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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1895~1985) -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이강기 2018. 3. 29. 07:45

[Why] "백 박사는 어떻게 백 개나 가졌소" 일제 치하에도 농담 주고받아…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일보

입력 : 2018.03.24 03:02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8>백낙준(1895~1985)

평안도 정주서 태어나 연세대 초대 총장으로
부산 피란 시절에도 천막 치고 가르친 큰 스승
연세대 들이닥친 시위대에 웃으며 '난 독재 능력 없어'

백낙준
이철원 기자
용재 백낙준은 189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의 넷째 아들이던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평판이 자자하던 백낙준은 중학교를 마친 뒤 중국 천진에 있는 신학서원에서 수학했다.

그는 신성중 교장이던 선교사 맥큔(온산온)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파크대에 입학해 역사를 전공했다. 뒤에는 프린스턴대 신학교를 다녔고 졸업 뒤 목사 자격을 얻었다. 그는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곧이어 예일대에 입학, 교회사를 전공했고 1927년 '조선개신교사'를 써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유억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로 취임했는데 그때부터 그가 사귄 인물들은 당대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유억겸을 필두로 정인보·윤치호·김성수 등 명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해방이 되자 백낙준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추대됐고 곧 대학으로 승격한 연희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1957년 그의 노력으로 연희와 세브란스가 통합돼 연세대가 탄생했을 때도 그는 초대 총장이 됐다. 안호상의 뒤를 이어 이승만 정부의 문교부 장관이 됐고 6·25사변이 터졌을 당시 고려대 총장이던 현상윤에게 함께 피란을 가자고 전화로 권했지만, 현상윤은 "나는 공산당에게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으니 피란 갈 이유가 없다"면서 피란을 거부했다. 현상윤은 납북돼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그는 부산 피란 시절에도 교육만은 계속 진행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문교 행정을 총괄했다. 'UN 한국 재건단'의 원조를 받아 종이를 마련해 교과서를 찍었고 남한 곳곳에서 천막을 치고 교육을 계속해 당시 영국의 타임지도 한국의 교육 현상을 크게 다룬 적이 있다. 그렇게 한 것은 교육자 백낙준의 투철한 신념이었다.

내가 해방된 이듬해 연희대학에 입학했을 때 백낙준은 51세의 장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총장 시간'에 그가 학생들을 향해 던진 교훈은 나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미국의 어떤 학자가 인체의 성분을 다 분석해 돈으로 환산했더니 다 합쳐도 1달러 몇 전밖에 안 되더라고 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한 번 말문을 열면 백낙준의 입에서는 청산유수처럼 시원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시간에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읽고 있던 자들은 너무나 큰 가르침을 놓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4·19 뒤에 민주당의 장면이 집권하였을 때 연세대에서도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 극소수가 '총장 나가라, 이사장 물러나라'고 떠들면서 백낙준을 독재자로 몰았다. 그는 웃으면서 '나는 독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라고 하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참의원이 창설되던 해 선거에 출마해 서울시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표를 받고 당선돼 초대 의장에 취임했지만 5·16 군사혁명이 터졌다.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처럼 학자 겸 정치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아흔이 되기까지 놀라울 만한 기억력을 간직하고 있었던 용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훈장에게 천자문을 배웠는데 훈장이 내가 천자문을 하도 잘 외우는 것을 보고 놀라서 위에서 아래로만 외우지 말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도 암송하라고 해 암기한 것이 80년이 더 됐다. 그런데 요새 갑작스레 다 생각이 나. 그동안 영어는 많이 잊어버렸어."

용재가 잔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일하던 때 그와 친분이 있는 당시의 명사들 사이에 말 못할 농담들이 오고 갔다. 수주 변영로가 용재 백낙준에게 전화를 했는데 비서가 그 전화를 받고 무심코 대화 내용을 듣게 됐다. 수주가 용재를 향해 "백 박사는 영어 이름이 'George Paik'이라니 나는 그게 하나밖에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백 개나 가졌소?" 그렇게 농담을 하니 용재는 낄낄거리고만 있더라는 것이다. 그 시절에 그런 농담들을 하면서 일제 치하 억울함을 달랜 것이 아닐까 나는 짐작해본다.

용재가 쉰을 갓 넘었던 나이에 그의 제자가 돼 40년을 모셨는데 그에게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오늘의 나는 무엇이 됐을까. 평범하고 무능한 노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백낙준은 나를 연세대 총장을 만들어보려고 유학도 시켰고 기회도 마련해줬지만 나는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유별난 노선을 택했기 때문에 스승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세대에서 물러나게 됐다.

용재 교육의 골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명기돼 있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 그는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랐고 평범한 평안도 산골에 농부 아들로 태어난 사람답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철저한 평등사상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고 정치에도 참여했다.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33년이 됐다. 용재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다. 그 스승이 떠난 뒤에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가. 막연하기 짝이 없는 30여년의 세월이었다. 그 스승의 능력과 업적에 10분의 1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 제자는 가슴을 스스로 어루만지면서 붓을 놓아야 할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3/20180323017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