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위님과 연락이 끊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화물열차를 타고 왔어요.”
지난달 23일, 92세로 별세한 김종필 전 총리와 아내 고(故) 박영옥 여사가 결혼 전이던 1951년 1월. 1·4후퇴 즈음 대구에 있어야 할 박 여사가 서울 육군본부 청사 앞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김 전 총리는 가슴이 뭉클했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 전 총리의 유작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스노우폭스북스·1만6800원·사진)가 3일 발간됐다. 앞서 나온 ‘김종필 증언록’과 같은 회고록 성격은 아니다. 김 전 총리가 우리 사회나 위인들의 삶에 대한 생각, 후배 정치인 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주가 됐다. 2016, 2017년 김 전 총리가 구술한 내용을 이덕주 전 총리 공보수석비서관이 정리했다.
정치판에서 ‘2인자’ 자리를 오르내린 김 전 총리는 세상인심에 대해 “인정이란 언제나 서민들의 것인가 보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1인자 자리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자 김 전 총리는 1968년 5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독대한 김 전 총리는 “각하, 제가 (1인자를 제치고 집권한 이집트의) 나세르입니까”라며 항의했다. 정계에서 물러나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권력깨나 있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졌고, 평범한 서민들이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 전 총리는 “그들에게는 아전인수나 아부도 없고, 음모나 중상도 없으며, 분에 넘치는 욕망도 없었다”며 “평범한 시민들과 격의 없는 담소를 즐겼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고 썼다.
김종필 전 총리가 그린 ‘거목’. 온갖 풍상을 이겨내고 우람하게 살아온 은행나무의 생명력에 경건함을 느끼며 그린 작품으로, 외손녀에게 이 그림을 줬다고 한다. 스노우폭스북스 제공
독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김 전 총리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46일간 갇혀 있을 때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오전 3시쯤 깨면 한바탕 책을 읽고 다시 잠들었다며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라고 했다.
2016년 한 언론 보도로 논란이 일었던 육영수 여사에 대한 언급에 관해서는 책에 담지 않았다. 김 전 총리가 미국에 유학한 동안 아내가 첫아이를 낳고 먹을 게 없어서 굶었는데, 숙모인 육 여사가 자기 식구들에게만 밥을 먹였다고 말했다고 당시 보도됐다. 책에는 “아내 곁에 육영수 여사가 있어서 임신 9개월의 아내를 두고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고만 나온다.
김 전 총리는 “나는 정치적으로 대개 보수의 입장에 서 왔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 왔다”며 “보수가 늘 보수 그대로 있으면 연못이 썩는다”고 조언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