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에는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어떤 상징성이 있어요. 나의 기호라든가 나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 책이라는 실물입니다. 특히 2010년을 전후한 시기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종이책이 종말을 맞을 것이란 예측이 주류였지요. 그러나 ‘구텐베르크(인류가 만든 최고 발명품인 금속활자) 안녕’이라는 예측은 틀렸습니다. 전자책은 도서의 여러 포맷 중 하나라는게 통계로 나타납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미디어사회학부 존 톰슨 교수는 최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사)출판유통진흥원(이사장 김종수) 주최 세미나에서 이같이 말했다. 톰슨 교수는 2시간여 진행된 기조강연을 통해 전 세계 도서 시장을 이끌고 있는 영·미권의 최근 출판 경향을 전했다. 그는 디지털 혁명이 지난 20여년간 지식 산업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향후 출판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 갖가지 통계를 토대로 분석해냈다.
톰슨 교수는 “가장 오래된 미디어산업 업종 중 하나인 도서출판이 과연 디지털 혁명과 만났을 때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는 모든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면서 전자출판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이어 “(디지털이란)새로운 기술이 막 도약하기 시작하면 그 당시엔 매출이 급성장하다가 매출이 정체되고 점차 줄어들었다”고 풀이했다. 말그대로 전자책은 기술 도약이 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S커브’의 유형을 보였다는 것.
그는 “종이책이 2000년대 초 음반 산업처럼 디지털 혁명으로 전자책에 밀려 몰락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으나, 이는 기우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전문가들은 공항에서 출장 중인 비즈니스맨이 경영 경제도서를 더 많이 볼 테니, 그 카테고리에서 디지털로 전환이 많을 것으로 예측했으나 틀렸다”면서 “주로 여성 독자층이 로맨스 픽션을 보는 카테고리에 디지털화가 많이 일어났다. 인문사회 서적의 전자책 이동은 크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2015년을 정점으로 여성 독자층이 많은 로맨스 픽션 분야 전자책도 하향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톰슨 교수는 또 미래 트렌드와 관련, ”앞으로 스스로 책을 내는 자기출판 시장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면서, “2016년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른 책 25%가 자가출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내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자가출판을 했는데, 이제는 처음부터 자기가 원해서 자가출판을 선택하는 구도로 갈 것”이라면서 특히 오디오북의 성장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귀로 듣는 새로운 ‘구전 문화’가 떠오르고 있다”면서 “디지털혁명을 통해 출판사가 독자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 이 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흐름”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500년 동안의 출판산업은 b2b사업, 즉 출판사가 책을 만들면 유통업체가 팔았던 것인데, 이젠 독자들과의 직접적인 관계 맺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출판사가 고객을 상대하는 자체가 가장 많이 바뀔 것이다. 그래서 제품을 뿌려서 패키징하고 판매하는 방식 자체가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아마존의 독식 구조에 대해, “미국 도서 매출에서 인터넷 아마존의 비중이 40%를 넘어섰다. 500여년의 출판유통 역사를 통틀어 단일 업체가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톰슨 교수는 영국 미디어 출판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