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더·가장·너무… 무한경쟁 사회, 부사도 센놈이 이겼다

이강기 2018. 11. 24. 13:53

[아무튼, 주말]

더·가장·너무… 무한경쟁 사회, 부사도 센놈이 이겼다

조선일보
  • 박돈규
  • 입력 2018.11.24 03:00

    당신의 부사는 안녕한가요

    당신의 부사는 안녕한가요
    일러스트= 안병현
    부사(副詞)는 문장에서 없어도 그만일 것 같지만 국어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용언(동사나 형용사) 앞에 놓여 뜻을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번성하는 말, 쇠락하는 말을 보면 그 사회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부사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지표다.

    "근년 들어 '짐짓' '무릇' '사뭇'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몹시'나 '매우'는 좀처럼 안 쓰고 '너무'만 너무 많이 쓰고 있고요."

    베스트셀러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쓴 김정선씨는 문어체에서 부사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그는 출판계에서 20년 넘게 교정 일을 해온 문장 수리공이다. "빈도나 강도를 나타내는 부사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말을 부드럽게 해주는 부사는 사라지고 있다"며 "과거라면 '퍽' '매우' '아주' '몹시' 같은 부사가 들어갈 자리를 '너무'나 '완전'이 차지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완전'은 명사인데 최근엔 부사로 둔갑하고 있다. "나 오늘 시험 완전 망했어"처럼.

    '아무튼, 주말'은 김한샘 연세대 교수에게 의뢰해 지난 60여 년 사이 우리가 어떤 부사를 더 쓰고 어떤 부사를 덜 쓰고 있는지 추적했다.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이 가진 신문 말뭉치를 대상으로 삼았다. 김 교수 연구팀은 증감 폭이 클 것으로 의심되는 부사 25가지를 골랐고,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들이 사용된 빈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사했다. 문장에 잠복한 한국인의 심리, 사회 변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더' '가장' '잘'… 빈도 증가

    어떤 부사가 다른 어휘에 비해 얼마나 더 사용됐는지 보여주는 값을 '상대 빈도'라고 한다. 연구팀이 추적한 부사 중 '더' '가장' '잘' '정말' '굉장히' '엄청'은 상대 빈도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가장' '정말'의 경우 1950년대에 비해 현재는 2배 정도 기사 문장에 더 자주 등장했다〈그래픽〉.

    당신의 부사는 안녕한가요


    기자들은 반대로 '무릇' '넌지시' '짐짓' '사뭇'은 점점 덜 쓰고 있다. 특히 '넌지시'는 1950년대와 견주면 7분의 1로 감소했다. 문어체에 자주 보이던 부사 '극히' '심히'도 사용 빈도가 급감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어체에서 부사적 용법으로 많이 쓴다고 우리가 체감하는 '완전'의 경우, 기사 말뭉치에서는 그 경향을 입증하기 어려웠다. 김한샘 교수는 "지면이 한정된 신문 기사는 일상어보다 정제된 문장을 쓰기 때문"이라며 "그런 제약에도 어떤 부사를 몇 배씩 더 사용하거나 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심하다는 뜻을 강조하는 부사를 '정도 부사'라고 부른다. 이번 조사에서는 '더' '가장' '정말' '굉장히' '엄청' 같은 정도 부사들의 상대 빈도가 확연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센 부사를 향한 뜨거운 러브콜이다. 우리 사회가 겪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김 교수는 "강력한 수식어를 써 주장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짙어진다"며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감정 노동이 늘어나고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등 사회 변화를 겪으며 생긴 불안감의 반영"이라고 진단했다. '극히' '심히' 사용이 줄어든 까닭은 "소셜미디어(SNS) 사용으로 말과 글 사이에 언어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문어에서만 주로 쓰던 부사들이 세력을 잃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극심한 경쟁 사회에 산다.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욕구가 점점 강해진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한국 사회에선 문장에도 '센 부사'를 써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번 말뭉치 조사 결과에 대해 극작가 김명화씨는 "말은 전염력이 강한데, 부사를 고를 때 신중함은 줄어들고 강한 자극과 속도에 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도 그렇지만 말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요즘 북한 사람들이 쓰듯이 간단명료했다. 김정선씨는 "무차별적으로 강한 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부드러운 부사만 쓴다면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진 것"이라며 "요즘 '~인 것 같다'처럼 말에 불필요한 장식을 붙이는 까닭도 당장 5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불안감 때문에 말의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다는 뜻이다.

    '100%원조진짜순참기름집'이라는 인플레

    당신의 부사는 안녕한가요


    단순히 부사 사용법만 달라진 게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언어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옛날에는 그저 '참기름집'이라는 간판을 내걸면 그만이었다. 안 믿을까 봐 '참기름' 앞에 '순'을 붙인 게 시작이다. 다시 '진짜'를 덧대 '진짜순참기름집'이 됐다. 그런 집이 많아지자 차별화가 필요했다. '원조진짜순참기름집'으로도 모자라 '100%원조진짜순참기름집'으로 거듭났다. 불신과 불안이 말에 거품을 부르고 값어치 하락을 자초하는 악순환이다.

    한국에서 영화는 그냥 개봉하지 않는다. 언제나 '대개봉'이다. 오늘 모실 손님은 흔해빠진 VIP가 아니라 VVIP다. 돈 드는 게 아니니 호칭도 부풀린다. '부사장'은 '사장', '부회장'은 '회장'이라고 높여 부른다. 또 설렁탕 주문할 때면 주저 없이 외친다. "보통 말고 특설렁탕으로 주세요, 특!"

    평범하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까. 특별해지고 싶어하는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과대 포장이 문제다. 웹사전 기획자 정철씨는 "속도를 강조하는 IT 시대가 되면서 과장된 수식어를 많이 쓰는 경향이 생겼다"며 "좀 더 빠른 단말기가 나오면서 강조하려다 보니 말에 저절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카페에 가면 숏 사이즈는 거의 사라졌다. 톨, 그란데, 벤티…. 자꾸만 더 큰 말, 더 센 말을 가져다 붙인다.

    언어 인플레이션은 등급 인플레이션과 누이 좋고 매부 좋게 결탁한다. 소고기는 1등급 위에 1+, 1++가 있다. 3등급까지 있지만 1등급 이상이 70%를 넘긴다. 계란을 무게로 구분하면 대란(52~60g) 위에 특란( 60~68g)이 있고 특란 위에 왕란(68g 이상)이 있다. 크기에 따른 영양소 차이는 거의 없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지난해 판정한 계란 등급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계란 품질은 1+등급부터 3등급까지 있는데, 2017년 판정한 7억5600만개 가운데 1+등급이 93.2%에 달했다. 최고 등급 비중이 이렇게 크다면 거품을 '짐짓' 모른 척하는 것 아닐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6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