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소장

이강기 2017. 6. 10. 08:40

[Weekend Interview] '벽안의 전라도 남자'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소장

나에게 우주의 중심은 전라도 순천…온돌방서 `그라믄 못써` 들으며 인생 배워
부계 켈트족·모계 인디언에 고향은 순천…그래서 성격 급해요

  • 허연 기자
  • 매일경제
  • 입력 : 2017.06.09 15:55:19   수정 : 2017.06.09 17: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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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진료실에서 환자와 상담하고 있다. 인 소장은 27년째 이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한주형 기자]
"긍게, 차트 좀 가져와 보소."

완벽한 전라도 사투리였다. 재밌다기보다 사실은 적응이 좀 안 됐다. 190㎝가 넘는 키에 희끗한 금발의 켈트족 남자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니 그럴 만도 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남자의 사무실에는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이라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땅 중에 순천만 한 곳은 없다'는 뜻으로 대원군이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인요한(미국명 존 린턴)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58)은 전라도 남자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자랐으니 전라도 남자가 맞는다.

인 소장은 1895년 한국에 파송돼 광주 수피아여고, 목포 정명학교, 기독병원 등을 세운 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의 외증손자다. 이후 4대에 걸쳐 그의 집안은 한국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외국을 나갔다가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리면 묵은지와 뜨끈뜨끈한 대중목욕탕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는 벽안의 전라도 남자. '영혼에서부터 뼛속까지 전부 한국인'이라는 인 소장을 신촌세브란스병원 그의 진료실에서 만났다.

―순천이 그렇게 좋은가.

▷내게 우주의 중심은 순천이다.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나자마자 순천으로 이사 와서 살았다. 그때 별명이 '매곡동 짠이'였다. 내 영어 이름이 존 린턴인데. '존'을 동네사람들이 '짠'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동네를 휘젓고 다녔는지 '매곡동 짠이'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정년이 8년 남았는데 정년이 되면 서울에 1시간도 더 안 있는다. 바로 순천으로 갈 거다. 난 지금도 전라도 묵은지 없이는 못 산다. 음식점 갈 때 싸 갈 정도다.

―전라도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나를 만들었다. 초가집 온돌방에서 고구마, 김치 먹으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자랐다. 온돌방에서 지식을 배웠고, 지혜와 도덕을 배웠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인터넷도 TV도 없는 군불 땐 방에서 전라도식 스토리텔링으로 인생을 배웠다.

그때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 '그라믄 못 써' 같은 말 속에 담겨 있는 커다란 지혜를 몸으로 깨달으면서 컸다. 전라도 말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 예를 들어 '잡놈'이라는 말도 욕이 아니다. 그 말은 대인관계 좋고, 박식하고, 인격적이면서 처신도 잘하는 사람을 칭찬할 때 쓰는 말이다. 기자 양반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 잘 이해를 못 할 거다(웃음).

―조상들 이야기가 듣고 싶다.

▷동학혁명 다음 해인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이 27세에 조선으로 파송되면서 한국과 우리 집안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분이 내 외증조부다. 당시 조지아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셨는데 신앙심 하나 때문에 이역만리 조선으로 왔다. 유진 벨은 광주 수피아여고 숭일학교, 목포 정명·영흥학교, 광주 기독병원 등을 설립했다.

유진 벨의 사위이자 내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턴은 22세에 한국에 와 선교활동을 했다. 전주 기전여고와 신흥고 교장을 지내고, 한남대를 설립해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에 의해 추방까지 됐다. 6·25 참전용사이기도 한 아버지 휴 린턴은 호남지역에서 봉사한 선교사였고 1984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 로이스 린턴은 결핵 진료를 위해 순천기독재활원과 요양원을 설립했고, 평생 결핵 치료와 선교에 헌신했다.

―왜 그렇게 희생적인 선교를 하셨는지.

▷비슷한 시기에 선교사로 들어온 알렌과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이분들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남장로교였던 우리 조상은 당시 선교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호남지역으로 갔다. 한 해 전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가난과 억압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교단의 지시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특성이 있다. 그들은 기도만 하기보다는 직접 나서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교육과 의료에 공을 들였다.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것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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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데.

▷연세대 1학년이었던 1980년 5월 고향 순천에 갔는데 전남대와 조선대를 다니던 친구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무조건 친구들을 앞세우고 광주로 갔다. 잡히면 나는 미국대사관 직원이고, 친구는 통역자라고 하기로 작전을 짰다. 가보니 광주 전체가 장례식장이었다. 시신이 안치돼 있던 상무관에 갔는데 거기서 한 외신기자가 내게 통역을 요청했다. 그러자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주요 매체 기자들이 전부 내게 몰려왔다. 나는 시민군 대표들의 말을 성심껏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신군부에게 권고추방 명령을 받았다. 참 가슴 아픈 시대였다.

―한국형 앰뷸런스를 최초로 개발했는데.

▷1984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내가 본과 2학년 때였는데 농촌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트럭에 싣고 가시다가 관광버스와 충돌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병원에 가셨을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다. 그때 응급의료 체계가 제대로 됐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셔야 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8년 후 가족들이 비용을 모아 한국형 앰뷸런스 개발에 착수했다. 목수, 용접공, 자동차 정비사 등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해 차를 개조했다. 병원 이송 전 처치에 대한 교육도 많이 했다. 소방서가 그저 불 끄는 곳이 아니라 인명구조를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결핵퇴치 사업을 북한에서도 했는데.

▷1996년 어머니가 40년 의료봉사한 공을 인정받아 호암상을 받으셨다. 그때 상금이 5000만원이었는데 그 돈으로 어머니는 북한에 앰뷸런스를 기증했다. 그 이후 북한 측에서 결핵퇴치 사업에 나서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북한을 가본 소감은.

▷북한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다. 방북 횟수만 29번이다. 언젠가 북한 안내원이 물었다. "남조선이 우리보다 잘산다는데 얼머나 잘사는지 이야기해보라우."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소떼 몰고 왔던 정주영 같은 사람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웃음).

―외국 혈통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아서 색다른 시각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우수한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일어난다. 거기다 부지런하고 융통성까지 있다. 한국인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서양인들은 룰 중심으로만 생각한다. 이게 한계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한국인보다 한 수 아래다. 한국인은 룰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이것이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인에게 불가능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좀 우스운 예를 들자. 서양인들을 자기가 뭔가 켕기는 짓을 하면 교회에 안 간다. 쉽게 말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은 답답할 정도로 착하게 산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다르다. 뭔가 좀 켕기는 일을 해도 교회는 나간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도 있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양손에 모두 떡을 쥐는 게 가능한 민족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순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융통성이다. 한국인들은 태생적으로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묘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결국은 해낸다.

부계 켈트족·모계 인디언에 고향은 순천…그래서 성격 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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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단점은.

▷한국인들은 자신을 너무나 과소평가한다. 이렇게 똑똑한데, 이렇게 부지런한데, 이렇게 재미있는데, 폐허 위에서 이런 나라를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자기 비하를 한다. 비판이나 자각은 필요하지만 좀 지나치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단합을 못 한다. 자기 친한 사람, 예를 들면 자기 출신 학교, 같은 고향 이런 카테고리에서는 잘 단합하는데 국가나 민족 같은 큰 카테고리로는 단합을 못 하는 거 같다.

―한국인들도 변하고 있지 않은가.

▷쓴소리를 더 하자면 한국인들은 장점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버리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인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허물은 덮어주고, 장점은 부각시켜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그런 기질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게 과연 나쁜 것인가. 잘못 활용한 사람들이 문제고, 산업화 과정에서 일부 세력이 부정부패를 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한국인의 기질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情)이라는 것도 그렇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게 나쁘기만 한 것인가. 체면도 마찬가지다. 남을 상대하는 도리를 챙기는 것이 큰 잘못인가. 의식개혁 한답시고 한국인의 특성 자체를 비하하는 건 나쁘다. 공사 구별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가문의 후손인데 요즘 한국 교회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일부 대형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 한국 대형 교회의 모습을 예상했더라면 목숨을 걸고 한국 땅에 왔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정교유착이 문제다. 한국 교회는 정치를 너무 좋아한다. 문제를 일으킨 유명한 정치인들 예배당에 가면 다 만난다는 말이 있다. 물론 과장이겠지만 농담이라도 이런 말이 나돌아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내 나라이자 고마운 나라다. 나는 1980년 정원 외 입학으로 연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예비고사를 제대로 치렀으면 못 들어갔다. 한국이 우리 조상들의 공적과 희생을 인정해 내게 기회를 준 것이다. 그렇게 한국은 날 의사로 만들어줬고, 최연소 센터장이 됐고, 2012년에는 특별귀화를 거쳐 정식 국적까지 취득했다. 너무 고맙다. 한국이 준 은혜를 갚느라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의대 다닐 때 힘들었다. 공부를 못 따라갔다. 미적분 같은 것도 힘들었지만 가장 어려운 게 한문이었다. 내가 한문을 잘 못하는데 교과서에 '전신홍반성낭창' '고관절탈구증' 같은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낙제를 한 적도 있다. 낙제했던 내가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을 할 때 전체에서 1등을 했다. 그러니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대단한가(웃음).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영어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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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6남매를 모두 한국인처럼 키웠다. 당연히 어린 시절에 한국 학교를 다녔다. 다 좋은데 문제가 있었다. 외모는 미국인인데 영어 한마디도 못하니 늘 놀림감이 됐고, 미국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는 선교사분을 가정교사로 데려다 영어를 가르쳤다. 나 같은 경우는 국제학교도 다녔고, 미국에서 유학도 했다.

―한국에서 살면서 유명한 사람도 많이 만나봤을 텐데 누가 기억에 남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이 기억난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독대를 한 적이 있는데 광주민주화운동 때가 생각이 나서 그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사람들에 대해 분노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인 원장! 원한이 뭔 도움이 됩니까" 이러면서 만델라 이야기를 한 30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통령 취임할 때 옆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나란히 있는 걸 보고 '큰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가끔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세련된 우파'라고 답한다. 난 공권력이 확실하게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방도 당연히 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정의와 개인의 자유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 관계는 정권을 미워해도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쪽이다. 인도적 지원마저 막는 건 안 된다. 나는 경제개발 역사와 민주주의를 찾기 위한 역사를 모두 인정한다. 그 두 개의 길이 한국을 만들었다.

―한국과 미국이 축구를 한다면.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다. 오브코스! 한국이다.

―형제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지.

▷큰형은 여전히 순천에서 선교활동을 한다. 둘째 형은 유진벨재단 일을 하고 있고, 셋째 형은 미국에서 건축업을 한다. 넷째인 누나는 아이를 11명 낳았는데 선교일과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다섯째 형은 금융인이다. 어머니는 91세인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사신다. 순천에 있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 하신다. 손주가 31명이다. 나는 자식이 넷이다.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은.

▷난 성질이 급하다. 그리고 혀가 날카롭다. 그래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가끔 실수도 했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우리 조상들의 계보를 따지자면 부계는 전형적인 켈트족이고, 모계는 인디언 피가 섞여 있다. 쉽게 말하자면 브레이브하트가 인디언 전사를 만나서 전라도에서 자란 것이다. 강골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좀 후회스럽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부드러워져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키워준 송옥자라는 사람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는 선교일로 바쁘셨다. 그때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내 기저귀를 갈아주고, 키워준 분이다. 난 어머님을 존경했고, 모정은 옥자 누나에게서 느꼈다. 그분은 날 사랑으로 키우셨다. 지금도 살이 닿으면 눈물이 난다. 자주 뵙지는 못한다. 그분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다.

―재산은 좀 모았나.

▷지금 관사에 산다. 내 개인 소유로는 땅 한 평 없다. 모아놓은 돈도 없다. 그래도 연금이 있으니 괜찮다. 미국 속담에 '장의사 차에는 짐칸이 없다'는 말이 있고, 한국 전라도 속담에는 '수의에는 괴비(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난 이런 속담이 좋다. 뭘 그렇게 많이 모아서 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자식도 돈 주면 망친다. 올바른 가치관과 상생하는 능력, 이런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운동 같은 건 하는지, 취미는 있나.

▷지금은 이래도 젊을 때 운동도 좋아하고 날씬했다. 키가 커서 농구를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축구와 수렵을 좋아한다. 유해조수구제단 멤버다. 이제 한국도 자연을 지키기 위해 자연을 조절해야 할 때가 온 거 같다. 수렵은 어른이 되어서도 동네 뒷산에서 놀던 걸 흉내낼 수 있는 재미있는 취미다. 들판에 털썩 앉아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는 취미다.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가 주로 하는 일은.

▷다양한 일을 한다. 일단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 의료관광 오는 분들, 주한미군과 미군 가족 등을 유치하고 치료하는 일을 한다. 외래·입원·응급실 업무 등 진료 관련 모든 일을 한다. 이민·유학·신체검사 업무도 한다. 이런 업무를 다른 종합병원도 하지만 세브란스가 가장 많이 한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에서부터 이슬람권 남미 사람들까지 온다. 코디네이터들이 구사하는 언어만 8개 국어다.

―국제진료센터가 자리 잡는 데 산파 역을 한 것 아닌가.

▷사실 1885년 광혜원이 생겼고 그때부터 외국인을 받았으니까 세브란스의 외국인 진료 역사는 130년이 넘은 셈이다. 외국인을 전문으로 보는 진료실이 개설된 것은 1962년이다. 나는 1991년 부임했는데 그때는 좀 낙후돼 있었다. 외국인 환자가 이틀에 한 명 정도 오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많이 커졌다. 교수 5명에 간호사 15명, 전담 수련의 3명 등 40명이 근무한다.

―향후 하고 싶은 일은.

▷한국 의사들은 손재주가 정말 좋다. 아까울 정도다. 은퇴하기 전에 한국 의료 기술을 K팝처럼 한류화하고 싶다. 의료는 하나의 산업이다. 한국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 간혹 외국에서 오는 환자를 많이 받으면 한국인들이 받아야 할 진료를 침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외국인들이 한국 병원을 많이 찾고, 그 이익으로 새로운 기술과 장비에 투자하면 한국 의료서비스 전체가 발전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순천에 내려갈 준비는 하고 있는지.

▷준비고 뭐고 없다. 은퇴하는 날 무조건 갈 거다. 요즘 '깨복쟁이' 고향 친구들을 대상으로 금연운동을 하고 있다. 그들이 건강해야 은퇴 후 나하고 놀아줄 거 아닌가(웃음). 낚싯대 하나 들고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웃고 떠들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인요한 소장은…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성장했다. 구한말 한국에 와서 근대 의료 및 교육체계를 전파한 유진 벨이 외증조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한국에서 평생 봉사를 한 손꼽히는 선교사 집안에서 자랐다.
순천에서 한국 학교를 다니고 대전 외국인학교를 거쳐 1980년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수련의 생활을 한 뒤 1991년부터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 2014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2년 정식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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