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된 모순으로 가득한 쿠바의 일상…가장 주관적인 영역인 일상에서 오해를 깨뜨리는 역설을 찾고 싶어
청년 철학도 김해완의 쿠바 탐구를 연재한다. 그는 2017년 9월 아바나에 정착해 쿠바 공부를 시작했다. 이 철학도는 이해했다. 혁명은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잃어보는 ‘생활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혁명 신생국 쿠바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을 택했고, 세계 정세가 출렁일 때마다 그에 맞춰 대담한 변혁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1)]
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쿠바에 열광하나?
아바나의 시간은 옆으로 간다
김해완 작가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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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또 세드로에서 나는 마르까네로 간다네. 꾸에또에 도착해서 나는 마야리로 간다네. (De Alto Cedro voy para Marcan. Llego en Cueto voy para Mayar.)” (노래 ‘찬 찬(Chan Chan)’ 중에서)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멋드러지게 노래를 한다. 1930년대 유행했던 쏜(Son)과 볼레로(Bolero)의 멜로디가 스페인어와 함께 퍼진다.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노년의 노련함과 음악의 소울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 유명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영화감독 빔 벤델(Wim Wender)이 찍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오래된 꿈을 꾼 기분이 든다. 이곳은 어디인가.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혁명을 성공시킨 카리브해의 섬. 북한과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동지’인 탓에 남한 대사관조차 없는 나라. 세계화에 문을 잠그고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는 땅. 쿠바다.
21세기 한국인이라면 ‘찬찬’을 이렇게 패러디할 것이다. “인천에서 나는 토론토로 간다네. 토론토에 도착해서 나는 아바나로 간다네.” 시대는 변한다. 최근 10년간 SNS는 세계 방방곡곡을 인터넷 속에서 연결시켰고, 2014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경제 봉쇄정책을 철폐했다. 이제 사람들은 꿈만 꾸는 게 아니라 여권을 들고 두 발로 직접 지구 반대편을 찾아간다. 요즘 아바나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출몰한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쿠바에 열광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세계화’의 추세에서 벗어나 고립돼 있다는 점 때문인지 모르겠다. 쿠바를 소개하는 글들은 모두 비슷한 문구를 사용한다. “시간이 멈춘 나라, 쿠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 지 거진 20년이 흘렀건만, 아바나의 풍경은 거의 변한 게 없다. 1950년대 올드카, 식민지 시대의 건물, 말레꼰에서 맥주를 마시는 커플, 그리고 ‘피델(Fidel)’과‘체(Che)’를 지지한다는 슬로건. 이곳에서는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바나에 짐을 푼 지 어언 100일 째, 나는 혼돈의 도가니에 있다! 현재 나는 관광객의 동선 밖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인 쿠바인의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쿠바가 20세기에 꽃피운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 역시 거세다. 젊은이들의 파티에서는 미국 팝송이나 레게똔(힙합 장르에 기반한 라틴 팝)이 들려오고, 핸드폰과 인터넷도 급격히 대중화되고 있다. 물자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생활의 배치 자체는 뉴욕이나 서울과 다를 바 없이 근대적이다. 사람들은 전기와 수도와 가스에 의존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키친 타올과 알루미늄 호일도 쓴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사회현상 또한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다.
이 상황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 봉쇄 때문에 한 장소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이 21세기의 ‘한국’의 전부가 아니듯이, 21세기의 ‘쿠바’는 혁명과 음악 그 이상이 아닐까? 1996년 생인 젊은 쿠바 친구는 나의 무지를 확인해 주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악파일을 구해달라고? 글쎄. 이 밴드가 명성을 얻은 후로는 너도 나도 그 멤버였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이 짬뽕이 됐어. 너는 정확히 뭘 찾는지 아는 거야?”
시간의 길을 잃다?뉴욕과 아바나의 교차점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멋드러지게 노래를 한다. 1930년대 유행했던 쏜(Son)과 볼레로(Bolero)의 멜로디가 스페인어와 함께 퍼진다.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노년의 노련함과 음악의 소울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 유명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영화감독 빔 벤델(Wim Wender)이 찍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오래된 꿈을 꾼 기분이 든다. 이곳은 어디인가.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혁명을 성공시킨 카리브해의 섬. 북한과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동지’인 탓에 남한 대사관조차 없는 나라. 세계화에 문을 잠그고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는 땅. 쿠바다.
21세기 한국인이라면 ‘찬찬’을 이렇게 패러디할 것이다. “인천에서 나는 토론토로 간다네. 토론토에 도착해서 나는 아바나로 간다네.” 시대는 변한다. 최근 10년간 SNS는 세계 방방곡곡을 인터넷 속에서 연결시켰고, 2014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경제 봉쇄정책을 철폐했다. 이제 사람들은 꿈만 꾸는 게 아니라 여권을 들고 두 발로 직접 지구 반대편을 찾아간다. 요즘 아바나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출몰한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쿠바에 열광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세계화’의 추세에서 벗어나 고립돼 있다는 점 때문인지 모르겠다. 쿠바를 소개하는 글들은 모두 비슷한 문구를 사용한다. “시간이 멈춘 나라, 쿠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 지 거진 20년이 흘렀건만, 아바나의 풍경은 거의 변한 게 없다. 1950년대 올드카, 식민지 시대의 건물, 말레꼰에서 맥주를 마시는 커플, 그리고 ‘피델(Fidel)’과‘체(Che)’를 지지한다는 슬로건. 이곳에서는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바나에 짐을 푼 지 어언 100일 째, 나는 혼돈의 도가니에 있다! 현재 나는 관광객의 동선 밖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인 쿠바인의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쿠바가 20세기에 꽃피운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 역시 거세다. 젊은이들의 파티에서는 미국 팝송이나 레게똔(힙합 장르에 기반한 라틴 팝)이 들려오고, 핸드폰과 인터넷도 급격히 대중화되고 있다. 물자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생활의 배치 자체는 뉴욕이나 서울과 다를 바 없이 근대적이다. 사람들은 전기와 수도와 가스에 의존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키친 타올과 알루미늄 호일도 쓴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사회현상 또한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다.
이 상황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 봉쇄 때문에 한 장소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이 21세기의 ‘한국’의 전부가 아니듯이, 21세기의 ‘쿠바’는 혁명과 음악 그 이상이 아닐까? 1996년 생인 젊은 쿠바 친구는 나의 무지를 확인해 주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악파일을 구해달라고? 글쎄. 이 밴드가 명성을 얻은 후로는 너도 나도 그 멤버였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이 짬뽕이 됐어. 너는 정확히 뭘 찾는지 아는 거야?”
시간의 길을 잃다?뉴욕과 아바나의 교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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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쿠바에 뭘 찾으러 왔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공부하기 위해서다. 뉴욕에 살 당시 나는 남미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인문학 공동체인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이 함께 진행하는 여행-공부 프로젝트 MVQ의 지원을 받아 쿠바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다음 행선지가 쿠바든 아니든 별 상관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1960년대 혁명에 대하여 상식도 로망도 없는 1990년대 생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곧바로 쿠바에 왔더라면 나는 정말로 맥락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길에서, 가게에서, 학교에서 만났던 이민자들은 내 나침반이 돼주었다. 나는 그네들의 집에서 살벌하게 터져나오는 세대 갈등에 친숙함을 느꼈고, 뉴요커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도록 노력하는 이민자 2세에게서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보았다. 21세기, 우리는 너나할 것없이 모두 ‘시간의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짧게 보면 최근 20년간 범람한 테크놀로지와 70년간 진행된 산업화의 결과지만, 멀리 보면 500년간 역사가 진행된 방향이다.) 세대의 단절과 갈등은 개인이 부모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수 없을 때 발생한다. 미지의 땅에 떨어진 이민자처럼, 각각의 세대는 매번 변하는 시대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익힌 ‘생존법’은 나의 윤리나 정체성과 전혀 연관이 없으며, 내 미래의 아이에게도 전해줄 수 없는 영양가 없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은 푸에르토리코의 이민 3세대나 한국의 88만원 세대나 똑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바나에서 첫 100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뉴욕에서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을 목격했다. 느긋해 보였던 하바나의 일상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개인의 욕망, 그리고 출렁거리는 바깥세상이 불일치하는 가운데 잉태된 모순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모순에 적응하거나, 버티거나, 탈출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또 세대마다 격하게 달랐다.
그제야 이해했다. 혁명은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잃어보는 ‘생활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혁명 신생국 쿠바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을 택했고, 세계정세가 출렁일 때마다 그에 맞춰 대담한 변혁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성공도 실패도 아닌 시대 속에서 ‘길 잃은’ 개인들이다. 오늘날 쿠바는 한국 사회나 뉴욕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세대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다. 이는 쿠바인들이 국경이 봉쇄된 와중에도 ‘시간의 이민자’ 대열의 선두주자에 서서 그들만의 스펙타클한 여행을 해왔음을 말해준다. 제1세계의 ‘현대문명’의 뒤를 쫓아가든지 혹은 제3세계의 ‘혁명’에 앞장서든지, 결국 (특히 비서구권) 생활인들은 생활의 연속성을 절단 내는 산업 시대의 흐름 속에서 먹고 살 길을 매번 새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이 궁금하다. 이 여행의 과정이 우리의 얼굴 또한 비출 것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다르게 살고 싶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길을 잃을까 봐, 그래서 굶을까 봐서다. 그러나 진짜 두려운 사실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대의 정언명령에 완전히 맞춰 산다고 해서 시대의 부적응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든 아바나에서든, 생활이라는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정도(正道)도 사도(邪道)도 아닌 새 길을 개척할 용기를 요구한다. 이 두려움을 응시하는 자에게 아바나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뉴욕과는 또 다른 각도로 말이다.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 연재는 2018년 아바나의 평범한 일상을 현장 포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의도와 또 어떤 의도치 않은 역설이 있었는지 아바네로(Habanero)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
혁명, 그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
만약 한국에서 곧바로 쿠바에 왔더라면 나는 정말로 맥락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길에서, 가게에서, 학교에서 만났던 이민자들은 내 나침반이 돼주었다. 나는 그네들의 집에서 살벌하게 터져나오는 세대 갈등에 친숙함을 느꼈고, 뉴요커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도록 노력하는 이민자 2세에게서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보았다. 21세기, 우리는 너나할 것없이 모두 ‘시간의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짧게 보면 최근 20년간 범람한 테크놀로지와 70년간 진행된 산업화의 결과지만, 멀리 보면 500년간 역사가 진행된 방향이다.) 세대의 단절과 갈등은 개인이 부모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수 없을 때 발생한다. 미지의 땅에 떨어진 이민자처럼, 각각의 세대는 매번 변하는 시대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익힌 ‘생존법’은 나의 윤리나 정체성과 전혀 연관이 없으며, 내 미래의 아이에게도 전해줄 수 없는 영양가 없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은 푸에르토리코의 이민 3세대나 한국의 88만원 세대나 똑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바나에서 첫 100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뉴욕에서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을 목격했다. 느긋해 보였던 하바나의 일상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개인의 욕망, 그리고 출렁거리는 바깥세상이 불일치하는 가운데 잉태된 모순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모순에 적응하거나, 버티거나, 탈출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또 세대마다 격하게 달랐다.
그제야 이해했다. 혁명은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잃어보는 ‘생활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혁명 신생국 쿠바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을 택했고, 세계정세가 출렁일 때마다 그에 맞춰 대담한 변혁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성공도 실패도 아닌 시대 속에서 ‘길 잃은’ 개인들이다. 오늘날 쿠바는 한국 사회나 뉴욕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세대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다. 이는 쿠바인들이 국경이 봉쇄된 와중에도 ‘시간의 이민자’ 대열의 선두주자에 서서 그들만의 스펙타클한 여행을 해왔음을 말해준다. 제1세계의 ‘현대문명’의 뒤를 쫓아가든지 혹은 제3세계의 ‘혁명’에 앞장서든지, 결국 (특히 비서구권) 생활인들은 생활의 연속성을 절단 내는 산업 시대의 흐름 속에서 먹고 살 길을 매번 새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이 궁금하다. 이 여행의 과정이 우리의 얼굴 또한 비출 것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다르게 살고 싶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길을 잃을까 봐, 그래서 굶을까 봐서다. 그러나 진짜 두려운 사실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대의 정언명령에 완전히 맞춰 산다고 해서 시대의 부적응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든 아바나에서든, 생활이라는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정도(正道)도 사도(邪道)도 아닌 새 길을 개척할 용기를 요구한다. 이 두려움을 응시하는 자에게 아바나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뉴욕과는 또 다른 각도로 말이다.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 연재는 2018년 아바나의 평범한 일상을 현장 포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의도와 또 어떤 의도치 않은 역설이 있었는지 아바네로(Habanero)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
혁명, 그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
쿠바 혁명은 1959년 1월 1일에 일어났다.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이날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하바나에 입성했다. 그리고 독재자 바티스타를 공식적으로 끌어내린 후 (그는 도망친 지 오래였다) “쿠바인들을 위한 쿠바”를 다시 세우겠노라고 공언했다. 지금이야 대단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미친 짓처럼 보였다. 이 작전이 성공했던 것은 가난한 농민들과 심지어 부유한 중산층까지 혁명을 두 팔 벌려 환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쿠바인들은 혁명 앞에서 이렇게 손발이 척척 맞았던 것일까? 이것은 하룻밤 만에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다. 그런데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라는 소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자발적으로 해방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을 주장했던 것을 계기로, 쿠바인들은 스페인 정부와 10년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1898년에는 마침내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미국이 독립전쟁에 개입했고 이를 빌미로 쿠바를 미국의 준 식민지 상태로 만든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말을 잘 들을 꼭두각시 독재자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고, 그렇게 60년간 쿠바의 민주주의 체제는 불능상태에 빠졌다. 쿠바의 대통령들은 미국에 충성하거나, 극도로 부패하거나, 부정선거의 달인이었다. 그중에서도 바티스타는 가장 문제적인 대통령이었다. 1933년에 그는 시민들이 지지했던 야당의 전도유망한 개혁안을 4개월 만에 쿠데타로 뒤엎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때는 그래도 노동조합과 협력하면서 일할 의지를 보였으나, 1952년에 쿠테타로 복귀할 때는 시민운동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무능한 독재자가 돼 있었다.
정치가 이렇게 막장드라마를 찍는 동안, 쿠바 사회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미국 문화와 자본 속에서 이리저리 표류했다. 인종 차별이나 빈부 격차 같은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은 더 곪아갔다. 사회 양극단에는 ‘농촌 빈민 150만 명’과 언제든 마이애미로 쇼핑을 갈 수 있는 ‘90만 명 남짓한 가장 부유한 쿠바인들’이 있었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있는 350만 명은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삼천리)
이때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외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다. 카스트로와 게릴라 군대가 정부를 상대로 몇 년간 전투를 치르면서 쿠바인들의 신뢰를 쌓았던 반면, ‘피델주의(Fidelismo)’에 대항하여 과격한 혁명이 아니라 온건한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혁명만이 답이었다. 1950년대 쿠바의 공기에는 혁명의 열기가 이미 짙게 퍼져 있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여기에 불씨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사건을 순서대로 개괄한 ‘앞 이야기’다. 그러나 1959년 이후의 이야기를 실감하려면 혁명정부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난감한 문제를 떠안았는지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혁명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쿠바라는 특수하고 고유한 맥락 속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 ‘뒷이야기’는 앞으로 연재에서 주제별로 다루게 될 테니, 오늘은 세 가지 키워드로 짧게만 훑어보자. 설탕, 신인류, 그리고 아히아꼬(Ajiaco)다.
① 설탕? 악마와의 계약을 끝내라
설탕. 설탕처럼 쿠바 역사에서 말 많고 탈 많은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작물에는 쿠바의 애달픈 식민지 시절이 녹아 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쿠바에 처음 왔을 당시, 아무리 찾아도 금이 보이지 않자 이들은 이 섬 전체로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토종 작물도 아닌 설탕이 바로 ‘쿠바’라는 국가의 탄생이유이자 존재이유였던 것이다. 쿠바가 어찌나 설탕을 체계적으로 잘 생산했는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세계 설탕의 4분의 1이 이 섬에서 나왔다.
그러나 독립국으로서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설탕 가격이 떨어지면 수입은 크게 줄었고, 설탕 수확 시즌이 끝나면 모두가 실업자가 됐다. 설탕이 아닌 다른 공산품은 외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해야 했고, 무엇보다 설탕은 쿠바와 쿠바 설탕 수입국(미국) 사이에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혁명정부는 1963년에 설탕 생산을 그만두고 경제를 다양화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모두를 굶주림으로 몰아넣었고, 1970년에는 설탕을 1000톤이나 생산하겠다고 했다가 다른 경제 부문을 마비 상태에 몰아넣었다. 지금도 설탕은 애증의 대상이다. 없이 살자니 죽고, 함께 살자니 병든다. 이 악마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는 한 이 땅에 식민지의 기억도 계속될 것이다.
② 신인류? 도덕적으로 옳은 개발
어떻게 쿠바인들은 혁명 앞에서 이렇게 손발이 척척 맞았던 것일까? 이것은 하룻밤 만에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다. 그런데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라는 소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자발적으로 해방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을 주장했던 것을 계기로, 쿠바인들은 스페인 정부와 10년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1898년에는 마침내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미국이 독립전쟁에 개입했고 이를 빌미로 쿠바를 미국의 준 식민지 상태로 만든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말을 잘 들을 꼭두각시 독재자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고, 그렇게 60년간 쿠바의 민주주의 체제는 불능상태에 빠졌다. 쿠바의 대통령들은 미국에 충성하거나, 극도로 부패하거나, 부정선거의 달인이었다. 그중에서도 바티스타는 가장 문제적인 대통령이었다. 1933년에 그는 시민들이 지지했던 야당의 전도유망한 개혁안을 4개월 만에 쿠데타로 뒤엎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때는 그래도 노동조합과 협력하면서 일할 의지를 보였으나, 1952년에 쿠테타로 복귀할 때는 시민운동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무능한 독재자가 돼 있었다.
정치가 이렇게 막장드라마를 찍는 동안, 쿠바 사회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미국 문화와 자본 속에서 이리저리 표류했다. 인종 차별이나 빈부 격차 같은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은 더 곪아갔다. 사회 양극단에는 ‘농촌 빈민 150만 명’과 언제든 마이애미로 쇼핑을 갈 수 있는 ‘90만 명 남짓한 가장 부유한 쿠바인들’이 있었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있는 350만 명은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삼천리)
이때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외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다. 카스트로와 게릴라 군대가 정부를 상대로 몇 년간 전투를 치르면서 쿠바인들의 신뢰를 쌓았던 반면, ‘피델주의(Fidelismo)’에 대항하여 과격한 혁명이 아니라 온건한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혁명만이 답이었다. 1950년대 쿠바의 공기에는 혁명의 열기가 이미 짙게 퍼져 있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여기에 불씨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사건을 순서대로 개괄한 ‘앞 이야기’다. 그러나 1959년 이후의 이야기를 실감하려면 혁명정부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난감한 문제를 떠안았는지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혁명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쿠바라는 특수하고 고유한 맥락 속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 ‘뒷이야기’는 앞으로 연재에서 주제별로 다루게 될 테니, 오늘은 세 가지 키워드로 짧게만 훑어보자. 설탕, 신인류, 그리고 아히아꼬(Ajiaco)다.
① 설탕? 악마와의 계약을 끝내라
설탕. 설탕처럼 쿠바 역사에서 말 많고 탈 많은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작물에는 쿠바의 애달픈 식민지 시절이 녹아 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쿠바에 처음 왔을 당시, 아무리 찾아도 금이 보이지 않자 이들은 이 섬 전체로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토종 작물도 아닌 설탕이 바로 ‘쿠바’라는 국가의 탄생이유이자 존재이유였던 것이다. 쿠바가 어찌나 설탕을 체계적으로 잘 생산했는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세계 설탕의 4분의 1이 이 섬에서 나왔다.
그러나 독립국으로서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설탕 가격이 떨어지면 수입은 크게 줄었고, 설탕 수확 시즌이 끝나면 모두가 실업자가 됐다. 설탕이 아닌 다른 공산품은 외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해야 했고, 무엇보다 설탕은 쿠바와 쿠바 설탕 수입국(미국) 사이에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혁명정부는 1963년에 설탕 생산을 그만두고 경제를 다양화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모두를 굶주림으로 몰아넣었고, 1970년에는 설탕을 1000톤이나 생산하겠다고 했다가 다른 경제 부문을 마비 상태에 몰아넣었다. 지금도 설탕은 애증의 대상이다. 없이 살자니 죽고, 함께 살자니 병든다. 이 악마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는 한 이 땅에 식민지의 기억도 계속될 것이다.
② 신인류? 도덕적으로 옳은 개발
쿠바 혁명이 처음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로의 전환이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혁명은 산업화가 이미 만개한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벌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공산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가난한 구(舊)식민지 저개발국에서 선택됐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란 이념이 아니었다. 식민지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하는 실천법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체 게바라는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그는 공산주의가 경제의 재구성을 넘어서 인간의 재구성을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다. 돈에 영혼을 팔지 않고, 선(善)을 보상으로 여기고, 성실히 일하는 인간이 모두가 될 때야 ‘도덕적으로 옳은 경제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쿠바 사람 누구도 빵 없이 신인류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날 쿠바는 병원과 학교 같은 근대 시설은 잘 갖춰놓고서 정작 이 시설을 돌릴 돈은 없는 희한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남을 착취하지 않고도 일용할 양식을 찾을 것인가?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 하더라도, 나와 내 공동체가 경제활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절박한 문제다.
③ 아히아꼬? ‘우리 아메리카’의 찌개
물론 이제는 쿠바 사람 누구도 빵 없이 신인류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날 쿠바는 병원과 학교 같은 근대 시설은 잘 갖춰놓고서 정작 이 시설을 돌릴 돈은 없는 희한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남을 착취하지 않고도 일용할 양식을 찾을 것인가?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 하더라도, 나와 내 공동체가 경제활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절박한 문제다.
③ 아히아꼬? ‘우리 아메리카’의 찌개
아히아꼬는 한국의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처럼 쿠바인 모두가 즐겨 먹는 국민 찌개다. 여기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와 야채가 투하된다. 그래서 아히아꼬는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의 피가 섞인 쿠바의 국민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쿠바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쿠바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 땅에 ‘쿠바인’이라는 소속감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원주민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는데, 그 말인즉 현재 쿠바인들은 전부 이민자나 노예의 후손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혁명 정부는 인종차별을 엄격히 금지했고 여러 문화가 서로에게 갈마드는 트랜스-문화화를 쿠바의 특징으로 내세웠다. 그래서인지 쿠바인들은 이 나라에 중국 문화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1% 섞였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젊은 세대는 과연 미국의 스테이크보다 쿠바의 아히아꼬를 더 좋아할까? 호세 마르띠는 플라타노(남미의 바나나)로 와인을 만들어 마시라고, 시큼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와인이라고 멋진 말을 남겼다. 그러나 21세기, 많은 쿠바 청년이 세계 시민으로서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 한다.
자, 이제 여행을 떠날 일만 남았다. 우리 집 쿠바 할아버지는 쿠바에 대해 뭣도 모르는 내가 글을 쓴다니 심기가 불편하신지 이렇게 말했다. “종이는 종이만을 증명할 뿐이고, 네 글은 ‘너의’ 진실일 뿐이야. 진실이 늘 주관적이라는 게 철학의 핵심 문제지….” (참고로 이분은 버스 정비사로 평생 일했던 평범한 쿠바 할아버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말씀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기 위해 어쨌든 글을 써야 하고, 내가 밥벌이를 해야 할아버지도 나에게서 하숙비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상의 진실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모든 진실이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면, 가장 주관적인 영역인 일상에서 오해를 깨뜨리는 역설을 찾고 싶다.
쿠바의 시간은 후진국처럼 뒤로도 흐르지 않고, 선진국처럼 앞으로도 흐르지 않는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삐뚤빼뚤 노선을 바꿔가며, 그러니까 옆으로 흐르고 있다. 이 시간의 선분이 예측의 좌표에서 빗겨나가는 만큼 생활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사색과 상상력 또한 깊어진다. 이제 이 시간을 따라 2018년을 사는 아바네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쿠바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쿠바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 땅에 ‘쿠바인’이라는 소속감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원주민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는데, 그 말인즉 현재 쿠바인들은 전부 이민자나 노예의 후손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혁명 정부는 인종차별을 엄격히 금지했고 여러 문화가 서로에게 갈마드는 트랜스-문화화를 쿠바의 특징으로 내세웠다. 그래서인지 쿠바인들은 이 나라에 중국 문화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1% 섞였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젊은 세대는 과연 미국의 스테이크보다 쿠바의 아히아꼬를 더 좋아할까? 호세 마르띠는 플라타노(남미의 바나나)로 와인을 만들어 마시라고, 시큼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와인이라고 멋진 말을 남겼다. 그러나 21세기, 많은 쿠바 청년이 세계 시민으로서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 한다.
자, 이제 여행을 떠날 일만 남았다. 우리 집 쿠바 할아버지는 쿠바에 대해 뭣도 모르는 내가 글을 쓴다니 심기가 불편하신지 이렇게 말했다. “종이는 종이만을 증명할 뿐이고, 네 글은 ‘너의’ 진실일 뿐이야. 진실이 늘 주관적이라는 게 철학의 핵심 문제지….” (참고로 이분은 버스 정비사로 평생 일했던 평범한 쿠바 할아버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말씀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기 위해 어쨌든 글을 써야 하고, 내가 밥벌이를 해야 할아버지도 나에게서 하숙비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상의 진실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모든 진실이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면, 가장 주관적인 영역인 일상에서 오해를 깨뜨리는 역설을 찾고 싶다.
쿠바의 시간은 후진국처럼 뒤로도 흐르지 않고, 선진국처럼 앞으로도 흐르지 않는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삐뚤빼뚤 노선을 바꿔가며, 그러니까 옆으로 흐르고 있다. 이 시간의 선분이 예측의 좌표에서 빗겨나가는 만큼 생활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사색과 상상력 또한 깊어진다. 이제 이 시간을 따라 2018년을 사는 아바네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비스타, 아바나(2)]
쿠바인 식탁에 깃든 혁명의 역설
친환경 천국인데 영양 결핍에 시달린다
김해완 작가
미국의 경제봉쇄에 자급자족 꿈꾸며 유기농업에 집중…식량 국산화 이뤘지만 세계 시장과 단절돼 불균형 심화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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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어마(Irma)가 휩쓸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의 어느 밤, 자정. 나는 캐리어 세 개, 박스 두 개와 함께 아바나 대학 옆에 있는 하숙집에 도착했다. 하숙집 할아버지는 내 몰골을 보더니 늦은 시간인데도 군말 없이 저녁밥을 차려주셨다. 그 한 끼니는 아직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밥, 국, 막 구운 닭고기, 손수 만든 감자튀김, 한 접시 가득한 샐러드. 단순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성이 녹아있었다. 할머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쿠바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아모르(사랑)’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이 ‘사랑스러운 메뉴’가 앞으로 매일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날짜가 바뀌어도 밥상에서 바뀌는 것은 고기의 종류뿐이었다. 그 고기가 조리될 방식, 사용될 소스, 곁들여질 사이드 메뉴까지 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2주 만에 나는 길거리에서 식당을 찾아 헤매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시금치와 버섯은 대체 어디 있지? 왜 시장에는 고구마와 양파밖에 없을까? 어째서 중국 음식조차 찾기 어렵단 말인가!
다만 이런 불평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하숙집 할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았고, 실제로 내가 먹는 음식은 쿠바에서 훌륭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나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바로 마음의 허기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렇다. 쿠바의 소박한 밥상은 식욕을 탐욕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의 본래 면목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렇지만 분명 문제는 존재한다. ‘철없는 외국인의 불평’으로 치부하기엔 쿠바인들도 음식에 마냥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쿠바의 식탁은 쿠바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서 모순적이다. 건강하면서 건강하지 않고, 맛있으면서 맛있지 않고, 배부르면서 또 배가 고프다.
소박한 밥상이냐, 결핍의 식단이냐
그때는 몰랐다. 이 ‘사랑스러운 메뉴’가 앞으로 매일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날짜가 바뀌어도 밥상에서 바뀌는 것은 고기의 종류뿐이었다. 그 고기가 조리될 방식, 사용될 소스, 곁들여질 사이드 메뉴까지 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2주 만에 나는 길거리에서 식당을 찾아 헤매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시금치와 버섯은 대체 어디 있지? 왜 시장에는 고구마와 양파밖에 없을까? 어째서 중국 음식조차 찾기 어렵단 말인가!
다만 이런 불평을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양질의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하숙집 할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았고, 실제로 내가 먹는 음식은 쿠바에서 훌륭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나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바로 마음의 허기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렇다. 쿠바의 소박한 밥상은 식욕을 탐욕으로 삼고 살아온 우리의 본래 면목을 거울처럼 비춘다.
그렇지만 분명 문제는 존재한다. ‘철없는 외국인의 불평’으로 치부하기엔 쿠바인들도 음식에 마냥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쿠바의 식탁은 쿠바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서 모순적이다. 건강하면서 건강하지 않고, 맛있으면서 맛있지 않고, 배부르면서 또 배가 고프다.
소박한 밥상이냐, 결핍의 식단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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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밥상은 기본적으로 신선하다. 가정식(食) 문화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요식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쿠바에서 ‘끼니’는 아직 전문 비즈니스의 영역에 포획되지 못했다. 밖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집 없고 돈 많은 관광객이나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불쌍한 자취생뿐이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음식은 그저 그렇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 식당에 가거나, 가격은 그저 그렇고 음식은 부실한 학생 식당에 가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집에서 밥을 먹는 게 너무 당연해진다. 가장 훌륭한 음식은 결국 가정식인 것이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처럼 특별한 날에 쿠바인들은 과일주스나 케이크, 크로켓까지 손수 만든다.
경제봉쇄라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식단을 탄생시켰다.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는 그 동안 수입해왔던 필수품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화학비료와 농약이었다. 그 후로 쿠바는 현실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유기농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기농법이 식량 부족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현재 쿠바 정부는 화학비료를 많이 쓰지 않고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 쿠바의 토양에 잘 맞는 토종 식물을 재배하도록 장려한다. 유통 과정이 느려서 부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채소 자체의 오염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또 수입산 작물이나 비닐하우스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쿠바인들은 늘 제철음식만 먹는다. 저농약과 제철음식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웰빙의 기초 아닌가!
식탁의 ‘아모르’를 위한 투쟁
경제봉쇄라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식단을 탄생시켰다.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는 그 동안 수입해왔던 필수품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화학비료와 농약이었다. 그 후로 쿠바는 현실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유기농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기농법이 식량 부족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현재 쿠바 정부는 화학비료를 많이 쓰지 않고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 쿠바의 토양에 잘 맞는 토종 식물을 재배하도록 장려한다. 유통 과정이 느려서 부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채소 자체의 오염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또 수입산 작물이나 비닐하우스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쿠바인들은 늘 제철음식만 먹는다. 저농약과 제철음식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웰빙의 기초 아닌가!
식탁의 ‘아모르’를 위한 투쟁
그러나 이런 강점을 인정하더라도, 쿠바의 밥상이 정말로 건강하지는 않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영양 불균형이다. 재료의 다양성이 부족한 탓이다. 채소는 비싼 데다 공급이 들쭉날쭉한 탓에 풍성하지 않고, 식단은 육류와 유제품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쿠바의 소박한 밥상이란 한국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밥, 김치, 나물반찬’이 아니라 ‘밥, 바나나튀김, 닭다리’의 조합이다!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찾는 간식은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피자다. 쿠바가 아무리 의료강국이라고 해도 이런 식생활은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조미료도 과하게 사용된다. 이것이 식욕의 욕구불만을 해결하는 방편인지, 아니면 수백 년 전부터 설탕대국이었던 쿠바의 식문화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설탕은 모든 곳에 투입된다. 차에 한 숟갈, 요구르트에 두 숟갈, 커피에 세 숟갈, 레모네이드에 네 숟갈…. 소금과 기름도 마찬가지다. 고기는 대부분 튀겨지고, 간은 지나치게 짜다. 이쯤 되면 쿠바 음식의 소박한 외양은 절제의 결과가 아니라 결핍의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다른 문제는 한 끼를 준비하는 데 좌절할 정도로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정부가 나눠주는 배급 수첩으로 필요한 모든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그 절반도 구매할 수 없어서 농산물 직거래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모든 시장을 수입산 없이 자족적으로 굴리기에는 현재 쿠바 농업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시스템의 결함은 고스란히 각 가정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어떻게든 매일 밤 식탁 위 ‘아모르’를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식들에게 말이다.
첫 번째 부담은 시장의 가격이다. 채소값은 쿠바인의 평균 월급과 비교하면 몹시 비싼 편이다. 2009년에 [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쿠바의 채소가격을 일본 물가로 환산하면 마늘 한 묶음이 2000엔(약 2만원)의 값어치라고 계산했는데, 최근 3~4년간 쿠바의 농산물 가격은 심지어 두 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국내산 작물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리케인이 한 해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농산물 가격은 곧바로 수직상승한다.
두 번째 부담은 공급의 불안정성이다. 오늘, 어느 시장에, 무엇이 있을지는 실제로 가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어제는 ‘가’ 시장에 싱싱한 아보카도가 있었는데, 오늘은 ‘나’ 시장에만 좋은 과일이 몰려 있는 식이다. 아침 일찍 시장에 들르지 않으면 오후에는 모든 채소가 다 팔려나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매일 아침마다 모든 시장을 돌아볼 만큼 시간이 많단 말인가?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목격한 아바나의 일부 사정이다. 하지만 아바나는 쿠바에서도 가장 ‘쿠바스럽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는 드물긴 해도 번듯한 식당이 존재하며, 비싸긴 해도 다양한 채소를 확보한 시장도 몇 개 있다. 그러나 아바나를 벗어나면 이런 대안마저 희박해진다. 외곽 지역들은 아직도 1990년대에 벌어졌던 전쟁 같은 식량난과, 그나마 있던 식재료가 모두 아바나로만 집중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서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철없는 아바네로(Habanero)의 불평’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레꼰에서 맥주와 닭다리를 뜯을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인 것이다.
쿠바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가정식이냐 요식업이냐, 유기농업이냐 화학농업이냐, 소박한 공산주의냐 풍요로운 자본주의냐…. 이것은 별 의미 없는 피상적인 이분법일 뿐이란 것을 말이다. 쿠바의 밥상이 제기하는 진정한 질문은 바로 ‘자급자족’이다.
나는 쿠바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자족의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유일한 목표도 자족이었고, 혁명의 유일한 문제도 끝내 자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19세기 내내 스페인과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치렀고, 20세기에는 이곳을 경제적·정치적·군사적 뒷마당으로 만들려는 미국에 저항해야 했다. 미국의 턱 아래에 있었던 데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도 늦었던 쿠바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컸다. 친미주의자였던 독재자 바티스타를 혁명을 통해 쫓아냈을 때, 쿠바인들은 사실상 이렇게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는 쿠바인의 땅이다. 미국 회사가 국가 산업을 하나씩 접수하는 꼴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다. 이제부터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
떠나간 사과, 잡혀간 고양이, 실종된 생선
조미료도 과하게 사용된다. 이것이 식욕의 욕구불만을 해결하는 방편인지, 아니면 수백 년 전부터 설탕대국이었던 쿠바의 식문화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설탕은 모든 곳에 투입된다. 차에 한 숟갈, 요구르트에 두 숟갈, 커피에 세 숟갈, 레모네이드에 네 숟갈…. 소금과 기름도 마찬가지다. 고기는 대부분 튀겨지고, 간은 지나치게 짜다. 이쯤 되면 쿠바 음식의 소박한 외양은 절제의 결과가 아니라 결핍의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다른 문제는 한 끼를 준비하는 데 좌절할 정도로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정부가 나눠주는 배급 수첩으로 필요한 모든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그 절반도 구매할 수 없어서 농산물 직거래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모든 시장을 수입산 없이 자족적으로 굴리기에는 현재 쿠바 농업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시스템의 결함은 고스란히 각 가정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어떻게든 매일 밤 식탁 위 ‘아모르’를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식들에게 말이다.
첫 번째 부담은 시장의 가격이다. 채소값은 쿠바인의 평균 월급과 비교하면 몹시 비싼 편이다. 2009년에 [몰락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쿠바의 채소가격을 일본 물가로 환산하면 마늘 한 묶음이 2000엔(약 2만원)의 값어치라고 계산했는데, 최근 3~4년간 쿠바의 농산물 가격은 심지어 두 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국내산 작물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허리케인이 한 해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농산물 가격은 곧바로 수직상승한다.
두 번째 부담은 공급의 불안정성이다. 오늘, 어느 시장에, 무엇이 있을지는 실제로 가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어제는 ‘가’ 시장에 싱싱한 아보카도가 있었는데, 오늘은 ‘나’ 시장에만 좋은 과일이 몰려 있는 식이다. 아침 일찍 시장에 들르지 않으면 오후에는 모든 채소가 다 팔려나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매일 아침마다 모든 시장을 돌아볼 만큼 시간이 많단 말인가?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목격한 아바나의 일부 사정이다. 하지만 아바나는 쿠바에서도 가장 ‘쿠바스럽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는 드물긴 해도 번듯한 식당이 존재하며, 비싸긴 해도 다양한 채소를 확보한 시장도 몇 개 있다. 그러나 아바나를 벗어나면 이런 대안마저 희박해진다. 외곽 지역들은 아직도 1990년대에 벌어졌던 전쟁 같은 식량난과, 그나마 있던 식재료가 모두 아바나로만 집중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서러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철없는 아바네로(Habanero)의 불평’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레꼰에서 맥주와 닭다리를 뜯을 수 있게 된 것도 기적인 것이다.
쿠바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가정식이냐 요식업이냐, 유기농업이냐 화학농업이냐, 소박한 공산주의냐 풍요로운 자본주의냐…. 이것은 별 의미 없는 피상적인 이분법일 뿐이란 것을 말이다. 쿠바의 밥상이 제기하는 진정한 질문은 바로 ‘자급자족’이다.
나는 쿠바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자족의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유일한 목표도 자족이었고, 혁명의 유일한 문제도 끝내 자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19세기 내내 스페인과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치렀고, 20세기에는 이곳을 경제적·정치적·군사적 뒷마당으로 만들려는 미국에 저항해야 했다. 미국의 턱 아래에 있었던 데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도 늦었던 쿠바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컸다. 친미주의자였던 독재자 바티스타를 혁명을 통해 쫓아냈을 때, 쿠바인들은 사실상 이렇게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는 쿠바인의 땅이다. 미국 회사가 국가 산업을 하나씩 접수하는 꼴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다. 이제부터 우리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
떠나간 사과, 잡혀간 고양이, 실종된 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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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의 첫걸음은 밥상부터 스스로 채우는 것, 즉 식량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쿠바 사람들이 ‘자족적인 밥상’을 위해 걸어온 길은 참으로 기상천외해서, ‘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 사조로 유명한 남미문학의 소재로 써도 좋을 정도다.
혁명 직후에 쿠바가 가진 식량 자원은 설탕뿐이었다. 지난 500년 동안 쿠바는 오로지 설탕을 재배하기 위한 땅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설탕을 수출해서 그 돈으로 필요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었지만, 세계 시장은 미국 때문에 꽉 막혀 있었다.
혁명 정부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설탕을 버리는 것이었다. 설탕 재배를 멈추는 대신, 그 빈자리에 다른 작물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쿠바 농업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만 명백해졌다. 1970년대에 쿠바 정부는 정책을 180도 돌렸다. 가용한 모든 노동력을 동원해서 오로지 설탕만을 생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설탕 재배를 제외한 모든 경제 부문은 전문성이 격감됐다. 그렇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소련이 주도하는 동구권 시장이 열렸다. 소련은 시장 가격이 아니라 ‘공정 가격’으로 설탕을 훨씬 비싸게 구매해 줬고, 그렇게 쿠바의 허울뿐인 ‘자급자족’을 도왔다.
이처럼 쿠바 정부가 10년마다 개혁을 감행할 때마다, 사람들의 식생활도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가령, 하숙집 할아버지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1980년대를 ‘사과’로 기억한다. 쿠바에서 사과는 꿈의 과일이다. 열대 섬나라인 쿠바에서는 사과가 나지 않아서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 사과를 맛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의 원조를 받던 시절만큼은 예외였다. 동구권 시장의 멤버였던 불가리아에서 사과가 헐값에 많이 수입됐던 것이다. ‘사과’가 상징하듯이 당시에는 풍족하지 않았어도 사회적으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건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사과도 떠나갔다.
그 후 영화와 같은 1990년대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자리가 없었고, 음식이 부족했으며, 전기가 끊겼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하루 종일 먹는 건 없고 운동만 하니 모두들 삐쩍 말라갔다. 카페테리아에서는 여전히 피자를 팔았지만, 치즈를 구할 수 없어서 하얀 플라스틱 조각을 얹어 피자를 구웠다. 이 ‘플라스틱 피자’를 사먹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중에는 고양이와 개가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먹을 게 완전히 바닥나자, 사람들이 이 친근한 동물들에게까지 조용히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다. 쿠바는 힘겹게 다시 일어서고 있다. 캐나다 자본, 중국 자본, 의료인력 수출, 그리고 관광업을 통해 어떻게든 수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쿠바인의 상실감까지 채워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쿠바 사람들의 식탁에서 생선이 실종됐다. 현재 쿠바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95%가 외국인이 투숙하는 호텔에 공급되거나, 수출용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산물은 섬나라에서 가장 찾기 힘든 음식이 된 것이다. 게다가 쌀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중국은 점점 쿠바 내에서 구소련과 같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쿠바인들은 소리 없이 묻는다. 이게 자족인가, 우리는 정말로 자족하고 있는가?
주적(主敵)은 근대농업이었다
혁명 직후에 쿠바가 가진 식량 자원은 설탕뿐이었다. 지난 500년 동안 쿠바는 오로지 설탕을 재배하기 위한 땅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설탕을 수출해서 그 돈으로 필요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었지만, 세계 시장은 미국 때문에 꽉 막혀 있었다.
혁명 정부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설탕을 버리는 것이었다. 설탕 재배를 멈추는 대신, 그 빈자리에 다른 작물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쿠바 농업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사실만 명백해졌다. 1970년대에 쿠바 정부는 정책을 180도 돌렸다. 가용한 모든 노동력을 동원해서 오로지 설탕만을 생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설탕 재배를 제외한 모든 경제 부문은 전문성이 격감됐다. 그렇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소련이 주도하는 동구권 시장이 열렸다. 소련은 시장 가격이 아니라 ‘공정 가격’으로 설탕을 훨씬 비싸게 구매해 줬고, 그렇게 쿠바의 허울뿐인 ‘자급자족’을 도왔다.
이처럼 쿠바 정부가 10년마다 개혁을 감행할 때마다, 사람들의 식생활도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가령, 하숙집 할아버지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1980년대를 ‘사과’로 기억한다. 쿠바에서 사과는 꿈의 과일이다. 열대 섬나라인 쿠바에서는 사과가 나지 않아서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 사과를 맛볼 수 없다. 그러나 소련의 원조를 받던 시절만큼은 예외였다. 동구권 시장의 멤버였던 불가리아에서 사과가 헐값에 많이 수입됐던 것이다. ‘사과’가 상징하듯이 당시에는 풍족하지 않았어도 사회적으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건 대부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사과도 떠나갔다.
그 후 영화와 같은 1990년대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자리가 없었고, 음식이 부족했으며, 전기가 끊겼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하루 종일 먹는 건 없고 운동만 하니 모두들 삐쩍 말라갔다. 카페테리아에서는 여전히 피자를 팔았지만, 치즈를 구할 수 없어서 하얀 플라스틱 조각을 얹어 피자를 구웠다. 이 ‘플라스틱 피자’를 사먹고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나중에는 고양이와 개가 거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먹을 게 완전히 바닥나자, 사람들이 이 친근한 동물들에게까지 조용히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다. 쿠바는 힘겹게 다시 일어서고 있다. 캐나다 자본, 중국 자본, 의료인력 수출, 그리고 관광업을 통해 어떻게든 수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쿠바인의 상실감까지 채워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쿠바 사람들의 식탁에서 생선이 실종됐다. 현재 쿠바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95%가 외국인이 투숙하는 호텔에 공급되거나, 수출용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산물은 섬나라에서 가장 찾기 힘든 음식이 된 것이다. 게다가 쌀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중국은 점점 쿠바 내에서 구소련과 같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쿠바인들은 소리 없이 묻는다. 이게 자족인가, 우리는 정말로 자족하고 있는가?
주적(主敵)은 근대농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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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다. 이 자족의 어려움은 공산주의 시스템이라는 쿠바의 내부적 요인 때문일까? 혹은 미국의 경제봉쇄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일까? 둘 다 온전한 대답이 될 수는 없다. 쿠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가 발 딛고 서 있는 근대라는 물질적 토대를 되돌아봐야 한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는 동일한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0년대의 쿠바 혁명은 구소련의 모델을 따라가면서 자본주의의 고질병인 노동 착취를 제어하면서도 사회 발전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소련 원조가 끊기자, 역설적이게도 농업의 근대화는 쿠바의 자급자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근대 농업은 인위적인 대량 생산을 기초로 한다. 이 대량 생산에 필요한 것은 종자 개량, 농업의 기계화, 화학비료, 그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세계 시장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필요하다. 농업은 늘 자본과 기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본과 기술을 아직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쿠바는, 외부의 원조가 끊기자마자 근대농업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타파할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혁명 이전에 근근이 이어오던 전통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생산량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협력은 현장에 있는 농민들의 주도로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핵심은 정치·경제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쌓는 것이다. 현재 쿠바는 농업 개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혁명의 근원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태어나, 청춘 시절을 혁명 정부에 충성했던 70대 쿠바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농장주였어. 부르주아 계급이었지만 혁명의 대의에 동의했고, 자발적으로 농장을 반납했어. 그 후 아버지는 바로 알아채셨어. 이 정부는 농업의 ‘농’자도 몰랐던 거야. 혁명 정부라면 농민들에게 직접 배우려고 했어야 했는데, 귀를 막았던 거지.”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
쿠바 정부는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를 급급히 쫓아가다가 이제야 농부들에게 귀를 열고 있다. 이 실수는 공산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쿠바의 텅 빈 시장을 비판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과연 쿠바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한국의 역량은 얼마나 될까? 세계 시장이 무너졌을 때, 얼마만큼의 농작물을 생산해서 밥상을 채울 수 있을까? 에너지 위기와 식량 부족의 위기는 나날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 반면, 한국의 시장은 수입산 작물로 넘쳐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쿠바의 ‘자급자족 드라마’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야 한다. 이들의 식탁이 사랑과 채소와 생선으로 싱싱하게 채워지기를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서 오늘 시장에서 고구마밖에 못 샀다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한 쿠바 청년이 영어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쿠바가 싫으면 처음부터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상한 마음이 이해됐다. 그의 눈에는 외국인들이 쿠바가 자족을 위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모른 채, 불평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불평불만은 우리 모두가 국적과 인종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 저녁 내 식탁에 든든한 밥 한 끼가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도저히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아바나에서나 서울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공산주의에서나 마찬가지다. 60년 전에 늙은 농장주가 자발적으로 토지를 정부에게 반납하면서 꾸었던 꿈은, 모두의 한 끼를 소중하게 여기는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소련 원조가 끊기자, 역설적이게도 농업의 근대화는 쿠바의 자급자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어째서일까? 근대 농업은 인위적인 대량 생산을 기초로 한다. 이 대량 생산에 필요한 것은 종자 개량, 농업의 기계화, 화학비료, 그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세계 시장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필요하다. 농업은 늘 자본과 기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본과 기술을 아직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쿠바는, 외부의 원조가 끊기자마자 근대농업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상황을 타파할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혁명 이전에 근근이 이어오던 전통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생산량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협력은 현장에 있는 농민들의 주도로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핵심은 정치·경제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쌓는 것이다. 현재 쿠바는 농업 개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혁명의 근원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서 태어나, 청춘 시절을 혁명 정부에 충성했던 70대 쿠바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농장주였어. 부르주아 계급이었지만 혁명의 대의에 동의했고, 자발적으로 농장을 반납했어. 그 후 아버지는 바로 알아채셨어. 이 정부는 농업의 ‘농’자도 몰랐던 거야. 혁명 정부라면 농민들에게 직접 배우려고 했어야 했는데, 귀를 막았던 거지.”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
쿠바 정부는 지난 60년 동안 산업화를 급급히 쫓아가다가 이제야 농부들에게 귀를 열고 있다. 이 실수는 공산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쿠바의 텅 빈 시장을 비판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과연 쿠바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한국의 역량은 얼마나 될까? 세계 시장이 무너졌을 때, 얼마만큼의 농작물을 생산해서 밥상을 채울 수 있을까? 에너지 위기와 식량 부족의 위기는 나날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 반면, 한국의 시장은 수입산 작물로 넘쳐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쿠바의 ‘자급자족 드라마’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야 한다. 이들의 식탁이 사랑과 채소와 생선으로 싱싱하게 채워지기를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서 오늘 시장에서 고구마밖에 못 샀다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한 쿠바 청년이 영어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쿠바가 싫으면 처음부터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상한 마음이 이해됐다. 그의 눈에는 외국인들이 쿠바가 자족을 위해 거쳐 온 과정은 전혀 모른 채, 불평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불평불만은 우리 모두가 국적과 인종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 저녁 내 식탁에 든든한 밥 한 끼가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도저히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과거에나 지금에나, 아바나에서나 서울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공산주의에서나 마찬가지다. 60년 전에 늙은 농장주가 자발적으로 토지를 정부에게 반납하면서 꾸었던 꿈은, 모두의 한 끼를 소중하게 여기는 ‘밥심’을 존중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비스타, 아바나(4)]
쿠바인들의 마지막 자존심, 집 구멍 난 지붕 아래 펼쳐지는 아바네로의 좌충우돌 드라마
김해완 작가
심각한 주택난에 쪼개고 덧붙여 ‘다같이’ 사는 공동주거 일상화…체 게바라가 꿈꿨던 ‘차별 없는 주거 자족’ 실험은 60년째 ‘진행 중’
첫 번째 장면. 한 외국인 여행객이 하룻밤 머물렀던 까사 빠르띠꿀라르(Casa Particular: 가정집의 빈 방을 여행객에게 제공하는 쿠바의 숙박업. ‘까사’라고도 불린다)를 나선다. 매트리스가 푹 꺼진 데다 새벽 6시부터 아이가 울어대는 바람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집주인은 궁핍한 얼굴로 좀 더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지만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여행객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란다. 집주인이 얼굴을 찡그리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주여, 부디 우리 집에 손님을 더 보내주소서!
두 번째 장면. 알코올중독으로 사고만 치던 막내 동생이 오랜 가출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동생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이 아니라, 이 술병과 함께 동생을 집어넣을 방이 없다는 사실이다. 집은 이미 만원이다. 동생이 집을 비운 사이에 두 딸과 한 아들, 두 손자와 손녀, 며느리와 그녀의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까지 한지붕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작년 후반부터 올해 초까지 방영됐던 쿠바의 국민드라마 [사랑의 시간(El Tiempo del Amor)]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시청했던 수많은 쿠바인이 이렇게 중얼거렸으리라. 오 주여, 부디 어느 여자가 사랑에 빠져서 저 못난 동생을 자기 집으로 거둬가게 해주소서!
하나는 실화고, 또 하나는 드라마다. 그러나 이 둘의 배경은 동일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다. 이곳에서 누구는 끌려들어가고, 누구는 쫓겨나며, 누구는 숨어 산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무너지는 건물들, 움직이는 사람들
겉으론 아바나의 ‘집구석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아바나의 길거리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여행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바나 역시 신선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매인 줄을 따라서 걸려 있는 빨래, 건물 벽을 고치고 있는 미장이, 성냥으로 가스불을 켜고 커피를 끓이는 할머니.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풍경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일으킨다.
그러나 삶은 이미지도 감성도 아닌 현실이다. 장기체류자의 눈으로 아바나의 길거리를 바라보면 어떨까? 외국인 전용 까사 표시인 파란 로고만 보일 것이다. 아바네로의 눈으로 이 도시를 본다면? 내국인 전용 까사 표신인 빨간 로고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시멘트나 경첩, 타일, 램프, 커튼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보이면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아바나의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집을 (통째로든 부분적으로든) 바꿀 수 있을까?’
쿠바의 주거환경은 몹시 독특하다. 쿠바 정부는 반세기 이상 사적인 부동산업을 전면 금지했고, 집주인의 권리는 허락하되 택지(宅地)의 권리는 모두 국가에 귀속했다. 따라서 쿠바에서는 월세나 전세, 매매(賣買) 같은 개념도 희박하다. 이곳의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가정집이다. 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일 수 있고, 국가로부터 할부로 구매해서 여전히 갚아나가고 있는 새 집일 수도 있다. 2011년 드디어 부동산 거래가 허용됐지만 일시불로 집값을 지불할 만큼 돈 많은 쿠바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주인이 바뀌는 것은 여전히 서로 집을 교환하거나 가족끼리 선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는 위에서 언급한 까사 빠르띠꿀라르다. 국가에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면서 빈 방이나 빈 아파트를 빌려주는 합법적인 비즈니스다. 그리고 셋째 주거 형태는 불법 까사다.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가정집이 몰래 세입자를 들이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적발된다면 집주인은 국가에 집을 몰수당하고 세입자 역시 곤란해지겠지만, 쿠바의 다른 비즈니스가 그렇듯이 이곳에서 암거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부동산이 죽었기 때문에 아바나의 주거 시장도 조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산이다. 세 가지 주거 형태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역학관계는 뉴욕에 버금갈 정도로 역동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바나의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고, 남아 있는 집마저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새 건물을 증축하는 속도는 세대가 교체되는 속도보다 더 느리다. 결국 분가를 원하는 젊은 부부는 곤란한 현실과 직면한다. 아바나에 자신을 위한 빈집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부족한 상황. 이 가운데에서 ‘집’은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됐다. 만인이 매달려야 하는 희소 자원이자, 돈을 버는 데 가장 효과적인 특수 자원이 된 것이다. 좁은 방에 몸을 구겨 넣어라, 그러나 세입자는 계속해서 오라!
아바네로들은 창의적으로 이 ‘집구석 드라마’를 써내려가고 있다. 물자의 한계, 자금의 부족, 그리고 집 공사에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료주의를 견뎌가며 어떻게든 기존의 집을 증축해 왔다. 식민지 풍 건물의 특징인 높은 천장을 두 개층으로 나눈다거나, 건물 내부에 있는 정원인 빠띠오(Patio)를 방으로 만든다거나, 방에 간이 화장실과 간이 주방을 만든다거나. 이런 변화가 축적되면 같은 공간이라도 몰라보게 변신한다. 아바나의 많은 아파트가 한눈에 파악하지 못할 만큼 희한한 구조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아바나의 건물들은 움직이고 또 변신하고 있다.
집의 변신은 그만큼 다사다난한 가족사를 반영한다. 집은 사람의 몸을 ‘수납하는’ 창고가 아니다. 집의 구조는 인간관계의 형태와 곧바로 맞물린다. 오늘날 한국에서 남녀노모두가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것은 개인 간의 사회적 거리가 돌이킬 수 없이 변했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더 다양한 대안과 섬세한 배려를 요구하는 일이 됐다.
가령,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남산강학원이라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동주거 실험을 했었다. 좁은 방 하나를 둘이서 나눠 쓰고 화장실 하나를 네 명이 함께 사용하면서도 문제가 전혀 없었던 까닭은, 연구실의 널찍한 공부방과 거대한 주방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이 없었더라면 공동주거는 그저 돈을 아끼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쿠바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쿠바가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이고 끈끈한 가족 문화를 자랑한다고 해도, 이곳의 시간은 ‘근대(modern)’의 시계를 따라서 쉼 없이 흐르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학교와 병원과 극장을 드나들고, 성차별주의나 나이에 따른 위계와 같은 인습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는 육체노동에 익숙하고, 아버지 세대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엘리트이며, 아들 세대는 혁명보다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와의 소통에 더 관심이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집단의 구성원이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예측 불가능한 각종 사건, 상상을 초월하는 스트레스다. 그리고 대안을 찾기 위한 무한한 인내심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실화다. 대학교 2학년인 딸이 엄마에게 선언한다.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겠다는 것이다. 엄마의 첫 질문은 ‘누구냐’가 아니라 ‘어디서’다. 딸은 대답한다. ‘내 방에서.’ 이제 엄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의 동거남과 동거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바나 어디에서도 그들이 독립된 공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간 이 젊은 커플을 위해 빨래를 하고 밥을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쿠바의 가정에서는 여전히 ‘엄마’가 과도한 책임을 떠맡는다) 어느 날 엄마는 마침내 생각한다. ‘빠띠오를 포기하고 거기에 아이들 살림집이나 차려줄까?’
집을 자족한다는 것의 의미
이런 기막힌 ‘동거(공동주거)’는 아바나 어디를 가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족 간에 불협화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아바나의 아파트는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변신한다. 그리고 변신이 거듭될수록 아바네로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디가 가족과 타인을 가르는 경계인가? 어디가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경계인가?
외국인은 아바나에서 살기 좋은 공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시골 출신의 쿠바인들은 공짜로 주거 공간을 얻기 위해서 아바네로와 결혼한다. 집을 둘러싼 아바나의 셈법은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아바나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버금가는 카오스의 공간이 될 거라고, 60년 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두 손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쿠바는 자기만의 맥락에서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현 상황을 성공이냐 실패냐 단정하기 전에, 쿠바가 주거에 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월간중앙] 2월호에서 나는 쿠바혁명의 여정이 ‘자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구(舊) 식민지 출신인 제3세계의 약소국이, 강대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구속에서 벗어나서, 과연 스스로의 사상과 실천력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 식량 같은 경우는 자족의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글로벌 시장으로부터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쿠바인이 먹을 식량은 쿠바인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거는 식생활보다 더 고차원적인 문제다. 사람이 먹지 않는 브로콜리는 동물의 식량이 돼서 여전히 자연의 일부로 기능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자연의 쓰레기에 불과하다.
집을 ‘자족한다’는 것은 건물을 건축할 수 있는 자금력과 기술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건물 내부에서 사람들이 세대에 세대를 거듭할 수 있도록 삶의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세대 유지’야말로 정부의 각종 일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목표다. 한 사람을 한 집에 계속 살게 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필요하다. 일자리가 있어야 하고, 시장이 있어야 하고, 예술이 있어야 한다.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류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좋은 이웃과 마을이 있어야 한다. 결국 집 하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집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다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거를 ‘자족할’ 수 있다.
쿠바혁명의 목표는 ‘신인류(El Hombre Nuevo)’라고 불릴 새로운 세대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체 게바라가 내세운 개념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반자본주의식 경제 발전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거꾸로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인간의 도덕적 의식을 다시 키우기 위해서 공산주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혁명의 집’은 아직도 공사 중
“우리에게는 숲이란 곧 나무들이라는 것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 지금까지 닦여온 경제적 기반은 의식의 발전을 침식시키는 일을 해왔다.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질적 기반을 닦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남성과 여성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 1965년, 체 게바라)
쿠바라는 숲을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남성과 여성”이라는 나무들을 잘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새 나무들은 어디에서 자라날까? 체 게바라는 아마도 이렇게 고민했을 것이다.
“집 없이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자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이 주거 환경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살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출신, 재산, 인종과 상관없이 모두가 그러하다. 또한 모든 장소는 정당한 노동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누구도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날 필요가 없을 때에야 그곳은 ‘집’이 될 것이다. 돈이 넘쳐나는 그 어떤 선진국도 이런 집을 짓지 못했다. 그렇다면? 쿠바부터 시작한다.”
철학은 좋았다. 관건은 실천력이다. 쿠바 정부는 혁명 초기부터 주거에 대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였다.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집에 대한 독점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집을 여러 채 소유해서 월세로 먹고 살았던 집주인들은 부동산을 포기해야 했다. 정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집을 두 채로 제한했다(하나는 도시, 또 하나는 농촌). 그렇다고 소유권 자체를 아예 말소시킨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에게 집을 물려받은 사람은 계속 같은 집에 살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국가에 월세를 지불하다가 원금을 다 갚으면 그 집을 소유할 수 있었다. 현재 아바나의 집주인들은 이때 혜택을 본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정부가 착수한 일은 건물의 복원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후반에 낙후된 건물을 복구하는 프로젝트도 실행됐다. 건축가를 무료로 파견해 거주자와 함께 집을 개조하거나, 빈곤자가 스스로 자기 집을 지을 기회를 주는 ‘미크로 브리가다(Micro Brigada)’였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 자금 문제 때문에 중지됐지만,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서 유엔에서 ‘2000년 세계주택전략’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는 미크로 브리가다 대신에 낙후된 집을 선정해서 재건축 비용으로 10만 쿠바 페소(약 450만원)의 신용을 제공하는 ‘쁠란 데 알베르가도(Plan de Albergado)’가 실시되고 있다.
의도도, 의지도, 아이디어도 훌륭했다. 그러나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무능력이라기보다는 쿠바가 처한 조건이 워낙 불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쿠바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장애물은 세 가지다. 첫째,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과 식민지 시절의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을 복원해서 재사용하려니 2세기 전에 사용됐던 건축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여름 태풍은 건물을 파괴한다.
둘째, 돈이 없다. 여기서 돈이 없다는 것은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외부에서 구매해야 한다는 뜻이다. 쿠바는 천연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다. 특히 1990년 대 초 소련이 붕괴되면서 쿠바는 시멘트 같은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원재료와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됐다. 현재 점토와 대나무 같은 친환경 소재로 건축하는 법을 개발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충분치 않다.
셋째, 지역 간의 균형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혁명이 일어나자 수많은 지방 사람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아바나로 이주했고, 1990년대에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모두들 아바나로 향했다. 오늘날에도 쿠바의 삶의 자원은 모두 아바나에 집중돼 있다.(이것은 앞으로 연재를 진행하면서 두루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의 집’은 아직도 공사 중이다. 쿠바가 관광업을 확장하면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21세기, 사람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자본이 유입돼야 집을 보수할 수 있다는 의견과, 관광객이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쿠바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쿠바의 ‘집’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기나긴 여정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든 간에, 쿠바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매혹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석유가 모두 떨어진다면 한국인은 과연 무슨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왜 한국은 자본이 넘치면서도 주거 환경은 행복하지 않은가? 지역 간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우선순위가 돼야 할까? 이런 질문은 중요하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정치적 노선과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같다. 땅에 삶이 이어지도록 돕는 것, 가족이 세대를 이으며 두고두고 살 수 있는 장기적인 ‘집’을 건설하는 것이다.
‘체’는 이웃집에 산다
아바네로들은 불평의 천재다. 특히 집 얘기만 나오면 불평은 몇 배로 가속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자랑스럽게 이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이 도시에서 길거리에 버려진 불쌍한 노숙자는 없다고. 우리 모두에게는 최소한 집이 있다고.
맞는 말이다. 아바네로들이 불편한 동거 생활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치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필리핀의 빈민촌이나 미국의 디트로이드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는 없다. 나는 이것이 정부의 주거 정책뿐만 아니라 커뮤니티가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파에 누워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늙은 부모님을 길거리에 내쫓거나, 내 방 침대에 더러운 양말을 벗어둔 5촌 아저씨를 추방하지는 않는다.
쿠바 사람들은 정말 그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니, “그보다는 이웃의 눈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준다. 같은 곳에서 몇 십 년 정도 살다 보면 이웃처럼 도움이 되고 또 두려운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바나의 ‘집’을 유지하는 최고의 자원은 ‘이웃사촌’인 셈이다! 세포막이 내부와 외부의 물질을 교환하면서 우리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건강한 커뮤니티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가르지 않고도 유지되는 모양이다.
지난 30년간 수많은 쿠바인이 외국으로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수많은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글로벌 시대의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가슴 찢어지는 이별도, 뒤에서 버텨야 하는 자의 심정도, 지켜야 하는 마을의 가치도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살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체가 바라던, 혹은 쿠바인들이 체를 모델로 삼은 ‘신인류’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 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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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장면. 알코올중독으로 사고만 치던 막내 동생이 오랜 가출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은 아직도 동생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이 아니라, 이 술병과 함께 동생을 집어넣을 방이 없다는 사실이다. 집은 이미 만원이다. 동생이 집을 비운 사이에 두 딸과 한 아들, 두 손자와 손녀, 며느리와 그녀의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까지 한지붕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작년 후반부터 올해 초까지 방영됐던 쿠바의 국민드라마 [사랑의 시간(El Tiempo del Amor)]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시청했던 수많은 쿠바인이 이렇게 중얼거렸으리라. 오 주여, 부디 어느 여자가 사랑에 빠져서 저 못난 동생을 자기 집으로 거둬가게 해주소서!
하나는 실화고, 또 하나는 드라마다. 그러나 이 둘의 배경은 동일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다. 이곳에서 누구는 끌려들어가고, 누구는 쫓겨나며, 누구는 숨어 산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무너지는 건물들, 움직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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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삶은 이미지도 감성도 아닌 현실이다. 장기체류자의 눈으로 아바나의 길거리를 바라보면 어떨까? 외국인 전용 까사 표시인 파란 로고만 보일 것이다. 아바네로의 눈으로 이 도시를 본다면? 내국인 전용 까사 표신인 빨간 로고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시멘트나 경첩, 타일, 램프, 커튼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보이면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아바나의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집을 (통째로든 부분적으로든) 바꿀 수 있을까?’
쿠바의 주거환경은 몹시 독특하다. 쿠바 정부는 반세기 이상 사적인 부동산업을 전면 금지했고, 집주인의 권리는 허락하되 택지(宅地)의 권리는 모두 국가에 귀속했다. 따라서 쿠바에서는 월세나 전세, 매매(賣買) 같은 개념도 희박하다. 이곳의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가정집이다. 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일 수 있고, 국가로부터 할부로 구매해서 여전히 갚아나가고 있는 새 집일 수도 있다. 2011년 드디어 부동산 거래가 허용됐지만 일시불로 집값을 지불할 만큼 돈 많은 쿠바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주인이 바뀌는 것은 여전히 서로 집을 교환하거나 가족끼리 선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는 위에서 언급한 까사 빠르띠꿀라르다. 국가에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면서 빈 방이나 빈 아파트를 빌려주는 합법적인 비즈니스다. 그리고 셋째 주거 형태는 불법 까사다.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가정집이 몰래 세입자를 들이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적발된다면 집주인은 국가에 집을 몰수당하고 세입자 역시 곤란해지겠지만, 쿠바의 다른 비즈니스가 그렇듯이 이곳에서 암거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부동산이 죽었기 때문에 아바나의 주거 시장도 조용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산이다. 세 가지 주거 형태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역학관계는 뉴욕에 버금갈 정도로 역동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바나의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고, 남아 있는 집마저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새 건물을 증축하는 속도는 세대가 교체되는 속도보다 더 느리다. 결국 분가를 원하는 젊은 부부는 곤란한 현실과 직면한다. 아바나에 자신을 위한 빈집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부족한 상황. 이 가운데에서 ‘집’은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됐다. 만인이 매달려야 하는 희소 자원이자, 돈을 버는 데 가장 효과적인 특수 자원이 된 것이다. 좁은 방에 몸을 구겨 넣어라, 그러나 세입자는 계속해서 오라!
아바네로들은 창의적으로 이 ‘집구석 드라마’를 써내려가고 있다. 물자의 한계, 자금의 부족, 그리고 집 공사에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료주의를 견뎌가며 어떻게든 기존의 집을 증축해 왔다. 식민지 풍 건물의 특징인 높은 천장을 두 개층으로 나눈다거나, 건물 내부에 있는 정원인 빠띠오(Patio)를 방으로 만든다거나, 방에 간이 화장실과 간이 주방을 만든다거나. 이런 변화가 축적되면 같은 공간이라도 몰라보게 변신한다. 아바나의 많은 아파트가 한눈에 파악하지 못할 만큼 희한한 구조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아바나의 건물들은 움직이고 또 변신하고 있다.
집의 변신은 그만큼 다사다난한 가족사를 반영한다. 집은 사람의 몸을 ‘수납하는’ 창고가 아니다. 집의 구조는 인간관계의 형태와 곧바로 맞물린다. 오늘날 한국에서 남녀노모두가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것은 개인 간의 사회적 거리가 돌이킬 수 없이 변했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더 다양한 대안과 섬세한 배려를 요구하는 일이 됐다.
가령,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남산강학원이라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동주거 실험을 했었다. 좁은 방 하나를 둘이서 나눠 쓰고 화장실 하나를 네 명이 함께 사용하면서도 문제가 전혀 없었던 까닭은, 연구실의 널찍한 공부방과 거대한 주방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이 없었더라면 공동주거는 그저 돈을 아끼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쿠바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쿠바가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이고 끈끈한 가족 문화를 자랑한다고 해도, 이곳의 시간은 ‘근대(modern)’의 시계를 따라서 쉼 없이 흐르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학교와 병원과 극장을 드나들고, 성차별주의나 나이에 따른 위계와 같은 인습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는 육체노동에 익숙하고, 아버지 세대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엘리트이며, 아들 세대는 혁명보다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와의 소통에 더 관심이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집단의 구성원이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예측 불가능한 각종 사건, 상상을 초월하는 스트레스다. 그리고 대안을 찾기 위한 무한한 인내심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실화다. 대학교 2학년인 딸이 엄마에게 선언한다.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겠다는 것이다. 엄마의 첫 질문은 ‘누구냐’가 아니라 ‘어디서’다. 딸은 대답한다. ‘내 방에서.’ 이제 엄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의 동거남과 동거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바나 어디에서도 그들이 독립된 공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간 이 젊은 커플을 위해 빨래를 하고 밥을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쿠바의 가정에서는 여전히 ‘엄마’가 과도한 책임을 떠맡는다) 어느 날 엄마는 마침내 생각한다. ‘빠띠오를 포기하고 거기에 아이들 살림집이나 차려줄까?’
집을 자족한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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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은 아바나에서 살기 좋은 공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시골 출신의 쿠바인들은 공짜로 주거 공간을 얻기 위해서 아바네로와 결혼한다. 집을 둘러싼 아바나의 셈법은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아바나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버금가는 카오스의 공간이 될 거라고, 60년 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두 손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쿠바는 자기만의 맥락에서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현 상황을 성공이냐 실패냐 단정하기 전에, 쿠바가 주거에 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월간중앙] 2월호에서 나는 쿠바혁명의 여정이 ‘자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구(舊) 식민지 출신인 제3세계의 약소국이, 강대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구속에서 벗어나서, 과연 스스로의 사상과 실천력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 식량 같은 경우는 자족의 문제와 곧바로 연결된다. 글로벌 시장으로부터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쿠바인이 먹을 식량은 쿠바인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거는 식생활보다 더 고차원적인 문제다. 사람이 먹지 않는 브로콜리는 동물의 식량이 돼서 여전히 자연의 일부로 기능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자연의 쓰레기에 불과하다.
집을 ‘자족한다’는 것은 건물을 건축할 수 있는 자금력과 기술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건물 내부에서 사람들이 세대에 세대를 거듭할 수 있도록 삶의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세대 유지’야말로 정부의 각종 일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목표다. 한 사람을 한 집에 계속 살게 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필요하다. 일자리가 있어야 하고, 시장이 있어야 하고, 예술이 있어야 한다.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류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좋은 이웃과 마을이 있어야 한다. 결국 집 하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집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다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거를 ‘자족할’ 수 있다.
쿠바혁명의 목표는 ‘신인류(El Hombre Nuevo)’라고 불릴 새로운 세대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체 게바라가 내세운 개념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반자본주의식 경제 발전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거꾸로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인간의 도덕적 의식을 다시 키우기 위해서 공산주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혁명의 집’은 아직도 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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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라는 숲을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남성과 여성”이라는 나무들을 잘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새 나무들은 어디에서 자라날까? 체 게바라는 아마도 이렇게 고민했을 것이다.
“집 없이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자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이 주거 환경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살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출신, 재산, 인종과 상관없이 모두가 그러하다. 또한 모든 장소는 정당한 노동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누구도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날 필요가 없을 때에야 그곳은 ‘집’이 될 것이다. 돈이 넘쳐나는 그 어떤 선진국도 이런 집을 짓지 못했다. 그렇다면? 쿠바부터 시작한다.”
철학은 좋았다. 관건은 실천력이다. 쿠바 정부는 혁명 초기부터 주거에 대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였다.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집에 대한 독점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집을 여러 채 소유해서 월세로 먹고 살았던 집주인들은 부동산을 포기해야 했다. 정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집을 두 채로 제한했다(하나는 도시, 또 하나는 농촌). 그렇다고 소유권 자체를 아예 말소시킨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에게 집을 물려받은 사람은 계속 같은 집에 살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국가에 월세를 지불하다가 원금을 다 갚으면 그 집을 소유할 수 있었다. 현재 아바나의 집주인들은 이때 혜택을 본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정부가 착수한 일은 건물의 복원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후반에 낙후된 건물을 복구하는 프로젝트도 실행됐다. 건축가를 무료로 파견해 거주자와 함께 집을 개조하거나, 빈곤자가 스스로 자기 집을 지을 기회를 주는 ‘미크로 브리가다(Micro Brigada)’였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 자금 문제 때문에 중지됐지만,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서 유엔에서 ‘2000년 세계주택전략’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는 미크로 브리가다 대신에 낙후된 집을 선정해서 재건축 비용으로 10만 쿠바 페소(약 450만원)의 신용을 제공하는 ‘쁠란 데 알베르가도(Plan de Albergado)’가 실시되고 있다.
의도도, 의지도, 아이디어도 훌륭했다. 그러나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무능력이라기보다는 쿠바가 처한 조건이 워낙 불리하기 때문이다. 현재 쿠바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장애물은 세 가지다. 첫째,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과 식민지 시절의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을 복원해서 재사용하려니 2세기 전에 사용됐던 건축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여름 태풍은 건물을 파괴한다.
둘째, 돈이 없다. 여기서 돈이 없다는 것은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외부에서 구매해야 한다는 뜻이다. 쿠바는 천연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다. 특히 1990년 대 초 소련이 붕괴되면서 쿠바는 시멘트 같은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원재료와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됐다. 현재 점토와 대나무 같은 친환경 소재로 건축하는 법을 개발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충분치 않다.
셋째, 지역 간의 균형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혁명이 일어나자 수많은 지방 사람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아바나로 이주했고, 1990년대에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모두들 아바나로 향했다. 오늘날에도 쿠바의 삶의 자원은 모두 아바나에 집중돼 있다.(이것은 앞으로 연재를 진행하면서 두루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의 집’은 아직도 공사 중이다. 쿠바가 관광업을 확장하면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21세기, 사람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자본이 유입돼야 집을 보수할 수 있다는 의견과, 관광객이 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쿠바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쿠바의 ‘집’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기나긴 여정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든 간에, 쿠바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매혹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석유가 모두 떨어진다면 한국인은 과연 무슨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왜 한국은 자본이 넘치면서도 주거 환경은 행복하지 않은가? 지역 간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우선순위가 돼야 할까? 이런 질문은 중요하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정치적 노선과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같다. 땅에 삶이 이어지도록 돕는 것, 가족이 세대를 이으며 두고두고 살 수 있는 장기적인 ‘집’을 건설하는 것이다.
‘체’는 이웃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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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다. 아바네로들이 불편한 동거 생활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치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필리핀의 빈민촌이나 미국의 디트로이드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는 없다. 나는 이것이 정부의 주거 정책뿐만 아니라 커뮤니티가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파에 누워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늙은 부모님을 길거리에 내쫓거나, 내 방 침대에 더러운 양말을 벗어둔 5촌 아저씨를 추방하지는 않는다.
쿠바 사람들은 정말 그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니, “그보다는 이웃의 눈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준다. 같은 곳에서 몇 십 년 정도 살다 보면 이웃처럼 도움이 되고 또 두려운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아바나의 ‘집’을 유지하는 최고의 자원은 ‘이웃사촌’인 셈이다! 세포막이 내부와 외부의 물질을 교환하면서 우리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건강한 커뮤니티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가르지 않고도 유지되는 모양이다.
지난 30년간 수많은 쿠바인이 외국으로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수많은 가족과 이웃을 잃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글로벌 시대의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가슴 찢어지는 이별도, 뒤에서 버텨야 하는 자의 심정도, 지켜야 하는 마을의 가치도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살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체가 바라던, 혹은 쿠바인들이 체를 모델로 삼은 ‘신인류’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 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비스타, 아바나(6)]
합법과 불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돈벌이
쿠바의 척박함에서 소박(素朴)의 가치를 깨닫다
김해완 작가
내·외국인 화폐 이원화 정책으로 물가 수십 배 차이 나기도…정부 묵인 아래 생계 위한 불법적인 돈벌이 수단도 일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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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쿠바 열풍’이 한창이다. 지구상에서 몇 남지 않은 공식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수많은 여행객이 발걸음을 옮긴다. 이러한 열풍은 관광업계의 마케팅 전략이 먹힌 결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일색이 된 세상 속에서, 돈 앞에서 무엇이 행복인지 잊어버린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향수를 반영하기도 한다. ‘푸르른 바다와 흥겨운 음악이 가득한 섬나라… 이곳에 가면 그 옛날 돈 없이도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쿠바에 머무를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는데, 이는 신념이라던가 하는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쓰리 잡(three jobs)’을 뛰면서 생활비를 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팍팍한 뉴욕 생활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돈 없이도 행복했던 한국’을 기억하는 세대도 아니면서, 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보여준 가난한 동네의 행복한 삶을 쿠바에 투사했다. 그 시절,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쿠바는 소박의 아이콘이었다. 아,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무지는 언제나 그 대가를 치른다. 쿠바에 머무른 지 7개월째인 지금, 나는 내가 멋대로 품었던 사회주의의 상(想)을 매일 버리고 있다. 아, 이것은 쿠바 탓이 아니라 홀로 상상하고 기대를 품었던 나의 탓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쿠바는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환경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나 그렇듯, 쿠바인들은 생계라는 문제 앞에서 모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쿠바에 머무를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는데, 이는 신념이라던가 하는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쓰리 잡(three jobs)’을 뛰면서 생활비를 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팍팍한 뉴욕 생활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돈 없이도 행복했던 한국’을 기억하는 세대도 아니면서, 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보여준 가난한 동네의 행복한 삶을 쿠바에 투사했다. 그 시절,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쿠바는 소박의 아이콘이었다. 아,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무지는 언제나 그 대가를 치른다. 쿠바에 머무른 지 7개월째인 지금, 나는 내가 멋대로 품었던 사회주의의 상(想)을 매일 버리고 있다. 아, 이것은 쿠바 탓이 아니라 홀로 상상하고 기대를 품었던 나의 탓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쿠바는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환경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나 그렇듯, 쿠바인들은 생계라는 문제 앞에서 모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맨 눈으로 바라본 아바나의 생계 현장은 어떨까? 한국인의 상식만을 탑재하고 있었던 나는 처음에는 아바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시장에 가도 물건이 안 보일까, 왜 똑같은 물건의 가격이 가게에 따라 25배나 차이 날까. 그리고 곧 여기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아바네로의 쇼핑 사정부터 살펴보자. 이론대로라면 정부의 배급을 통해 모든 생활이 가능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반 이상의 생필품을 시장에서 구하고 있다. 이들의 소비는 즉흥적이고 비정기적이다. 시장이 먼저 있고 그 후에 물건이 조달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모이는 곳에 임시 시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건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희귀한 아이템’이다. 따라서 쇼핑의 주도권을 내가 아니라 물건에게 넘겨 줘야 한다. 있으면 사고,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
우선 아바네로의 쇼핑 사정부터 살펴보자. 이론대로라면 정부의 배급을 통해 모든 생활이 가능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반 이상의 생필품을 시장에서 구하고 있다. 이들의 소비는 즉흥적이고 비정기적이다. 시장이 먼저 있고 그 후에 물건이 조달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모이는 곳에 임시 시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건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희귀한 아이템’이다. 따라서 쇼핑의 주도권을 내가 아니라 물건에게 넘겨 줘야 한다. 있으면 사고, 없으면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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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귀하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숨어 있는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 달 동안 찾아 헤맸던 수세미를 노점상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이른 아침에 이미 다 팔리고 없는 양파를 어떤 아저씨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기도 한다. 누구나 배급줄에서 기다릴 수 없다는 상황을 이용해 정부가 공급하는 저렴한 배급식품을 집집마다 방문하며 더 비싸게 판매하는 장사꾼들도 있다. 이런 보부상 사업은 국제적으로도 이루어진다. 여행 비자가 있는 소수의 쿠바인들이 멕시코에 가서 공산품을 직접 들여오는 것이다. 가전제품이나 의류가 그 대상이다.
이처럼 실질적인 시장은 안개처럼 퍼져 있다. 이런 환경에서 합리적인 가격을 기대하긴 어렵다. 공급 상황이 흔들릴 때마다 물건의 가격은 널뛰기를 한다. 계란은 원래 하나 당 1쿱(40원)인데, 작년 태풍 ‘어마’가 왔다 간 직후에는 5쿱까지 뛰었다.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한국에서 같은 물건을 살 때보다 가격이 더 비싸다. 심플한 옷이 한 벌에 최소 20~30쿡(2만~3만원)은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가격은 가게마다 천차만별
이처럼 실질적인 시장은 안개처럼 퍼져 있다. 이런 환경에서 합리적인 가격을 기대하긴 어렵다. 공급 상황이 흔들릴 때마다 물건의 가격은 널뛰기를 한다. 계란은 원래 하나 당 1쿱(40원)인데, 작년 태풍 ‘어마’가 왔다 간 직후에는 5쿱까지 뛰었다.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한국에서 같은 물건을 살 때보다 가격이 더 비싸다. 심플한 옷이 한 벌에 최소 20~30쿡(2만~3만원)은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가격은 가게마다 천차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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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물건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칠수록, 마진이 붙으면서 가격은 뻥튀기된다. 예를 들어 감자는 배급표를 가진 현지인에게 무료로 배급되고 있는데, 배급표가 없거나 이미 써 버린 사람들에게는 몇 배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또, 정부에서 정한 500㎖ 생수 한 병의 공식 가격은 500원이지만, 이 생수는 아바나 어디를 가든지 1000원에 팔린다. 쿠바 사람들의 최저 월급이 250쿱(약 1만원)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물가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다.
누군가 물건을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이에게는 돈을 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바나의 지하시장은 아바네로의 지갑 사정과 직결된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현재 쿠바 정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월급의 액수는 몹시 낮아서 실질적인 생계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그래서 쿠바인들은 생계비를 확충하기 위해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
첫 번째 해결책은 관광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현재 쿠바의 실질적인 돈벌이 수단은 관광업이다. 관광업에서 수익이 높게 나는 까닭은 쿠바가 쿡(CUC, 미국 달러와 일대일로 교환되는 외국인용 화폐)과 쿱(CUP, 쿠바 현지인용 화폐)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화폐 제도를 택했기 때문이다. 쿡과 쿱의 환율은 1대 25다. 외국인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쿡으로, 현지인의 물가는 쿱으로 계산되고 있다. 그래서 길거리 가판대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1쿱이지만, 외국인이 머무는 호텔 옆에서는 1쿡(25쿱)이 되는 마법이 벌어진다. 관광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국가가 제도적으로 ‘가격 뻥튀기’를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아바네로들은 쿡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목을 맨다.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직통택시는 보통 5쿡(약 5000원)부터 가격을 매기는데, 이는 환전하면 125쿱이다. 125쿱으론 버스 열 번, 아이스크림 열 컵, 커피 열 잔, 햄 샌드위치 열 개, 거기에 덤으로 로빠 비에하(Ropa Vieja, 쿠바의 전통요리) 한 접시까지 구매할 수 있다. 15분 동안 택시 운전으로 열 사람을 위한 버스비와 간식비가 마련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두가 관광업에만 종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두 번째 해결책은 생산자의 신분으로 지하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재 대부분이 정부 관할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개인 사업을 하려면 ‘불법 행위’가 불가피해진다. 가령, 시가 공장에서 평생 일했던 할아버지는 은퇴 후에 몰래 담뱃잎을 빼돌리고, 그의 아들은 이 담뱃잎을 말아서 정부 가격보다 더 싸게 시가 박스를 내다 판다. 혹은 식당에서 일하는 조카가 밀가루와 햄을 가져다주면, 고모는 이것으로 학교 근처에 학생들을 위한 작은 분식점을 여는 식이다.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생존법’
누군가 물건을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이에게는 돈을 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바나의 지하시장은 아바네로의 지갑 사정과 직결된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현재 쿠바 정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월급의 액수는 몹시 낮아서 실질적인 생계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그래서 쿠바인들은 생계비를 확충하기 위해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
첫 번째 해결책은 관광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현재 쿠바의 실질적인 돈벌이 수단은 관광업이다. 관광업에서 수익이 높게 나는 까닭은 쿠바가 쿡(CUC, 미국 달러와 일대일로 교환되는 외국인용 화폐)과 쿱(CUP, 쿠바 현지인용 화폐)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화폐 제도를 택했기 때문이다. 쿡과 쿱의 환율은 1대 25다. 외국인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쿡으로, 현지인의 물가는 쿱으로 계산되고 있다. 그래서 길거리 가판대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1쿱이지만, 외국인이 머무는 호텔 옆에서는 1쿡(25쿱)이 되는 마법이 벌어진다. 관광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국가가 제도적으로 ‘가격 뻥튀기’를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아바네로들은 쿡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목을 맨다.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직통택시는 보통 5쿡(약 5000원)부터 가격을 매기는데, 이는 환전하면 125쿱이다. 125쿱으론 버스 열 번, 아이스크림 열 컵, 커피 열 잔, 햄 샌드위치 열 개, 거기에 덤으로 로빠 비에하(Ropa Vieja, 쿠바의 전통요리) 한 접시까지 구매할 수 있다. 15분 동안 택시 운전으로 열 사람을 위한 버스비와 간식비가 마련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두가 관광업에만 종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두 번째 해결책은 생산자의 신분으로 지하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재 대부분이 정부 관할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개인 사업을 하려면 ‘불법 행위’가 불가피해진다. 가령, 시가 공장에서 평생 일했던 할아버지는 은퇴 후에 몰래 담뱃잎을 빼돌리고, 그의 아들은 이 담뱃잎을 말아서 정부 가격보다 더 싸게 시가 박스를 내다 판다. 혹은 식당에서 일하는 조카가 밀가루와 햄을 가져다주면, 고모는 이것으로 학교 근처에 학생들을 위한 작은 분식점을 여는 식이다.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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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 수수료를 챙기는 것 역시 보편적인 해결책이다. 가령, 한 까사 주인이 여행객을 다른 까사에 소개해 주면 그는 단기적으로 일당 5쿡, 장기적으로 월 50쿡(약 5만원)의 소개비를 받는다. 이것도 한 번만 받는 게 아니라, 여행객이 그 까사를 완전히 나갈 때까지 정기적으로 받는다. 택시운전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운전사는 차의 실제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차를 빌리는 대가로 매일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 아닌가? 중개 수수료 역시 세금을 피하는 ‘눈먼 돈’이 아닌가? 국민 세금으로 무료로 박사 학위까지 공부한 사람이 교육에 종사하지 않고 택시운전사가 되다니, 이것은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묻는 사람은 아바나의 생계를 아직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이다. 정부 역시 사람들이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마비되지 않고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다.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바나에서 생계를 둘러싼 계산은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돈이 늘 사적인 인맥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우정과 이해관계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요동친다. 아바네로마저도 그 복잡함에 고개를 내젓는 판국인데, 인간의 정(情)을 주고받는 소박한 공동체를 상상하고 온 외부인은 큰 코다친다. 눈 감으면 코 베는 곳은 서울이 아닌 아바나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쿠바 정부나 쿠바인이나, 정말로 돈이 궁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No hay dinero)’, 이 표현은 어디서나 들려 온다. 하지만 돈의 부재를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성급히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칼로 무 베듯이 딱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경제에서는 생산을 촉진하는 자본주의의 요소와 분배에 집중하는 사회주의의 요소가 언제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만 보면 자본주의가 완승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티 같은 국가에서 자본주의는 완전히 실패한 체제다.
월급과 물가 사이의 불일치, 널리 퍼진 지하시장, 교육받은 인력을 활용할 수 없는 빈약한 산업. 이런 모순적인 시스템은 역설적이게도 ‘소박한 삶’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쿠바 혁명은 처음부터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이 아니었다. 혁명을 지지했던 대중의 정서는 반미주의와 민족주의에 가까웠는데, 이 정서 아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생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20세기 초, 독립을 이뤄낸 쿠바인들은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처럼 동일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속국이 되어서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자급자족하는 모험을 해볼 것인가? 선택은 후자였다. ‘쿠바인들을 위한 쿠바(Cuba por los cubanos)’, 이 유명한 문구는 미국 달러를 위해서 주권을 팔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돈이 없다고? 돈 빼고 다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 아닌가? 중개 수수료 역시 세금을 피하는 ‘눈먼 돈’이 아닌가? 국민 세금으로 무료로 박사 학위까지 공부한 사람이 교육에 종사하지 않고 택시운전사가 되다니, 이것은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묻는 사람은 아바나의 생계를 아직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이다. 정부 역시 사람들이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마비되지 않고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다.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바나에서 생계를 둘러싼 계산은 복잡하고 또 복잡하다. 돈이 늘 사적인 인맥을 타고 흐르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우정과 이해관계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요동친다. 아바네로마저도 그 복잡함에 고개를 내젓는 판국인데, 인간의 정(情)을 주고받는 소박한 공동체를 상상하고 온 외부인은 큰 코다친다. 눈 감으면 코 베는 곳은 서울이 아닌 아바나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쿠바 정부나 쿠바인이나, 정말로 돈이 궁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No hay dinero)’, 이 표현은 어디서나 들려 온다. 하지만 돈의 부재를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성급히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칼로 무 베듯이 딱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경제에서는 생산을 촉진하는 자본주의의 요소와 분배에 집중하는 사회주의의 요소가 언제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만 보면 자본주의가 완승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티 같은 국가에서 자본주의는 완전히 실패한 체제다.
월급과 물가 사이의 불일치, 널리 퍼진 지하시장, 교육받은 인력을 활용할 수 없는 빈약한 산업. 이런 모순적인 시스템은 역설적이게도 ‘소박한 삶’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쿠바 혁명은 처음부터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이 아니었다. 혁명을 지지했던 대중의 정서는 반미주의와 민족주의에 가까웠는데, 이 정서 아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생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20세기 초, 독립을 이뤄낸 쿠바인들은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처럼 동일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속국이 되어서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자급자족하는 모험을 해볼 것인가? 선택은 후자였다. ‘쿠바인들을 위한 쿠바(Cuba por los cubanos)’, 이 유명한 문구는 미국 달러를 위해서 주권을 팔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돈이 없다고? 돈 빼고 다 있다!
쿠바혁명은 이 과제에 어떻게 응답했을까? 구성원이 다양한 만큼 생계에 대한 이해관계도 천차만별이었지만, 혁명 정부는 최약자와 대다수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을 택했다. 체 게바라가 말한 것처럼 부르주아의 안락한 생활은 포기할지라도, 돈 없는 자에게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신인류(Hombre Nuevo)’의 가치를 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인간주의적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비싸다는 것이다. 지난 4세기 동안 스페인의 설탕 농장으로, 그 다음에는 미국의 카지노 사업장으로 기능해 온 쿠바에 탄탄한 경제기반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혁명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고 있지 않다. 경제 구조의 다양화를 이루고자 했던 70년대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소련에 설탕 판매로 의존하는 전략은 90년대 이후로 불가능해졌으며, 미국의 경제 봉쇄는 예나 지금이나 견고하게 쿠바의 목을 조르고 있다. 그러나 쿠바는 아직도 ‘가난하지만 평등한 삶’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관광업으로 길을 뚫어 보려고 하는 중이다.
현재 쿠바가 안고 있는 문제는 혁명의 실패보다는 식민지 유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아비바 촘스키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잘 ‘작동하는’ 것은 식민지 권력이 되었던 반면에, 가장 잘못 ‘작동하는’ 것은 식민화된 쪽”이라고 주장했다. ([쿠바혁명사], 26쪽) 식민지에서 원자재를 착취했던 제1세계는 그 부를 기반으로 산업을 꽃피운 반면, 제3세계는 사회를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당한 채 여전히 구(舊)제국주의 국가들의 그림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쿠바가 생계와 주권 사이에서 하고 있는 고민은, 자본주의 국가인 아이티나 필리핀에서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다.
한 번은 아이티에서 유학 온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쿠바에는 돈이 없어. 그런데 사실 이곳에는 돈 빼고 모든 게 다 있어.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이티만 봐도 쿠바가 얼마나 발전된 국가인지 알 수 있지.” 이 친구의 의견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돈이 없을지언정, 쿠바의 길거리에서 절망적인 가난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돈의 부재’가 이곳에서 의미하는 바다. 쿠바에서 개인이 가난한 이유는 그 사람의 탓이 아니라 국가의 탓이며, 쿠바라는 국가가 가난한 이유는 국가의 탓이 아니라 부당한 세계 경제의 구조 탓이다. 그러나 세계는 개인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식민지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채 스스로 생계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쿠바의 현실이자 쿠바인의 운명이다. 오늘도 “돈이 없다”고 말하는 이웃집 할머니의 돈 타령에는 지난 500년의 세계사가 진하게 녹아 있는 셈이다.
현재 쿠바는 새로운 딜레마에 처해 있다. 다수에게 ‘돈 빼고 다 있는’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 소수가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 소수란 외국에서 매달 돈을 송금해 주는 친척들, 밤늦게까지 외국인을 태우고 짧은 영어로 가격을 흥정하며 돈을 버는 택시 기사들, 외국인을 관광업에 연결해 주는 브로커들이다. 하지만 다들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임시방편으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
특히 이중 화폐 제도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중으로 갈라놓고 있다. ‘가난한 쿠바’와 ‘부유한 외국’이라는 대비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쿡을 벌어들이는 소수, 쿡에서 쿱으로의 환전, 그리고 쿱을 소비하는 다수. 이 시나리오는 얼핏 보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현지인과 외국인이 한 공간에 공생하는 상황에서 화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인에게 25배 더 비싸게 상품을 판다는 것은, 현지인들이 현지 물가로 계산된 월급으로 25배는 더 비싼 외국 생필품을 구매해야만 하는 역설을 의미한다. 그럴수록 노동력은 관광업에 몰리고, 공공부분의 일자리는 일손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관광 수입이 커지면커질수록 쿠바가 지난 60년간 지켜오려고 애를 쓴 원칙들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중 화폐’의 역설
문제는 이 인간주의적 시스템을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비싸다는 것이다. 지난 4세기 동안 스페인의 설탕 농장으로, 그 다음에는 미국의 카지노 사업장으로 기능해 온 쿠바에 탄탄한 경제기반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혁명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고 있지 않다. 경제 구조의 다양화를 이루고자 했던 70년대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소련에 설탕 판매로 의존하는 전략은 90년대 이후로 불가능해졌으며, 미국의 경제 봉쇄는 예나 지금이나 견고하게 쿠바의 목을 조르고 있다. 그러나 쿠바는 아직도 ‘가난하지만 평등한 삶’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관광업으로 길을 뚫어 보려고 하는 중이다.
현재 쿠바가 안고 있는 문제는 혁명의 실패보다는 식민지 유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아비바 촘스키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잘 ‘작동하는’ 것은 식민지 권력이 되었던 반면에, 가장 잘못 ‘작동하는’ 것은 식민화된 쪽”이라고 주장했다. ([쿠바혁명사], 26쪽) 식민지에서 원자재를 착취했던 제1세계는 그 부를 기반으로 산업을 꽃피운 반면, 제3세계는 사회를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당한 채 여전히 구(舊)제국주의 국가들의 그림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쿠바가 생계와 주권 사이에서 하고 있는 고민은, 자본주의 국가인 아이티나 필리핀에서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다.
한 번은 아이티에서 유학 온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쿠바에는 돈이 없어. 그런데 사실 이곳에는 돈 빼고 모든 게 다 있어.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이티만 봐도 쿠바가 얼마나 발전된 국가인지 알 수 있지.” 이 친구의 의견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돈이 없을지언정, 쿠바의 길거리에서 절망적인 가난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돈의 부재’가 이곳에서 의미하는 바다. 쿠바에서 개인이 가난한 이유는 그 사람의 탓이 아니라 국가의 탓이며, 쿠바라는 국가가 가난한 이유는 국가의 탓이 아니라 부당한 세계 경제의 구조 탓이다. 그러나 세계는 개인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식민지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채 스스로 생계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쿠바의 현실이자 쿠바인의 운명이다. 오늘도 “돈이 없다”고 말하는 이웃집 할머니의 돈 타령에는 지난 500년의 세계사가 진하게 녹아 있는 셈이다.
현재 쿠바는 새로운 딜레마에 처해 있다. 다수에게 ‘돈 빼고 다 있는’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 소수가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 소수란 외국에서 매달 돈을 송금해 주는 친척들, 밤늦게까지 외국인을 태우고 짧은 영어로 가격을 흥정하며 돈을 버는 택시 기사들, 외국인을 관광업에 연결해 주는 브로커들이다. 하지만 다들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임시방편으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
특히 이중 화폐 제도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중으로 갈라놓고 있다. ‘가난한 쿠바’와 ‘부유한 외국’이라는 대비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쿡을 벌어들이는 소수, 쿡에서 쿱으로의 환전, 그리고 쿱을 소비하는 다수. 이 시나리오는 얼핏 보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현지인과 외국인이 한 공간에 공생하는 상황에서 화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인에게 25배 더 비싸게 상품을 판다는 것은, 현지인들이 현지 물가로 계산된 월급으로 25배는 더 비싼 외국 생필품을 구매해야만 하는 역설을 의미한다. 그럴수록 노동력은 관광업에 몰리고, 공공부분의 일자리는 일손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관광 수입이 커지면커질수록 쿠바가 지난 60년간 지켜오려고 애를 쓴 원칙들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중 화폐’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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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을 가장 심각하게 체현한 장소가 바로 아바나다. 외국의 달러가 가장 많이 유입되는 곳,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 관광업이 가장 성하는 곳. 쿠바에서 가장 부유하고 또 활기찬 이 도시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외국 자본이 유입될수록 생계비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사람들은 더욱 전전긍긍하며 돈 만들 구멍을 찾는다. 쿠바인들 사이에도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고,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젊은 아바네로들은 자아실현을 하기보다는 외국인과의 인맥을 통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에 유혹을 느낀다.
돈 없이도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물질 만능주의에 찌든 사람들만이 아니다. 쿠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빛났던 쿠바인의 존엄성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최근에 이사를 했는데, 가족처럼 지냈던 예전 쿠바 집주인이 중개 수수료로 매달 내 집값에서 50쿡을 받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집주인은 이런 수수료가 비도덕적인 돈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꽤 비싼 고급 시계를 차고 있었다. 돈 있는 자만이 ‘돈 없이 함께 살아가자’는 그 옛날 도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쿠바가 이 과도기를 잘 빠져나갈지, 아니면 ‘밥은 다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의 미덕과 ‘당당하게 일해서 내 밥값은 내가 번다’는 자본주의의 윤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표류할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나는 여전히 외국인이다. 아직도 많은 불편함을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돈에 치였으면서, 아바나에서는 돈에 매달려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한하게도 내 가계부의 지출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쿠바 사람들처럼 애를 쓰며 장을 보고, 귀찮아도 매 끼니 밥을 해먹고, 오래 기다려도 대중교통을 사용하자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든 것이다. 처음에는 불편해서 도대체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살아보니 또 살 만하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다. 그러면서 나는 쿠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살아 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의 상황에 절망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를 아끼며 살아 가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섬을 사랑한다.
사랑은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마음은 자연히 중심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게 된다. 평화로운 마음, 부지런한 몸. 소박함이라는 것은 어떤 환경이 아니라, 어느 환경에서든 이렇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게 아닐까? 2018년의 아바나는 ‘돈 없는 그 시절’에 응답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진정한 소박함을 훈련시키고 있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돈 없이도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물질 만능주의에 찌든 사람들만이 아니다. 쿠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빛났던 쿠바인의 존엄성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최근에 이사를 했는데, 가족처럼 지냈던 예전 쿠바 집주인이 중개 수수료로 매달 내 집값에서 50쿡을 받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집주인은 이런 수수료가 비도덕적인 돈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꽤 비싼 고급 시계를 차고 있었다. 돈 있는 자만이 ‘돈 없이 함께 살아가자’는 그 옛날 도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쿠바가 이 과도기를 잘 빠져나갈지, 아니면 ‘밥은 다 함께 나눠먹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의 미덕과 ‘당당하게 일해서 내 밥값은 내가 번다’는 자본주의의 윤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표류할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나는 여전히 외국인이다. 아직도 많은 불편함을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돈에 치였으면서, 아바나에서는 돈에 매달려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한하게도 내 가계부의 지출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쿠바 사람들처럼 애를 쓰며 장을 보고, 귀찮아도 매 끼니 밥을 해먹고, 오래 기다려도 대중교통을 사용하자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든 것이다. 처음에는 불편해서 도대체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살아보니 또 살 만하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다. 그러면서 나는 쿠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느긋하게 살아 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의 상황에 절망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를 아끼며 살아 가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섬을 사랑한다.
사랑은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마음은 자연히 중심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게 된다. 평화로운 마음, 부지런한 몸. 소박함이라는 것은 어떤 환경이 아니라, 어느 환경에서든 이렇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게 아닐까? 2018년의 아바나는 ‘돈 없는 그 시절’에 응답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진정한 소박함을 훈련시키고 있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비스타, 아바나(7)]
세계 최고 쿠바 의료복지의 허와 실
의사들이여, 세상을 ‘근치(根治)’하라
김해완 작가
수준 높은 의술과 세계가 부러워하는 무상의료 구축…의사 처우 낮고 병원 의존도 높아 비효율성 갈수록 심화돼
5년 전, 난생 처음 외국살이를 하러 가는 나에게 어머니는 선물을 주셨다. 돌로 만들어진 전기 찜질기였다. 이 주먹만한 돌멩이는 그 후로 몇 번이고 나를 구했다. 배탈이 나든 몸살감기에 걸리든, 아랫배부터 찜질하면 증상이 훨씬 완화되었다.
그러나 꼭 효과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찜질기를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병원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 그것도 뉴욕이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면 봉합 가격을 비교한 후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러니까 의료 보험도 없는 외국 유학생이 병원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픈 날에 홀로 침대에 누워서 찜질기를 사용하고 있노라면, 괜히 우울해졌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자가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도, 돈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가 서글펐다. 이 작은 돌멩이에 내 건강을 의존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초라한가!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을까? 뉴욕 생활을 접고 아바나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쿠바에는 ‘병원비’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빈손으로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오는 곳이 바로 병원이다. 휘황찬란한 뉴욕에 비하면 아바나는 초라한 도시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의료 수준은 이곳이 월등한 것이다. 아디오스, 전기 찜질기. 이제 내가 이 돌멩이에 의지할 일은 없으리라!
이상 실현한 공공의료의 지상낙원
쿠바, ‘국경없는의사회’나 품을 법한 소망을 국가 단위에서 실현시킨 거의 유일한 나라다. 쿠바 혁명은 의료의 개념을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 탈바꿈시켰고, 이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 의료철학은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다큐멘터리 [식코]의 말미에서 무어 감독은 배를 타고 몰래 쿠바로 건너간다. 돈 때문에 병원 치료를 포기한 미국 환자들과 함께였다. 이 발칙한 계획 때문에 그는 미국 정부와 소송에 시달려야 했지만, 덕분에 전 세계인은 똑똑히 보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는 미국의 각종 방해 공작 속에서도 ‘의학 인본주의’의 불씨를 지켜냈다는 것을.
누구는 의심할 것이다. 이는 좌파(?) 감독의 의도적인 ‘프로파간다’ 아닌가! 그러나 아바나에서 9개월 동안 살면서 직접 병원을 이용해 본 사람으로서 말하겠다. “이곳의 의료 시스템은 환상적이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병원은 낡디낡았고, 의약품은 늘 부족하며, 생활 습관도 웰빙과 거리가 먼 곳이 바로 쿠바다. 그러나 이처럼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의사들과 환자들은 제1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문적인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 대조적인 풍경이 너무 낯선 나머지, 마치 ‘환상(fantasy)’처럼 보이는 것이다.
잠시 이 이상한 나라로 의료 투어를 떠나 보자. 쿠바에서 가장 기본적인 진료가 이루어지는 단위는 동네 병원이 아니다. 바로 가정의다. 이들은 집집마다 직접 방문해 병을 예방하고, 체질 개선에 조언을 주며, 정기적으로 당국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가정의의 간단한 처방으로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 환자는 각 마을마다 있는 종합클리닉(policlínico)으로 보내진다. 이 둘은 무니시피오(municipio: 한국으로 치면 행정구역 상 면이나 군에 해당하는 단위) 병원에 속해 있는데, 쿠바의 보건부에서 근무하는 박사 에두아르도 사세아(Eduardo Zacea)의 논문에 의하면 이 첫 번째 단계에서 80%의 환자가 치료된다고 한다.
만약 병이 이미 진행된 후라면 어떻게 할까? 환자는 지방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지방 병원의 임무는 치료를 진행하면서 합병증의 발생을 막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더 악화한다면, 환자는 국립 병원으로 옮겨져 전문의가 지휘하는 진료를 받는다. 환자들 중 5%가 국립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언제 생길지 모르는 응급 상황을 위해서 국립 병원의 20~30%의 병실은 늘 비워져 있다고 한다. 이처럼 크고 작은 병원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총체적인 의료시스템을 이룬다.
여기서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공공성이다. 어떻게 병원들 사이에 이런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한 것일까? 국가가 의료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는 전체 의료비의 96%가 국가 세금에서 지출되고 있을 정도로 절대 다수의 병원이 국가 소유다. 그래서 이곳의 의료시스템은 SNS(Sistema Nacional de Salud), 즉 국민 건강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둘째는 예방 의학이다. 시약품 하나, 환자복 하나, 의사 한 명이 귀한 쿠바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처음부터 발병의 싹을 잘라서 치료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쿠바 의학이 백신 개발에서 특히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로, 쿠바 의료시스템의 꽃은 가장 많은 전문의가 모여 있는 종합병원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가정의와 종합클리닉이다. 이것은 가능한 ‘큰 병원’에서 ‘비싼 치료’를 받아야 좋다는 우리네 상식과 배치된다. 역시, ‘환상적인’ 의료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과연 이 색다른 시도는 실제로 어떤 결과를 냈을까? 쿠바의 의료시스템이 이룩한 성과는 세계보건기구(WHO)도 인정할 만큼 뛰어나다. 이 나라의 건강 지표는 선진국과 거의 차이 나지 않는다. 쿠바의 영아사망률은 지난 40년 간 4.6%에서 0.7%로 떨어졌고, 기대수명은 77세에 육박한다. 이 눈에 띄는 진전은 매일 800명에서 1000명의 환자들이 부담 없이 드나드는 종합클리닉 덕분이다. 몇 달 전, 내가 가스통에 성냥으로 부주의하게 불을 붙이다가 화상을 입고 병원에 뛰어갔을 때, 의사가 내게 요구했던 것은 신분증 하나뿐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역시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이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상관없이 통용되는 진리다. 내가 병원에 들어가서 돈 한푼 내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오는 동안, 대가는 다른 형태로 지불되고 있다. 바로 비효율성이다. 우선 환자는 치료를 받기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 비싼 돈을 지불하는 민영 병원에서도 고작 10분 상담을 받으려고 두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잦은데, 일반 병원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이런 만성적인 지연은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환자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가령, 노인은 무릎 관절염의 통증이 심해도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단 30분의 치료를 위해서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매번 그를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기다려 주고, 보살펴 준단 말인가? 병원비는 무료인 대신 시간이라는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하물며 약국을 이용하는 일도 간단치 않다. 약국에 약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자들은 필요한 약을 발견할 때까지 여러 약국을 돌아다닌다.
이런 ‘체증’은 오늘날 쿠바가 맞닥뜨린 현실의 벽을 반영한다.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시스템은 훌륭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성능 좋은 차를 갖고도 정작 가솔린이 없어서 멀리까지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 시스템을 운전하는 ‘가솔린’은 바로 돈이다. 돈이 부족하다. 쿠바가 내부적으론 여전히 고집스럽게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고 있을지라도, 소련의 동구권 시장이 사라진 상황인 만큼 세계 무역시장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특히나 의료는 수입이 절실한 영역이다. 쿠바에는 필수 의약품과 최신 의료 기기를 자급할 생산 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가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은 값싼 설탕뿐이고,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에 운신의 폭도 몹시 좁다. 쿠바의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데이터베이스 회사인 Statista에 의하면 쿠바의 경상수지는 2017년 기준 80억 미국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낙후돼 가는 의료 인프라도 대체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 쿠바는 돈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문을 의료 인력으로 대체해 왔다. 쿠바의 높은 의료 교육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19세기에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카를로스 핀라이(Carlos Finlay)라는 쿠바 의사였고, 20세기에 홀연히 나타나 쿠바에 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도 의사였다. 1959년 혁명 이후, 봉사 정신을 철저하게 교육받은 수많은 젊은 의사가 쿠바의 시골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 단 열 가구뿐이어도 종합클리닉을 세웠다. 부족한 자본을 ‘사회관계 자본’으로 극복한 모범적인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의료 인력도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다. 소련의 지원이 끊긴 1990년대부터 쿠바 정부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많은 의사룰 외국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국내에 부족해진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쿠바의 의대들은 입학 문턱을 낮췄고, 그 부작용으로 교육의 질이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게다가 과잉 진료라는 예기치 못한 부대비용도 생겼다. 병원 문턱이 낮아지자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에도 의사를 찾고, 처방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약값이 싸다는 이유로 약을 과하게 복용하고, 그 결과 몸에 내성이 생겼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의료 인력이 아무리 많이 배출돼도 극복될 수 없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걸까?
근치(根治)와 포기 사이에서
세상 어디나 그렇듯, 쿠바에도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을 ‘의료복지 천국’이라거나 ‘공공의료 실패국’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쿠바는 1959년 혁명이 탄생시킨 의료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있을 뿐이다.
이 철학의 창시자는 물론 체 게바라다. 아르헨티나에서 총을 들고 찾아온 이 젊은 의사는 의료의 개념을 뒤바꿔 놓았다. 체에게 의사란 ‘병원’에 앉아서 제 발로 찾아온 ‘환자’를 상담하는 전문직이 아니었다. 의사가 싸워야 할 상대는 병(病)이다. 그리고 병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개개인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체질은 다 다르지만, 이것이 병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간 집단이 형성해 온 ‘라이프스타일’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은 환자의 삶 속에서 자라나며, 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엮이고 또 풀리는 그물코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를 ‘치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혁명이다. 의사는 병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사회와, 사회의 병든 구조를 내면에서 재생산하는 개인의 습속을 모두 바꿔야 한다.
쿠바 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예방 의학이고,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병의 뿌리를 뽑고 체질을 바꾸는 ‘근치(根治)’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예방이든 근치든, 우리는 의학 용어를 개인적인 규모에 적용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체는 의학의 지평선을 병원 너머로 끝없이 확장시켰다. 1960년에 의대생들에게 한 연설을 보면, 체가 근치라는 개념을 얼마나 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왜 의사가 또한 농부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가 새로운 영양식품을 파종하는 법을 배우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농업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일지 모르는 작고 가난한 쿠바에서, 새 식품을 소비하려는 열정과 영양 구조를 다양화하려는 열망의 씨앗을 사람들 사이에 심는 법을 그가 어떻게 배우는지 볼 것입니다.”(1960년 8월 19일, 의대생과 건강 근무자들에게 한 연설 중에서)
근대의학이라는 구멍
식생활은 건강의 기본이다. 이 사실에서 출발한 체는 의사에게 새로운 영양식품의 개발, 생산, 분배의 임무를 지운다. 여기에는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데 방해가 되는 제도가 있으면 바꾸라는 뜻까지 함축돼 있다. 의사가 농부도 되고, 상인도 되고, 행정관도 돼야 하는 판이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회 이슈가 건강과 관련되어 있기에, 쿠바 의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해결사’이자 ‘노동 제공자’로서 콜을 받는다.
그러나 근치는 원칙으로서는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 어떤 인간도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 없듯이, 그 어떤 사회도 완전한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체도 이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의사라는 직업을 “창조자의 일”에 비유했다. 그러나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다. 식민지의 유산, 왜곡된 경제 구조, 미국의 경제 봉쇄와 같은 장애물이 산적해 있는 쿠바에서, 근치는커녕 건강 상태를 현상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처럼 목표는 요원한데 노동 강도가 세다면 제 아무리 진정성과 열정 충만한 의사라도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쿠바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의사지망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치료하려는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성찰 없이 기존 시스템에 순응하는 관료주의가 자리하게 된다. ‘포기’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쿠바 의료시스템의 진정한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는데, 체의 초창기 정신을 되살릴 계기는 부재하다는 것. 아바나를 벗어나서 시골로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체는 “농촌에 가서 농부들에게 배우라”고 의사들에게 명령했지만, 그의 철학은 농촌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이런 시도와 실패를 오롯이 쿠바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이는 공정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쿠바의 한계는 근대의학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쿠바 의료시스템의 문제는 가난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혹은 국가가 의료 사업을 독점하면서 생기는 비효율성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가난과 비효율성은 근대의 진짜 얼굴이다.
근대의 민낯은 뉴욕, 런던, 서울에 없다. 아바나, 마닐라(필리핀), 포르토프랭스(아이티)에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제1세계는 제3세계의 자원을 값싸게 이용함으로써 오늘날 근대적인 삶의 양식을 구축해 왔고, 제3세계도 ‘발전하기만’ 한다면 이 굴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선전해 왔다.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제3세계 도시의 기본 양식은 이미 근대적으로 세팅되어 있다. 단지 이들에게는 이 양식을 효율적으로 굴리는 데 필요한 자원을 값싸게 끌어올 제4세계, 제5세계가 없을 뿐이다. 즉, 제3세계는 ‘아직’ 발전하지 못해서 제1세계처럼 살 수 없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희생양과 가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 근대의 구조적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의학에서도 똑같은 패러독스가 제기된다. 기술 자체만 보면 근대 의학은 분명 발전했다. 그러나 이 발전도 역시 수많은 자원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너무 비싸다는 소리다. 그래서 근대 의학은 그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역에서 개인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미국 의료와 쿠바 의료는 근대 의학의 이런 구멍들이다. 이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의학을 훌륭하게 진전시켰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의학은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생명을 구할 수 없다. 개인이나 국가가 돈이 없다면 최신 의약품이 등장해도 그림의 떡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는 의학 서비스 역시 생명을 보호할 수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 서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고, 국가가 의료 자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 다른 대안 없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체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새로운 쿠바를 꿈꿨을 때, 그 꿈의 본질은 역시 근대화였다. 저들은 제1세계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되,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근대화된 쿠바에서 사람들이 더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신선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체의 꿈이 진정 ‘근치’였다면, 그 꿈은 제 1세계 반열에 끼는 데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을 다시 고민하는 데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먼 병원보다 옆의 찜질기가 낫다
현재 나의 전기 찜질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료복지 천국인 이곳에서 그 쓸모를 다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까? 아니다. 애초의 기대는 철저하게 빗나갔다. 이곳에서도 찜질기는 제 역할을 다하느라 바쁘다. 두통, 복통, 생리통, 몸살감기가 닥칠 때마다 이 돌멩이는 든든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한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찜질기를 함께 돌려쓰고 있다. 평생 찜질기를 본 적 없는 아바네로들은 이것을 ‘마법의 돌’이라고 부른다. 이런 작은 기계 하나만 있으면 병원 갈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며 부러운 표정도 짓는다.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런 작은 찜질기인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수단들 말이다. 물론 병이 깊어지면 의사는 꼭 필요하겠지만, 삶의 길목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자잘한 질병질환을 누구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죽는 건 자연의 이치다. 다만, 이런 숙명적인 고통을 긍정하고 생명의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내 몸의 주인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삶의 길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의사도 해줄 수 없는 ‘근치’는 환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미국에서든, 또 시간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쿠바에서든 진정한 건강을 기원했던 체의 꿈은 살아남을 것이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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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꼭 효과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찜질기를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병원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 그것도 뉴욕이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면 봉합 가격을 비교한 후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러니까 의료 보험도 없는 외국 유학생이 병원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픈 날에 홀로 침대에 누워서 찜질기를 사용하고 있노라면, 괜히 우울해졌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자가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도, 돈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가 서글펐다. 이 작은 돌멩이에 내 건강을 의존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초라한가!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을까? 뉴욕 생활을 접고 아바나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쿠바에는 ‘병원비’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빈손으로 들어가서 빈손으로 나오는 곳이 바로 병원이다. 휘황찬란한 뉴욕에 비하면 아바나는 초라한 도시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의료 수준은 이곳이 월등한 것이다. 아디오스, 전기 찜질기. 이제 내가 이 돌멩이에 의지할 일은 없으리라!
이상 실현한 공공의료의 지상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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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의심할 것이다. 이는 좌파(?) 감독의 의도적인 ‘프로파간다’ 아닌가! 그러나 아바나에서 9개월 동안 살면서 직접 병원을 이용해 본 사람으로서 말하겠다. “이곳의 의료 시스템은 환상적이다!”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병원은 낡디낡았고, 의약품은 늘 부족하며, 생활 습관도 웰빙과 거리가 먼 곳이 바로 쿠바다. 그러나 이처럼 불리한 조건 속에서 의사들과 환자들은 제1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문적인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 대조적인 풍경이 너무 낯선 나머지, 마치 ‘환상(fantasy)’처럼 보이는 것이다.
잠시 이 이상한 나라로 의료 투어를 떠나 보자. 쿠바에서 가장 기본적인 진료가 이루어지는 단위는 동네 병원이 아니다. 바로 가정의다. 이들은 집집마다 직접 방문해 병을 예방하고, 체질 개선에 조언을 주며, 정기적으로 당국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가정의의 간단한 처방으로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 환자는 각 마을마다 있는 종합클리닉(policlínico)으로 보내진다. 이 둘은 무니시피오(municipio: 한국으로 치면 행정구역 상 면이나 군에 해당하는 단위) 병원에 속해 있는데, 쿠바의 보건부에서 근무하는 박사 에두아르도 사세아(Eduardo Zacea)의 논문에 의하면 이 첫 번째 단계에서 80%의 환자가 치료된다고 한다.
만약 병이 이미 진행된 후라면 어떻게 할까? 환자는 지방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지방 병원의 임무는 치료를 진행하면서 합병증의 발생을 막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더 악화한다면, 환자는 국립 병원으로 옮겨져 전문의가 지휘하는 진료를 받는다. 환자들 중 5%가 국립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언제 생길지 모르는 응급 상황을 위해서 국립 병원의 20~30%의 병실은 늘 비워져 있다고 한다. 이처럼 크고 작은 병원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총체적인 의료시스템을 이룬다.
여기서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공공성이다. 어떻게 병원들 사이에 이런 유기적인 협력이 가능한 것일까? 국가가 의료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는 전체 의료비의 96%가 국가 세금에서 지출되고 있을 정도로 절대 다수의 병원이 국가 소유다. 그래서 이곳의 의료시스템은 SNS(Sistema Nacional de Salud), 즉 국민 건강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둘째는 예방 의학이다. 시약품 하나, 환자복 하나, 의사 한 명이 귀한 쿠바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처음부터 발병의 싹을 잘라서 치료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쿠바 의학이 백신 개발에서 특히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로, 쿠바 의료시스템의 꽃은 가장 많은 전문의가 모여 있는 종합병원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가정의와 종합클리닉이다. 이것은 가능한 ‘큰 병원’에서 ‘비싼 치료’를 받아야 좋다는 우리네 상식과 배치된다. 역시, ‘환상적인’ 의료 국가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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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세상에 역시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이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상관없이 통용되는 진리다. 내가 병원에 들어가서 돈 한푼 내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오는 동안, 대가는 다른 형태로 지불되고 있다. 바로 비효율성이다. 우선 환자는 치료를 받기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 비싼 돈을 지불하는 민영 병원에서도 고작 10분 상담을 받으려고 두 시간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잦은데, 일반 병원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이런 만성적인 지연은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환자에게 큰 걸림돌이 된다. 가령, 노인은 무릎 관절염의 통증이 심해도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지 않는다. 단 30분의 치료를 위해서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매번 그를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기다려 주고, 보살펴 준단 말인가? 병원비는 무료인 대신 시간이라는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하물며 약국을 이용하는 일도 간단치 않다. 약국에 약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자들은 필요한 약을 발견할 때까지 여러 약국을 돌아다닌다.
이런 ‘체증’은 오늘날 쿠바가 맞닥뜨린 현실의 벽을 반영한다.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시스템은 훌륭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다.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성능 좋은 차를 갖고도 정작 가솔린이 없어서 멀리까지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 시스템을 운전하는 ‘가솔린’은 바로 돈이다. 돈이 부족하다. 쿠바가 내부적으론 여전히 고집스럽게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고 있을지라도, 소련의 동구권 시장이 사라진 상황인 만큼 세계 무역시장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특히나 의료는 수입이 절실한 영역이다. 쿠바에는 필수 의약품과 최신 의료 기기를 자급할 생산 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가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은 값싼 설탕뿐이고,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에 운신의 폭도 몹시 좁다. 쿠바의 무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데이터베이스 회사인 Statista에 의하면 쿠바의 경상수지는 2017년 기준 80억 미국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낙후돼 가는 의료 인프라도 대체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 쿠바는 돈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문을 의료 인력으로 대체해 왔다. 쿠바의 높은 의료 교육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19세기에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카를로스 핀라이(Carlos Finlay)라는 쿠바 의사였고, 20세기에 홀연히 나타나 쿠바에 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도 의사였다. 1959년 혁명 이후, 봉사 정신을 철저하게 교육받은 수많은 젊은 의사가 쿠바의 시골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 단 열 가구뿐이어도 종합클리닉을 세웠다. 부족한 자본을 ‘사회관계 자본’으로 극복한 모범적인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의료 인력도 새로운 위기를 맞이했다. 소련의 지원이 끊긴 1990년대부터 쿠바 정부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많은 의사룰 외국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국내에 부족해진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쿠바의 의대들은 입학 문턱을 낮췄고, 그 부작용으로 교육의 질이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게다가 과잉 진료라는 예기치 못한 부대비용도 생겼다. 병원 문턱이 낮아지자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에도 의사를 찾고, 처방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약값이 싸다는 이유로 약을 과하게 복용하고, 그 결과 몸에 내성이 생겼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의료 인력이 아무리 많이 배출돼도 극복될 수 없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걸까?
근치(根治)와 포기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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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학의 창시자는 물론 체 게바라다. 아르헨티나에서 총을 들고 찾아온 이 젊은 의사는 의료의 개념을 뒤바꿔 놓았다. 체에게 의사란 ‘병원’에 앉아서 제 발로 찾아온 ‘환자’를 상담하는 전문직이 아니었다. 의사가 싸워야 할 상대는 병(病)이다. 그리고 병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개개인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체질은 다 다르지만, 이것이 병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인간 집단이 형성해 온 ‘라이프스타일’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은 환자의 삶 속에서 자라나며, 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엮이고 또 풀리는 그물코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를 ‘치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혁명이다. 의사는 병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사회와, 사회의 병든 구조를 내면에서 재생산하는 개인의 습속을 모두 바꿔야 한다.
쿠바 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예방 의학이고,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병의 뿌리를 뽑고 체질을 바꾸는 ‘근치(根治)’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예방이든 근치든, 우리는 의학 용어를 개인적인 규모에 적용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체는 의학의 지평선을 병원 너머로 끝없이 확장시켰다. 1960년에 의대생들에게 한 연설을 보면, 체가 근치라는 개념을 얼마나 넓은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왜 의사가 또한 농부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그가 새로운 영양식품을 파종하는 법을 배우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농업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일지 모르는 작고 가난한 쿠바에서, 새 식품을 소비하려는 열정과 영양 구조를 다양화하려는 열망의 씨앗을 사람들 사이에 심는 법을 그가 어떻게 배우는지 볼 것입니다.”(1960년 8월 19일, 의대생과 건강 근무자들에게 한 연설 중에서)
근대의학이라는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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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치는 원칙으로서는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 어떤 인간도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 없듯이, 그 어떤 사회도 완전한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체도 이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의사라는 직업을 “창조자의 일”에 비유했다. 그러나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다. 식민지의 유산, 왜곡된 경제 구조, 미국의 경제 봉쇄와 같은 장애물이 산적해 있는 쿠바에서, 근치는커녕 건강 상태를 현상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처럼 목표는 요원한데 노동 강도가 세다면 제 아무리 진정성과 열정 충만한 의사라도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쿠바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의사지망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치료하려는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성찰 없이 기존 시스템에 순응하는 관료주의가 자리하게 된다. ‘포기’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쿠바 의료시스템의 진정한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는데, 체의 초창기 정신을 되살릴 계기는 부재하다는 것. 아바나를 벗어나서 시골로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체는 “농촌에 가서 농부들에게 배우라”고 의사들에게 명령했지만, 그의 철학은 농촌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이런 시도와 실패를 오롯이 쿠바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이는 공정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쿠바의 한계는 근대의학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쿠바 의료시스템의 문제는 가난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혹은 국가가 의료 사업을 독점하면서 생기는 비효율성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가난과 비효율성은 근대의 진짜 얼굴이다.
근대의 민낯은 뉴욕, 런던, 서울에 없다. 아바나, 마닐라(필리핀), 포르토프랭스(아이티)에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제1세계는 제3세계의 자원을 값싸게 이용함으로써 오늘날 근대적인 삶의 양식을 구축해 왔고, 제3세계도 ‘발전하기만’ 한다면 이 굴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선전해 왔다.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제3세계 도시의 기본 양식은 이미 근대적으로 세팅되어 있다. 단지 이들에게는 이 양식을 효율적으로 굴리는 데 필요한 자원을 값싸게 끌어올 제4세계, 제5세계가 없을 뿐이다. 즉, 제3세계는 ‘아직’ 발전하지 못해서 제1세계처럼 살 수 없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희생양과 가난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는 근대의 구조적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의학에서도 똑같은 패러독스가 제기된다. 기술 자체만 보면 근대 의학은 분명 발전했다. 그러나 이 발전도 역시 수많은 자원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너무 비싸다는 소리다. 그래서 근대 의학은 그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역에서 개인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미국 의료와 쿠바 의료는 근대 의학의 이런 구멍들이다. 이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의학을 훌륭하게 진전시켰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의학은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생명을 구할 수 없다. 개인이나 국가가 돈이 없다면 최신 의약품이 등장해도 그림의 떡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는 의학 서비스 역시 생명을 보호할 수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 서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고, 국가가 의료 자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 다른 대안 없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체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새로운 쿠바를 꿈꿨을 때, 그 꿈의 본질은 역시 근대화였다. 저들은 제1세계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되,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근대화된 쿠바에서 사람들이 더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신선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체의 꿈이 진정 ‘근치’였다면, 그 꿈은 제 1세계 반열에 끼는 데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을 다시 고민하는 데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먼 병원보다 옆의 찜질기가 낫다
현재 나의 전기 찜질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료복지 천국인 이곳에서 그 쓸모를 다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까? 아니다. 애초의 기대는 철저하게 빗나갔다. 이곳에서도 찜질기는 제 역할을 다하느라 바쁘다. 두통, 복통, 생리통, 몸살감기가 닥칠 때마다 이 돌멩이는 든든한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한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찜질기를 함께 돌려쓰고 있다. 평생 찜질기를 본 적 없는 아바네로들은 이것을 ‘마법의 돌’이라고 부른다. 이런 작은 기계 하나만 있으면 병원 갈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며 부러운 표정도 짓는다.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런 작은 찜질기인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수단들 말이다. 물론 병이 깊어지면 의사는 꼭 필요하겠지만, 삶의 길목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자잘한 질병질환을 누구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죽는 건 자연의 이치다. 다만, 이런 숙명적인 고통을 긍정하고 생명의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내 몸의 주인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삶의 길은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의사도 해줄 수 없는 ‘근치’는 환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미국에서든, 또 시간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쿠바에서든 진정한 건강을 기원했던 체의 꿈은 살아남을 것이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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