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記事를 읽는 재미

"한국의 굴욕"(1997년 외환위기 때 Economist지가 한국에 대해 보도한 기사의 번역 제목, 원제목은 "엉망진창이 된 한국"이었다)

이강기 2018. 10. 21. 18:39

(IMF 외환위기는, 그 여파가 여전히 우리 경제에 미치고 있고 그 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아무튼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국경제를 칭찬해대던 외국의 유명 언론들은 위기가 일어난 후 싹 안면을 바꾸어 한국경제의 여러 후진적, 비합리적 요인들을 시시콜콜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더러는 듣기에 좀 억울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당연히 고쳐야 할 병폐들이었다. 아래 글은 이코노미스트지 97년 11월27일자에 실린 The Mess in South Korea를 번역하여 KOTRA 홈페이지 "세계 1000대 기업 DB"에 올렸던 글이다. 귀중한 자료가 될 것도 같아 그 무렵 번역해 올렸던 한국 IMF 환란에 관한 주요 외국언론들의 논설들을 내 블로그에 보관코자 한다. - 이강기) 

 


"한국의 굴욕"

 

 

(The Economist, 97. 11. 27, 번역 1997 12.4)
- 기적의 종말, 한국의 경제적 굴욕은 바로 새 지도자를 뽑는 대선 직전에 찾아왔다. 과연 새 대통령은 이 나라의 엄격히 통제된 자본주의 관행을 바꿀 수 있을까? 상위 세 후보자 중 아무도 현 위기에 대해 누가 봐도 합당하다 싶은 치유계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앞으로 부득불 세금을 높이고 더 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을 수 없    을 것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

 


그토록 빨리 부를 이룬 나라도 흔치 않다. 그렇게 뜻밖의 치욕을 당한 나라도 많지 않다. 몇 주간 부인한 끝에 이 아시아 최대의 호랑이 경제국인 한국은 마침 내 11월 21일, 자국 금융시장혼란을 막기 위해 IMF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뉴스는 한국의 외환시장과 증권시장에 치명타를 가해 주식가격은 한국이 아직 군부독재체제 아래 있던 1987년 7월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다.

 

한국은 지금까지 동아시아 통화위기에 굴복한 나라 중 가장 큰 경제규모를 가졌기 때문에 이번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들어갈 것이다. 한국 정부는 IMF에 200억 달러를 요청했지만(이 글은 한국과 IMF 합의문이 나온 12월3일 이전에 쓰여진 것임 - 옮긴이), 그것은 오직 시작에 불과하다. 취약하고 낡은 한국의 금융시스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600억 달러에서 1천억 달러의 돈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30년간 매년 평균 8.6%의 경제성장을 이룩해 온 나라로선 IMF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여간 견디기 힘든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주의 일부 주식투자가들은 더 이상의 손해를 막기 위해 증권시장 폐쇄요구 데모를 벌였다. IMF가 돈을 빌려주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요구하게 될 도수 높은 개혁은 더 큰 충격을 줄 것이다.

 

지난 주 김영삼 대통령은 텔레비젼을 통해 국민들이 받게 될 "뼈아픈 고통"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경제의 병이 비열한 외국 미디어들에 의해 날조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위중하다는 것을 지금 와서 실감은 하면서도, 서울 거리에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법률을 기안하는 관료들도 그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를지, 혹은 중상을 입은 호랑이를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과감한 수술이 필요한 지를 이해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이번 위기는 한국으로서는 아주 나쁜 시기에 찾아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만료를 겨우 3개월 앞두고 있다. 그는 한국 금융기관들이 악성부채로 불구가 돼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부인해 왔으며, 그의 퇴임 때까지 위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도 무위로 끝났다. 그 대신 12월 18일에 선출될 그의 후계자에게 암담한 경제현실을 물려주게 됐다. 상위 세 후보 중 아무도 이번 위기와 관련해 누가 봐도 합당하다싶은 치유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앞으로 부득불 세금을 높이고 노동자들을 더 많이 해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 관절염 앓는 호랑이

 

많은 서민들은 이번 위기가 부자들이 외국 사치품들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한 탓으로 믿고 있다. 이번 주 일단의 애국적인 주부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허리띠를 졸라매고 외국여행을 하지 말며 집에 퇴장하고 있는 달러를 은행에다 저축하자고 호소했다. 그 정도로 현 위기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번 위기를 가져오게 한 실제원인들은 거의 반세기 이전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950-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 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그리고 전망도) 그 뒤 독립한 아프리카의 가나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부터 근면과 이상교육열, 국가주도의 내핍생활, 그리고 수입된 기술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상황을 바꿔 나갔다. 정부지시에 따라 각 은행들은 있으나 마나한 싼 금리로 "전략" 산업에 돈을 쏟아 부었고, 경제 열기가 부글부글 끓으며 점점 확대돼 갔다.

 

수출은 1960년의 3천 300만 달러에서 1996년엔 1천 300억 달러로 늘었다. 해마다 식량부족을 겪는 농업국가가 한 세대만에 세계 최대의 선박건조 및 메모리 칩 생산국,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 그리고 11번째의 경제대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평균수명이 1955년에 47세이던 것이 지금은 71세다.

 

정말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아아, 하지만 가엾은 일이다. 그렇게도 찬란하던 경제가 어느 듯 노쇠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니. 정부주도 경제정책은, 경제구조가 상대적으로 간단하여, 외국의 기술을 빌려와서 집중투자를 하면 생산량이 크게 늘어날 수 있는 초기에는 잘 먹혀 들어간다. 그러나 선진국 수준까지 이른 한국경제는 지금 관료들이 움직여 나가기에는 너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신용평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입김에 따라 대
출을 해주는 국가주도의 금융관행이 이번의 재앙을 몰고 왔다.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족벌경영체제의 재벌들은 지나치게 많은 은행융자를 받을 수 있는 배려를 받아 온 바람에 수익성에 대한 냉철한 판단도 없이 몸체를 불려왔다. 그들은 불룩해 진 호주머니 덕택으로 별 전문성도 없는 분야에까지  손을 뻗어 사업을 다변화 해 나갔다. 한국의 상위 5대 재벌은 평균 140개의 다양한 사업분야에 침투해 있다. 상위 4대 재벌(현대, 대우, LG, 및 삼성)은 한국수출의 절반 이상을 점하고 있으나 그들의 수익은 형편없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중소기업들의 설자리를 잃게 해 실리콘 벨리의 경우와 같은 개혁적인 창업회사들의 천국과는 거리가 먼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며, 위험한 재벌위주의, 그리고 악성부채 누적으로 쓰러져 가는 금융기관들로 가득 찬 나라로 만들고 말았다.

 

한 전문가는, 한국은행 대출의 18%가 필시 회수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수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상위 30대 재벌 중 25대 재벌은 자산 대 부채비율이 1:3이며 그 중 10개회사는 1:5 이상이다. 정상적인 경제상황이라면 1:1이어야 하는 것이다. 8개의 재벌이 올 들어 그들의 채권자들에게 화의를 신청했다. 일부 재벌들이 구조조정계획을 속속 밝히고 있지만 - 삼성은 중역들의 임금을 10% 낮추고 직원의 30%를 새 자리로 옮기며 일부 생산라인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 일부 분석가들은, 상위 5대재벌을 제외하고는 안전한 재벌회사가 드문 것으로 보고 있다.

 

제대로 하는 구조조정이라면 심한 고통이 따를 것인데 부분적으로 이는 고도 성장시대의 달콤한 타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정부는 노동조합활동을 대부분 금지함으로써 임금을 생산성 이하로 묶었었다. 하지만 기업주들에게 이러한 은전을 베푸는 대신 기업주들은 종업원들을 법적 하자가 없는 한 한 사람도 해고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해 놓았다. 그 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난 해 연말 그 조항을 없애려다가 노동조합이 전국적인 파업을 벌이겠다며 위협하는 바람에 연기돼 버렸다. 그 결과, 공식적인 실업률이 3% 이하로 잡혀 있긴 하지만, 컨설턴트회사인 Booz Allen & Hamilton은, 현재 고용된 노동자의 거의 10분의 1은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IMF는 최소한 경영상태가 나쁜 몇몇 재벌들과 은행들을 파산하게 내버려두도록 한국 측에 요구할 것이다. 바람직한 것으로는 은행과 기업들로 하여금 그들의 적자내역을 밝히도록 하고 구제불능의 경우엔 지원금을 중단하는 일이다. 이 때 은행 예금자들은 보호받을 것이며, 아마(잘 되지는 않겠지만) 주주들 역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필시 평생직장의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재벌들은, 관세의 급격한 인하와 수입업자들에 대한 징벌적인 세금공세가 없어짐으로써 외국 경쟁회사들의 집요한 공세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이 받을 고통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업률은 올라가고 임금은 떨어질 것이다. 재벌들이 그들의 부채를 줄이기 위해 자산을 처분함으로써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가치가 붕괴될 것이다. 1989년이래 한국은 일본에서 투기광란이 피크를 이뤘던 때보다도 더 많은 비율로 신규 오피스 빌딩들을 지어댔다. 90년도에 일본경제의 거품이 빠지자, 자산가격이 70%나 폭락해버렸다.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잔인해 보이지만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대안은 한국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뿐이니까. 개방이 더 늦어지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Booz Allen & Hamilton은 과잉노동자(해고는 안됐지만 실제로 필요 없는 노동자)비율이 해마다 1% 포인트씩 올라가 노동시장이 지금처럼 계속 얼어붙게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 제조업체들은 오랫동안 보호를 받아온 끝에 시장에 단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력이 싼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와의 가격경쟁, 그리고 미국, 일본, 유럽 등과의 기술및 경제규모 경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당초 한국정부가 예상한 98년도 성장률 6%는 한갓 꿈이 되어버렸다. 향후 2년간 2.5% 이상의 성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낙관론자들이 원화 약세에 의한 수출증가가 약간의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비관론자들은 GDP가 실질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추측만 할 뿐 실제로 사태를 바로잡는데 얼마나 걸릴 것이며 고통이 얼마나 심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한국의 차기정부가 얼마나 단호하게 필요한 경제자유화를 추진하느냐에 달렸다 할 것이다.

 

현재의 한국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투철한 의지를 가진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한 지도자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국은 전에도 불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쑥스럽게 만든 적이 몇 번이나 있으며, 이번에도 또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7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 땅에 가져온 이래 어떤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것보다도 훨씬 큰 용기와 배짱을 요구할 것이다. 세계는 숨을 죽이며 지켜볼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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