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2.28 03:05
장쩌민·후진타오의 수족 차례로 쳐내… 황제 자리 거머쥐다
- 조선일보
[종신집권 꿈꾸는 시진핑… 5년 만에 '1인 천하' 어떻게 가능했나]
정적 보시라이 비리사건 터지자 反부패 앞세워 경쟁세력 무력화
후진타오 정권 핵심 저우융캉에 장쩌민 군부 인맥까지 사정 칼날
권력 놓는 순간 보복 당할까봐 장기집권 추진한다는 분석도
2012년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에 대한 서구의 평가는 "역대 최약체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에 과묵하고 무색무취한 그에게서 13억명을 이끌 강력한 리더십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서구 언론 평가는 그러나 완전히 달라졌다. 개혁·개방 이래 40년간 이어진 '국가주석 10년 임기제' 헌법 조항을 폐지하려는 시진핑을 그들은 '21세기 마오쩌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치며 제도화된 권력 계파 간 안배와 집단지도 체제는 시진핑 주석에 의해 폐지될 처지다. 그는 어떻게 단 5년 만에 1인 종신 집권을 꿈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것일까.
첫째 동력은 시대적 배경이었다.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한 2010년 '아랍의 봄', 201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중국 공산당에 충격을 안겨 줬다. 부패한 독재자들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은 '지금처럼 가다간 중국 공산당도 망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겨 줬다. 그런 위기감은 부패와의 전쟁에 나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치며 제도화된 권력 계파 간 안배와 집단지도 체제는 시진핑 주석에 의해 폐지될 처지다. 그는 어떻게 단 5년 만에 1인 종신 집권을 꿈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것일까.
첫째 동력은 시대적 배경이었다.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한 2010년 '아랍의 봄', 201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중국 공산당에 충격을 안겨 줬다. 부패한 독재자들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은 '지금처럼 가다간 중국 공산당도 망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겨 줬다. 그런 위기감은 부패와의 전쟁에 나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시진핑이 제거한 정적과 후계자 그룹 정리 그래픽](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02/28/2018022800292_0.jpg)
공교롭게도 시진핑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대형 부패 사건이 터졌다. 첫 장본인은 시 주석의 최대 후계 경쟁자 보시라이 충칭 서기였다. 그는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시진핑보다 네 살 위인 태자당 그룹의 맏형이었다. 시 주석이 권좌에 오르기 한 해 전인 2011년 그는 비리·조폭 척결을 내세워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핵심 측근인 충칭 공안국장의 미국 망명 시도, 아내의 살인 사건이 잇따라 밝혀지며 몰락했다. 그가 낙마한 2012년 3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후진타오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 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의 아들이 만취 상태로 최고급 페라리 스포츠카를 몰다가 숨진 것이다. 사건 당시 차에는 알몸의 여대생 두 명도 타고 있었다. 링지화는 후진타오 주석의 비서실장이었다.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시진핑 주석은 대대적인 반(反)부패 사정으로 연결했다. '호랑이(부패한 권력층)든 파리(지위가 낮은 비리 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는 시진핑 정권의 선언에 여론은 열광했다. 시 주석은 반부패 캠페인을 철저히 정치적 경쟁 세력을 척결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했다. 같은 태자당 출신인 왕치산을 사정 책임자로 앉히고 칼날을 휘둘렀다. 타깃 설정은 신중하고 전략적이었다. 상대 세력의 수장(首長)이 아니라 2인자 그룹을 노렸다.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 저우융캉, 중국 군부 내 장쩌민 인맥의 대부인 궈보슝·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이 그렇게 날아갔다. 온갖 비리 혐의를 들이밀면서 잘라내겠다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수족을 지킬 명분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당·정·군 3대 권력 집단을 자기 세력으로 물갈이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군권은 나중에 넘겨받는 관행을 깨뜨린 그의 승부 근성은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2012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자신의 전임자 장쩌민이 그랬던 것처럼 후임자에게 군사위 주석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시 주석은 집무를 거부하며 압박했고 후진타오는 결국 군사위 주석까지 한 번에 넘겨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덕분에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군권까지 완벽히 쥔 상태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전선동에서도 그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과감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그를 다룬 기사는 한 해 3000건이었다. 후진타오 시절은 2000건이었다. 시 주석은 무려 5000건이었다. 그는 또 인터넷을 완전히 틀어쥐고 반대 여론을 원천 차단했다. 작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그는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 그 같은 난제를 성취하려면 강력하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집권 연장을 예고했다. 하지만 반부패로 인해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가 권력이라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이 장기 집권을 노리는 또 다른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오쩌둥 시대에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시진핑 주석은 대대적인 반(反)부패 사정으로 연결했다. '호랑이(부패한 권력층)든 파리(지위가 낮은 비리 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는 시진핑 정권의 선언에 여론은 열광했다. 시 주석은 반부패 캠페인을 철저히 정치적 경쟁 세력을 척결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했다. 같은 태자당 출신인 왕치산을 사정 책임자로 앉히고 칼날을 휘둘렀다. 타깃 설정은 신중하고 전략적이었다. 상대 세력의 수장(首長)이 아니라 2인자 그룹을 노렸다.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 저우융캉, 중국 군부 내 장쩌민 인맥의 대부인 궈보슝·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이 그렇게 날아갔다. 온갖 비리 혐의를 들이밀면서 잘라내겠다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수족을 지킬 명분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당·정·군 3대 권력 집단을 자기 세력으로 물갈이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군권은 나중에 넘겨받는 관행을 깨뜨린 그의 승부 근성은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2012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자신의 전임자 장쩌민이 그랬던 것처럼 후임자에게 군사위 주석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시 주석은 집무를 거부하며 압박했고 후진타오는 결국 군사위 주석까지 한 번에 넘겨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덕분에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군권까지 완벽히 쥔 상태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전선동에서도 그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과감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그를 다룬 기사는 한 해 3000건이었다. 후진타오 시절은 2000건이었다. 시 주석은 무려 5000건이었다. 그는 또 인터넷을 완전히 틀어쥐고 반대 여론을 원천 차단했다. 작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그는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 그 같은 난제를 성취하려면 강력하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집권 연장을 예고했다. 하지만 반부패로 인해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가 권력이라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이 장기 집권을 노리는 또 다른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오쩌둥 시대에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정적 날린 칼잡이 왕치산, 시코노믹스 설계자 류허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시진핑 제국 만든 1등 공신들
시진핑 주석을 '시 황제(皇帝)' 반열에 올린 1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왕치산 전 당 중앙기율위 서기다. 시진핑 주석과 같은 혁명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낸 그는 시진핑 집권 1기 상무위원 중 시진핑 주석과 귓속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몇 개월씩 사라지면 반드시 그 뒤에는 거물급 인사의 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곤 했다.
왕 전 서기의 반(反)부패 작업을 시 주석의 권력 강화로 연결시켜 준 인물이 자오러지 상무위원이다. 당 중앙조직부장으로 당내 고위인사 1400명의 파일을 쥐고 있었던 그는 왕치산이 제거한 정적(政敵) 자리에 시진핑 인맥을 채워넣는 역할을 했다. '왕치산이 뜨면 자오러지가 바빠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시진핑 집권 2기, 공산당 최고위직인 7인의 상무위원에 오른 인물을 보면 대부분 참모형,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다. 장쩌민·후진타오 시절에는 각 권력 계파의 실력자들이었던 점과 대비된다.
왕후닝 상무위원은 장쩌민·후진타오 시절부터 외교·안보 분야의 책사로 활약해온 인물이다. 당 통치이념 면에서는 천민얼 충칭 서기가 복심으로 불린다. 그는 시 주석이 저장성 서기 시절 선전부장 겸 저장일보 사장을 맡아, 시 주석 이름으로 4년간 게재된 칼럼의 초고를 쓴 인물이다. 시 주석 통치철학의 밑그림을 함께 그린 인물이다.
경제 면에서는 시진핑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류허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이 있다. 그는 시코노믹스 설계자로 불린다.
리잔수 상무위 원은 시진핑 집권 1기 거의 모든 해외 순방에 동행했던 인물이다. 시진핑 집권 1기 당 중앙판공실 주임(비서실장)을 맡아 시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허베이성 정딩현에서 밑바닥 행정을 배울 때 이웃한 현의 수장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 30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평생을 지방을 돌다가 67세에 상무위원에 발탁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왕후닝 상무위원은 장쩌민·후진타오 시절부터 외교·안보 분야의 책사로 활약해온 인물이다. 당 통치이념 면에서는 천민얼 충칭 서기가 복심으로 불린다. 그는 시 주석이 저장성 서기 시절 선전부장 겸 저장일보 사장을 맡아, 시 주석 이름으로 4년간 게재된 칼럼의 초고를 쓴 인물이다. 시 주석 통치철학의 밑그림을 함께 그린 인물이다.
경제 면에서는 시진핑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류허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이 있다. 그는 시코노믹스 설계자로 불린다.
리잔수 상무위 원은 시진핑 집권 1기 거의 모든 해외 순방에 동행했던 인물이다. 시진핑 집권 1기 당 중앙판공실 주임(비서실장)을 맡아 시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허베이성 정딩현에서 밑바닥 행정을 배울 때 이웃한 현의 수장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 30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평생을 지방을 돌다가 67세에 상무위원에 발탁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8/20180228002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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