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인생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내·성실, 후배들 키우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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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생인 하춘화는 만 6세이던 1961년 데뷔했다. 2021년이면 데뷔 60년이다. ‘가수 나이’를 기준으로 현역 가수 가운데 하춘화보다 선배는 없다. 하춘화는 “현재 활동하는 가수들 중에는 내가 가장 오래된 것 같다”고 했다.
월간중앙이 1월 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호텔’에서 하춘화와 만났다. 하춘화는 “가수 이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바람 부는 날, 비 오는 날 견뎌왔더니 어느덧 60년 세월이 흘렀다. 내 목소리가 허락하는 한 무대에 서고 싶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2년 후면 데뷔 60년이시죠?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다섯 살 때까지 부산에서 살다 여섯 살 때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아버지가 저를 동아백화점 4층 동아예술학원에 데려가셔서 ‘우리 애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소개하셨죠. 그 학원에 유명한 작곡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거든요. 다른 선생님들은 귀담아 듣지 않으셨는데 피아노 선생님만 ‘너 무슨 노래 잘하니’라고 물어보시더니 노래를 시키시더라고요. 노랫소리가 들리니까 선생님들이 다들 모이셨어요. 또 그 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가니까 백화점에 온 손님들도 몰려들었고요. 당시 최고였던 형석기(1911∼1994) 선생님이 6개월간 저를 교육하시더니 아버지에게 음반을 내자고 제안하셨고, [천재 소녀가수 하춘화 가요앨범]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이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얼마 전 ‘죽기 전에 앨범 한번 내자’고 하셨는데, 그땐 너무 바빠서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음의 빚입니다.”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어린 딸을 가수로 만든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아버지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 남다르셨던 것 같아요. 장손에 장남인 아버지에게 딸만 넷이어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밖에서 아들을 낳아 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앞으로는 아들딸이 관계없는 시대가 온다’며 거절하셨어요. 또 당시는 대중예술인을 ‘딴따라’라며 천대하던 때였잖아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부모 뜻대로 자식을 키우려 할 게 아니라 자식의 타고난 재질을 키워줘야 한다’며 저를 밀어준 유일한 후원자였어요. 아버지 덕에 오늘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데뷔 기념앨범은 늘 2~3년 전에 발표하시죠? 60년 기념앨범의 구성이 궁금합니다.
“요즘 성인 가요가 침체됐잖아요? 그래서 앨범을 낼 때 굉장히 심사숙고합니다. 앨범 내는 게 목표가 아니라 대중에게 사랑받는 게 목표니까요. 이번에는 4년 만에 내게 됐어요. 계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마산에 있는 경남대를 나왔어요. 근데 마산과 진해가 창원시로 통합되면서 마산이란 단어가 잊혀지고 있어요. 마산이 고향인 분들은 아쉬움이 크죠. 그래서 타이틀곡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로 했습니다. 가사는 제가, 곡은 마산이 고향인 이호섭 선생님이 쓰셨어요. 딱 한 번 TV에 방송됐는데 문의가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앨범은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를 비롯해 신곡 3곡에 기존 히트곡 12곡 그리고 MR(Music Recorded) 3곡으로 구성됐습니다.”
‘마음속 동지’ 마이클 잭슨, 미소라 히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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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공연 횟수 8500회로 기네스북에 올랐었죠. 그때가 근 30년 전이니까 지금까지 총 9000회 정도? 1970~80년대에는 1년 365일 중 180일 공연을 했어요. 등창이 나고 발톱이 빠졌어요. 요즘엔 1년에 20~30회쯤 하고 있으니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되죠. 음반을 통해 발표한 곡은 2500곡가량 돼요. 외국 가수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찌 그런 천문학적인, 또 미개한 숫자가 가능하냐’며 놀라워합니다. 외국에서는 앞뒤로 1곡씩 싱글앨범을 내는 데 반해 우리는 LP 시절 한 앨범에 12곡씩 냈기 때문이죠. 1년에 음반을 11개 냈던 적도 있었어요. 2500곡이라면 이미자·나훈아 선배 정도로 알고 있어요.”
5년 단위로 공연을 준비하시는 걸로 유명합니다.
“20주년, 25주년, 30주년 이런 식으로 기념공연을 해왔어요. 3년 전에 55주년 공연이 끝났는데, 곧바로 60주년 공연 준비에 들어갔어요. 아무렇게나 공연할 수는 없잖아요? 주위에서는 저더러 올림픽에 나가냐고 물어봐요(웃음). 제 공연에 자주 오시는 마니아들은 공연 후 ‘이번이 더 좋았어요’라며 만족해하세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좋아지기보다 ‘다음엔 뭘 하지’라는 부담이 더 커집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 부담을 안고 공연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은 어떤 곡들입니까?
“발표한 곡은 2500곡이지만 가사 1·2절을 제대로 외우는 곡은 100곡쯤 될까요? 그 100곡은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제가 자주 불렀던 노래들이죠. 길을 지나다 ‘어디서 들었던 노래인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제 노래인 경우도 많아요(웃음).”
음색이나 가창력 면에서 부러웠던 가수가 있습니까?
“타이거 우즈, 마이클 잭슨, 미소라 히바리를 좋아했어요. 이 세 분은 대여섯 살 때 노래나 운동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고 할까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이 죽었을 때 한동안 너무 우울하고 허전했어요. 또 타이거 우즈가 스캔들에 시달릴 때는 마음이 아팠어요. 미소라 히바리는 5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뒤로 일본에 가면 허전하더라고요. 미소라 히바리는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에요. 매니저 역할을 했던 어머니는 딸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까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겼었죠.”
미소라 히바리(1937~1989)는 일본의 쇼와(昭和)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배우다. 1989년 6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라이벌로 생각하셨던 가수가 있었나요?
“남진·나훈아 시대에 저는 홍일점이었어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TBC 방송가요대상에서는 남녀 가수상 1명씩, 남녀 신인가수상 1명씩을 선정했어요. 나훈아·김세환·남진 등 남자 가수상 주인공들만 바뀌었을 뿐 저는 계속 받았어요. 신인상은 건너뛴 저는 18세 때 처음 방송가요대상을 받았습니다. 나이나 스타일이 비슷해야 라이벌이라 할 텐데 그럴 만한 상대가 없었어요. 일부 언론에서 김추자씨와 저를 라이벌로 부각시켰는데 사실 노래 스타일부터 모든 게 달랐어요. 같은 날 서울에서 리사이틀(콘서트)을 하면 관객 수에 따라 ‘하춘화가 이겼다’ ‘김추자가 이겼다’는 투로 보도하는 식이었죠. 저를 발굴해서 11세 때 전속계약을 하신 임종수 지구레코드 회장님 말씀이 ‘너와 전속계약 한 이유는 당장의 히트곡을 바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5~6년 후엔 틀림없이 히트곡이 나온다. 네 목소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목소리다. 더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딱 지금 그대로만 불러라’고 하셨어요. 그땐 무슨 말씀인지 잘 몰랐는데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 의미를 알겠더라고요.”
신데렐라? 어려움 많았지만 티 안 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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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피아노도 배우고 기타도 배웠는데 능숙한 정도는 아니에요. 피아노는 1년 전부터 다시 배우고 있어요. 얼마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는데 자극을 좀 받았죠(웃음). 프레디 머큐리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프레디 머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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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서기 전 습관 같은 게 있으세요?
“늘 양치를 합니다. 제 마음을 다지는 의미에서 하는 거죠. 또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밥을 먹지 않습니다. 저녁 공연이 있으면 아침만 먹고 점심부터 거릅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절대 물을 마시지 않아요. 대중 앞에서 벌컥벌컥 물을 마셔요? 그건 아주 예의 없는 행동이죠. 또 무대에서 제가 신었던 신발은 직접 깨끗이 닦아서 보관합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것 같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인색한 편입니다. 칭찬하는 말은 담아두지 않지만, 지적하는 말은 새겨두고 고치려 애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노는 것, 밥 먹는 것까지도 계획을 세워서 하지, 즉흥적으로 하진 않아요.”
60년 가수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과 가장 아쉬운 일을 꼽아주신다면.
“예전에는 신데렐라, 행운아라고들 하셨죠. 결코 아닙니다. 남들이 겪은 어려움? 저도 다 겪었어요. 다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죠. 대중이 사랑해 줄 때는 누구든지 잘할 수 있어요, 대중의 사랑이 식었을 때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해요. 그런 시기를 자기 발전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다시 기회가 왔을 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이 식었다고 해서 ‘외롭다, 힘들다’고 만 생각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죠. 어려울 때를 잘 극복해야 롱런하는 것 같아요. 저에게도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있었죠. 그걸 다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살아간다는 게 쉬운 건 아닙니다. 그러다 60년이 됐는데…. 사실 실감이 안 나요. 60년이라면 저를 80세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거든요(웃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이 나이에 뭘’이라는 말입니다. 나이를 먹고 싶어서 먹는 사람 있나요? 세월이 흐르니까 먹는 거죠. 돌아보면 피아노를 꾸준히 배우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됩니다. 그리고 가장 보람된 일은 1985년 평양 공연이에요. 그해 추석 때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 예술단을 동시 교환해서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했죠. 그리고 한·일 어업협정 문제가 불거졌던 때도 기억나는군요. (1999년 3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를 서울 신라호텔로 초청해서 제 공연을 함께 관람했어요. 제가 오부치 총리와 일본 노래도 한 곡 불렀는데 다음 날 신문에 ‘가요 외교’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더라고요. 가수로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국내 최초 박사 가수, 네 자매 모두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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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는 건 기쁨이죠. 몰랐던 걸 하나씩 알아가는 건 대단한 희열입니다. 공부도 취미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네 자매가 모두 박사죠?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폐병을 앓는 바람에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딸 넷 중 법관이 한 명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계셨는데, 법관은 없고 모두 박사가 됐네요. 어느 날 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니 딸 셋의 박사모 사진이 걸려 있는데, 제 자리를 비워두셨어요. 이유를 여쭸더니 ‘저긴 네가 들어갈 자리야’라고 하셨죠. 그 말씀이 상당한 압박이 됐어요.”
경남대와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하춘화는 2000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한국 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3전4기 끝에 2003년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전형(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에 합격한 하춘화는 ‘사회 변동기의 대중가요와 대중 정서의 상관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2006년 8월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내 대중가수 중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하춘화가 최초다.
한길 60년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인생철학이 궁금합니다.
“제 인생철학은 인내입니다. 인내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 같아요. 수시로 바뀌는 사람은 결과가 없더라고요. 어르신들 말씀처럼 ‘그 모양 그 꼴’인 거죠. 미련할 정도로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 결과가 있더군요. 나이 먹고 철이 들면서 한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됐어요. 10년, 20년, 30년 걷다 보면 자기만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길을 바꾸면 역사를 없애는 셈이죠. 저는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심호흡을 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합니다. 하루 자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고, 하루 더 자고 나면 생각이 또 달라집니다. 어려운 일에 처할수록 시간을 갖고 차분해지려고 노력합니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목숨을 일을 뻔하셨죠?
“이주일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60대 초반에 돌아가셨죠. 살아 계신다면 저와 일을 많이 하셨을 텐데…. 그분은 무명 시절 제 콘서트의 전속 사회자로 10년 정도 일하셨어요. 저보다 나이는 15년쯤 위지만 저한테 말씀을 놓지 않으셨어요.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때는 저는 어깨 쪽에 타박상밖에 안 입었지만, 이주일 선생님은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으셨어요. 그런데도 저를 업고 극장을 빠져 나오셨죠. 나중에 기자들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춘화씨 구할 생각을 하셨냐’고 묻자 이주일 선생님은 농담조로 ‘내 밥줄이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겠냐’고 하셨대요. 저에겐 생명의 은인이죠. 나중에 서울 금호동에 집을 사서 이사한 뒤에 저와 아버지를 초대해서 몇 번이고 감사 말씀을 하셨는데….”
고(故) 이주일과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하춘화의 눈시울은 불거지고 음성은 떨렸다. 하춘화는 “이주일 선생님이 유명해진 뒤에 나쁜 일(외아들 사망)이 있었다. 큰 병을 얻어 일찍 떠난 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자녀를 갖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없으면 가지려고 노력해야겠지만, 그래도 안 생기면 없는 대로 사는 거죠. 사실 애기가 하나 있었는데 (복중에서) 잃었어요. 하나님이 ‘열심히 노래 부르며 남을 위해 살라고 하시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애가 없다고 해서 동정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예의가 없는 거죠.”
공연 수익금 200억원 기부, 영암엔 고등학교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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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활동할 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국가 행사 때 자주 초대돼서 공연을 하게 됐고, 대통령도 뵙게 됐죠. 제가 둘째 딸 박근령씨와 나이가 비슷해서 더 예뻐하셨던 것 같아요. 이리역 폭발사고 때도 박 대통령이 헬기 타고 내려오셔서 전북지사에게 가장 먼저 물은 말이 ‘하춘화 어떻게 됐어?’였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 보배, 너도 아버지랑 같이 다닌다면서? 나도 우리 근혜랑 같이 다닌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 노래 중에 ‘강원도아리랑’을 유독 좋아하셨어요. 제가 가사까지 직접 적어드렸죠. 1985년 평양 공연 다녀오고 나서 위로연 때 전두환 대통령이 수고 많았다고 격려하셨죠. 그분은 제 노래 중 ‘무죄’ ‘영암아리랑’을 좋아하셨고, 제 공연에도 거의 빠짐없이 오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의 애창곡이 ‘베사메무초’인데 같이 부른 적이 있습니다. 제 가수 인생이 60년이다 보니 대통령들과도 자주 뵙게 된 거죠.”
사회에 기부도 많이 하셨죠?
“중3 때 ‘물새 한 마리’라는 히트곡이 나왔어요. 그때 아버지가 저를 불러 앉혀놓고 ‘이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됐으니 너도 받은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거라. 너를 본받을 수 있도록 동료들에게 동기 부여를 해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예전에 안양에 나자로 마을이라는 나병(癩病) 환자촌이 있었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19세 때 첫 리사이틀을 하고 나서 두 번에 걸쳐서 그곳에 1000만원을 기부했어요. 당시 서울 시내 100평짜리 단독주택 한 채가 300만~400만원이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라 지금까지 꾸준히 기부하고 있어요. 3년 전 55주년 기념공연 때는 수익금으로 서울 25개 구와 부산 16개 구의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을 도왔습니다.”
하춘화는 2016년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했다. 하춘화가 지금까지 공연 수익을 통해 기부한 금액은 2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꼼꼼한 춘화씨’는 “기부액이 어려운 이웃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지정(指定)기부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부친의 고향인 영암에는 사재를 털어 고등학교를 설립하셨죠?
“영암에 고등학교가 없다 보니 자녀들을 광주나 목포로 보내야 했죠. 유학을 보내면 학비뿐 아니라 하숙비도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낭주고등학교를 세운 겁니다. 낭주가 영암의 옛 이름이거든요. 1976년에 학교 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하고 개교식을 했어요. 그때도 이주일 선생님이 사회를 보셨죠. 그런데 그 작은 지역에 2만 명이 모인 겁니다. 사람들이 앉을 곳이 없자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영암아리랑’을 들었어요. 지역에서는 ‘하춘화 고등학교’라고 불렀습니다(웃음).”
양친(兩親)이 생존해 계시죠?
“어머니(김채임)가 98세, 아버지(하종오)가 101세예요. 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생이시죠. 두 분 다 건강하세요.”
장수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중요한 게 성격 아닌가 싶어요. 어머니는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입니다. 아버지는 낙천적이세요. 화가 나셨더라도 옆에서 조금만 풀어드리면 담아두지 않으세요. 또 아버지는 주는 걸 좋아하세요. 돈을 빌려주고도 받지 못하실 정도로 여리십니다. 40년 동안 아버지는 지병(持病)이 4가지나 있으신데, 그만큼 관리를 할 수밖에 없죠. 그게 오히려 장수의 비결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가수는 내 운명… 목소리 될 때까지 노래하고 싶어
“나이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우울증에 빠질 수 있어요. 생각하기 나름이잖아요?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인생도 좋은 쪽으로 풀리는 것 같아요. 세상 살기가 어려운 건 돈이 많으나 적으나 마찬가지예요.”
건강관리 비결이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9000회 정도 공연을 했잖아요? 공연 그 자체가 엄청난 운동이에요. 건강하지 못하면 무대에 설 수도 없고요. 저에겐 운동이 생활이에요. TV 보면서 아령도 하고, 훌라후프도 하죠. 그리고 원래 많이 먹지 못해요. 소식(小食) 체질이죠.”
골프에도 조예가 깊으시죠?
“그것도 아버지 영향이에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 정신 건강에 좋다’며 권유하신 거죠. 29세 때 골프를 시작했는데 아버지랑 필드에 가장 많이 나갔어요. 요즘엔 1년에 여섯 번 정도 필드에 나가요. 한때 싱글까지 쳤는데 지금은 80대 초·중반쯤 칠걸요?”
언제까지 노래하고 싶으세요?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요.”
패티김은 만 75세이던 2013년에 은퇴하셨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 더 하시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굳이 은퇴 발표를 하지 않으시더라도 서서히 줄여가는 것이 은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송해 선생님은 90세가 넘도록 활동하시잖아요?(웃음)”
아이돌 스타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
“제가 요즘에 태어났다면 환영을 받았을 텐데, 그땐 눈총을 받았죠(웃음). 타고난 재질만 있다면 박수치고 환영합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어려서부터 해야죠. 하지만 재질이 없는데 억지로 하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가수가 되신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단 한번도요. 저는 팔자나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렇지만 노래와 가수는 제게 운명인 것 같아요. 세 살 때 제가 대중가요 300곡을 외워서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몇 년 전 [전국노래자랑]에 세 살짜리가 노래 부르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저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살 때 제가 불렀던 노래를 녹음해 둔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분을 찾고 있어요.”
이루고 싶으신 꿈은 무엇인가요?
“10월 말쯤 국내 최초로 영암에 ‘트로트가요센터’가 개관합니다. 그 안에 ‘하춘화 전시관’ ‘하춘화 아트홀’이 있습니다. 또 그 단지 안에 꿈나무들을 훈련시키는 아카데미가 들어설 겁니다. 가수의 꿈을 가진 아이들이 훈련하고 무대에 서고 앨범까지 내는 시스템으로 운영될 겁니다. 대중가요 인재를 제대로 길러보겠습니다. ‘영암으로 가야 전통가수의 꿈을 이룬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요.”
끝으로 팬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춘화가 매일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잘하면 칭찬해 주시고, 못하면 꾸짖어 주세요.”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agadi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