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6) 박정희(1917~1979)
어느 역사가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대화의 결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자부한다.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존재는 앞으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역사에 남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에는 두 사람 이름이 틀림없이 기억될 것이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그 공화국을 지켜낸 이승만과, 찢어지는 가난으로 춘궁기가 되면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농촌이 세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내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나의 논리는 단순한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는 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 같은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는 정치적 불상사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도 개발도상국이라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일어나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받은 민주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섯 번 이 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중단 없는 전진'을 강조하며 마치 두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전진을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것으로 내 눈에 비쳤다.
그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드디어 유신 헌법, 유신 체제를 국민에게 강요하며 이에 관련된 포고령을 내리면서 '유신 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고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자는 15년 이하 징역이 끝나도 또다시 15년은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포하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나로서는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신 헌법은 민주 헌법이 아니다'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대중 강연에서도 서슴지 않고 나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때 이미 내 마음속에는 15년 징역을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측했던 대로 나는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서빙고에 자리 잡은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1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나를 취조하던 문관 한 사람은 스스로 이북 출신임을 털어놓으면서 말했다. "김 교수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청와대에서 묶어 오라고 하니 저희 입장도 난처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감옥 생활도 할 만하겠다고 느꼈다.
지금은 역사기념관으로 변모한 서대문 구치소 9사상 18방에 수감되어 살던 어느 날 새벽, 내가 갇혀 있던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에서 매우 기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아직도 새벽인데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그 독방에 마련된 조그마한 비닐 창문으로 폭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뚫고 들어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날이었다. 그 비바람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헤쳐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멎고 얼마 뒤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고 나는 느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그 음성을 내 귀로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토록 미워하던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이 싹 사라지고 내 마음에는 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넉넉지 못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그가 동경한 역사적 인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우리나라의 이순신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한 3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지망하여 합격하였다. 2년 뒤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여 수석 졸업하였지만, 일본군에 소속되지 못하고 만주군 대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아마도 그의 꿈이 나폴레옹처럼 군인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되는 것 아닐까. 어찌 보면 박정희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를 구해 준 것은 백선엽이었다. 그를 5·16 쿠데타 대표로 모신 것은 김종필이었다. 그가 18년이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과 이후락의 충성 경쟁이 크게 주효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백두진, 김용환, 남덕우, 이승윤 등 그의 측근으로 모여든 경제 각료들은 당대의 수재였다. 그뿐인가. 일본 육사 출신이 한국 대통령이 된 사실에 감격한 탓인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보다 경제 선진국이던 일본이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실 또한 그가 타고난 천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과 동남아에서도 크게 환영받은 것이 사실이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그때 그 사람'은 김재규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임기를 다 마치고 무사히 은퇴했다 하여도 노후가 과연 평화로웠을까.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시련도 박정희의 18년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군 이 나라의 경제적 번영이 다시 '보릿고개'로 돌아갈 수는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의 '퍼주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침몰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나는 이 나라 유명 인사가 되어 90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고 있지만 그 시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날이 되돌아오기를 희망합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영어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No, thank you."
내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나의 논리는 단순한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는 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 같은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는 정치적 불상사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도 개발도상국이라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일어나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받은 민주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섯 번 이 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중단 없는 전진'을 강조하며 마치 두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전진을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것으로 내 눈에 비쳤다.
그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드디어 유신 헌법, 유신 체제를 국민에게 강요하며 이에 관련된 포고령을 내리면서 '유신 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고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자는 15년 이하 징역이 끝나도 또다시 15년은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포하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나로서는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신 헌법은 민주 헌법이 아니다'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대중 강연에서도 서슴지 않고 나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때 이미 내 마음속에는 15년 징역을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측했던 대로 나는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서빙고에 자리 잡은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1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나를 취조하던 문관 한 사람은 스스로 이북 출신임을 털어놓으면서 말했다. "김 교수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청와대에서 묶어 오라고 하니 저희 입장도 난처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감옥 생활도 할 만하겠다고 느꼈다.
지금은 역사기념관으로 변모한 서대문 구치소 9사상 18방에 수감되어 살던 어느 날 새벽, 내가 갇혀 있던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에서 매우 기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아직도 새벽인데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그 독방에 마련된 조그마한 비닐 창문으로 폭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뚫고 들어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날이었다. 그 비바람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헤쳐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멎고 얼마 뒤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고 나는 느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그 음성을 내 귀로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토록 미워하던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이 싹 사라지고 내 마음에는 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넉넉지 못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그가 동경한 역사적 인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우리나라의 이순신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한 3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지망하여 합격하였다. 2년 뒤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여 수석 졸업하였지만, 일본군에 소속되지 못하고 만주군 대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아마도 그의 꿈이 나폴레옹처럼 군인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되는 것 아닐까. 어찌 보면 박정희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를 구해 준 것은 백선엽이었다. 그를 5·16 쿠데타 대표로 모신 것은 김종필이었다. 그가 18년이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과 이후락의 충성 경쟁이 크게 주효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백두진, 김용환, 남덕우, 이승윤 등 그의 측근으로 모여든 경제 각료들은 당대의 수재였다. 그뿐인가. 일본 육사 출신이 한국 대통령이 된 사실에 감격한 탓인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보다 경제 선진국이던 일본이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실 또한 그가 타고난 천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과 동남아에서도 크게 환영받은 것이 사실이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그때 그 사람'은 김재규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임기를 다 마치고 무사히 은퇴했다 하여도 노후가 과연 평화로웠을까.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시련도 박정희의 18년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군 이 나라의 경제적 번영이 다시 '보릿고개'로 돌아갈 수는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의 '퍼주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침몰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나는 이 나라 유명 인사가 되어 90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고 있지만 그 시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날이 되돌아오기를 희망합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영어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No,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