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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

이강기 2019. 9. 2. 08:25

①일제하 강제동원 "1944년 이전 渡日은 자발적 선택" "현해탄 건너기 전 40% 탈출"


입력 2019.09.02 03:00

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


②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軍·警이 납치했다는 주장은 거짓… 수입 괜찮고 선택의 자유있었다"
"고노 담화도 '강제 동원' 인정… 인플레 고려하면 형편없는 수입"


③독도 영유권
"조선 지도, 우산도 위치 제각각… 1905년 日 편입 때 항의도 안 해"
"메이지정부 '독도는 조선땅' 확인… 외교권 박탈당해 항의 못했다"

7월 초 출간된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동원은 '허구'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로 시달린 게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도발적 주장을 편다. 최근 '반일(反日)'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 책은 오히려 더 주목받고 있다. 8월 중순부터 연속 3주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을 정도다. '반일종족주의'가 제기한 일제하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독도 영유권 등 3대 쟁점에 대해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시환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최운도 독도연구소장 등 전문 연구자들이 지상(紙上) 논쟁을 펼친다.

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는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다'며 독도 영유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 /해군

일제하 징용 등 강제동원

―'반일종족주의'(이하 반일): 일제시대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가 임금도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는 '강제동원'은 허구다. 강제적 성격의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8개월간 실시했을 뿐이고, 인원도 10만명 이하였다. 1939년 9월부터 '모집', 1942년 2월부터 시행한 '관(官) 알선'은 지원자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민족 차별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임금을 낮게 주고, 더 위험한 작업을 시켰다는 건 역사 왜곡이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절, 일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피해자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간 것처럼 표현한 건 잘못이다. 하지만 헌병·순사가 붙잡아가는 것만 강제동원이 아니다. 일본은 1938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했다. 법에 따라 이뤄졌지만 일본도 가입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한 강제노동이었다. 일본 정부도 2015년 7월 군함도 등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인정했다.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 일본 외무상이 강제성을 부정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임금이 높고 근로 조건이 좋았으면 왜 동원된 조선인들이 현해탄을 건너기 전 40%나 탈출했겠는가. 극히 일부 자료만 가지고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반일: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신매매나 취업 사기는 있었지만,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 연행은 없었다. 위안부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임금도 못 받고 성노예로 일한 게 아니라, 상당한 선택의 자유가 있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발표한 고노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했다. 20개월에 걸친 정부 조사로 나온 결과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했다. 위안부 모집은 군(軍)의 요청을 받은 민간 업자가 주도했는데, 감언, 강압 등 피해자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고,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다고 밝혔다. 위안소 생활도 '강제적 상황하에서의 사역 등 참혹했다'고 인정했다. 버마(현 미얀마)에서 일한 위안부 피해자(문옥주)의 저금 기록(2만6551엔)을 근거로 수입이 높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버마의 전시 물가 인플레(1800배) 때문에 실제론 20엔 정도의 가치에 불과하고 송금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나마 종전으로 휴지 조각이 됐다.

독도 영유권

―반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조선시대 지도엔 우산도 위치가 제각각으로 그려질 만큼 독도에 대한 영토 인식이 없었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했을 때도 대한제국은 이렇다 할 항의도 하지 않았다.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 16세기 지도를 현대 지도와 같은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우산도는 17세기 말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동국문헌비고'(1770년) 등에는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독도)"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자 이 사실을 파악한 울릉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2/20190902000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