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지식-행동 합일’ 정신…‘열린 사회’ 핵심 가치”
한겨레신문
등록 :2019-07-17 08:06수정 :2019-07-17 10:48
‘채인후의 중국철학사’ 네권 번역
“저자 별세하기 전에 끝내 다행”
한길 걷다 보니 주요 맥락들 보여
30회 강의하며 정리해보고 싶어
주자학은 다른 생각들 용납 안해
타율·수직적 사고 방식이 지배
서양문물 수용 근대화 기회 놓쳐
이기주의 성행도 ‘닫힌 문화’ 때문
지위 고하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옳고 그름 판단할 ‘양지’ 있어
이것이 자율·수평적 사회 토대
인터뷰| 중국철학자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
조변석개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지만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하나로 모두를 꿰뚫는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경지를 넘볼 수는 없다. ‘중국철학’ 한길을 걸어온 노학자 정인재(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양명학자 채인후의 중국철학사> 상·하권(동방의빛 펴냄)을 번역해 내놓았다. 무려 1400쪽에 이르는 분량이다. 그는 이미 풍우란(펑유란)의 <중국철학사>와 노사광(라오쓰광)의 <중국철학사> 네권을 번역한 바 있다. 호적(후스)의 철학사와 함께 현대 중국의 대표적 철학서로 꼽히는 풍우란, 노사광의 철학서에 이어 채인후(차이런허우)의 철학사까지 번역해 마침으로써 대미를 장식한 그를 서울 목동의 개인공부방 ‘학이사제’로 찾았다.
그는 먼저 “채 선생이 떠나기 전 번역을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채인후의 제자들이 지난 4월 대만에서 연 ‘채인후 90세 기념학술대회’에 강연자로 초청을 받았을 때 막 인쇄를 끝낸 이 책을 들고 가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채인후는 지난달 세상을 떴다. 채인후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20세기 이래 만족할 만한 <중국철학사>를 시종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발분의 저작을 썼다”며 “오랜 친구가 나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니 즐거운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정 교수는 40여년 전 대만 유학 시절부터 채인후와 알고 지냈다. 그의 딸 정소이(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도 채인후의 문하에서 학위를 했다. 정 교수는 당시 딸에게 “선생의 학문과 함께 인품을 배우라”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근대 서양의 총칼에 중국이 유린당한 반성에서 공자 타도를 주창한 호적과 그 뒤의 철학서들은 서양 철학의 틀로 중국 철학을 정리했다. 채인후는 이를 비판하며 중국 유학, 특히 생명 중심의 양명학 관점에서 중국 철학의 본의를 드러냈다”고 평했다. 현대양명학의 태두인 웅십력(슝스리)을 잇는 신유학자 모종삼(머우쭝싼)의 수제자인 채인후는 이 책에서 대가답게 중국 철학과 세계 철학의 요체를 단 몇줄로 정리했다.
“서양 철학은 지식을 중심으로 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천명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을 얻음)은 종교에 맡겨버린다. 중국 철학은 ‘생명’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심성의 학문과 덕을 완성하는 두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중국에서 학문과 가르침은 합일된 것이다.”
노사광은 중국 철학을 ‘심성론 중심’과 ‘우주론 중심’으로 나눴다. 채인후는 풍우란의 저서엔 심성론적인 주체성이 빠져 있고, 노사광의 저서엔 형이상의 천도론이 생략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양자를 아울러 천도론과 심성론이 하나의 생명으로 관통된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 책 후기에서 “과거 불교를 흡수 소화하여 신유학을 만들어냈듯이 서양 철학과 종교를 소화하여 새로운 중국 철학을 창조해내야 한다”고 썼다. 지금까지 주로 번역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겸허하기 그지없던 그는 번역한 책들도 짚지 못한 주요 흐름과 맥락들이 보인다고 했다. 그가 “대학이든 도서관이든 자리가 마련되면 중국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강의를 30회 정도로 정리해서 해보고 싶다”고 노익장을 내보인 것은 그런 자신감의 발로다. 중국 철학을 종횡무진으로 누벼온 그가 최후의 정착지로 삼은 곳은 채인후와 같은 양명학이다.
한국양명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양명학의 정신>을 저술한 바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노장은 물론 양명학까지 이단으로 배척했다. 양명학의 심학이 불교의 심학과 같다고 본 까닭이다. 그런데 정통 한학자가 왜 굳이 아웃사이더를 택했을까.
“서양 문화가 들어올 때도 주자학의 전통만 지키고 사특한 서양 문물을 배척한다는 위정척사를 외친 건 ‘다른 생각’(이단)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닫힌 의식’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선 ‘(어디) 가시려면 여기서 내리세요’라고 하는데 주자학의 전통이 강한 대구 지하철 방송은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한다. 개개인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의 반영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분간하지 못한 것도 그런 닫힌 문화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는 “개인주의는 나뿐 아니라 타인의 다름도 존중하는 것이지만 이기주의는 오직 내 이익만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구분했다.
정 교수는 “주자학에는 ‘판단의 기준’은 있어도 마음 자체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며 “또한 사농공상을 상하주종적 위계질서로 수직적 사회를 만들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타율적 사고방식이 성행케 해 질문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지식인들이 학문으로 알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니 ‘참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창하고 나온 것이 양명학”이라고 했다.
양명학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야마구치현에서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 정한론자 요시다 쇼인의 학문이라 하여 더 관심을 사고 있다. 정 교수는 “아직 일본의 양명학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답이 담겨 있었다. 그는 “조선이 500년간 주자학 이외 일체의 사상을 배제한 왕과 주자학자들에 의해 소현 세자가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청나라로부터 도륙과 치욕을 겪지도 않고, 일본보다 더 빨리 근대화를 이뤘을 수도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청나라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배우고 귀국한 소현 세자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른 개방으로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열린 학문인 양명학을 위해 그는 준비된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는 일제 강점기 경북 군위에서 흑룡강(헤이룽장)성으로 이주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해방 뒤 귀국했다. 유아세례자인 그는 고교 때는 교사의 영향으로 니체에 심취하기도 하고, 인천 신신예식장에서 불교학의 대가인 이종익 박사의 유식학 강의를 듣고 큰 감화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어느 사상, 종교도 배척하기보다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양분화하는 그는 이 시대 양명학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명학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지(良知)를 천리라고 본다. 따라서 왕이나 윗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양지가 있다고 여긴다. 직업과 지위가 달라도 성인이 되는 길은 같다고 보니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열린 시민사회를 만드는 학문이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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