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에 예사롭지 않은 산이 있다. 봉황산(鳳凰山)이다. 봉황은 예로부터 ‘새 중의 왕은 봉황이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百獸)의 왕은 호랑이’라는 말처럼 상서로운 동물인데 중국에서는 봉황이 천자(天子)를 상징하고 있다. 천자가 사는 궁문(宮門)에 봉황을 장식해 봉궐(鳳闕) 혹은 봉문(鳳門)이라 했고 아름다운 누각은 봉대(鳳臺)라고 불렀다. 해발 818m의 산이 봉황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위에서 본 산세(山勢)가 꼭 봉황처럼 생긴 이유에서라고 한다.
그런 이 산이 더 유명해진 것은 초입에 들어선 절 때문이다. 이 절에 얽힌 전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골담초’라고도 불리는 선비화(禪扉花)다. 이 평범치 않은 나무는 의상(義湘)대사(625~702)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의상은 자기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으며 말했다고 한다. “나무가 싱싱한지 시들었는지를 보고 내 생사(生死)를 알라!” 1400년 가깝도록 나무가 시든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의상대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신통하다 보니 탐욕을 부린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가장 유명한 것은 광해군 때 관찰사 정조(鄭造)에 대한 구전(口傳)이다. 그는 ‘대사의 지팡이’를 지니고 싶어 그만 나무줄기를 잘라 갔는데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이런데도 선비화의 잎이 아들을 낳는 데 효험 있다, 질병에 좋다고 소문나 몰래 따가는 이들이 많아지자 결국 선비화는 금속으로 된 쇠창살 안에 갇히고 만다. 높이 1m70cm, 굵기가 사람 손마디만한 나무의 슬픈 운명이라 하겠다.
‘산 초입에 들어선 절’이 어디인지는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이다. 해동화엄종찰(宗刹) 부석사(浮石寺)다. 부석사를 세 차례 다녀왔는데 이 사찰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이 중학교 국사수업 때니 세월의 괴리가 40여 년이나 된다. 선비화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와 관련됐다면 부석사 자체에는 의상대사의 로맨스가 얽혀 있다. 다 아시다시피 의상은 벗 원효(元曉)와 함께 650년 당(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잠을 자려고 찾아든 무덤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한밤 원효의 갈증을 풀어 준 감로수(甘露水)가 다음 날 알고 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닫고 당나라행을 단념했다. 의상에게도 다른 사연이 있다. 열아홉 때인 644년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승려가 됐던 의상은 원효와 헤어져 홀로 중국으로 갔다가 요동(遼東)에서 첩자로 몰려 신라로 추방됐다. 의상은 굴하지 않고 661년 이번엔 뱃길로 중국으로 향해 이듬해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양주(揚州) 종남산에는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602~668)스님이 있었다. 지엄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 의상은 오랜 여행 끝에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런 의상을 보며 연정(戀情)을 품은 이가 바로 유지인의 딸 선묘(善妙) 낭자였다. 의상은 서른여섯, 선묘는 열일곱 꽃다운 나이로 의상이 몸을 추스르는 데 최선을 다하다 의상을 연모한 것이다. 하지만 스님에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71년 신라로 귀국할 때 의상은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안타깝게 만나지 못했다. 뒤늦게 의상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는 바닷가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망망대해의 점(點)처럼 보일 뿐이었다. 낭자는 어떻게 했을까. 선묘는 의상에게 전달하려 했던 비단을 바다에 던지며 “이 비단이 님에게 전달되게 하소서” 하고 빌었다. 놀랍게도 선물은 의상의 배로 날아갔다. 선묘는 이어 자신이 용(龍)이 돼 의상의 배를 호위하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지고야 만다.
의상과 선묘의 인연은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석사를 지을 때 500여 이교도(異敎徒)가 나타나 의상을 괴롭힐 때 선묘는 그의 꿈에 등장해 해법을 가르쳐줬다. 의상이 선묘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드리니 큰 바위가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지금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옆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용(龍)이 된 선묘가 실제로 들어올린 것이라고 한다.
바위가 두번 세번이나 공중으로 치솟자 이교도들은 겁에 질려 의상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짓는데 힘을 합치게 됐다. 과연 공중에 뜬 바위가 존재할까? 이런 의심이 있는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地)》에서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리지 않는다”고 해 부석(浮石)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묘는 이후 부석사를 지키는 용이 돼 무량수전 앞뜰에 묻혔다는데 1967년 우리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실제로 5m나 되는 석룡(石龍)의 하반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낭자를 기린 작은 각(閣)이 있다.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676년인데 왜 하필 봉황산에 터를 잡은 것일까? 봉황산이란 이름이 산세에서 비롯됐다고 하지만 의상이 이 산에 절을 세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봉황산은 당시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지도를 보면 봉황산은 태백산맥 줄기로 남으로는 청량산-각화산, 서남쪽은 선달산-형제봉-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진다. 이 서남쪽이 바로 지금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경계였던 것이다.
고(故)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에 잊지 못할 글이 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부석사에는 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석사의 창건 과정과 선묘에 얽힌 전설 외에 무량수전, 안양문(安養門)이 있는데 이 이름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니다. 무량수는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국토,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한다. ‘안양’이란 말 역시 극락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경기도에 있는 안양시도 같은 한자인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경기도 삼성산에 고려 개국을 도운 스님에게 절을 지어 주며 바친 안양사라는 이름이 그대로 시(市)의 명칭이 됐다고 한다.
안양루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33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극락으로 가는 33천(天)이다. 안양루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장관인데 앞서 다룬 김삿갓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백발이 된 지금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라는 시를 남겼다. 더 나아가 의상과 관련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열 개의 절이 어딘가를 두고 기록이 갈린다. 《삼국유사》에는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6곳만 등장한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부석사·화엄사·해인사·범어사·옥천사 외에 미리사·보원사·갑사·국신사·청담사가 나온다. 미리사는 중악공산(中岳公山),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는 미리사를 말한다.
보원사는 웅주(熊州) 가야협, 즉 지금의 충남 서산 운산면에 있고, 계룡산 갑사, 전주 무산의 국신사는 지금도 존재해 있다. 문제는 ‘한주 빈아산 청담사’인데 이 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하니 안타깝다. 의상이 창건하거나 간여한 화엄십찰에는 다 전설이 있다. 의상이 맨먼저 세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의상이 유학 길에 오르기 전 동해(東海) 인근 굴에 관음보살이 산다는 말을 듣고 7일간 기도하자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등장했다.
천룡팔부는 중국인 김용의 소설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불법을 지키는 신장(神將)을 뜻한다.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등 여덟 신(神)이 그것이다.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아 의상이 처음 만난 분은 백의관음인데 다시 의상이 7일을 더 기도하자 마침내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에게 대나무 두 개가 솟아나는 자리에 절을 지으라는 말을 남겼다. 그곳이 바로 낙산사라니 예사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낙산사는 강화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불교에서 으뜸으로 꼽는 기도처라고 한다. 보문사와 보리암 역시 다녀온 적이 있지만 이 유서 깊은 낙산사가 몇 년 전 대화재로 전소(全燒)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서기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지었다. 얼마전 인도 수상이 왔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0년 전 인도공주와 가야의 왕이 결혼했다”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 인도와의 인연도 꽤나 깊다.
이 절은 이후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면서 이름이 높아지고 670년 의상이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사방의 벽에 화염경을 새기며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 됐다. 나중에는 도선국사까지 간여했다니 대단한 절이 아닐 수 없다. 이 장륙전이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으로 이름이 바뀐 데도 설화가 있다. 조선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인조가 복원했고 숙종이 중수(重修)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불사(佛事)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계파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는 걱정이 돼 밤새 대웅전에서 밤샘기도를 드리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대신 맨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말했다. 스님이 한참 길을 가는데 웬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
스님은 난처했지만 꿈에 등장한 노인의 말을 어길 수 없어 시주를 권했는데 노파는 한참을 듣더니 이런 말을 남기고 길가의 늪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겠으니 문수대성은 가피(加被·도움)를 내리소서.” 이후 계파스님이 몇 년 동안 불사를 이루지 못하고 전국을 걸식하던 끝에 한양에 도착했는데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 나온 어린 공주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공주는 스님을 보고 반가워 매달렸는데 한쪽 손이 불구였다. 펴지지 않는 손을 계파스님이 만지자 쫙 펴졌는데 손바닥에 ‘장륙전’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감동 받은 숙종이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는 장륙전을 중수할 비용을 댔다. 전각이 완성된 후 장륙전의 이름이 바뀐다. ‘각황’, 즉 임금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각황전으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내친김에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의 창건 설화도 살펴보기로 한다. 청량사는 해발 870m인 청량산의 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올라가기가 꽤나 힘겹다.
청량사는 특이하게도 663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說)이 엇갈리는 사찰이다. 하지만 설화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의상보다는 원효가 건설의 주역이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는데 여기엔 뿔이 세 개 달린 소(牛)가 등장한다. 절을 짓고 있을 때 부근 마을에 뿔이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이 송아지는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얼마되지 않아 낙타처럼 크고 힘도 세 ‘남민’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먹성 좋은 소의 여물을 대기에도 급급했다고 한다.
어느 날 원효가 이곳에 나타나자 그 소가 갑자기 순하게 변하더니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원효는 소의 주인에게 시주를 권했고 남민은 힘이 천하장사인 소의 도움을 받아 청량산 정상까지 돌과 나무를 옮길 수 있었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 소가 갑자기 죽었다. 원효는 이를 불쌍히 여겨 소를 절 앞마당에 묻고 극락왕생을 축원했는데 알고 보니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그 소를 묻은 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세 가지로 갈라졌다.
청량사의 대웅전을 유리보전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내부의 약사여래불과 문수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각각 종이(紙)와 모시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산이 험해 들고 올라가기 쉽도록 가벼운 재질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의상대사는 청량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연화봉(蓮花峯)이 의상봉으로 불리며 근처에 의상굴·의상암이 있기 때문이다. 의상암은 지금 절터만 남아 있으며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절의 역사에 ‘원효와 의상이 함께 지었다’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신라시대 절의 창건에 힘쓴 이가 의상이기에 그의 이름을 거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불교사를 보면 원효보다는 의상의 무게가 더 느껴지니까 말이다.
앞서 말한 낙산사 창건 설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親見)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원효가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원효가 낙산사를 향해 가는데 흰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짓꿎은 원효가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한 여인이 생리가 묻은 속옷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은 피묻은 더러운 물을 건넸다. 이에 원효가 물을 버리자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스님은 (관음보살을 만나러)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놀란 원효가 뒤를 돌아보자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가 관음보살상을 보니 거기 나머지 짚신 한짝이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앞서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현신(顯身)임을 알게 됐다. 이렇게 의상은 고상하게, 원효는 미련하게 그려진 설화는 왜 나왔을까? 의상이 수도에 힘쓴 반면 원효는 거리의 포교에 주력했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까지 낳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기나긴 불교이야기를 한 것은 수년 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뉘우침 때문이다. 당시 영국을 기점으로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을 종횡(縱橫)하며 많은 것을 보고 공부하면서 〈조선닷컴〉에 ‘옥스퍼드레터’라는 형태의 기행문을 연재한 적이 있다. 당시 시리즈를 쓰며 너무도 유럽의 문화가 부러웠다.
분명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중세까지는 압도적으로 그들을 앞섰는데 왜 그들에겐 찬란한 문화가 남고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하고 자탄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름대로 전국 팔도를 주유(周遊)했다고 믿어 왔는데 알고 보니 지금까지 본 것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돌아온 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영국·프랑스·이탈리아처럼 세계에 자랑할 우리 문화유산(遺産)은 대체 무엇인가, 세계에 내놓을 우리 인적 자산(資産)은 누구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산하(山河)를 돌아보며 이런 잠정 결론을 얻게 됐다. 한반도에 산재한 사찰(寺刹)과 서원(書院)이야말로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한민족의 보물(寶物)이며 보존 상태도 우리 전란사(戰亂史)를 감안해도 열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 어느 곳을 봐도 도시 중심에 교회가 서 있듯 492년 고려사와 맥을 함께한 불교유산과 518년 조선사를 받친 서원문화가 눈에 비친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전국 사찰을 취재하며 느낀 게 대체 우리 절 가운데 의상(義湘)대사나 자장(慈藏)율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몇 군데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때론 도선(道詵)국사 같은 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두 스님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조선일보》에서 종교를 담당하는 전문기자에게 “혹시 조계종에서 의상대사나 자장율사가 지은 절이 몇 개나 되는지 통계를 뽑아 놓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런 자료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의상은 625년에 태어나 702년에 사망했고 자장율사는 590년에 태어나 65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 산이 더 유명해진 것은 초입에 들어선 절 때문이다. 이 절에 얽힌 전설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골담초’라고도 불리는 선비화(禪扉花)다. 이 평범치 않은 나무는 의상(義湘)대사(625~702)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의상은 자기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으며 말했다고 한다. “나무가 싱싱한지 시들었는지를 보고 내 생사(生死)를 알라!” 1400년 가깝도록 나무가 시든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의상대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신통하다 보니 탐욕을 부린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가장 유명한 것은 광해군 때 관찰사 정조(鄭造)에 대한 구전(口傳)이다. 그는 ‘대사의 지팡이’를 지니고 싶어 그만 나무줄기를 잘라 갔는데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이런데도 선비화의 잎이 아들을 낳는 데 효험 있다, 질병에 좋다고 소문나 몰래 따가는 이들이 많아지자 결국 선비화는 금속으로 된 쇠창살 안에 갇히고 만다. 높이 1m70cm, 굵기가 사람 손마디만한 나무의 슬픈 운명이라 하겠다.
부석사 일주문에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한밤 원효의 갈증을 풀어 준 감로수(甘露水)가 다음 날 알고 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닫고 당나라행을 단념했다. 의상에게도 다른 사연이 있다. 열아홉 때인 644년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승려가 됐던 의상은 원효와 헤어져 홀로 중국으로 갔다가 요동(遼東)에서 첩자로 몰려 신라로 추방됐다. 의상은 굴하지 않고 661년 이번엔 뱃길로 중국으로 향해 이듬해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양주(揚州) 종남산에는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602~668)스님이 있었다. 지엄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 의상은 오랜 여행 끝에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런 의상을 보며 연정(戀情)을 품은 이가 바로 유지인의 딸 선묘(善妙) 낭자였다. 의상은 서른여섯, 선묘는 열일곱 꽃다운 나이로 의상이 몸을 추스르는 데 최선을 다하다 의상을 연모한 것이다. 하지만 스님에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석사로 가려면 계속 오르막이다. 계단을 수없이 넘어야 한다. |
의상과 선묘의 인연은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석사를 지을 때 500여 이교도(異敎徒)가 나타나 의상을 괴롭힐 때 선묘는 그의 꿈에 등장해 해법을 가르쳐줬다. 의상이 선묘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드리니 큰 바위가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지금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옆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용(龍)이 된 선묘가 실제로 들어올린 것이라고 한다.
바위가 두번 세번이나 공중으로 치솟자 이교도들은 겁에 질려 의상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짓는데 힘을 합치게 됐다. 과연 공중에 뜬 바위가 존재할까? 이런 의심이 있는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地)》에서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리지 않는다”고 해 부석(浮石)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묘는 이후 부석사를 지키는 용이 돼 무량수전 앞뜰에 묻혔다는데 1967년 우리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실제로 5m나 되는 석룡(石龍)의 하반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무량수전 뒤에는 선묘낭자를 기린 작은 각(閣)이 있다.
자연목 그대로를 문지방으로 삼았다. |
고(故)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에 잊지 못할 글이 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부석사에는 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석사의 창건 과정과 선묘에 얽힌 전설 외에 무량수전, 안양문(安養門)이 있는데 이 이름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니다. 무량수는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국토,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한다. ‘안양’이란 말 역시 극락세계를 뜻한다고 한다. 경기도에 있는 안양시도 같은 한자인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경기도 삼성산에 고려 개국을 도운 스님에게 절을 지어 주며 바친 안양사라는 이름이 그대로 시(市)의 명칭이 됐다고 한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가위 천하일품이다. |
보원사는 웅주(熊州) 가야협, 즉 지금의 충남 서산 운산면에 있고, 계룡산 갑사, 전주 무산의 국신사는 지금도 존재해 있다. 문제는 ‘한주 빈아산 청담사’인데 이 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하니 안타깝다. 의상이 창건하거나 간여한 화엄십찰에는 다 전설이 있다. 의상이 맨먼저 세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의상이 유학 길에 오르기 전 동해(東海) 인근 굴에 관음보살이 산다는 말을 듣고 7일간 기도하자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등장했다.
사찰의 문에 새겨진 문양은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
실제로 낙산사는 강화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불교에서 으뜸으로 꼽는 기도처라고 한다. 보문사와 보리암 역시 다녀온 적이 있지만 이 유서 깊은 낙산사가 몇 년 전 대화재로 전소(全燒)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서기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지었다. 얼마전 인도 수상이 왔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0년 전 인도공주와 가야의 왕이 결혼했다”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 인도와의 인연도 꽤나 깊다.
부석사라는 명칭이 유래한 뜬돌이다. |
당시 불사(佛事)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계파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는 걱정이 돼 밤새 대웅전에서 밤샘기도를 드리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대신 맨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말했다. 스님이 한참 길을 가는데 웬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
부석사 안양루를 정면에서 보면 그 유명한 ‘유령불’이 보인다. |
이에 감동 받은 숙종이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는 장륙전을 중수할 비용을 댔다. 전각이 완성된 후 장륙전의 이름이 바뀐다. ‘각황’, 즉 임금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각황전으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내친김에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의 창건 설화도 살펴보기로 한다. 청량사는 해발 870m인 청량산의 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올라가기가 꽤나 힘겹다.
화엄사 각황전의 웅장한 모습이다. |
어느 날 원효가 이곳에 나타나자 그 소가 갑자기 순하게 변하더니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원효는 소의 주인에게 시주를 권했고 남민은 힘이 천하장사인 소의 도움을 받아 청량산 정상까지 돌과 나무를 옮길 수 있었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 소가 갑자기 죽었다. 원효는 이를 불쌍히 여겨 소를 절 앞마당에 묻고 극락왕생을 축원했는데 알고 보니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었던 것이다. 그 소를 묻은 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세 가지로 갈라졌다.
청량사의 대웅전을 유리보전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내부의 약사여래불과 문수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각각 종이(紙)와 모시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산이 험해 들고 올라가기 쉽도록 가벼운 재질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의상대사는 청량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봉화 청량산 청량사는 올라가는 게 거의 등산하는 수준이다. |
앞서 말한 낙산사 창건 설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親見)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원효가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원효가 낙산사를 향해 가는데 흰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짓꿎은 원효가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한 여인이 생리가 묻은 속옷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하자 여인은 피묻은 더러운 물을 건넸다. 이에 원효가 물을 버리자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스님은 (관음보살을 만나러)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놀란 원효가 뒤를 돌아보자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가 관음보살상을 보니 거기 나머지 짚신 한짝이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앞서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현신(顯身)임을 알게 됐다. 이렇게 의상은 고상하게, 원효는 미련하게 그려진 설화는 왜 나왔을까? 의상이 수도에 힘쓴 반면 원효는 거리의 포교에 주력했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까지 낳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청량사 유리보전 앞에서 본 석탑이다. |
분명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중세까지는 압도적으로 그들을 앞섰는데 왜 그들에겐 찬란한 문화가 남고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하고 자탄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름대로 전국 팔도를 주유(周遊)했다고 믿어 왔는데 알고 보니 지금까지 본 것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돌아온 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영국·프랑스·이탈리아처럼 세계에 자랑할 우리 문화유산(遺産)은 대체 무엇인가, 세계에 내놓을 우리 인적 자산(資産)은 누구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 산하(山河)를 돌아보며 이런 잠정 결론을 얻게 됐다. 한반도에 산재한 사찰(寺刹)과 서원(書院)이야말로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한민족의 보물(寶物)이며 보존 상태도 우리 전란사(戰亂史)를 감안해도 열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 어느 곳을 봐도 도시 중심에 교회가 서 있듯 492년 고려사와 맥을 함께한 불교유산과 518년 조선사를 받친 서원문화가 눈에 비친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전국 사찰을 취재하며 느낀 게 대체 우리 절 가운데 의상(義湘)대사나 자장(慈藏)율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몇 군데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때론 도선(道詵)국사 같은 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두 스님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조선일보》에서 종교를 담당하는 전문기자에게 “혹시 조계종에서 의상대사나 자장율사가 지은 절이 몇 개나 되는지 통계를 뽑아 놓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런 자료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의상은 625년에 태어나 702년에 사망했고 자장율사는 590년에 태어나 658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