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路

성불사 팽나무 그늘 아래

이강기 2017. 4. 20. 12:56

[김민철의 꽃이야기] 성불사 팽나무 그늘 아래

조선일보


입력 : 2017.04.20 03:07

느티나무와 함께 대표적 정자나무… 대나무 총에 열매 넣고 쏘면 '팽~'
구효서 중편 '풍경소리'에도 등장… 절 마당 팽나무 거목 아래에서 조금씩 마음 치유해가는 이야기
꾸준하고 실험적인 작가에 박수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고향 마을 입구엔 수백년 된 거목 팽나무가 두 그루 있다. 팽나무 아래는 우리의 주 놀이터였다. 우리는 아침에 바로 초등학교에 가지 않고 팽나무 아래에 모여 오징어놀이를 했다. 그 놀이를 요즘 애들도 알지 모르겠는데, 땅에 커다란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공격과 수비팀으로 나누어 밀고 당기고 깨금발로 싸우는 거친 놀이였다. 그러다 수업 시작 10분 전쯤 예비 종이 울리면 모두 가방을 들고 학교로 뛰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어릴 적 노는 장면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정자나무로 많이 심은 나무다. 우리 동네 팽나무 아래에도 정자가 있었다. 한여름엔 어른들이 계셔서 우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씀 전하라고 할 때나 갔다. 그러나 다른 계절엔 그곳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다. 그 팽나무는 적당한 높이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올라가 놀기에 좋았다. 누가 어디까지 올라가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대부분 서너 번째 가지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담력이 센 아이들은 대여섯 번째 가지까지 올라갔고 원숭이처럼 이웃 나무로 옮겨가기도 했다.

팽나무라는 이름은 열매를 대나무 총에 넣고 쏘면 '팽~'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우리는 팽나무 열매를 모아 열심히 총을 쏘았다. 열매가 불그스름해지면 따먹기도 했는데, 살짝 단맛이 도는 것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가을엔 나무 전체가 노랗게 단풍이 들었다. 팽나무는 필자에게 '고향의 추억으로 가는 표지판'이다.

이번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구효서 중편 '풍경소리'에 팽나무가 나와 반갑게 읽었다. 이 소설은 이은상의 시조 '성불사의 밤'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서른두셋쯤 보이는' 미와는 뭔가 '달라지고 싶으면 성불사에 가서 풍경소리를 들으라'고 한 친구의 권유에 산사에 갔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성불사 팽나무 그늘 아래
/이철원 기자

그곳에서 미와가 깊은 밤에 풍경소리를 듣고 절 마당에 있는 거대한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엄마를 잃은 슬픔을 치유해가는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은 생기지 않는다. 첫날 공양주 좌자가 미와에게 '이곳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준 것은 팽나무 그늘 아래서였다. 미와가 두릅나물과 표고버섯 무침을 맛있게 먹다 사레가 들려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린 곳도 팽나무 아래였다. '그러자 팽나무 이파리들이 쏴아, 바닷소리를 냈다.(…) 팔랑거리는 작은 잎들을 하염없이 쳐다보자니 아련하고 간지럽고 재채기가 날 것 같고 졸렸다.' 시각은 물론 청각·촉각까지 동원해 팽나무에 대한 묘사가 감각적이다.

미와가 남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것도 팽나무 아래서였다. '그의 말은 내가 팽나무 이파리를 다 셀 때까지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팽나무가 있어서 가을 산사의 풍경은 더욱 고즈넉해졌고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더욱 섬세해졌다.

경복궁 향원정 옆에 있는 팽나무는 이제 막 싹을 내밀기 시작했다. 팽나무는 전국적으로 어디에서나 자라지만 남부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소금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도 잘 자란다. 세월호 아픔을 간직한 팽목항도 주변에 팽나무가 많아 생긴 이름일 것이다. 어느 정도 크면 느티나무는 나무껍질이 타원 모양으로 벗겨지지만 팽나무는 벗겨지지 않아 매끄러운 점이 다르다. 팽나무 잎은 가장자리 톱니가 잎 절반 정도까지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 구효서(60)는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로 등단했다. 올해가 등단 30년이다. 그는 매일 서울 중계동 집에서 공릉동 작업실까지 삼천리호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글을 쓰는 전업작가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근래 들어 이상문학상을 비롯해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도 '글로써 글을 깨는(이문파문·以文破文)' 실험적인 글들을 내놓고 있다. 상당수 작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주장이 강해지면서 스토리가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는데 이 작가는 확연히 다르다. '풍경소리'도 대화 처리가 파격적이고 3인칭 시점을 사용하다가 슬그머니 1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등 작가의 실험 정신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글이다.

꽃에 관심을 갖는 필자 입장에서는 여러 소설에서 꽃(식물)을 주요 소재 또는 상징으로 쓰는 것도 흥미롭다. 욕심 내지 않고 꽃을 너무 길지 않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도 고수답다. 그는 책에 사인할 때 쑥부쟁이 그림을 그려주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 한 살"이라며 "힘들고 지치기보다 철없는 어린아이같이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산 간월도 팽나무
서산 간월도 팽나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9/20170419039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