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격변기 ‘러시아 패싱’ 조바심
열강 틈새에 겪은 식민지와 분단… 역사의 치욕 되풀이 않으려면 치밀한 전략과 각오 다잡아야
![](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8/06/27/90777247.1.jpg)
지난주 열린 ‘한-러 포럼’ 참석차 동행한 교수 한 분은 “6개월 전에 왔을 때랑 또 바뀌었다”며 변화 속도에 혀를 내두른다.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무표정한 러시아인들도 이제 달라졌다. 백야로 대낮처럼 환한 밤거리에서 러시아팀 승리를 자축하는 축구팬들의 응원과 행진이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러시아에 일주일 갔다 오면 소설 한 권을 쓰고, 한 달 머물면 수필 한 편을 쓰지만, 1년 지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그 실체를 쉽게 파악하기 힘든 국가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로 달라진 러시아. 겉만큼 속도 변했을까. 예컨대 한국 혹은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 말이다.
조심스럽긴 해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실천적 한-러 협력’을 주제로 마련된 이번 포럼에서 나온 전직 주한 대사 등의 발언을 토대로 분위기를 유추해볼 수도 있겠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데다 그 행태를 오래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북핵 폐기에 회의적이었다. “북핵은 안보의 방패다. 악수와 오찬 했다고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부분적 비핵화라면 몰라도 완벽한 비핵화는 안 할 것이란 진단이다.
그러면서 ‘러시아 패싱’에 대한 조바심을 반영한 듯 다자협상의 틀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중국이 시종 그러하듯. 한반도 문제 해결에 당연히 러-중이 참여하는 평화안보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핵화 과정에서 입지 축소를 걱정하는 것은 러시아만이 아니다. 동북아 질서의 빠른 재편에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내세우며 지정학적 이해를 다투는 치열한 수 싸움을 진행 중이다. ‘중국 패싱’을 막으려 시진핑이 북에 종전선언 보류를 촉구했다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일본이 북한 관련 사업에 의욕을 보이고 외무성에 ‘북한과’를 신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다. 물꼬 튼 한국이 주역인 줄 알았는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 다들 북한 쪽에 관심 집중이다.
대격변기의 한반도 상황은 고차방정식으로도 풀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다. 아전인수 격 얕은 수와 달콤한 해석에 빠져 있다가는 봉변당하는 일이 늘 생길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친일반일, 친미반미, 친중반중, 친러반러 등 편을 나눠 국내에서 한민족끼리 다툴 일이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봉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치밀한 전략과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긴장감과 각오를 다잡아야 할 때다.
열강 틈새에 끼어 익사했던 구한말의 뼈저린 비극, 강대국의 논리에 따른 ‘코리아 패싱’과 분단, 그리고 6·25의 교훈. 그 100년의 교과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학습했는가.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나라를 도울 뿐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