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기록과 기억은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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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끝난 드라마 ‘도깨비’를 ‘본방사수’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 저승사자, 삼신할미 같은 인물들이 한복이 아니라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것이 참신했다. 그중에서도 삼신할미의 빨간색 의상과 구두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망자가 망각의 차를 마시면서 이승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저승길을 나서고, 도깨비에 대한 기억을 잊은 도깨비 신부가 자신이 남긴 기록을 통해 기억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도깨비의 검을 뽑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역사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이니, 기억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를 편찬하면서 기록과 역사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고려 초 지식인들이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거란이 발해의 수도를 무너뜨렸을 때 10만명의 유민이 고려로 몰려왔고 그중에는 세자까지 있었으니, 이들에게 물었다면 발해의 역사와 제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사람 장건장은 《발해국기》를 썼는데, 고려는 어째서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는지 유득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발해사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중국 기록을 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유득공의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
일기란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글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문건의 《양아록(養兒錄)》은 할아버지가 16년 동안 손자를 애지중지 키우면서 기록한 육아일기다. 이문건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 출신이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돼 성주로 유배를 갔고,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잘 키워서 집안을 일으킬 작정을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손자의 성장 과정을 꼼꼼히 관찰했고, 손자 교육을 위해 각별히 신경 쓰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손자에게 매를 때리기도 했다. 이문건이 일기를 쓴 것은 손자가 장성한 뒤 할아버지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서였다. 오늘날 이 일기는 16세기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기본 자료가 됐다.
상인이 거래처와 주고받은 편지나 거래장부가 사료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 역사학자인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은 프랑스 국경지대에 있던 뇌샤텔출판사의 문서들을 분석해 18세기 유럽의 출판계와 독서 풍경을 복원한 책이다. 프랑스혁명은 계몽사상을 담은 책보다 포르노 소설이나 중상비방문 같은 금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흥미롭지만 당시 서적의 인쇄 방식, 금서의 유통 경로, 교환 방식을 일일이 밝혀낸 것에 눈길이 간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자료라고 문자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기록유산에는 문자 기록 외에 이미지나 기호로 기록된 것, 비문, 시청각 자료, 인터넷 기록물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인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에는 흑백필름, 사진, 시민들의 증언이 들어 있고, ‘새마을운동 기록물’에는 마을회의 회의록, 새마을 지도자의 편지, 시민의 기증서가 있다. 최근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에는 생방송한 비디오 녹화 테이프, 큐시트, 기념음반까지 포함돼 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뉴스를 보면서 앞으로 어떤 기록이 역사적 자료가 될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혐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 자료로 이용되지만 앞으로는 현 정부의 역사를 밝히는 사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록을 통해 기억하고 사람들의 기억은 역사가 된다. 일반 시민의 평범한 일상이라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란 사실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기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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