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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사령관에 정전협정일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

이강기 2018. 11. 2. 17:09

"클라크 사령관에 정전협정일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

 정효식 기자                                        

정효식 기자 사진


 
마크 웨인 클라크 제3대 유엔군 사령관의 두 손녀인 도란과 루이즈가 1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정전협정 서명일을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고 했다"고 말했다.[이광조 JTBC 카메라기자]
마크 웨인 클라크 제3대 유엔군 사령관의 두 손녀인 도란과 루이즈가 1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정전협정 서명일을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고 했다"고 말했다.[이광조 JTBC 카메라기자]


“할아버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서명일을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고 했습니다. 완전한 승리 없는 휴전으로 한국이 다시 위기에 빠질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1952~53)의 두 손녀인 루이즈(69)와 도란 클라크(64)가 “할아버지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명령을 따랐지만, 서명을 마지막까지 원하지 않았다”며 전한 이야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한 가운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 사령관 세 명이 대표로 서명한 정전협정 조인식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다. 두 손녀는 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1984년 작고한 클라크 사령관을 대신해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제6회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수상했다.
 

클라크 사령관 두 손녀가 전한 정전협정 비화
"완전 승리아닌 정전, 한국에 다시 위기 걱정,
북폭 계속 주장했지만 미 대통령 허락 안 해,
한국전 부상 아들 최고 훈장 추천받자 반대"

1일 워싱턴에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1984년 작고)의 손녀인 루이즈(왼쪽 세 번째)와 도란(다섯 번째)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제6회 한미동맹상 수상했다.

1일 워싱턴에서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1984년 작고)의 손녀인 루이즈(왼쪽 세 번째)와 도란(다섯 번째)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제6회 한미동맹상 수상했다.

 
맏손녀 루이즈는 이날 본지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정전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북한이 미래에 끔찍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믿었다”며 “압도적인 화력으로 북폭하길원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해리 트루먼-아이젠하워)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또 “할아버지는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 협상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믿지 않았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정전협정 이후 할아버지는 더는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매우 화가 났으며 가슴 아파했다”며 “정전협정 조인 후 3개월 만에 전역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고, 유엔군 대표가 묵었던 문산 숙소에서 따로 서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1953년 7월 27일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고, 유엔군 대표가 묵었던 문산 숙소에서 따로 서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클라크 사령관이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반공포로 송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었다고 했다. 도란은 “할아버지가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일은 ‘철의 장막’ 뒤로 돌아가길 원치 않던 수많은 반공포로 송환이었고 이 때문에 휴전협정은 장기 교착상태에 빠졌다”며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돌려보내길 원치 않았고 그렇게 됐다”라고도 말했다. 미 본국 정부와 달리 클라크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뜻이다.
 
도란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한국을 사랑했다”며 “할머니는 2차 대전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할아버지가 1952년 한국으로 오자 서울에 와서 남편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전역 후엔 시타델 군사대학 학장으로 여생을 보낸 할아버지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국군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발전한 데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했다”라고도 했다.
 
클라크 사령관의 외아들이자 한국전 참전 영웅인 윌리엄 도란 클라크(2015년 작고)의 딸들인 루이즈와 도란은 둘 다 할리우드 여배우 출신다. 어린 소녀 시절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책장의 무수한 훈장과 한국전에서 입은 총상 흉터를 보고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자라서 알게 됐다고 했다. 도란은 “할아버지 집에 갈 때면 큰 로마 글씨가 적힌 군복이나 총탄 관통 흔적이 멋지다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루이즈는 “백과사전에서 사진을 보고 할아버지가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인 윌리엄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21살 소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세 번 크게 다쳐 은성훈장과 함께 상이훈장 세 개를 받았다. 
 

“아버지는 첫 번째부상을 해 야전병원에 후송된 뒤 더는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귀국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다음 날 밤 병원을 탈출해 전선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부상 때도 똑같이 했다. 더 어린 부하를 남겨놓고 떠날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세 번째크게 다쳤을 때 병원으로 당시 할아버지 친구이자 아버지의 대부였던 매슈 리지웨이 2대 유엔군 사령관이 직접 찾아 ‘너는 체포됐다’며 직접 귀국명령을 내려 그때야 전장을 떠났다.”

 
도란은 “아버지가 귀국 후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천받았지만 (후임 사령관에 부임한) 할아버지가 중간에 절차를 중단시켰다”며 “훈장 심사 권한이 있는 사령관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최고 훈장을 주는 게 일종의 정실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녀들에 2차 대전 중 금화 보따리 첩보전 들려줘 
 
클라크 사령관은 어린 손녀들에겐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였던 첩보전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첩보전에서 실제 사용했던 1789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금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첩보전에서 실제 사용했던 1789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금화.


“할아버지는 한밤에 지중해에서 잠수함에서 작은 고무보트에 옮겨타고 모로코 해안에 몰래 상륙했다. 당시 유럽 각국에서 모은 금화 보따리를 들고 가서 괴뢰 정부 치하 인사들에 미군 점령을 위한 정보 수집이나 투항을 권유하는 뇌물로 사용했다.” 

 

두 손녀는 이날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789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금화를 목에 걸고 와 보여주기도 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