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 전문기자의 休]대만 역사기행
태평양을 건너온 바람에 일어난 파도에 가차없이 강타당하는 저 곳은 대만 섬 북단의 예류 해안단구. 저 기묘한 바위지형은 융기한 해저가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 비에 깎이고 녹아내려 생긴 자연현상의 결과다. 지룽(대만)에서 summer@donga.com
숲을 보노라면 산을 잊는다. 반면 산만 쳐다보면 숲이 보이지 않는다. 여행도 그렇다. 볼거리만 치중하면 시간 소일에 그친다. 알맹이 없는 주마간산이다. 이건 모든 여행자가 흔히 들 겪는 일상적인 실수. 그걸 피하자면 약간의 공을 들여야 한다. 숲만 보지 말고 산세까지 살피는 준비와 여유다. 시야를 넓혀 주변까지 가늠한다면 금상첨화. 여행이란 내가 가보지 않은 곳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살피고 배우며 호기심을 채우는 지적 활동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그곳의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 지형과 기후, 위치와 산물 같은. 이런 걸 인문지리(人文地理)라고 한다. 삶의 방식이 지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인데 역사마저도 그렇다. 오늘은 여행지 대만(臺灣)을 인문지리의 시각으로 살핀다.
1653년 제주도 강정해안. 한 무리의 ‘외계인’이 나타났다. 붉은 수염에 괴이한 복장, 이상한 말을 하는 외국인 무리. 하멜 일행(총 36명)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범선 스페르버르호가 풍랑에 좌초해 표착한 것이었다. 이후 나가사키로 탈주하기까지 조선 억류 13년의 스토리는 항해서기 하멜이 남긴 ‘하멜표류기’를 통해 공개됐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이들이 어디서 출항했는지는 잘 모른다. 대만이었다. 당시 그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였다. 지명도 ‘포르모자(Formosa)’였다.
동인도회사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수탈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국왕으로부터 군사 활동은 물론 외교 교섭권까지 부여받아 해외에서 무력으로 통상교역을 추진하던 수탈 조직이다. 그 최초는 1600년 영국이고 2년 후 네덜란드가 뒤따랐다. 하멜 일행 표착 당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전성기였다. 인도항로 개척 후 아시아 향료무역을 독점해온 포르투갈을 제압하고 영국마저 제치며 극동의 일본까지 진출했다. 보유한 상선만도 3만4000척에 이르렀다.
16, 17세기 대항해시대에 아시아는 포르투갈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의 각축장이었다. 가장 먼저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스페인은 필리핀 마닐라를,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향료무역을 전개했다. 그러다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곳곳에서 밀어냈고 끝내는 포르투갈이 개척한 일본(나가사키)까지 차지하며 대만이 새로운 거점으로 부각됐다. 중국 대륙(청나라) 교역의 관문인 샤먼(푸젠성)이 뱃길로 하루 거리인 데다 북으로는 일본, 남으로는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를 두루 관장하는 전략상 우월한 위치 덕분이었다.
1653년 제주도 강정해안. 한 무리의 ‘외계인’이 나타났다. 붉은 수염에 괴이한 복장, 이상한 말을 하는 외국인 무리. 하멜 일행(총 36명)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범선 스페르버르호가 풍랑에 좌초해 표착한 것이었다. 이후 나가사키로 탈주하기까지 조선 억류 13년의 스토리는 항해서기 하멜이 남긴 ‘하멜표류기’를 통해 공개됐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이들이 어디서 출항했는지는 잘 모른다. 대만이었다. 당시 그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였다. 지명도 ‘포르모자(Formosa)’였다.
동인도회사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수탈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국왕으로부터 군사 활동은 물론 외교 교섭권까지 부여받아 해외에서 무력으로 통상교역을 추진하던 수탈 조직이다. 그 최초는 1600년 영국이고 2년 후 네덜란드가 뒤따랐다. 하멜 일행 표착 당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전성기였다. 인도항로 개척 후 아시아 향료무역을 독점해온 포르투갈을 제압하고 영국마저 제치며 극동의 일본까지 진출했다. 보유한 상선만도 3만4000척에 이르렀다.
16, 17세기 대항해시대에 아시아는 포르투갈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의 각축장이었다. 가장 먼저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스페인은 필리핀 마닐라를,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향료무역을 전개했다. 그러다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곳곳에서 밀어냈고 끝내는 포르투갈이 개척한 일본(나가사키)까지 차지하며 대만이 새로운 거점으로 부각됐다. 중국 대륙(청나라) 교역의 관문인 샤먼(푸젠성)이 뱃길로 하루 거리인 데다 북으로는 일본, 남으로는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를 두루 관장하는 전략상 우월한 위치 덕분이었다.
그런 대만에 네덜란드가 진출한 건 1624년. 섬 남부 서해안의 안핑(타이난 지역)에 요새를 구축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먼저 북부 동해안 지룽을 거점으로 삼은 스페인을 몰아내며 포르모자(대만)를 석권했다. 그러고는 여기서 일본 교역을 진행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금단의 땅’이었다. 청나라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눈치채고 외국과의 통교를 철저히 봉쇄한 탓. 외국 상선은 조선과 교역 시 대륙 무역을 단절한다는 청의 엄포에 아예 관심을 껐다. 하멜의 표착은 이 와중이었고 그래서 효종은 이들을 억류했다. 서양인 체류가 청에는 외국과의 통교로 비칠 게 뻔해서다. 조선이 수입한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반청복명(反靑復明)의 기치를 세워 청에 도전할 것이란 오해에 봉착할 우려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대만 식민은 37년 만에 끝났다. 반청복명을 외치며 청에 맞서다 이 섬까지 밀려난 세력에 의해서다. 타이난의 질랜디아 요새가 이들에게 함락되자 네덜란드는 즉시 대만을 떴다. 길지 않은 세월, 하지만 유산은 크다. 그들은 엄청난 국부를 챙겼다. 유럽서 고가에 팔리던 설탕(사탕수수)과 쌀, 차 플랜테이션 덕분. 하지만 더 귀중한 게 있다. ‘타이완’(대만의 한자어 발음)이란 국명이다. 그건 질랜디아 요새가 있던 ‘타이워완(臺窩灣)’에서 유래했다. 타이워완이 ‘타이완’으로 변한 것이다. 타이난 지역은 대만의 ‘문화적 수도’다. 전통과 역사 숨쉬는 고도다. 대만의 중심이 1887년 타이베이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해도 타이워완이 있는 타이난이 수도였다. 그 타이난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다양한 거리음식인데 타이베이 명소가 된 야시장이 그 유산이다. 그러니 이제 스린, 라오허제, 스다, 화시제 같은 타이베이 야시장에 들르걸랑 타이난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기억하자.
대만을 여행한 이라면 누구든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왜 대만엔 일본을 닮은 게 이렇게 많은 건지. 그렇다. 도처에서 일본 것이 감지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패밀리마트(일본 브랜드 편의점)다. 많기도 하지만 마트 유리벽에 붙은 가격표시판의 글씨체와 표기 방식이 일본과 똑같다. 거리 상점과 백화점의 상품 전시 방식과 세련된 포장도 일본을 방불케 한다. 호텔과 레스토랑, 쇼핑가도 마찬가지로 일본을 생각나게 한다. 그 연유, 오랫동안 일본 지배에서 비롯된 친밀성이다. 한반도가 일제에 강점된 건 36년. 그런데 대만은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부터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50년이나 된다.
이렇듯 대만의 외세 지배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대륙서 밀려난 반청복명의 한족과 제국주의 일본인 등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3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1948년부턴 대륙 각지의 한족까지 밀려들었다. 연전연패로 밀리던 국민당 군이 1949년 10월 진먼다오(金門島·대만에 부속한 섬)에 상륙한 홍군 1만 명과 벌인 전투에서마저 졌다면 지금의 대만은 아예 없다. 대만 명주 ‘진먼 고량주’엔 그 역사가 담겨 있다. 외딴섬인 데다 패주한 마당이라 진먼다오 방위부대엔 보급품도 부족했다. 그래서 군대 스스로 섬에서 키운 수수로 술을 빚어 그걸 팔아 자급자족했다. 그게 이 술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졌다. 이 주조장은 주민에게 매년 술을 선사하는데 그때 준 도움에 대한 보답이다.
장제스 총통이 대륙을 탈출한 건 1949년. 경비행기를 타고 부인 쑹메이링과 함께 대만에 도착한 장 총통은 본토 수복을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깨졌다. 대만이 중공(중국공산당)과 대적하는 미국의 최후 방어선이 되면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한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누렸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유엔에 진입하며 회원국 지위마저 상실(1971년)했다. 시대의 풍운아 장제스 총통이 숨진 건 그 4년 후. 당시 그는 국부(國父)로 숭앙됐고 그래서 타이베이 시내 여의도공원만 한 거대 부지에 높이가 70m에 이르는 웅장한 중정기념관이 화교와 국민의 기부금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관광지에도 장제스의 유산이라 할 게 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15km 북쪽의 온천명소 양밍산(陽明山)이다. 애초엔 차오산(草山)이었는데 1945년에 거처를 여기 둔 장제스가 존경해온 명나라 학자 왕양명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개명했다. 이 산엔 유황온천이 곳곳에 있고 거기엔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욕과 경치를 함께 즐기는 대형 노천욕장이 있다.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101빌딩(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 역시 그렇다. 이 건물의 건립 계획은 1992년 시작됐는데 그해는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한 해. 대만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이 특별한 건물을 통해 중국의 위협에도 대만이 건재함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정부 주도의 이 건축에 대만 13개 은행이 공동으로 건축비를 갹출했다.
고궁박물원의 수장품도 장제스의 유산이다. 국민당 정부는 전세가 기울자 1948년 11월 베이징에서 ‘대철퇴(大撤退)’ 논의를 개시했다. 중요 문물의 대만 이전을 뜻하는 것인데 유물 보존보다는 청나라 법통이 국민당 정부로 이어진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이들은 물품을 선별해 난징(장쑤성)에 모아두고 12월부터 해군 함정과 상선으로 실어 날랐다. 그게 고궁박물원 수장고에 보관 중인 송, 원, 명, 청 네 왕조의 도자기 서화 책자 등 75만 건. 하지만 이건 난징에 쌓아두었던 양의 10분의 1. 나머지는 반출하지 못했다. 린퉁파(林桶法) 교수(대만 푸런대 역사학과)는 “그래도 중요한 건 다 가져왔다”고 말했다.(2년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당 정부의 패퇴로 대만은 대륙 한족의 피란처가 됐다. 1953년 조사 당시 외성인(外省人·대륙주민)은 120만 명. 당시 대만 인구(800만 명)의 15%였는데 이 비율은 지금도 비슷하다. 이런 역사를 알고 나면 대만의 다양한 문화와 먹을거리, 그리고 외향적인 분위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타이베이 주변 가볼만한 곳▼
예류엔 기암괴석… 양밍산엔 노천온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대만 식민은 37년 만에 끝났다. 반청복명을 외치며 청에 맞서다 이 섬까지 밀려난 세력에 의해서다. 타이난의 질랜디아 요새가 이들에게 함락되자 네덜란드는 즉시 대만을 떴다. 길지 않은 세월, 하지만 유산은 크다. 그들은 엄청난 국부를 챙겼다. 유럽서 고가에 팔리던 설탕(사탕수수)과 쌀, 차 플랜테이션 덕분. 하지만 더 귀중한 게 있다. ‘타이완’(대만의 한자어 발음)이란 국명이다. 그건 질랜디아 요새가 있던 ‘타이워완(臺窩灣)’에서 유래했다. 타이워완이 ‘타이완’으로 변한 것이다. 타이난 지역은 대만의 ‘문화적 수도’다. 전통과 역사 숨쉬는 고도다. 대만의 중심이 1887년 타이베이로 옮겨지기 전까지만 해도 타이워완이 있는 타이난이 수도였다. 그 타이난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다양한 거리음식인데 타이베이 명소가 된 야시장이 그 유산이다. 그러니 이제 스린, 라오허제, 스다, 화시제 같은 타이베이 야시장에 들르걸랑 타이난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기억하자.
대만을 여행한 이라면 누구든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왜 대만엔 일본을 닮은 게 이렇게 많은 건지. 그렇다. 도처에서 일본 것이 감지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패밀리마트(일본 브랜드 편의점)다. 많기도 하지만 마트 유리벽에 붙은 가격표시판의 글씨체와 표기 방식이 일본과 똑같다. 거리 상점과 백화점의 상품 전시 방식과 세련된 포장도 일본을 방불케 한다. 호텔과 레스토랑, 쇼핑가도 마찬가지로 일본을 생각나게 한다. 그 연유, 오랫동안 일본 지배에서 비롯된 친밀성이다. 한반도가 일제에 강점된 건 36년. 그런데 대만은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부터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50년이나 된다.
이렇듯 대만의 외세 지배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대륙서 밀려난 반청복명의 한족과 제국주의 일본인 등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3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1948년부턴 대륙 각지의 한족까지 밀려들었다. 연전연패로 밀리던 국민당 군이 1949년 10월 진먼다오(金門島·대만에 부속한 섬)에 상륙한 홍군 1만 명과 벌인 전투에서마저 졌다면 지금의 대만은 아예 없다. 대만 명주 ‘진먼 고량주’엔 그 역사가 담겨 있다. 외딴섬인 데다 패주한 마당이라 진먼다오 방위부대엔 보급품도 부족했다. 그래서 군대 스스로 섬에서 키운 수수로 술을 빚어 그걸 팔아 자급자족했다. 그게 이 술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졌다. 이 주조장은 주민에게 매년 술을 선사하는데 그때 준 도움에 대한 보답이다.
장제스 총통이 대륙을 탈출한 건 1949년. 경비행기를 타고 부인 쑹메이링과 함께 대만에 도착한 장 총통은 본토 수복을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깨졌다. 대만이 중공(중국공산당)과 대적하는 미국의 최후 방어선이 되면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한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누렸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유엔에 진입하며 회원국 지위마저 상실(1971년)했다. 시대의 풍운아 장제스 총통이 숨진 건 그 4년 후. 당시 그는 국부(國父)로 숭앙됐고 그래서 타이베이 시내 여의도공원만 한 거대 부지에 높이가 70m에 이르는 웅장한 중정기념관이 화교와 국민의 기부금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관광지에도 장제스의 유산이라 할 게 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15km 북쪽의 온천명소 양밍산(陽明山)이다. 애초엔 차오산(草山)이었는데 1945년에 거처를 여기 둔 장제스가 존경해온 명나라 학자 왕양명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개명했다. 이 산엔 유황온천이 곳곳에 있고 거기엔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욕과 경치를 함께 즐기는 대형 노천욕장이 있다.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101빌딩(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 역시 그렇다. 이 건물의 건립 계획은 1992년 시작됐는데 그해는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한 해. 대만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이 특별한 건물을 통해 중국의 위협에도 대만이 건재함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정부 주도의 이 건축에 대만 13개 은행이 공동으로 건축비를 갹출했다.
고궁박물원의 수장품도 장제스의 유산이다. 국민당 정부는 전세가 기울자 1948년 11월 베이징에서 ‘대철퇴(大撤退)’ 논의를 개시했다. 중요 문물의 대만 이전을 뜻하는 것인데 유물 보존보다는 청나라 법통이 국민당 정부로 이어진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이들은 물품을 선별해 난징(장쑤성)에 모아두고 12월부터 해군 함정과 상선으로 실어 날랐다. 그게 고궁박물원 수장고에 보관 중인 송, 원, 명, 청 네 왕조의 도자기 서화 책자 등 75만 건. 하지만 이건 난징에 쌓아두었던 양의 10분의 1. 나머지는 반출하지 못했다. 린퉁파(林桶法) 교수(대만 푸런대 역사학과)는 “그래도 중요한 건 다 가져왔다”고 말했다.(2년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당 정부의 패퇴로 대만은 대륙 한족의 피란처가 됐다. 1953년 조사 당시 외성인(外省人·대륙주민)은 120만 명. 당시 대만 인구(800만 명)의 15%였는데 이 비율은 지금도 비슷하다. 이런 역사를 알고 나면 대만의 다양한 문화와 먹을거리, 그리고 외향적인 분위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타이베이 주변 가볼만한 곳▼
예류엔 기암괴석… 양밍산엔 노천온천…
장제스 중화민국 초대총통의 업적을 기리는 중정기념당의 정문. 문 뒤로 높이 70m 기념관이 보인다. summer@donga.com
타이베이와 주변에서 갈 만한 곳은 주펀과 예류(野柳), 중정(中正)기념당을 들 수 있다. 주펀(‘아홉 등분’이란 한자어)은 가파른 산기슭에 좁은 골목을 이루며 들어선 산동네. 여기 살던 아홉 가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아랫마을에서 사온 물건을 똑같이 나누어 썼다 해서 이렇게 불려왔다고 한다. 금맥 발견으로 한때 금광이 들어서 흥청댔지만 폐광 후엔 관광지로 변했다. 작은 찻집과 선물가게 상점이 좁은 골목에 즐비하다.
예류는 타이베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해안 경승지로 우리의 정동진 격. 해안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즐비한데 융기 현상에 따라 수면 위로 노출된 바위가 오랜 세월 바람과 비, 파도에 침식된 결과다. 초입의 안내센터에선 한국어 안내 동영상(15분)을 볼 수 있다.
예류는 타이베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해안 경승지로 우리의 정동진 격. 해안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즐비한데 융기 현상에 따라 수면 위로 노출된 바위가 오랜 세월 바람과 비, 파도에 침식된 결과다. 초입의 안내센터에선 한국어 안내 동영상(15분)을 볼 수 있다.
타이베이 시내 야시장 중 하나인 화시제.
타이베이 시내 중정기념당은 미국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을 본뜬 것으로 링컨 대통령처럼 의자에 앉은 장제스 총통의 거대한 좌상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지금은 볼 수 없다. 장 총통의 어린 시절부터 대만 체류까지 전 생애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 사진과 더불어 다양한 기록물로 전시 중이다. 입장 무료.
도교와 불교가 혼재한 사찰 룽산쓰.
양밍산(陽明山)의 노천온천욕은 습도 높은 타이베이 여행길에 청량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대만의 노천욕장에선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타이베이 101빌딩 전망대 오르기도 빼놓을 수 없다. 긴 줄을 서야 하는 대낮보다 저녁식사 후 늦은 시간에 야경을 즐기는 것도 좋다. 88층을 37초 만에 오르내리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이 부문 세계 최고(기네스북 기록)다. 타이베이 야시장으론 관광명소인 도교·불교사원 룽산쓰(龍山寺)와 이웃한 화시제(華西街)를 권한다. 두 곳을 함께 둘러볼 수 있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타이베이(대만)에서 조성하 여행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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