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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 "공산당과 싸움, 기계 고치듯 차근차근 했다"

이강기 2019. 2. 16. 09:25

[아무튼, 주말]

"공산당과 싸움, 기계 고치듯 차근차근 했다"

조선일보
  • 권승준 기자
    • 입력 2019.02.16 03:00

    [권승준 기자의 한방] 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권승준 기자의 한방] 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외모로도 유명했다. 1980년 자유노조 투쟁 당시 세계에 각인된 그의 모습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미남자였다. 어느새 머리와 콧수염도 희끗해진 그는 최근 눈 수술을 받아 평생 처음 안경을 쓰고 다닌다고 했다. 변하지 않은 건 투쟁 본능. “지금 폴란드 집권 여당이 헌법을 침해하고 사법부를 장악하려 한다”며 항의하는 운동에 동참 중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개룡남(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공식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 그리고 2년제 직업학교를 마친 뒤 조선소 전기공이 되었다. 열심히 사는데도 점점 가난해졌다. 독재국가에서 나고 자란 탓이었다. 배운 건 없어도 용기는 남달랐던 이 개룡남은 참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어 독재에 맞섰다. 싸움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삶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노벨평화상도 그의 몫이 됐다. 노동자 출신 중 최초였다.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낯익은 스토리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러시아보다 소련이란 이름이 더 친숙한 세대. 반(反)공산 진영의 희망이자 소련 공산당의 근심거리였던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연대라는 뜻의 폴란드어·자유노조)'의 지도자, 그리고 폴란드 민주공화국 2대 대통령(1990~1995) 레흐 바웬사(75) 얘기다.

    지난 9일 평창평화포럼 특별 연사로 방한한 바웬사 전 대통령을 만났다. 행사장인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컨벤션 센터에서 한 직원은 견학 온 중학생들에게 그를 소개하면서 '20세기 레전드(전설적 인물이란 뜻의 은어)'라고 불렀다. 티셔츠 위에 편안한 재킷 차림. 수행원도 경호원 한 명뿐.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자리에서 격의 없이 꺼낸 첫마디는 "피곤하다". 의전도 격식도 신경 쓰지 않는 솔직담백함은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라 반골 기질 다분한 악동(惡童)에 가까웠다. 자서전 '희망의 길'에서 그는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고 적은 바 있다.

    [권승준 기자의 한방] 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1980년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 중인 바웬사 노동자연대 위원장. / 게티이미지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나. 공부하길 무척 싫어했다고 썼던데.

    "말썽 피우는 데는 대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대장 기질이 있었던 거 같다. 공부 빼곤 뭐든지 최고가 되고 싶어 했다. 심지어 낚시도 마을에서 제일 잘했다."

    ―낚시?

    "나는 전쟁통에 태어났다.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다행히 내가 살던 곳(폴란드 그단스크)은 바닷가였다. 먹고 살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물고기가 없었으면 진작에 굶어 죽었을 거다. 그랬다면 자유노조 창설이나 공산권 붕괴도 좀 늦어졌겠지(웃음). 참, 낚시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뭔가?

    "물에 물고기가 적어야 한다. 그래야 낚시가 재미있다. 물고기가 너무 많으면 낚시가 재미가 없다. 고생해서 한 마리 건져 올리는 재미로 낚시하는 거다. 투쟁이랑 비슷하지. 적이 강해야 투쟁도 재미가 있다. 소련은 아주 강한 적수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막내아들이다.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텐데.

    "어머니는 굉장히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분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불린 분이다. 어머니 덕분에 신앙을 가지게 됐고, 그 덕분에 흔들릴 때마다 하느님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들을 웃겨라'고도 가르쳐주셨다. 유머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말이 너무 많으셨다. 어머니가 너무 중요한 걸 많이 가르쳐줘서 (다 배우기) 힘들었다. 너무 많이 배우는 데 질려서 나는 내 아이들에겐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다(웃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는데 조선소 전기공이 됐다.

    "자동차 정비공보다 조선소 전기공이 더 깨끗하고 멋있게 보였다. 결국 전기공 일보다 데모를 더 많이 하긴 했지만. 요즘 조선소는 우리 때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이더라. 그래서 요즘 청년들은 데모를 안 하는 것 같다(웃음)."

    평범한 청년에서 반독재 선봉으로

    그간 국내 언론과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이렇게 자기 고백적인 바웬사는 찾기 어렵다. 청년 바웬사가 역사의 물결에 휘말린 때는 1970년. 공산당이 식료품 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데모 얘길 해보자. 처음부터 반정부 투쟁은 아니었다는데.

    "그때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이 쏜 총에 사람이 맞아 죽는 걸 봤다. 고깃값이 너무 비싸다고 항의하는 사람을 쐈다. 거기서 공산당의 민낯을 본 거다. 그때부터 사람들과 좀 다른 얘길 한 것 같다. 단순히 식료품 가격 말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도 권력을 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얘길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도 나를 달리 봤다. 문제는 공산당도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거다. 비밀경찰들이 감시했고, 결국엔 조선소에서 해고됐다."

    ―해고되고 나서도 지하에서 싸웠다. 두렵지 않았나.

    "공산당보다 아내가 더 무서웠다. 해고돼 수입이 끊기고 나니 아내가 더 무서워지더라. 내 별명이 '황금손'이다. 못 고치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장 난 TV같은 걸 수리해주고 돈을 받았다. '불법 수리공'이었던 셈인데 조선소 다닐 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더라(웃음). 덕분에 싸움도 계속할 수 있었지. 공산당이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유혹도 물리칠 수 있었고."

    [권승준 기자의 한방] 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공산당에 맞서던 시절을 떠올리며 포즈를 취해 달라는 주문에 레흐 바웬사 폴란드 전 대통령은 엄지를 거꾸로 세웠다. 티셔츠엔 폴란드어로 ‘헌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폴란드 집권 여당의 사법부 장악 시도를 비판하는 의미라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자신과 가족을 우선했다면 유혹이 매력적이었을 텐데. 공산주의가 그렇게 싫었나.

    "단순히 공산주의가 아니라 소련의 독재가 문제였다. 결국 폴란드를 통치한 건 소련의 독재정권이었다. 그들은 무력으로 폴란드 인민을 협박했다. 시위가 번지면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우리 국경에 탱크를 배치했다. '핵무기를 가진 군대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너희는 이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계속 주는 거다. 내가 소련에 반대한 건 그렇게 무력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체제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 정권은 어떤가. 북한 역시 공산당 독재국가인 데다 과거 폴란드처럼 인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북한은 과거 (소련) 공산당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본다. 핵무기를 만드는 건 자국민뿐 아니라 이웃 나라까지 무력으로 억누르는 행동이다. 지도자라면 핵무기를 개발할 돈으로 사람들을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바로 무기 대신 경제를 택한 것 아닌가. 한국 사람들도 북한을 향해 '우리의 길을 따라 평화를 추구하면 우리처럼 사람답게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야 한다.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일 못하고 멍청한 사람들을 이기는 게 당연한 거다."

    최초의 노동자 출신 노벨상 수상자

    1980년 8월 14일. 공산당이 또다시 식료품 가격을 인상한 것으로 시작된 시위가 폴란드 전국으로 번질 때였다.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2000여 명이 파업 투쟁을 하기 위해 조선소에 모였다. 해고노동자였던 바웬사는 조선소 담장을 넘어 들어와 동료였던 이들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선언했다. "오늘, 여기서 솔리다르노시치가 결성되었습니다." 한 달 뒤 바웬사는 노동자들을 이끌고 공산당과 협상을 통해 자유노조를 합법화시켰다. 철의 장막에 큰 구멍 하나가 뚫리던 순간이었다.

    [권승준 기자의 한방] 공산권 몰락 촉발시킨 레흐 바웬사
    폴란드의 민주화 물결이 최고조에 이른 1988년 3월 바웬사 당시 자유노조 의장이 그단스크조선소 집회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독려하는 모습. / AP
    "내가 막 담장을 넘었을 때가 결정적 순간이었다. 조선소에 모인 노동자들 앞에서 조선소를 관리하는 공산당 간부가 '집에 돌아가라. 당에서 식료품 가격을 내려줄 거다'라고 회유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간부에게 반대하거나 항의하지 않더라. 내가 군중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그 간부에게 레프트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 원하는 걸 얻으려면 여길 떠나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의 리더가 됐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당신이 리더가 된 비결이 궁금하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리더라는 자리는 계획했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나도 처음엔 투사가 되거나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독재에 맞서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하는 데만 집중했을 뿐이다. 독재 대신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정치인처럼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하다 보니 어느새 대통령 자리까지 밀려와 있더라."

    소련과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상징으로 떠오른 바웬사는 198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소련의 감시가 심한 상황에서 상을 받으러 출국할 경우 다시 귀국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꾀를 냈다. 아내인 다누타가 대리 수상을 한 것이다. 당시 시상식장에서 다누타가 보인 침착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바웬사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아내를 사랑하게 됐다"는 유명한 농담을 했다.

    ―가족 얘기를 해보자. 운동에 헌신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텐데.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가장 미안하고 아쉽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게 딱 두 명이다. 하느님과 아내."

    ―하느님과 아내를 두려워해서 그런가. 당신은 중요한 국면마다 대화와 평화적 해결을 선택했다. 특히 1989년 폴란드 공산당과 마라톤협상을 통해 선거로 첫 정권 교체를 이뤄낸 건 당신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과격한 해법을 주장한 동지들을 어떻게 설득했나.

    "나는 언제나 실현 가능성 있고 실제 효과가 있는 해법을 찾았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것과 비슷하다. 복잡한 문제를 단번에 푸는 해법은 없다.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그게 '불법 수리공'으로 일하던 시절 체득한 교훈이다. 동지들과 수많은 토론을 했다. '이게 최선이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그때 선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공산당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면 아마 유럽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헌법, 법치주의 그리고 경제

    정치인 바웬사의 경력은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1990년 압도적인 지지로 폴란드 민주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됐지만, 재임 중 경제 정책 등에서 실기를 거듭하며 임기 말에는 지지율이 3%까지 폭락했다. 1995년 재선에 실패한 뒤에는 "생활비가 없다"며 조선소 노동자로 복직하는 등 튀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반독재 투쟁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민주주의에 대한 당신의 깨달음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중요한 건 이념 그 자체가 아니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세 가지다. 첫째, 헌법이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헌법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법치주의다. 권력자든 시민이든 헌법을 지키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는 경제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사람들은 정부를 따르지 않는다. 독재정권은 이 세 가지 중 아무것도 제대로 못 했다."

    ―북한은 어떤가? 김정은 정권이 그 세 가지를 잘해 나가고 있다고 보는가.

    "북한에선 나 같은 노동자 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진 못할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회사나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하고 나처럼 대통령이 될 기회도 잡을 수 있다. 공산당 독재 아래에선 오직 당을 통해서만 돈을 벌 수 있고, 정치할 수 있다."

    ―당신의 경험이 한국에 주는 충고는.

    "솔리다르노시치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자유노조의 힘만으로 폴란드를 민주화시킨 게 아니다. 교황뿐만 아니라 온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의 이웃들이 같이 '공산당 타도'라는 짐을 짊어졌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와 남북통일이라는 짐을 혼자 짊어지면 안 된다. 이웃 나라들과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바웬사는 미안하다며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고 일어섰다. "하느님이 원하지 않으시기에" 평생 단 한 번도 주말 미사를 빼먹지 않았다고 했다. 단순하고 솔직하며 자기 확신에 찬 성격 그대로였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었던 그는 이런 식으로 삶을 일궈냈다. 집에 먹을 게 없으면 낚시를 하고, 직장에서 잘리면 '불법 수리공'이 되어 돈을 벌고, 독재 정권이 탄압하면 지하에서 사람을 모아 싸움을 이어갔다. 책 한 권 읽어본 적 없지만 자서전에 "지식인들이 5시간 동안 논쟁해 내린 결론이 내가 5초 만에 내린 것 과 다를 게 없었다"고 당당하게 썼다. 수많은 지식인이 '소련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결국 역사는 '무력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체제에 동의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단순함, 솔직함, 그리고 자기 확신이라는 가치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할까.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면서 불법 수리공이었던 콧수염의 사내가 V자를 그려 보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15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