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術

비취청자의 중국 뛰어넘기

이강기 2017. 6. 10. 08:53

[케이트의 미술 이야기] 비취청자의 중국 뛰어넘기

  • 매일경제
  • 입력 : 2017.06.09 15:44:51   수정 :2017.06.09 17:06:08

                   

387016 기사의 0번째 이미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디에선가 한번쯤은 보았을 고려상감청자(高麗象嵌靑瓷)는 한국 예술의 대표적인 명품이다. 상감청자의 가장 큰 예술적 매력은 우러나오는 색깔에 있다. 물총새의 깃털이 띠는 푸르스름한 색이라고 하여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 보석인 `비취(翡翠)`와 같은 색이다. 청자의 진수는 비취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색`이다.

어떻게 하여 고려청자가 이런 절묘한 비취색을 갖게 되었는가는 한국 예술사에 숨어 있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본래 청자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9세기 중국에서는 선종(禪宗)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좌선 중에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차(茶)를 마시는 문화가 붐을 이루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옥(玉)으로 만든 다완(茶椀)이라는 잔에 차를 따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우윳빛 같고 푸르스름한 반투명한 옥의 색깔 때문에 옥다완은 차의 색과 옥의 색이 어우러져 신비롭고 아름다운 시각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또 맑은 정신을 추구하려는 심정과 공명한다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이 비싼 옥다완에 차를 마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옥다완과 비슷한 느낌을 내면서 덜 비싼 대체품에 대한 수요가 생겼고 청자가 그 현실적 대안으로 만들어졌다.

10세기 말엽 중국에서 정치적 혼란이 벌어지자 당시 청자 기술로 유명했던 오월국의 장인들이 외국으로 피난했다. 고려는 이때 중국 도공들을 스카우트했다. 고려가 처음 만든 청자는 중국 도공들이 전수한 기술로 그대로 만든 중국 청자였다. 그러나 그 후 150여 년의 실험기를 거쳐 12세기 무렵 고려청자는 모방을 넘어 창조적 도약을 한다. 초기의 탁하고 누런색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진짜 비취색을 띠는 `메이드 인 고려`로 변모한 것이다. 여기서 더 발전해 표면에 장식 무늬를 판 상감청자도 만들어졌다.

387016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청자 색깔의 아름다운 진보를 이룩한 고려 도공은 나름의 비법(秘法)이 있었다. 중국 청자는 한 번에 구웠지만, 고려 도공은 유약을 입히지 않고 초벌한 후, 두 번째 구울 때는 유약을 흠뻑 묻혀 구웠다. 현대 미술가들이 쓰는 언어로 표현하면 `층(層·layer)`을 입혔다. 그래서 층과 층 사이로 틈이 만들어져 그 틈을 빛이 투과하여 마치 `빛을 머금은 듯한` 잔잔한 광휘가 흘러나오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청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온 송나라 사신들도 감탄할 경지였다. 고려인들도 자신들이 창조한 청자에 자부심을 갖고 "우리 색깔은 비색(翡色)이 아니라 비색(飛色)"이라고까지 말했다.

왜 중국에서는 청자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는데, 고려에서만 이런 비약이 일어났는가? 중국에는 옥다완이라는 일류품이 이미 있었고 청자는 이류품이었기 때문에 청자 기술을 발전시킬 동인이 약했던 반면 고려에는 옥다완이 없기 때문에 청자를 일류품으로 만들 동인이 강했기 때문이다. 옥다완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일류품이 없는 상태에서 고려 도공들은 좀 더 멋있고 신비로운 색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실험과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중국 청자의 이류성을 뛰어넘어 일류 고려청자를 탄생시켰다.

고려청자 이야기는 현대미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국 현대미술은 서양에서 수입한 기법이나 양식에 바탕을 두고 시작하였다. 앵포르멜, 팝아트, 개념예술, 비디오아트 등 외국에서 수입된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진짜 창작이 아니다. 처음에는 모방에서 시작했더라도 오랜 노력 끝에 창조적으로 비약시킨 고려청자가 진짜 명품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고려청자가 무엇인지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