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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임진왜란’ 갑오왜란을 ‘갑오경장’으로 왜곡

이강기 2018. 6. 14. 20:56

‘제2의 임진왜란’ 갑오왜란을 ‘갑오경장’으로 왜곡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 식민지 프레임, 이제는 벗자



오늘의 덕수궁 야경. 경운궁이라 불렸던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다. 일제에 맞선 항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13년 동안 이룩된 많은 근대적 문물이 이곳에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1897년 10월 12일 선포로부터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13년 동안 존재했지만 마치 없었던 것처럼, 혹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폄하되곤 했던 나라가 대한제국이다. 존재감은커녕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은 망해도 싼 나라였을까.
 

일본, 1894년 동학 구실 불법 침략
경복궁 침공 왕 생포, 처절한 저항
2차 봉기 일본 vs 고종·동학 전쟁

왕비 시해는 왜란 이후의 을미왜변
항일 전쟁 위한 고종의 선택 ‘망명’
日 ‘비겁한 도망’ 개인 행위로 먹칠

동학 전쟁, 대한제국 항일 전쟁
반근대적·시대착오적이라 채색
좌뇌도 우뇌도 식민 프레임에 갇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대한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대한제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소위 ‘갑오경장’(1894)이 실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다. 우리 역사의 근대적인 서술 체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94년의 역사적 사건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정리한 것은 일제의 시각이다. 1894년에 벌어진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 백성이 처절하게 희생된 전쟁을 일제는 누락시켰다. 갑오왜란은 ‘은폐의 비밀’을 풀 열쇠다. 1894년 조선이 처한 국가 상황을 갑오경장이 아니라 갑오왜란의 시각으로 봐야 120년 동안 묻혀 있던 역사가 되살아난다.
 
1894년 8000명의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했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불법 침략이었다. 6월 26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3일 경복궁을 침공해 왕을 생포했다. 이후 전국 각 지방에서 일본군과 조선 백성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의 유생과 의병, 동학군들이 쓴 상소문과 격문을 보면 임진왜란의 재현이었다. 1592년(임진년) 일본의 침략이 임진왜란이라면, 1894년(갑오년) 일본의 침략도 엄연한 ‘갑오왜란’인 것이다.
 
당시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도 남원에서 1894년 8, 9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국왕 생포 사실을 접하고 이를 임진왜란 같은 침략전쟁으로 인지했다. 동학농민군이 10월에 제2차 봉기를 하며 내세운 구호는 ‘척왜(斥倭)’로 단일화됐다. 반봉건적 폐정 개혁을 구호로 내걸었던 그해 2월의 1차 봉기와 달랐다. 왜침(倭侵)에 대한 항전이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군의 불법 상륙에서부터 서울 점령과 경복궁 침범 등 무력행위에 대항해 조선군과 동학군 그리고 전국의 의병이 전개한 모든 전쟁은 갑오왜란에 대한 항전의 범주로 파악돼야 한다.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까지도 일본이 조선침략을 목적으로 일으킨 갑오왜란의 연장선에서 다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갑오왜란으로 죽은 조선인 희생자는 청일전쟁에서 죽은 청·일 양측의 수를 합친 것보다 네 배나 더 많았다. 1894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동학농민군이 3만 명이 넘는다. 열악한 의료 조건으로 결국 사망에 이른 전상자(戰傷者)까지 합치면 5만 명에 이르며, 여기에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왕궁 수비대 등 조선군과 일반 의병, 농민을 다 합하면 피살자 수는 20만 명이 넘는다. 많게는 30만~4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면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418명이었고 병사자(病死者)까지 포함한 총 사망자는 약 2만 명이었다. 청국 사망자는 대만에서의 희생자를 포함해도 약 3만 명이었다.
 
일본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가 1997년 일본에서 펴낸 저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푸른역사)는 이 분야의 고전이다. 일본군이 1894년 조선을 침략해 경복궁을 포위하고 국왕을 생포하는 전쟁 상황을 치밀하게 고증해냈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의 저자인 와다 하루키도 1894년의 상황을 “조선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이 조선전쟁을 “청일전쟁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와다 하루키 책의 해설문을 쓴 최덕규 박사는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조선전쟁은 한국 강점으로 이어진 동시에 독립을 되찾고자 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을 촉발했다. … 1945년까지 한국과 일본제국은 전쟁 중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최덕규 ‘해제’, 와다 하루키 지음,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제이앤씨, 2011, 85쪽)
 
“1894년 조선전쟁, 대한제국 독립전쟁 촉발”
우키요에(일본 풍속화)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1894년 조선의 상황을 그린 ‘조선 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朝鮮 京城戰爭 日本兵 大勝利圖)’. 표제나 그림 내용 모두 작가가 조선과의 전쟁으로 당시 상황을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강덕상 일 시가현립대 명예교수가 펴낸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김광열·박순애 옮김, 일조각, 2010)에 실려 있다. [사진 일조각]

우키요에(일본 풍속화)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1894년 조선의 상황을 그린 ‘조선 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朝鮮 京城戰爭 日本兵 大勝利圖)’. 표제나 그림 내용 모두 작가가 조선과의 전쟁으로 당시 상황을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강덕상 일 시가현립대 명예교수가 펴낸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김광열·박순애 옮김, 일조각, 2010)에 실려 있다. [사진 일조각]



당시 일종의 언론 기능을 했던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는 1894년이 한국과 일본 간의 전쟁 시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894년 그려진 우키요에에 ‘조선 경성 전쟁’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이 여러 장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1882년의 임오군란에 대해서도 ‘조선 대전쟁도’라고 규정한 우키요에가 전해진다.(강덕상 편저, 김광열·박순애 옮김,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 일조각, 2010) 우리 역사책만 그 시기를 전쟁이 아닌 개혁의 시기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학과 고종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고종이 동학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에게 내린 고종의 거의(擧義) 밀서 등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동학의 2차 봉기는 일본에 맞선 고종과 동학의 연합항전이었음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갑오왜란에서 승리한 일제가 친일 내각을 세워놓고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이 소위 갑오경장이다.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실제 아무것도 이뤄낸 것이 없는 이름뿐인 개혁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무슨 대단한 개혁을 한 것처럼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워왔고 또 각종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달달 외우고 있다. ‘갑오경장’이란 명칭에 속았던 것이다. 식민지 프레임의 함정이다.
 
1894년을 갑오왜란의 전쟁 상황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일제가 왜 왕비 시해라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까지 저질렀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을미사변’이라는 아무 내용도 없는 표현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갑오왜란으로 궁궐 속에 유폐당한 고종과 왕비가 일제의 군사강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밀어내려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했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의해 다시 돌려주게 되는데, 이 삼국간섭도 고종과 왕비의 대러시아 비밀외교의 성과였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1905년 8월 22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는 왕비 시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주한 공사(미우라)에게 명령을 내려 후자가 친일세력을 이끌고 궁중을 습격한 사건”으로 적어 놓았다.(최덕규 지음, ‘고종 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12년, 104쪽)
 
일본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들여 위장막을 치며 각종 ‘정치 쇼’를 했지만 고종과 백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왕비 시해사건의 가해자를 왜군으로 못 박는 ‘을미왜변’으로 불러야 ‘갑오왜란’의 연장선상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였음이 이제라도 명확해진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일본을 따라서 을미사변이라고 해선 안 될 것이다.
 
을미왜변 직후 조선은 국제적으로 ‘망한 나라’로 간주되었다. 왕비까지 시해당한 망국의 상황에서 고종이 항일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망명’이었다. 러시아 황제와의 비밀외교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동안 써온 ‘아관파천’이란 용어에는 국왕을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뜻이 담겼다. ‘파천(播遷)’이라 하면 고종이 도성을 떠나 지방으로 피란 갔다는 얘기인데 고종은 도성의 러시아 공관에 가 있었다. 그것도 숨으러 간 것이 아니라 반격의 싸움을 준비하러 간 것이다. 와다 하루키조차도 이를 “단순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와 갑오왜란에 대한 “최대의 반격”이라고 해석했다(와다 하루키 지음,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39쪽).
 
고종은 당시 만국공법상 외국이나 다름없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관으로 러시아 황제의 공식 약속을 얻어 ‘망명’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거듭해서 ‘망명(asylum)’이라고 말하고 있다(호머 헐버트 지음, 『The History of Korea』 302쪽). 그러나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일본 공사관은 아관망명 이틀 후부터 바로 ‘아관파천’으로 본국에 정보보고를 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관기록』 8권). 일본 공사관 기록, 일본 외무성 문서, 일본 신문들 그리고 친일파들만 ‘아관파천’ 또는 ‘노관(露館)파천’이라 했다.
 
아관망명 당시 러시아 공사관. 당시 서울 정동 일대에 모여 있던 외국 공관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까지 약 1년간 머물며 항일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현재는 탑 부분만 남아 있다.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아관망명 당시 러시아 공사관. 당시 서울 정동 일대에 모여 있던 외국 공관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까지 약 1년간 머물며 항일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현재는 탑 부분만 남아 있다.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대한제국 선포는 갑오왜란 돌파 신의 수

갑오왜란을 역사에서 지워버린 결과가 무엇인가. 을미왜변과 아관망명이 일제에 대한 ‘항쟁’ 관점에서 조명되는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의 경거망동과 자업자득, 고종의 비겁하고 치욕스러운 ‘도망’이라는 개인 행위로 흙칠이 되며 폄하된다.
 
대한제국 선포는 갑오왜란이라는 전시(戰時) 비상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고종의 ‘신의 한 수’였다. 이를 정상(正常) 국가의 정상적 국정 운영과 비교하면 안 된다. 대한제국 시기 급선무는 당연히 독립전쟁이었다. 대한제국이 근대화 개혁을 많이 이뤄냈지만 그 개혁도 독립전쟁의 다음 순위였다. 대한제국을 평가할 때 제1의 초점은 개혁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투쟁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근대사를 보는 시각은 두 갈래다. 하나는 지금까지 익숙한 시각이다.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란-청일전쟁-갑오경장-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독립협회·독립신문·만민공동회-러일전쟁-을사보호조약-군대해산-한일합병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시각이다. 노무현 정부 때 근현대사 교과서를 처음 만들면서 ‘좌파 교과서’라고 비판받은 교과서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논란 가운데 만들어진 ‘뉴라이트 국정교과서’ 시안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다. 식민지 프레임이 우리의 좌뇌와 우뇌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120년 동안 또 다른 시각이 폄하됐다. 갑오왜란에 맞선 동학농민전쟁, 을미왜변을 딛고 일어난 대한제국의 항일전쟁이 오히려 반근대적 수구세력으로 채색되는 것이다. 반면 일제의 사주에 의해 움직인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와 독립신문·만민공동회 등은 근대화의 시도였지만 아쉽게도 민비·고종·근왕파·친러 세력의 뒷다리 잡기로 인해 실패한 안타까운 사건들로 정리된다. 이런 틀 속에서 대한제국이 제대로 평가받을 리가 없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소위 ‘을사보호조약-군대해산-한일합병’을 거쳐 멸망하고 마는 허수아비 국가로 인식된다. 역사 서술에서 아예 빼버리거나 서술하더라도 독립협회의 ‘문명 개화’ 운동을 탄압한 친러 반동 수구 전제국가로 간단히 비하되곤 한다.
 
대한제국이 그렇게 보수반동의 수구정권이고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면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세울 때 굳이 대한제국을 승계하는 뜻을 밝혔을 이유가 없다. 대한제국의 국호를 계승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했고 헌법에는 ‘구황실 우대’ 조항까지 명시해 놓았다. 그 이유가 뭘까. 우리는 누구의 어떤 눈으로 우리 근대사를 보고 있는가.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역사박물관,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일조각, 시간여행 
 
더 읽어볼 만한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한영우·효형출판·2001),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영희·서울대출판부·2003),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 외·푸른역사·2006), 『끝나지 않은 역사』(이태진·태학사· 2017),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상 황태연·청계·2017)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