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設, 建築

언론에 속살 드러낸 육사 교정…건축 거장들의 작품 가득

이강기 2018. 12. 13. 10:01

[단독]언론에 속살 드러낸 육사 교정…건축 거장들의 작품 가득

조선일보

입력 : 2018.12.12 04:00

화랑의식, 장교 임관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육사 화랑연병장. /김리영 기자

“열쇠 모양이 아니고, 가운데 중(中), 마음 심(心)을 형상화한 것이지요. 육사가 나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 돼라는 의미였죠.”

지난달 23일 서울 태릉 일대 육군사관학교 내 육군박물관 앞. 곽재환 칸건축 대표가 건물을 가르키며 설계 컨셉트을 설명하자, 동행했던 육사 관계자들은 일제히 “아, 그게 아니었구나”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육사 생도들은 이 건물이 열쇠모양 처럼 생겨 조국통일의 열쇠가 되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 곽 대표는 한국 건축계 거장(巨匠)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이 박물관을 설계했다.

육사는 이날 한국건축가협회와 함께 지역주민 등을 초청해 처음으로 교정 곳곳을 보여주며 건축물에 담긴 의미 등을 설명하는 건축투어를 개최했다. 당시 건물 설계에 참여했던 건축가 중 생존자들이 직접 건물에 얽힌 스토리를 알려줬다. 조선일보 땅집고는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초청받아 교정 곳곳을 취재했다. ‘국군 리더의 요람’ 육사가 굳게 닫혀있던 교정(校庭)의 속살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육사 교정은 군인 양성 기관인만큼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에 근엄하고 차가운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강철희 한국건축가협회장은 “육사 교정은 김중업·김수근·이광노·김종성 등 대한민국 1세대 건축 거장들의 작품이 다 모여있는 ‘한국 현대 건축의 미니 박물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사당 꼭 닮은 학교본부

육군사관학교 본부 건물.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군사관학교 제공

학교본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고(故) 무애 이광노 건축가의 작품이다. 육사 지휘부가 입주했고 석조 건축물이다.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000㎡ 규모로 1980년 완공했다.

이광노 건축가는 1975년 국회의사당을 짓자마자 학교본부 설계에 착수했다. 그러다보니 국회의사당과 외관이나 구조적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국회의사당의 경우 1층 중앙로비인 로텐더홀은 천장이 높아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육사 학교본부도 비슷하다. 1층에 들어가면 천장이 3층 높이여서 시원스럽다.

육군사관학교 본관을 올려다 본 모습. /이상빈 기자

눈에 띄는 점은 국회의사당과 달리 돔이 없다는 것. 학교본부 지붕은 사각형 로비에 어울리도록 초가지붕 모양이다. 박영준 육사 토목환경학과장은 “초가집은 겸손과 겸양, 섬김의 대명사로 군대 지휘부가 갖춰야할 덕목”이라며 “국가의 리더가 될 생도들이 교육생 시절에 배워야 할 덕목을 건물 설계에 녹여냈다”고 했다.

■ 육군박물관, 국내에서 가장 오래돼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육군박물관. /육군사관학교 제공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중업 건축가는 프랑스 대사관, 삼일빌딩,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기도하다.

그는 1981년 육군박물관을 설계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박물관으로 1983년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로 준공했다. 전시실 2개와 강당 등으로 이뤄졌다.

전시실로 올라가는 1층 계단 창문에는 3층 천장까지 스테인드 글래스로 처리했다. 이 창문엔 사물놀이패가 신명나게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육사박물관 로비에서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창문에는 3층 천장까지 뻗은 스테인드 글래스로 눈에 띈다. 이 창문엔 사물놀이패가 신명나게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상빈 기자

2층의 1전시실은 고대실로, 3층의 2전시실은 현대실로 각각 운영한다. 고대실은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의 군사 자료 약 1000점이, 현대실엔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기념물, 평화유지군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엔 마지막 남은 대한제국 장교였던 황석 부위가 입었던 예복이 박물관에 기증됐다.

이 건물은 외관이 독특하다. 직사각형 모양 사무동 건물과 원형의 박물관 등 두 개의 매스로 이뤄져 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열쇠처럼 생겼다. 그래서 육사 생도들 사이에선 ‘조국 통일의 열쇠’가 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왔다.

육사기념관 꼭대기 전망대에서 육사박물관을 바라본 모습. 건물의 모양이 흡사 열쇠를 닮아, 생도들 사이엔 박물관이 '조국 통일의 열쇠'가 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심기환 기자

하지만 당시 박물관 설계에 참여했던 곽재환 칸건축 대표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그는 “박물관이 ‘장구’를 형상화했다거나 ‘열쇠’ 모양이라는 건 엉뚱한 이야기”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며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핵심 메시지인 충성의 ‘충(忠)’을 은유해서 설계했다는 것. 곽 대표는 “박물관이 육사의 중심이고, 우리나라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육군박물관 중정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상빈 기자

실제로 건물 가운데 원통형 중정(中庭)은 ‘가운데 중(中)’을 형상화했고, 건물 중앙에 설치했던 분수는 ‘마음 심(心)’을 상징한다는 것. 다만 원래 분수였던 중정은 관리상 이유로 철거했다. 육사 관계자는 “박물관 유물에 습기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분수를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철거 후엔 원형 울림통 효과가 있어 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곽 대표는 “유물 보존 대책은 다른 대안이 많지만 박물관에서 분수를 없애면 하늘의 마음을 담고자 한 김중업 선생의 설계 의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육군박물관을 설계한 곽재환 칸건축 대표가 박물관의 외벽 삼각벽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리영 기자

건물 외벽은 기와색 삼각벽돌로 둘렀다. 삼각형이어서 빛에 따라 형상이나 빛깔, 색이 달라진다. 이 삼각벽돌은 솔가지를 태워 색을 입힌 것으로 기와를 만들 때 쓰는 전통 가마 방식이다. 당대 최고 벽돌장인 김영림씨가 제작했다.

박물관 기둥은 군인의 ‘세워총’ 자세를 형상화했다. 사각형 건물 끝엔 비상계단이 있는데 일부러 방향을 비스듬히 해 건물과 별개인 조형물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빗물을 받는 물홈통은 잔 모양으로 디테일을 살렸다.

■ 육사기념관 외벽엔 졸업생 이름 모두 새겨

'교훈탑'이라고도 불리는 육사기념관. 높이는 64m로 탑을 받치는 5개의 지주는 육군의 별을 상징한다. /육군사관학교 제공

육사기념관은 일명 ‘교훈탑’으로 불린다. 1962년 5월부터 사용한 교훈인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를 ‘지(智)·인(仁)·용(勇)’으로 다시 환원하면서 건립이 구상됐고, 이후 졸업생의 성금으로 1986년 준공했다.

김중업 건축가와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양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김수근 건축가는 이 건물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념관은 지상의 탑과 지상 1층~지하 2층 기념관으로 구성된다. 탑 높이는 64m로 ‘육사’를 상징하며, 탑을 받치는 5개의 지주는 육군의 별을 상징한다. 항간에는 “오각성(五角星) 탑이 제5공화국을 상징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일했던 김원석 공간건축 고문은 터무니없다고 했다. 그는 “오각별은 군에서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면서 “5공화국과 관련된 건 없다”고 했다.

육사기념탑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 /심기환 기자

육사기념관 1층엔 학교 역사관과 전사자실이 있다. 눈에 띄는 건 1층 외벽에 개교 이후 74기(2018년)까지 졸업생 명단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 김원석 고문은 “졸업생들이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긍지를 갖고 손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지하 2층엔 생도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꼭대기층엔 바닥면적 70㎡ 규모의 십오각형 모양 전망대가 있다. 육사 교정 전체와 태릉 일대를 볼 수 있어 조망이 뛰어나다.

육사기념관 탑의 1층 외벽엔 졸업생 명단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심기환 기자

탑이 지어진 1986년은 육사 개교 40주년이었는데, 10년 뒤 50주년인 1996년 기념관 형태로 바뀌었다. 그 전엔 지하에 식당과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 국내서 보기 드물었던 개가식 육사도서관

종로SK사옥, 서울 힐튼호텔 등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육사도서관. /육군사관학교 제공

육사도서관은 1982년 준공했다.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6753㎡(약 2000평)짜리 건물이다. 생도교육과 학술 정보 지원 목적으로 대우그룹이 지어 기증했다. 건물에 우당(愚堂)이란 이름이 붙어있는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친의 호를 썼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은 건축 당시엔 국내에서 보기 힘든 개가식(열람자가 서가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으로 설계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지금이야 대부분 도서관이 개가식이지만, 당시엔 도서가 분실·훼손될 것을 우려해 흔치 않았다”며 “주된 이용자가 최고의 도덕성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관생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자연광을 이용한 채광이 눈에 띈다. 정진경 육사 교장(중장)은 “재학 당시 햇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도서관 바닥은 석회암의 일종인 트래버틴(travertine)을, 건물 내부벽은 녹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책장과 의자, 서가 등은 모두 참나무로 마감했다.

설계자인 김종성 건축가는 한국 건축가 1세대로 작고한 김중업,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한국 3대 현대 건축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종로 SK사옥,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서울 힐튼호텔 등을 설계했고, 강남구 삼성동에 짓는 현대차 GBC 마스터플랜 총괄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육사도서관 내부. 자연광을 이용한 채광이 눈에 띈다. /김리영 기자

이밖에도 육사에는 조선시대 삼군부 부속 건물 중 하나인 청헌당과 서울시 건축상을 받은 원불교 화랑대 교당, 한국건축가협회장을 역임한 강석원 건축가가 지은 화랑대 성당 등도 있다.

육사는 월요일과 신정, 설 및 추석연휴를 제외하면 오전 10~12시, 오후 2~4시 인터넷으로 신청만 하면 누구나 입장이 가능하다.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는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을 볼 수 있다.

생도들이 실시하는 열병식인 화랑의식.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30분부터 진행된다. /이상빈 기자

정진경 육사 교장은 “육사는 ‘도약적 변혁’을 맞이해 군인 교육기관으로 민간에 개방해 지역주민에게 다가가는 기관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며 “군인의 생활 터전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도 견학할 수 있는 만큼 많은 분들이 친근하게 다가와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육사는 한국건축가협회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육사 내 건축물 보존과 건축 교육 등에 대한 자문 수렴을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