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미투’ 이후 문단이 발칵 뒤집혔다. 여러 작가가 ‘미투’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이와 관련, 과거 성폭력 실태를 폭로·고발한 글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한 인간의 인권 차원을 넘어 문화예술계의 존립을 훼손하는 존엄성 문제다.
《서울대저널》 2016년 12월호(140호) |
'서울대저널' 2016년 12월호(140호)에 실린 〈문학은 성착취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아니다〉에 따르면, 여성 소설가 A 씨는 “남성 중견문인들이 술자리에서 후배 여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따먹고’ 싶은 순서를 매기거나 이들과 맺은 성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며 상대 여성을 ‘걸레’라고 칭하는 일 등을 목격해 왔다”고 밝혔다.
원로 문인이 있는 술자리에 암묵적으로 젊은 여성 문인이나 편집자가 그의 옆이나 맞은편에 앉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원로 문인이 여성 문인의 신체에 자연스럽게 손을 대기도 한다.
원로 문인이 있는 술자리에 암묵적으로 젊은 여성 문인이나 편집자가 그의 옆이나 맞은편에 앉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원로 문인이 여성 문인의 신체에 자연스럽게 손을 대기도 한다.
또 다른 여성 소설가 B 씨는 “원로 문인을 수행하는 일이 일방적으로 젊은 여성 문인에게만 부과된다”며 “‘P 선생님은 양옆에 여자를 꼭 끼고 다녀야만 한다’는 소문을 실제로 확인하게 됐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B 씨는 편집인 L 씨의 소개로 원로 문인 K 씨가 있는 술자리에 초대됐다. B 씨는 자연스럽게 K 씨의 옆자리로 안내됐었다. 이에 대해 B 씨가 L 씨에게 의문을 표하자, L 씨는 “그래야 내 기가 살지”라는 말로 응수했다. B 씨는 이러한 관행이 일상화된 분위기에서는 자신이 받은 성희롱·성추행·성폭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문단 권력이 성폭력 양산
2016년 '문학과사회' 겨울호(116호). |
2016년 '문학과사회' 겨울호(116호)도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았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이미라(가명)는 자신의 시를 인정해 주던 기성 시인과 수 차례 성관계를 갖고 임신까지 한다. “더 이상 나의 시를 봐주지 않을까 봐, 내가 시를 쓸 수 없게 될까 봐,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워 시인의 성관계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낙태를 했지만 그는 그 시인과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를 유지한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인상 공모전에 당선됐을 때 이미라는 소감문에다 그 시인에게 감사하다고까지 써야 했다.
신인 작가들이 기성 작가들에게 성희롱·성추행을 당하는 이유는 문단 내 권력 때문이다. 문단을 쥐락펴락 하는 기성 작가들의 눈에 들지 않고선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발표할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2015년 7월 창간한 문예서평지 '악스트'에서 소설가 천명관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출판사와 언론사, 그리고 대학이 카르텔을 형성해 시스템을 만들고 작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작가는 더 이상 문단의 주인이 아니다. 선생님들이 주인이다. 권력은 언제나 그 권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다. 하지만 나는 모든 심사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의 명단을 확인할 때마다 그 실체를 경험한다.
'서울대저널' 2016년 12월호(140호)에 실린 성폭력 피해 사례. |
요즘 신인들은 어떻게 써야 등단을 하고 문학상을 받는지 영악하게 알고 있다. 나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취향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다 비슷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한 주머니에 다 담아도 삐져나오는 송곳 하나 없다는 게 기이할 정도다. 결국 선생님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시스템이 반백년 넘게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이다.”
어린 작가 지망생이 주로 타켓
2017년 1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페미라이터 이성미씨는 문단 내 성폭력이 작가 지망생들에게 주로 일어난다고 했다. 특히 비등단 창작자, 미성년자일 때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수가 많다는 것이다. 등단제도가 단일하고 강고하기 때문에 문단의 경계 밖으로 사각지대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고 학생들의 경우 입시 문제가 걸려 있다. 실기 강사가 기성 문인이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면서도 강사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최소한 입시나 등단까지는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몇 년이나 침묵하게 된다. 대학에서도 등단과 작품 활동에 불이익이 있을까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데, 가해 문인은 자신의 힘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문단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 “자신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아느냐” 등의 명시적 암묵적 위협으로 침묵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문학 창작 환경이 과외나 창작교실 등의 사교육-예고-대학 문창과와 국문과까지 동일하게 이어지는 구조, 교육자-저자-심사위원-문학상 수상자 등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가 피해자들이 폭력에 저항하거나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검찰이나 경찰 수사, 여성단체 상담에서도 문학 또는 예술계에서 작동하는 상징 권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여, 업무상 위력에 의한 폭력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피해사실을 의심받기도 한다.
이성미씨는 일상화된 문단 내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문인 단체의 회원(문인)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별도의 성폭력 상담기구 설치 △신인상을 주최한 문예지 및 신문사와 연계해 신인작가 성평등 교육 실시 △문학출판계 성폭력 관련 상설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