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敎

마흐디(Mahdi) - 순니와 시아가 다른 이유

이강기 2018. 4. 28. 17:39

마흐디(Mahdi) - 순니와 시아가 다른 이유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월간조선


⊙ 마흐디는 기독교의 메시아, 불교의 미륵과 유사한 존재 … 순니에서는 중시하지 않지만 시아에서는 숭배
⊙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이슬람법 전문가들은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무슬림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찾아 해석하고 알려주는 존재
⊙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마흐디를 대신한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통치하는 나라
                            

예배를 인도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바로 뒤 흰색 양복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은 사람이 아흐마디네자드 전 대통령. 시아파는 예배인도자가 움푹 파인 낮은 곳에서 예배를 이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부(副)왕세자 시절인 5월 1일 자국 알아라비야 텔레비전과 인터뷰에서 “이란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대화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란은 헌법과 호메이니의 가르침에 기반한 극단주의 사상으로 만들어진 국가로,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을 장악하여 12이맘 시아파 신앙을 널리 퍼뜨리고 이맘 마흐디(Imam Mahdi)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라다. 이란은 “이맘 마흐디가 올 것이라고 믿고, 마흐디의 재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며 무슬림 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란과 상호 이해관계를 두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란 정부가 “이맘 마흐디와 관련된 목표를 이루길 원하기 때문에 이란인들의 삶은 열악하다”면서 “이란 정권은 하룻밤 사이에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바꿀 경우 정권의 정통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라며 마흐디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이란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도대체 마흐디가 누구이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이토록 이란을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마흐디는 아랍어 동사 ‘하다(hada)’, 즉 ‘인도(引導)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이 바르게 인도한 사람’을 뜻한다. ‘인도하다’는 코란의 핵심어 중 핵심어다. 코란 첫 장을 펴면 하나님에게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1장 6절)”라고 간절히 바라는 기원문이 나온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원죄, 세례, 구원을 이야기할 때, 이슬람은 시종일관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인도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코란에서 말하는 인도의 주체는 하나님이니, 마흐디는 하나님이 이끄는 자다.
 
  정작 코란에는 마흐디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초기 이슬람 시대에 이 말은 존칭어로 쓰였던 것 같다. 7세기 초 무함마드와 같은 시대를 산 시인 하산 이븐 사비트(Hasan ibn Thabit)는 무함마드를 마흐디로 불렀다. 또 7세기 후반에는 이슬람을 원래대로 완전한 모습으로 재현할 공동체의 지도자를 마흐디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마흐디는 종말론적 인물을 뜻하게 된다. 무슬림들은 마흐디를 세상이 종말에 다달아 불의로 가득 차 있을 때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를 마흐디로 부를 때는 이러한 종말론적 의미가 없었다.
 
  순니파 무슬림들은 마흐디의 존재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마흐디라는 종말론적 인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바로 마흐디라고 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예수 재림 때 마흐디가 무슬림 공동체를 이끈다는 견해도 있었다. 코란에 따르면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올렸기에 예수는 종말의 시각에 다시 강림하는데, 마흐디와 예수의 관계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예수 외의 마흐디는 없다’는 전승과 ‘마흐디와 예수가 둘 다 세상 종말 때 온다’는 전승이 혼재한다.
 
 
  이슬람 세계의 미륵
 
시아파 무슬림들이 기다리는 12번째 이맘 마흐디. 얼굴을 표현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인다.
  순니 세계의 대표적인 석학 알가잘리(1058~1111)를 위시하여 여러 저명한 순니파 무슬림 학자들은 애써 마흐디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마흐디라는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종말론적 존재 마흐디가 내포한 정치적 변혁, 사회변동을 우려하는 마음이 더 컸을 가능성이 크다. 마흐디는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에 마흐디 신앙이 커질수록 현존 무슬림 사회의 붕괴나 분열이 촉발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미륵불의 화신(化身)으로 자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미륵불을 정변(政變)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처럼 마흐디도 기존 정치질서를 허물면서 무슬림 사회의 격변을 촉발할 수 있다. 1881년 수단의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 압드 알라가 스스로를 마흐디로 선포하고 튀르크-이집트 통치자의 지배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 좋은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니 세계 무슬림 대중은 마흐디 도래를 믿으며 기다렸다. 마흐디에 관한 전승 대다수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한 이븐 칼둔(1332~1406)은 그의 역작 《무깟디마(Muqaddima, 서설·序說)》에서 사람들이 마흐디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들은 종말의 시각이 오면 예언자 무함마드 집안 출신 인물이 이슬람 신앙을 굳건히 하고 정의를 확립할 것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이 그를 따를 것이다. 그는 무슬림들을 다스리고, 마흐디로 불린다. 그의 뒤를 이어 적(敵)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이때 전승에 기록된 대로 종말의 징후가 나타난다. 그런 후 예수가 강림하여 적그리스도를 죽인다. 또는 마흐디와 함께 예수가 강림하여 마흐디를 도와 적그리스도를 죽이고, 예배 때 마흐디 뒤에 선다.〉
 
  그러나 순니파 이슬람에서는 마흐디가 종말에 이슬람의 정의를 굳건히 세울 것이라는 믿음이 신조로 확립되지는 못하였다. 순니파의 신앙을 대변하는 5가지 기둥(신앙증언, 예배, 희사, 단식, 순례), 6가지 믿음(유일신, 경전, 예언자, 천사, 최후의 심판, 정명) 어디에도 마흐디의 도래가 명문화되지 않았다.
 
 
  12이맘
 
632년 최후의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디르쿰에서 알리를 후계자로 선언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습.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알리.
  시아파, 더 상세히 구분하여 말하자면 시아파의 주류인 12이맘 시아파의 마흐디관(觀)은 순니파와 많이 다르다. 시아파는 마흐디가 종말 시대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죄 없이 순결하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874년 5살 때 사라져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는 12번째 이맘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알아스카리(Muhammad ibn al-Hasan al-Askari)가 바로 마흐디라고 믿는다. 무함마드 이븐 알하산 알아스카리는 ‘알마흐디 문타자르(al-Mahdi al-Muntazar)’라고도 하는데, ‘오시길 기다리는 마흐디’ 라는 의미다.
 
  12이맘 시아파는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마지막 메카순례를 마치고 일행과 헤어지는 갈림길인 가디르쿰(Ghadir Khumm)에서 무슬림력으로 두 알핫즈(Dhu al-Hajj)월 18일에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Ali)를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로 지명하였다고 믿는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무함마드 사후 무슬림 공동체 통수권은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거쳐 656년에야 비로소 알리에게 전해졌다. 그래서 시아파는 가디르쿰에서 한 예언자의 말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공동체의 지도자를 칼리파, 즉 예언자의 ‘대리자’라고 부르는 순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이맘’이라고 한다. 이맘은 지도자, 인도자, 안내자라는 뜻인데, 학자, 원로, 예배 인도자 등을 가리킬 때 두루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시아에서 말하는 이맘은 이러한 일반적인 뜻과는 달리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순니 칼리파와 달리 이들에게는 예언자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코란의 행간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대 이맘 알리는 예언자의 딸 파티마와 혼인하여 2번째 이맘인 큰아들 하산과 3번째 이맘인 둘째 아들 후세인을 낳았다. 4번째부터 12번째 이맘은 모두 후세인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니까 12명 이맘 모두 예언자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다.
 
  시아는 더 나아가 예언자, 예언자의 딸 파티마, 12이맘을 합쳐 모두 14명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순결한 존재라고 믿는다. 인간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늘 열려 있지만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흐디로 오는 12번째 이맘도 그래서 순결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이맘의 후계자 이슬람법 전문가
 
시아파 첫 번째 이맘 알리. 좌측 녹색 옷을 입은 소년이 두 번째 이맘 하산, 오른쪽 붉은색 옷 소년은 세 번째 이맘 후세인.
  그렇다면 874년 사라졌다는 12번째 이맘 마흐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부분은 이맘들이 죄 없이 순결하다는 것과 함께 오늘날 순니파 무슬림들이 손사레를 치며 거부할 뿐 아니라 말도 안 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상이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11번째 이맘 하산 알아스카리가 죽자 장례를 이끈 12번째 이맘 마흐디는 목숨을 노리던 순니 압바스 칼리파조의 칼날을 피해 오늘날 이라크 사마르라의 10번째, 11번째 이맘 무덤 옆 모스크 아래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12번째 이맘은 4명의 충직한 대리인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였다. 그런데 941년 이맘 마흐디는 4번째 대리인 아부 알-하산에게 6일 후 죽을 터이니 준비를 잘하고 다음 대리인은 지명하지 말라는 내용의 서한을 직접 서명하여 보냈다. 죽기 직전 4번째 대리인은 누가 다음 대리인이 될 것이냐는 주변의 질문에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시아파는 4번째 대리인의 죽음을 기점으로 874~941년을 12번째 이맘의 소은폐기, 이후를 대은폐기로 나눈다. 더 이상 대리인이 없기에 세상은 12번째 이맘과 소통할 통로가 없다. 그래서 이맘의 대은폐기다. 이맘 마흐디는 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제 그를 만날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 버리고 세상이 폭력과 불의로 가득 찬 종말의 시대뿐이다.
 
  그러나 이맘 마흐디가 세상과 완전히 소통을 끊은 것은 아니다. 시아파는 이맘의 가르침을 이슬람법 전문가들을 통해 따른다. 이들은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무슬림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법을 찾아 해석하고 알려준다. 지금 어디엔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종말의 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재림하는 이맘 마흐디를 위해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세상을 이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란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완성한 ‘이슬람법 전문가의 통치’로,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정치체제다.
 
 
  숙적 이란과 사우디
 
예배를 인도하는 이란이슬람공화국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왼쪽 뒤 첫 번째가 루하니 대통령. 왼쪽에서 5번째가 알리 라리자니 국회의장, 7번째 갈색 옷이 호메이니의 손자 하산 호메이니.
  이란 헌법 5조는 이맘 마흐디를 ‘시대의 주(主)’로 칭하면서 이맘 마흐디를 대신하여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이란을 이끈다고 선언한다.
 
  〈시대의 주 ─ ‘지고하신 신이시여, 그의 출현을 서둘러주시옵소서!’ ─ 부재(不在) 시, 헌법 107조에 따라 이란이슬람공화국에서 이맘의 권위와 인도의 책임은 정의롭고, 경건하고, 시대를 잘 알고, 용감하며, 행정가인 이슬람법 전문가가 진다.〉
 
  이란을 신정(神政)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슬람법 전문가정(專門家政)이다.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때까지 이맘으로부터 권위와 인도의 능력을 위임받아 시아파 국가를 이끄는 것이다.
 
  이맘 마흐디에 믿음이 신조로 자리 잡지도 않고, 역사적으로 대학자들이 믿을 만한 것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마흐디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생각도 없는 순니파 무슬림들의 눈으로 보면 시아파의 마흐디 사상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굳건한 믿음이다. 중동 헤게모니를 두고 이란과 다투고 있는 순니파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에서 보면, 시대의 주 이맘 마흐디가 올 때까지 이슬람법 전문가들이 국가를 다스리는 이란은 사실상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왕세자는 이란의 헌법과 호메이니의 가르침은 극단적인 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1979년 혁명 이래 이란은 팽창정책을 펴면서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란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노린다고 하면서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주목표가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슬림의 예배방향에 도달하는 것이 이란 정권의 주목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전투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저기 이란에서 벌어지도록 애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두고 이란이 공격을 가하겠다느니 점령하겠다느니 하면서 험하고 거친 말을 쏟아 부은 적은 없다. 사실 근대 시아파에 대한 공격은 와하비 근본주의로 무장한 사우드 가문이 먼저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선조 셰이크 사우드가 이끄는 1만2000여 명의 와하비 전사들이 1801년 4월 시아파 주민들이 나자프로 순례를 간 사이를 틈타 카르발라를 침입하여 3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하고 3번째 이맘 후세인이 묻힌 사원을 파괴한 것은 시아파 무슬림의 역사적 기억에 깊은 상처와 회한으로 남아 있다.
 
 
  마흐디는 메카에 재림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의 마흐디 사상을 두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장소가 메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이맘 마흐디는 부정한 지도자 우마이야조의 칼리파 야지드 손에 카르발라에서 비참하게 죽어 간 3번째 이맘 후세인의 기일(忌日)인 아슈라(무슬림력 1월 10일)에 메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624년 바드르(Badr) 전투에서 전사한 313명의 신자들과 만날 것이다. 이어 이맘 마흐디는 첫 번째 이맘 알리가 순교하여 묻힌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Kufah)를 중심지로 삼아 거주할 것이라고 한다.
 
  바드르 전투는 무함마드가 박해를 받고 메카에서 메디나로 622년 이주한 후 자신을 괴롭히던 고향 메카 사람들과 처음으로 벌인 전투다. 이때 무함마드의 무슬림 공동체는 전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만일 패배했더라면 이슬람 신앙운동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필자가 이슬람 관련 글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이맘 마흐디가 제일 먼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은 순니,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펼쳐지고 있는 오늘날 중동 정세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874년에 사라진 사람이 어떻게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냐고 순니는 시아의 이맘 마흐디를 비난하고 비웃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시아는 하나님이 전능하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라고 반박할 뿐 아니라 재림의 장소가 메카라고 하니 현 정세에서는 긴장감이 도는 믿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주!
 
12번째 이맘이 이란의 잠카란에 출현했다는 전승에 따라 세운 잠카란 모스크.
  더욱이 이맘 마흐디 사상의 핵심이 불의를 타도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으로 이란혁명의 근간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이맘 마흐디는 단순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현실 사회를 변혁하는 강력한 정치적·사회적 동력을 제공한다. 1979년 이란혁명 때 호메이니에게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이맘 마흐디입니까?”라고 시아 무슬림이 물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마흐디 사상을 단순히 막연한 종말 사상이라고 얕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란혁명의 시작은 3번째 이맘 후세인의 기일이자 이맘 마흐디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아슈라였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순니 왕정국이 시아의 마흐디 사상을 대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이들 순니 왕정 산유국에서 시아파들은 석유가 매장, 생산, 유통되는 지역에 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레인은 시아파 주민이 다수다. 순니 왕정국의 시아파 주민은 왕국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 왔다고 불만이 가득하고, 왕국은 자국 내 시아파 주민이 같은 신앙을 지닌 시아파 이란의 사주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다.
 
  그러나 사실 마흐디의 파괴력은 시아파에만 국한되지 않고 순니파에도 미친다. 이란 혁명이 성공한 지 몇 개월 후인 이슬람력 1400년 1월 1일(1979년 11월 20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고 반기를 든 알우타이비가 알까흐타니를 마흐디로 선포한 후 400~500명의 추종자와 함께 약 2주간 성지 중의 성지인 메카 대모스크를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가 하나 되어 믿음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는 중동 이슬람 문화권에서 마흐디는 단순히 종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고리타분한 단어가 아니다. 984년 이맘 마흐디가 출현하였다고 전해지는 이란의 잠카란(Jamkaran)에는 이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세워져 참배객들의 발길이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테헤란 대학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이슬람 영성(靈性)의 수도” 테헤란에는 중동에서 가장 긴 거리가 있다. 남북으로 19.3km에 달하는 이 길의 이름은 ‘발리예 아스르(Vali-ye Asr)’다. 시대의 주! 마흐디는 지금 이 순간 믿는 이들의 마음과 삶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입력 : 2017.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