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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運動 103만명 참가·934명 死亡… 天主敎會선 信者 독립운동 참여 금지

이강기 2019. 2. 21. 10:30

3·1운동 103만명 참가·934명 사망… 첫 공식 집계 나왔다

조선일보
  • 김성현 기자
    • 입력 2019.02.21 03:01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국사편찬위, '3·1운동 100년 기념 데이터베이스 구축' 결과 발표

    1919년 3·1 운동 당시 국내외에서 최다 103만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최다 93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가 20일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 사망자도 최소 725~최다 934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존 자료에 기록된 시위 참여자 58만명, 사망자 553명보다 최고 1.7배 높은 수치다.〈본지 2월 7일 자 A1면

    국사편찬위는 지난 2016년부터 3년간 진행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 결과를 발표했다. 국가 연구 기관이 3·1운동과 관련된 공식 집계 자료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19년 3~4월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와 파업, 휴학 등도 모두 2464건에 이르며, 이 가운데 시위는 1692건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3·1운동은 시위 횟수와 참여 인원, 사망자 등 기본 통계도 신뢰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 교과서도 일제강점기 자료에 따라 시위 횟수를 848회로 기술했다. 하지만 이번 국편 발표에 따르면, 당시 시위는 일제 통계는 물론이고 박은식 선생의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1542건보다도 많았다. 자료를 검토한 정병욱 고려대 교수는 "일제의 3·1운동 관련 통계가 축소 경향이 있어서 역사학계에서는 박은식 선생의 기록을 '최대치'로 자주 인용했다"며 "이번 국편에서 집계한 시위 건수는 그동안 과장됐다는 평가를 받았던 박은식 선생의 수치와 가장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국편은 일본 육군성 자료인 '소요사건관계서류철(騷擾事件關係書類綴)', 조선총독부의 '소요 사건에 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각종 판결문과 재한(在韓) 선교사 자료 등 3·1운동 관련 1차 자료 2만1407건을 검토해서 DB를 구축했다. 또 관련 시위 정보를 지리 정보 시스템(GIS)과 연계, 3·1운동의 전개 양상을 지역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게 했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 220군(郡) 가운데 211군(95.9%)에서 일어났다. 지역별로 평안남도는 3월 1~7일, 함경남북도와 경북·전북은 3월 중순,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등은 3월 말에 시위가 정점에 이르렀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서울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도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 세력의 조직적 운동으로 빠르게 시위가 시작돼 대규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국편 DB 자료를 통해서도 3·1운동의 전국적, 전 민족적, 전 계층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충북 청주와 충남 청양 등 전국 43군에서는 야간에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산상 횃불 시위'가 벌어졌다. 이 교수는 "경찰이나 헌병의 출동이 어렵고 폭력 진압을 피하기 쉽기 때문에 시위 참여자의 피해와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독립과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으로 산 위에서 야간 횃불을 사용한 것"이라며 "산상 횃불 시위는 농민들의 지역 공동체 중심 자발적 시위에서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信者 독립운동 참여 금지한 100년 前 천주교회…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한다"

      입력 2019.02.21 03:01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서 당시 역사적 사실에 공개 사과
    "민족의 고통과 아픔 외면했다"

    김희중 대주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사진〉 대주교는 20일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신자 독립운동 참여 금지' 조치 등에 대해 "잘못"이라며 사과했다. 김 대주교는 이날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100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政敎)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종교계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으나 천주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세례명 토마스) 의사의 마지막 고백성사와 미사 요청을 거부했으며 지시를 어긴 빌렘 신부에겐 2개월간 미사 집전을 금지하기도 했다. 천주교계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1990년대 이후 "일제 치하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1993년 김수환 추기경), "애국충절뿐 아니라 열심한 신앙인으로서도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분"(2009년 정진석 추기경)으로 재평가한 바 있다.

    김희중 대주교는 마지막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 한반도에 참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1/20190221001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