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격변기 ‘러시아 패싱’ 조바심
열강 틈새에 겪은 식민지와 분단… 역사의 치욕 되풀이 않으려면 치밀한 전략과 각오 다잡아야
고미석 논설위원
29년 만에 다시 찾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야말로 환골탈태 그 자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슨 새삼스러운 말이냐 하겠지만, 1989년에 방문했던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국가 위신을 걸고 월드컵에 온 나라가 총력 질주한 덕분일까. 음침하고 우중충한 건물들이 도열해 있던 30년 저편 잿빛 도시의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찾기 힘들었다. 쾌적한 공기가 도시를 감싸고 크고 작은 공원녹지가 들어앉아 서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를 보는 듯했다. 지난주 열린 ‘한-러 포럼’ 참석차 동행한 교수 한 분은 “6개월 전에 왔을 때랑 또 바뀌었다”며 변화 속도에 혀를 내두른다.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무표정한 러시아인들도 이제 달라졌다. 백야로 대낮처럼 환한 밤거리에서 러시아팀 승리를 자축하는 축구팬들의 응원과 행진이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러시아에 일주일 갔다 오면 소설 한 권을 쓰고, 한 달 머물면 수필 한 편을 쓰지만, 1년 지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그 실체를 쉽게 파악하기 힘든 국가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로 달라진 러시아. 겉만큼 속도 변했을까. 예컨대 한국 혹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 말이다.
조심스럽긴 해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실천적 한-러 협력’을 주제로 마련된 이번 포럼에서 나온 전직 주한 대사 등의 발언을 토대로 분위기를 유추해볼 수도 있겠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데다 그 행태를 오래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북핵 폐기에 회의적이었다. “북핵은 안보의 방패다. 악수와 오찬 했다고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부분적 비핵화라면 몰라도 완벽한 비핵화는 안 할 것이란 진단이다.
그러면서 ‘러시아 패싱’에 대한 조바심을 반영한 듯 다자협상의 틀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중국이 시종 그러하듯. 한반도 문제 해결에 당연히 러-중이 참여하는 평화안보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핵화 과정에서 입지 축소를 걱정하는 것은 러시아만이 아니다. 동북아 질서의 빠른 재편에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내세우며 지정학적 이해를 다투는 치열한 수 싸움을 진행 중이다. ‘중국 패싱’을 막으려 시진핑이 북에 종전선언 보류를 촉구했다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일본이 북한 관련 사업에 의욕을 보이고 외무성에 ‘북한과’를 신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다. 물꼬 튼 한국이 주역인 줄 알았는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 다들 북한 쪽에 관심 집중이다.
대격변기의 한반도 상황은 고차방정식으로도 풀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다. 아전인수 격 얕은 수와 달콤한 해석에 빠져 있다가는 봉변당하는 일이 늘 생길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친일반일, 친미반미, 친중반중, 친러반러 등 편을 나눠 국내에서 한민족끼리 다툴 일이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봉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치밀한 전략과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긴장감과 각오를 다잡아야 할 때다.
열강 틈새에 끼어 익사했던 구한말의 뼈저린 비극, 강대국의 논리에 따른 ‘코리아 패싱’과 분단, 그리고 6·25의 교훈. 그 100년의 교과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학습했는가.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나라를 도울 뿐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