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진보가 뭔지도 모르고 친북이니 종북이니… 투사는 용납할 수 없었다
- 조선일보
입력 : 2018.02.24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4>김지하(1941~)
처음 필명은 '地下'였는데 어느새 잔디밭과 강의 '芝河'로 변해 굳어져
정치인과 재벌 싸잡아 비난한 '오적'으로 유명세
군사독재 끝나고 '생명'으로 다시 놀라게 한 탈속한 신선 같은 시인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고 국사학에 일가견을 가졌던 천관우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 없지만 김지하의 일은 역사에 남을 겁니다." 국사학계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던 천관우의 한마디였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김지하가 한 일은 우리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나도 믿고 있다.
그는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얼굴이 오늘도 매우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는 귀태(貴態)가 엿보이는 점잖은 얼굴의 소유자였고 전기 기술자로 생계를 이어 갔다. 김지하와 나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그의 어머니도 자주 만나게 됐는데 생활이 어려웠던 탓이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세파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뛰어난 남도 미인이었고 김지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은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도 미인답게 상냥하고 싹싹한 미소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줬다.
김지하가 원주로 이사 온 동기는 분명히 모르지만, 그는 원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썩 잘하던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에 입학해 1966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학생 시절부터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크게 분개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군사 정권에 의해 강행되던 때 학생 시위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시절 그의 멘토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였고, 그가 문단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69년 '황톳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의 필명이 처음에는 땅 아래를 뜻하는 '지하(地下)'였지만 어느새 그의 필명은 잔디밭과 강을 뜻하는 '지하(芝河)'로 변해 굳어져서 그의 본명이 김영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이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4개월이나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 1970년 정치인과 재벌을 싸잡아 비난·매도하는 시 '오적'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반공법을 위반하였다 해 체포돼 그 시를 게재한 '사상계'의 대표 부완혁과 같은 감방에 한동안 갇혀 있었다.
김지하의 이름은 이 나라 학생층과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거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 그는 박경리의 딸이면서 연대 사학과를 졸업한 천진난만한 규수 김영주와 결혼해 원보와 세희,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미 반정부 운동으로 우뚝 선 김지하는 속칭 민주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거처를 여러 번 바꾸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눈을 피해 다녔는데, 그때 나와 김지하의 연락을 맡아준 이화여대 사회학과 학생의 이름은 장하진이었다. 나중에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장하진은 김지하를 존경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마다치 않고 김지하를 위해 온갖 수고를 감수했다. 나도 남산 중앙정보부에 자주 잡혀가던 시절,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던 때였다. 나를 신문하던 오치억 계장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장하진이라는 학생 아시죠. 매우 무서운 젊은 여성입니다. 내 앞에서 새빨간 눈을 부릅뜨며 '이 정권은 곧 망해야 해'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1970년대 뜻있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지하의 위치와 영향력이 그 정도였다.
김지하는 천재적 소질을 여러 방면에 타고난 사람이다. 군사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가 '비어(蜚語)' 또는 '구리 이순신' 등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고 나갔는데 군사 독재의 시대는 끝나고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가 됐을 때 김지하는 그가 원했다면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 높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언젠가 그는 자기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다. 양심선언이나 참회록도 그렇게 철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민을 다 들어주면서도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준 원보의 어머니는 참 훌륭한 여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진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진보라는 깃발을 들고 나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어쭙잖은 가치를 내세우는 작자들을 단연 멀리했다. 대한민국을 어지럽히는 인간들을 향한 그의 확고부동한 자세는 강남 일대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무산자 혁명을 꿈꾸는 한심한 인간들과 달랐다.
젊어서부터 김지하는 건강이 썩 좋지 못한 젊은이였다. 그가 중앙정보부 감시하에 마산요양병원에 수용돼 있다가 풀려나 서울에 올 때 중앙정보부는 나를 지도교수로 정해 내가 마산까지 가서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게 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탈속한 신선 같은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나에게 그려준 난초는 대원군을 저리 가라 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나는 김지하와 내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며 함께 존재해 온 사실에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천관우가 남긴 말을 되새겨본다. 김지하는 우리 역사에 틀림없이 남을 것이라는 그의 한마디를.
김지하가 원주로 이사 온 동기는 분명히 모르지만, 그는 원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썩 잘하던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에 입학해 1966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학생 시절부터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크게 분개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군사 정권에 의해 강행되던 때 학생 시위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시절 그의 멘토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였고, 그가 문단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69년 '황톳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의 필명이 처음에는 땅 아래를 뜻하는 '지하(地下)'였지만 어느새 그의 필명은 잔디밭과 강을 뜻하는 '지하(芝河)'로 변해 굳어져서 그의 본명이 김영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이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4개월이나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 1970년 정치인과 재벌을 싸잡아 비난·매도하는 시 '오적'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반공법을 위반하였다 해 체포돼 그 시를 게재한 '사상계'의 대표 부완혁과 같은 감방에 한동안 갇혀 있었다.
김지하의 이름은 이 나라 학생층과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거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 그는 박경리의 딸이면서 연대 사학과를 졸업한 천진난만한 규수 김영주와 결혼해 원보와 세희,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미 반정부 운동으로 우뚝 선 김지하는 속칭 민주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거처를 여러 번 바꾸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눈을 피해 다녔는데, 그때 나와 김지하의 연락을 맡아준 이화여대 사회학과 학생의 이름은 장하진이었다. 나중에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장하진은 김지하를 존경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마다치 않고 김지하를 위해 온갖 수고를 감수했다. 나도 남산 중앙정보부에 자주 잡혀가던 시절,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던 때였다. 나를 신문하던 오치억 계장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장하진이라는 학생 아시죠. 매우 무서운 젊은 여성입니다. 내 앞에서 새빨간 눈을 부릅뜨며 '이 정권은 곧 망해야 해'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1970년대 뜻있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지하의 위치와 영향력이 그 정도였다.
김지하는 천재적 소질을 여러 방면에 타고난 사람이다. 군사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가 '비어(蜚語)' 또는 '구리 이순신' 등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고 나갔는데 군사 독재의 시대는 끝나고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가 됐을 때 김지하는 그가 원했다면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 높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언젠가 그는 자기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다. 양심선언이나 참회록도 그렇게 철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민을 다 들어주면서도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준 원보의 어머니는 참 훌륭한 여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진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진보라는 깃발을 들고 나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어쭙잖은 가치를 내세우는 작자들을 단연 멀리했다. 대한민국을 어지럽히는 인간들을 향한 그의 확고부동한 자세는 강남 일대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무산자 혁명을 꿈꾸는 한심한 인간들과 달랐다.
젊어서부터 김지하는 건강이 썩 좋지 못한 젊은이였다. 그가 중앙정보부 감시하에 마산요양병원에 수용돼 있다가 풀려나 서울에 올 때 중앙정보부는 나를 지도교수로 정해 내가 마산까지 가서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게 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탈속한 신선 같은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나에게 그려준 난초는 대원군을 저리 가라 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나는 김지하와 내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며 함께 존재해 온 사실에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천관우가 남긴 말을 되새겨본다. 김지하는 우리 역사에 틀림없이 남을 것이라는 그의 한마디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3/20180223017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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