽게 무너지지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 옳겠슴다. 그렇지만 어쟀던 진실은 밝혀지기가 마련임다.
윤승남   - 2014/06/06 05:24:08  
진실이늦게라도 밝혀지는것은 어쨌던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김치김씨   - 2014/06/09 15:33:01  
진실을 파헤치는 유작가님에게 한표 보냅니다.
요즘 들어 진실의 중요성을 아주 느끼고 있습니다..
더 많은 진실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니카 팬   - 2014/06/10 00:51:51
김치김씨님 참 오래만에 뵙는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기가막혀   - 2014/06/11 11:24:34
정말 큰일은 큰일입니다. 연변의 평론가들이 세상모르고 김학철옹은 로싱계보의 작가라고 올리불더니 .........

이제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진정한 항일투사작가를 친일 한간문인에게 가져다가 붙여놓은것이 아닙니까!
이래서 력사공부를 해야하고 력사를 알아야 한다는것인것 같습니다.

력사에 무지하면 이런 웃음거리를 빚게 됩니다.
김치김씨   - 2014/06/12 18:44:33  
니카 팬 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니카 팬 입니다..^^
김선화   - 2014/06/20 05:47:15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

많은것을 배우는 니카. 감사합니다.
황성준   - 2014/06/21 05:50:59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 그러나 받아들이는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것 같다.
최학근   - 2014/06/29 18:04:30  
몇 년 동안 청설님의 칼럼을 낱낱이 읽어왔던 저는 오늘 너무 큰 충격에 넋을 잃을 정도로 혼미해졌습니다. 중국문학의 대문호로 높이 떠받들렸던 魯訊이 이처럼 한심하고 비루한 인간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깐요...이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참으로 너무 참담합니다... 아무쪼록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매화   - 2014/07/17 11:27:14  
안녕하세요.작가님.
제가 편지를 쓸려고 하는데 메일 주소가 안보이길래 이렇게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나는 거 같습니다.꽃집 아저씨가 얘기한게 맞습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납니다.
그리고 올린글도 사실이 맞습니다.저 과거가 있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저의 남편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모르는게 낳은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불쌍한 부모님 아들 남편을 생각해주십시오.다 제 잘못입니다.
진심으로 만나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단지 제 자신을 넘 믿었던 것 뿐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제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이제 용서해 주십시요.
반성하면서 살겠습니다.
김애단   - 2014/08/01 02:04:14  
충격 너무 커요 !!!!
독고민수   - 2014/08/05 23:07:15  
노신의 친일행적 저는 믿습니다.
해외독자   - 2014/08/21 00:37:38  
이 일은 완전히 쇼크수준이라고 해야할것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믿을수도 없고 믿지않을수도 없고. 중국의 인민들을 반세기 이상 속여왔던 더러운 세상에 대고 침을 뱉을수밖에.
김 정도   - 2014/08/22 22:08:33  
吉林日报报业集团
秋瑾与鲁迅的情谊
——为纪念辛亥革命100周年而作
秋素莉(秋瑾堂侄女、吉林电视台原播音指导) 秋国荣(秋瑾堂侄、长春电视台原高级记者)
在辛亥革命百年到来的时候,人们不会忘记为实现共和制度这一崇高的目标而流血牺牲的革命志士。我们也不禁想起了姑姑、近代著名女革命家、妇女解放运动的先驱——秋瑾,同时想起姑姑的同乡,文学家、思想家——鲁迅。秋瑾与鲁迅有着深厚的情谊。
鲁迅赞扬、尊重秋瑾。秋瑾殉难后,他写过许多文章追念她,缅怀之情溢于字里行间。1925年,鲁迅先生又写了《论“费厄泼赖”应该缓行》一文,再一次引用了秋瑾的事迹和她为革命牺牲的教训,藉以告诫革命者总结经验,战斗到底。1934年末,晚年染病的鲁迅还在《病后杂谈》、《病后杂谈之余》等文中再次提到秋瑾,控诉了封建统治者的血腥罪行,批评了人们对于压迫、奴役、屠戮的健忘。
秋瑾、鲁迅和周恩来是绍兴城中当代最杰出的三位代表人物,人称“当代绍兴三杰”。鲁迅和秋瑾还有一定的世交亲缘关系。1995年11月8日秋瑾诞辰120周年时,30多位秋氏亲属代表聚会绍兴。聚会时,秋瑾嫡系侄孙、我们的堂侄秋经武还和我们谈到他亲历的周家和秋家的往事。
1964年,秋经武刚从大学毕业到中学教书。当年夏末秋初,鲁迅的三弟、年已古稀的浙江省原省长周建人到绍兴秋瑾故居。同来的有周建人夫人王蕴如、瞿秋白夫人杨之华等。周建人一进故居就走进秋高(秋瑾亲侄)的卧室,坐在床沿上非常随和地谈起往事,打听故人和后人的近况。周建人说:“小时候,我常到你们秋家来,至今我还记得团姆娘食盒里的大福果(即橄榄)、蜜枣和开口笑呢!”(秋瑾的大嫂张顺,团姑是她的小名)。
鲁迅的文章中屡称秋瑾为“姑娘”,按绍兴习俗,姑娘有三种概念:一种是泛指未成婚的女子,一种是指父亲的姐妹即姑母,还有一种是指姑嫂关系。而对后一种概念,秋瑾嫂氏的娘家人就不管其出嫁与否都称秋瑾为姑娘。按此,鲁迅屡称秋瑾为“秋瑾姑娘”,其亲缘关系或有可能来自秋瑾嫂氏的娘家。
1875年诞生于福建的秋瑾比鲁迅年长6岁,两人较多的交往是在日本。鲁迅1902年赴日本留学,首先进入东京弘文学院江南班学习日语。1904年春,秋瑾也自费到日本留学,不久也进弘文学院学习。秋瑾大约有两个月的时间和鲁迅在一起学习,两人的寓所相距不远,时有交往。当时秋瑾在东京参加并组织“演说练习会”,还在很多集会上发表演说。这期间鲁迅则“赴会馆、跑书店、赶集会、听讲演”。秋瑾是才能出众的演说家,她在东京时所作的演说在当时是第一流的,鲁迅就记述过当时秋瑾在东京各处讲演以及受到热烈欢迎的情况,并对此发表过很多感慨。鲁迅不仅参加秋瑾讲演的集会,而且是一名忠实的听众和拥戴者。
鲁迅和秋瑾在弘文学院同学虽只有两个月左右,但同乡之谊、同学之谊相当深厚。在鲁迅心目中,秋瑾不但德才过人,且端庄、豪爽、温和、诚厚,爱憎分明。他曾经生动地描绘过秋瑾说:“秋瑾姑娘很能干,有意见就当面提出,语气很坚决,不转弯抹角,所以不少人怕她。但是她爱唱歌,好合群,性格爽朗,而且善豪饮,讲话精辟,又热心公益,所以很多人喜欢和她接近。虽然秋瑾姑娘生得很秀气,但人品很高尚、正派,所以很多人不敢在她面前讲浮话。”(绍兴人把调侃、戏谑的俏皮话等统称“浮话”。)
鲁迅对于秋瑾的牺牲是十分悲痛的。1911年,革命党人王金发就任绍兴军政分莩督,鲁迅立即邀范爱农等谒见王金发,揭露章介眉在1907年参与以先斩后奏的办法,杀害秋瑾,强烈呼吁“现在要为秋女侠报仇才好!”后来王金发把章介眉逮捕,但不久便释放了。鲁迅对此十分气愤,曾撰文尖锐地批评王金发。为纪念秋瑾,鲁迅在小说《药》中塑造了夏瑜的形象,用来隐喻秋瑾和秋瑾式的革命家。他对自己作品中的夏瑜怀有深深的敬意,并且坚信革命者的鲜血不会白流。他说,是“不恤用了曲笔”,在革命者的坟上“添了一个花环”。而其用意则在“删削那些黑暗,装点些欢容,使作品比较的显出若干亮色”,从而使读者看到正义终将战胜邪恶的希望。辛亥革命后,鲁迅多次凭吊过秋瑾。
秋瑾与鲁迅的交往和情谊,在中国革命史上留下了令人神往、沁人肺腑、不胜慨叹的一页。
我们缅怀秋瑾和鲁迅,因为他们是国家和民族的脊梁,因为他们是国家和民族的骄傲和自豪。在辛亥革命100周年之际,记此文献上一份敬仰,以一首小诗结束:
辛亥祭百年,后人仰先贤。民族复兴业,世代永相传。

박민규   - 2014/08/26 14:53:37  
김정도님. 바로 님이 퍼다주신 이런 관방의 인위적인 조작날조 기사들이 지금 모두 그 진실이 밝혀지고 있는것이라고 봅니다. 루쉰의 소설 <약>에 대한 정부 관방의 해석과 문학 학자들의 해석이 지금 서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유 작가의 이번 글에서 제공하고 있는 새로운 정보들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은데요.
싱거운 사람   - 2014/11/07 01:22:31  
음 너무 심각하다. 중국 13억 국민을 반세기나 넘게 속여온 기만극이 폭로되고 있다는 ㅠㅠㅠㅠㅠ
김점순   - 2015/01/03 21:18:18  
정말 믿을수가 없습니다.
고춘호   - 2015/06/13 12:33:09  
정말 이대로 믿어도 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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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흑인이 좋아, 나중에...
 [ ] [류영애수필] 인연의 줄      [80]
No : 282 Date : 2008/08/14 Hit : 4878 Vote : 97 Name :  류영애
   모처럼 찾아온 주말, 아버지의 팔을 잡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으로 산보하러 나왔다.

   화창한 날씨와 같...
 [ ] [최미령 소설] 30원이 아닌 30원      [28]
No : 281 Date : 2009/05/26 Hit : 3070 Vote : 52 Name :  빵순이
   오늘 노트북 선물받고 너무 좋아서 엄마한테 자랑할겸 내려갔었다.

   엄마가 출근하는곳은 의학원...
 [ ] 최경령 최신수필      [11]
No : 280 Date : 2015/08/07 Hit : 3206 Vote : 12 Name :  령이
칵테일 잔을 들고 있는 언니의 손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멋진 레스토랑에 함게 저녁을 하게된 나와 언니.
습관적으로 집중 할때는 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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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 279 Date : 2012/06/01 Hit : 4501 Vote : 251 Name :  苏阳小南
[글 쓴이: 최경령, 재미 조선족 유학생, 미국 뉴욕]



  
 
 

이국 땅에서 좀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요일 가리지 않고 일한지 벌써 6년째였다. 토요일은 6시 퇴근이기에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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