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왕의 나라' 아닌 '신의 나라'를 택한 이란
[이란 혁명]
영국·미국 지원받은 팔레비 왕조, 급격한 서구화 추진해 국민 반발
국외로 추방된 성직자 호메이니, 1979년 이슬람혁명 성공 이끌어
모든 법이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신정국가 세우고 최고지도자 등극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호메이니 묘에 지난 7일 무장 괴한이 침입해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어요. 그 결과 17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부상했는데요. 이후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밝혔어요. 특히 호메이니의 묘소에서 테러가 발생해 이란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어요. 호메이니 묘는 이란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혁명의 성지'이기 때문이죠.
◇팔레비 왕조의 서구화 정책
팔레비 왕조(1925~1979) 시절 이란은 급격한 서구화를 추진했어요. 영국의 지지를 받은 국왕 레자 샤(페르시아어로 왕이란 뜻)는 상비군을 두어 권력을 강화하고, 서구 국가처럼 사법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근대적 교육을 실시했죠. 교육과 사법 분야를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레자 샤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면서 개혁을 멈추지 않았어요. 1941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친서방·반이슬람 색채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그는 보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 등 근대적 개혁을 밀어붙였죠. 얼핏 보면 좋은 개혁 같지만, 팔레비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을 무력화하는 것이었어요. 문맹 퇴치로 국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성직자들이 갖고 있던 영향력이 줄고, 토지 개혁으로 이슬람 공동체 소유 땅을 빼앗아 재정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죠. 또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따지는 이슬람의 권위도 떨어지게 돼요.
- ▲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전 테헤란대학교 여대생들이 캠퍼스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어요(왼쪽 사진). 1979년 혁명으로 이란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神政) 국가가 되면서 이란 여성은 외출할 때 몸과 머리카락을 가려야 해요. 2015년 테헤란의 한 카페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파르스타임스, 블룸버그
사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를 추진한다면서 왕권을 강화해 민주화에 역행했어요. 또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영국 기업에 넘겨준 대가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죠. 1951년 반(反)외세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총리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석유를 국유화해서 외세의 경제 침탈로부터 벗어나려 했어요. 그러나 모사데크는 팔레비와 영국·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아요. 이때부터 미국이 이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고, 미국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감이 커졌어요.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이 거세지면서 중심인물로 떠오른 이가 아야톨라(시아파 고위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였어요. 팔레비 정부는 1964년 11월 새벽 4시에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사원으로 향하는 호메이니를 납치해 공항으로 데려가 국외로 추방시켜버렸죠. 호메이니는 15년간 이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라크와 프랑스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정부 투쟁을 이끌어요.
◇호메이니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호메이니는 국외에서 육성 녹음테이프나 편지를 통해 이란 사람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제시했어요.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학생들은 이에 호응해 반정부 투쟁을 이어갔죠. 1977년 11월 29일 호메이니의 아들이 협심증으로 사망했다고 이란 정부가 발표했어요. 이란 국민은 국왕이 암살한 것이라고 믿었죠. 호메이니 아들에 대한 추도 물결은 반정부 시위에 기름을 부었어요. 이란 국민의 불만은 1978년 1월 폭발하고 말았어요. 이란 북부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반정부 시위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학생 4명이 사망한 거예요. 이에 호메이니는 전국의 이슬람 사원에서 이 학생들의 죽음을 기리는 집회를 40일마다 한 번씩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때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어요.
- ▲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시민들이 ‘샤(왕) 기념탑’ 주변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군중 틈에는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이 들어간 피켓이 여럿 보여요. 혁명이 성공한 후 이 탑은 ‘아자디(자유) 기념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위키피디아
-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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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검정 '차도르'만 보고 가면 이란을 몰라… 우린 미국 너무 좋아해"
입력 2016.11.14 03:00
[경제 제재 풀린 이란을 가다… 서울대 졸업·한국 여성과 결혼한 모셴씨]
"테헤란은 온종일 막혀… 3개 차선에 차량은 네댓 줄
휘발유는 1L당 300원꼴… 원유보다 더 싸게 제공"
"북한과 同級으로 비교 말라, 그쪽은 핵무기를 개발했고
우린 그렇게 한 적 없는데 지금까지 제재를 받아왔다"
9시간 반을 날아 두바이 공항에 도착해 3시간을 기다려 테헤란행(行)으로 갈아탔다.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는 모셴 박티아르(54)씨가 나와 있었다. 미국 배우 브루스 윌리스를 닮은 그는 한국 기자단의 안내자였다. 이번 여행은 이란 정부와 한국언론진흥재단 초청으로 이뤄졌다.
작년 여름 이란은 주요 6개국과의 핵(核) 협상 타결로 경제 제재가 풀렸다. 13년 만이었다. 이란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줄 것이다. 문제는 경제 제재를 받던 이란과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외지인으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데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없습니다. 무역 거래나 사업 투자 어느 것도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지난번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해 대규모 투자 MOU(양해각서)를 맺은 것도 휴지 조각이 되겠지요. 물론 석유는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판매 대금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미국에서 금융 제재를 안 풀어주니까요."
모셴씨를 만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일정에서 정부 측 인사나 언론인, 상공인들을 만났으나 이들과의 짧은 대화는 의례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주일간 함께 지낸 모셴씨와는 깊고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직업은 자동차 부품 수입상이다. 가끔 이번처럼 이란 정부의 한국어 통역 일을 맡고 있다. 그의 성장기에는 팔레비 왕조와 이슬람 혁명(1979년),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이 있었다. 그 시기에 26개월간 군악대에서 근무했다. 그런 그가 10년간(1987~1996년) 서울에서 살았다. 한국과의 인연은 놀랍게도 '통일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됐다.
당시 그의 부친은 작은 가방 공장을 했고, 이란 화폐(리알)의 가치는 한국 돈보다 훨씬 높았다. 통일교 신자로서 서울에 먼저 와 있던 이란 친구의 조언으로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한국영사관에서 학생 비자를 받고 다시 들어와 서울대 어학연수원에 등록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사귄 한국 친구들에게 통일교 실체에 대해 듣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 뒤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서는 언어 문제로 성적이 형편없었습니다. 전공을 바꿔 경영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는 삼성전자에 다니던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1994년 한국에서 큰딸을 낳았다. 생활비는 남대문 시장에서 의류를 구입해 이란 휴양지에서 옷 가게를 연 형(兄)에게 부쳐주는 걸로 마련했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을 건지, 아니면 외국어대의 이란어 강의 제의를 수락할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한국 생활과 사람들은 좋았습니다. 이란으로 돌아온 것은 딸 새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회는 혼혈에 대해 이상하게 쳐다봤습니다. 아내에게 '이런 환경에서 우리 딸을 키울 수 없다'고 설득해 이란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는 혼혈을 오히려 귀하게 보니까요."
인구 1200만명의 수도 테헤란은 열사(熱沙)의 사막과는 다른 곳이었다. 도로 양옆에는 수로(水路)가 있었다. 체류 동안 우박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약간 낮을 뿐 해가 지면 추웠다. 스키장도 있었고, 도시 너머로 해발 4000m가 넘는 설산(雪山)이 솟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예상을 뒤집은 건 오랜 경제 제재로 묶여 있던 테헤란의 차량 행렬이었다. 한 가구당 한 대꼴(총 1700만대)로 차를 갖고 있었다. 푸조의 조립 공장으로 출발한 '호드로'라는 이란 자동차 메이커는 지금은 완성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에 그렇게 많은 푸조차가 돌아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공장을 돌리기 위해 차만 찍어냈지, 도로망과 주차 시설, 대중교통 등 정부가 해야 할 인프라 투자에는 손을 놓고 있었다. 대신 휘발유는 1L당 300원, 경유는 100원꼴로 원유(原油)보다 더 싸게 제공하면서 교통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시내 도로는 하루 종일 막혔다. 3차선 도로에서 차량 행렬은 네댓 줄이 되기 일쑤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 방문 뒤 떠나는 날에, 이란 측에서는 '신호등을 붙잡아도 차량을 통제할 수가 없으니 박물관 관람 뒤 곧바로 공항으로 가라'고 외교적 결례(?)를 무릅썼다.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하고, 교차로에선 차머리를 먼저 들이댔다. 우리 같으면 난리가 나도 몇 번 날 수 있겠다 싶지만, 워낙 익숙해서인지 클랙슨도 별로 들리지 않았다. 10년 전쯤 북한 개성에 갔을 때 관공서 앞에 전시품처럼 주차된 구형 벤츠만 봤을 뿐 거리에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풍경에 비하면 테헤란 시내는 오랜 경제 제재와는 무관해 보였다. 모셴씨의 말이다.
"경제 제재를 받아도 이란은 농산물 등에서 자급자족이 됩니다. 7개 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고, 두바이항(港)까지는 통통배로도 갈 수 있어요. 밀수(密輸)를 통해 생필품들이 충분히 제공돼 왔습니다. 물론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이란 수출품의 80%를 차지하는 석유 금수(禁輸) 조치로 경제를 부흥할 자금이 부족했지요."
이란의 석유 매장량은 세계 4위이고, 천연가스는 세계 1위다. 철광석과 우라늄도 풍부하다. 영토는 한반도 8배다. '중동의 맹주(盟主)'라는 사우디아라비아가 3000만명(외국인 포함)인 데 비해, 이란은 8000만명이다. 인접 국가들의 배후 시장까지 감안하면 시장 규모가 엄청난 셈이다. 과거에는 유럽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서 교역의 '실크로드'에 있었다.
이란의 경제 제재가 풀렸다는 톱뉴스와 현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 '쇼핑센터' 간판이 걸린 건물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 조악한 중국산으로 채워진 잡화점 수준이었다. 맥도널드나 KFC 가게, 미국계 체인 호텔도 없다. 영어 표기가 전혀 없어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내가 만난 이란 정부 측 인사마다 "우리는 핵 협상에서 제시된 약속을 다 이행했다. 왜 금융을 풀어주지 않느냐"라고 억울해했다. 무엇보다 이란이 북한과 동급(同級)으로 비교되는 것 자체에 질색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핵무기는 코란 정신에 위배된다'는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의 어록을 강조했다. 실제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최근 사찰에서 '핵무기 개발 흔적이 없다'는 최종 결론이 났다.
이란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제재도 억울한데, 여전히 묶여 있는 금융 제재에 울분을 터뜨릴 만하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매주 반복적으로 "미국은 믿을 수 없다"고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지하철역 구내에는 'Down with USA(미국을 타도하라)!' 같은 포스터가 전시돼 있었다. 모셴씨의 설명이다.
"사실 이란 국민은 미국을 너무 좋아합니다. 협상이 타결됐을 때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더 큰 겁니다. 다른 국가들과 관계 가 개선됐고 외국 기업들도 들어오고 있지만 실제 삶에는 별로 개선이 없으니까요."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핵 문제만이 아닌 이슬람 혁명 당시 '444일간의 미 대사관 점령' 악몽, 헤즈볼라·무자헤딘 등 무장 과격 단체의 배후,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견제, 신정(神政) 체제와 인권에 대한 우려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핵 협상은 타결됐지만, 이란과의 달러화 거래를 막은 미국 내 '이란제재법'이 아직 살아 있다. 이 때문에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는 이란 은행들에 대한 신용등급 부여를 꺼리고 있다. 이란 은행들이 무역 보증이나 결제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경제 제재 동안 이란의 가장 큰 '우방'은 중국이었다. 정부 측 인사들을 만나 보면, 국제 제재 속에도 자신들과 계속 거래해온 중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이 이란과의 협상에 공들였다는 분석이 있다. 보잉사가 이란항공과 비행기 판매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이 '금융 해제'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으로 시계(視界)가 불투명해진 게 사실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이란의 팔레비 왕조 시절에는 친미(親美) 정권이었다. 이란은 '아랍'과 분리된 서방 사회였다(실제 이란인은 아리안족이고 아랍인은 셈족임). 당시 선글라스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대생 사진은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란은 유일하게 종교가 정부 위에 있는 '신정(神政) 체제'다. 국민 선거에 의해 행정 수반(대통령)과 의회를 선출하지만,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를 대표로 하는 '성직자회의'에서 이 후보자들의 적격 여부를 검증한다. 대법관의 인선도 하메네이에 의해 결정된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면서 젊은 층에서는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종교적 냉담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슬람 혁명으로 버스·지하철, 공항 검색대, 관공서 구내식당 등에는 남녀 칸이 구분돼 있다. 새벽에 호텔 뒤편 공원에 나가 보니 남녀가 따로 모여 집단 체조를 했다. 공직자들은 여성과 악수도 하지 않는다. 축구에 열광하는 이 나라에서 여성의 축구장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체제는 사람의 욕망(欲望)을 잠복시킬 뿐이다. 청춘들이 모이는 데이트 장소나 테헤란 대학에서는 서로 끌어안거나. 여자 친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기도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코 성형이 유행하고 있다. 음주는 공식적으로 '범죄'에 해당하지만, 전화 한 통화로 집까지 밀주가 배달되기도 한다.
"검은색 차도르 공식 복장만 보고 가면 이란을 다 본 게 아닙니다. 집안 파티에서는 몹시 화려해집니다. 이란이 가부장적인 나라로 비치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한국이 훨씬 더합니다. 부(副)대통령을 비롯해 여성 정치인이 많고, 집안 발언권도 아내 가 셉니다. 여기서는 부계(父系)나 시가(媤家)는 힘을 못 씁니다. 여성 중심으로 장모와 외삼촌, 이모가 영향을 끼칩니다."
이란의 구전(口傳) 서사시 '쿠시나메'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로 가서 공주와 결혼해 다시 돌아오는 스토리다. 실제 신라시대 석상에는 서역의 얼굴상(像)이 있다. 피가 통하지 않는가.
[新중동천일야화] 美의 40년 '反이란 노선'을 낳은 결정적 사건
입력 2018.12.17 03:11 꼭 1년 전 '미국이 항상 이스라엘을 편드는 이유'라는 글을 이 지면에 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선언한 즈음이었다. 반면 미국이 늘 의심하고 압박하는 나라가 있다. 이란이다. 미국의 중동 외교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친(親)이스라엘, 반(反)이란'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전쟁에서 맞서 싸운 적 없는데도 1979년 '호메이니 혁명' 후 斷交
444일간 美 대사관 인질 억류가 원인… 해묵은 원한 씻어내야 平和도 가능
올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하며 제재를 복원했다. 나름대로 합의를 지켜온 이란은 분노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나서서 미국의 합의 준수를 설득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미국의 반이란 감정은 트럼프 정부만의 얘기가 아니다. 오바마 정부 시절 미·이란 핵 합의 타결 직후 실시한 갤럽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국민의 57%는 협상에 반대했다. 당시 이란 호감도는 이전 27년간 평균(11%)보다 약간 높은 14%였으나 이는 합의 타결 직후 컨벤션 효과에 가까웠다. 미국인 열에 아홉은 이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명쾌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미국과 이란 양국은 최근까지 전쟁에서 맞싸운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란과는 40년 가까이 아예 단교(斷交) 상태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전까지 미국에 이란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팔레비 왕정 퇴진 후 반미 정권이 들어섰으나 미국인을 겨냥한 구체적 살상 행위는 딱히 없었다. 1983년 레바논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 및 해병대 기지 폭탄 테러를 일으킨 헤즈볼라의 배후로 이란이 의심받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88년 호르무즈해협 상공에서 미군이 이란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 격추해 290명의 승객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인 9·11은 사우디 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알 카에다의 소행이었다. 사건 직후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위로를 표했고, 테헤란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미국 희생자들을 추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나선 미군에게 이란은 자국 영공 통과까지 허용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 전쟁을 선언하면서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의외였다. 이란이 반미 독재국가여도 적어도 알 카에다와는 적대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국제무대에서 이란의 행태는 여전히 음험하다. 신정주의 독재 체제는 억압적이고 인권문제도 자주 불거진다. 핵개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고, 재래식 군비 확충과 함께 헤즈볼라 지원 등 역내 안정을 해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국 사우디아라비아의 독재 체제도 만만치 않게 억압적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는 대략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유독 이란을 싫어하는 다른 명분과 이유가 있을 법하다. 혁명 당시 과격파들이 미국 대사관을 습격, 인질 52명을 444일 동안 억류했던 사건으로부터 뿌리 깊은 반감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대사관은 미국 영토다. 인질들은 미국 국민이었다. 영토와 국민이 폭도들에게 유린당한 기억은 오래 남았다. 미군 특수부대의 비밀 구출 작전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비극도 덧대어졌다. 전쟁 피해만큼이나 아픈 기억을 40년 가까이 갈무리해 온 셈이다. 켜켜이 쌓인 미국의 이란 불신과 적대감을 이해할 만하다. 이란 입장에서도 1953년 미국과 영국이 총리 모사데그를 비밀 쿠데타로 실각시킨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다. 이란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쿠데타만 아니었다면 중동 최초로 이란이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도 있었다는 회한을 토로하곤 한다.
어쩌면 국익을 둘러싼 면밀한 전략적 평가나 치열한 게임의 셈법만큼이나 역사의 기억들도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변수인지 모른다. '기억의 정치학'은 말한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 때론 해원(解寃)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6/20181216017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