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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기 맞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 21살 때 무일푼으로 프랑스 유학 떠난 이유

이강기 2019. 9. 7. 11:51


50주기 맞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 21살 때 무일푼으로 프랑스 유학 떠난 이유

 9월 2일은 현대 베트남을 세운 호찌민(胡志明·1890년 5월 19일~1969년 9월 2일)의 50주기다. 호찌민을 거론하지 않고 현대 베트남을 말할 수 없다. 그는 1945년 9월 2일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 북부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세우고 초대 주석을 맡아 종신 재직했다.  

과거 급제한 아버지 아들 이름으로 ‘성공’ 붙여
프랑스 식민지 되자 유교 대신 프랑스어에 무게
여객선에서 배삯 대신 주방보조 일하며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 이어 공산주의자로 활동
런던 호텔에서 일하다 세계적 요리사 제자 될 뻔
파리강화회담장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
모스크바서 공산혁명가 교육 받고 중국으로 파견
북베트남 세우고 종신 주석 재직하며 전쟁 지휘



          

북베트남 세우고 프랑스·미국에 맞서 전쟁  

호 주석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1954년 8월 1일)을 치르고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을 몰아냈다. 베트남은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상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호 주석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에 맞서 베트남 전쟁(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40일)을 벌였다. 한국도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64년 9월 11일~1973년 3월 23일에 걸쳐 연인원 32만5517명이 파병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보리센코 공원 공장에 지난 7월 5일 설치된 베트남 초대 주석 호찌민의 동상. 올해 9월 2일로 호 주석의 50주기를 맞았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보리센코 공원 공장에 지난 7월 5일 설치된 베트남 초대 주석 호찌민의 동상. 올해 9월 2일로 호 주석의 50주기를 맞았다. 타스=연합뉴스]

돼 5099명이 목숨을 잃고 1만1232명이 부상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초대주석의 영묘.. 5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달 31일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초대주석의 영묘.. 5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달 31일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한국 지렛대로 경제개발 나선 베트남

북베트남은 호 주석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했다. 남북 베트남은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이뤘다. 과거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부(國父) 호찌민을 기리기 위해서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개혁개방정책)’를 시작하며 나라의 문을 열어젖힌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하며 경제개발의 시동을 걸었다. 김영삼 대통령 이래 모든 한국의 대통령이 반드시 찾는 주요 국가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베트남에 4대 교역 국가이며, 베트남에 한국은 3대 교역 국가이자 제1의 투자국가다. 베트남은 한국을 지렛대로 경제개발에 나선 셈이다. 
  
베트남은 오랜 전쟁 탓에 전 세계에 정글·베트콩·게릴라전의 이미지로 남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선 결혼·취업 등으로 이주 베트남인이 늘면서 성실하고 생활력과 가족애가 강한 국민이라는 인상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었다가 공산화 이후 이름을 호찌민으로 바꾼 호찌민시의 스카이라인. 남북 통합 뒤 경제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Vinhomes Central Park and Landmark 81, Vietnam's tallest building are seen from the Saigon river in Ho Chi Minh city, Vietnam June 6, 2019. REUTERS/Yen Duong/2019-06-07 01:30:15/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었다가 공산화 이후 이름을 호찌민으로 바꾼 호찌민시의 스카이라인. 남북 통합 뒤 경제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Vinhomes Central Park and Landmark 81, Vietnam's tallest building are seen from the Saigon river in Ho Chi Minh city, Vietnam June 6, 2019. REUTERS/Yen Duong/2019-06-07 01:30:15/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유교 문화 뿌리 깊은 베트남

사실 베트남은 인도와 중국 문명이 서로 만나는 동남아시아에서 유교 문화가 더욱 강했던 드문 나라다. 유교 문화는 청년 호 주석의 삶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베트남은 당시의 조선처럼 유교 세상이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로 후에를 수도로 삼았던 응우옌 왕조(阮朝·1802~1945년)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청년들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공자와 맹자를 논하며 유학을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해야 관리로 출세할 수 있었다.  
1921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한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1921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린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한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아들 이름을 ‘공손’ ‘성공’으로 붙인 아버지

호 주석의 아버지 응우옌신삭(阮生色·1862~1929년)도 과거에 급제해 진사에 해당하는 포방(副榜)이 됐다. 그는 지방관리가 됐으나 세금을 거두려고 곤장을 치던 지역 유지가 비명횡사하면서 책임을 지고 면직돼 시골 훈장으로 살았다.   
 
그는 1890년에 태어난 아들에게 응우옌신쿵(玩生恭)이란 아명을 붙였다. 공손한 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10살이 되자 성공이 예정된 인물이라는 뜻의 응우옌땃따잉(玩必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의 기대가 엿보인다. 이 아들이 바로 미래의 호찌민이다.   
 
그 뒤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보낸 프랑스는 1883년 후에 조약을 통해 베트남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세력 아래에선 더는 과거처럼 유학으로 출세하기가 힘들게 됐다. 프랑스 보호령에서 출세하려면 프랑스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서당에 다니던 아들을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나중에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을 지낸 고딘디엠의 아버지가 세운 학교였다. 하지만 아들은 프랑스 선생님에게 대들다 퇴학당했다.  
1946년 무렵의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1946년 무렵의 호찌민.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어 잘해야 출세” 증기선 태워 보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아예 프랑스에 보내 공부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들이 프랑스 증기선에 승선해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무일푼이어도 비싼 뱃삯을 부담하지 않고 배에서 일하며 프랑스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호 주석은 프랑스인 선장에게 면접을 본 뒤 주방 보조로 승선할 수 있었다. 덩치가 작아 고된 잡역을 하는 대신 주방으로 가게 됐다. 1911년 21살의 아들은 응우옌바라는 가명으로 국제여객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조리사가 되어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프랑스어 남성 존칭인 ‘므슈’로 불렸다. 이를 통해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본토에서 베트남에서보다 훨씬 공손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차별과 식민지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호찌민의 삶은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호찌민이 세계적인 요리사 에스코피에로부터 제자되기를 제안 받았던 런던 칼튼 호텔 자리에 붙은 블루플라크.[사진 오픈 블루플라크]

호찌민이 세계적인 요리사 에스코피에로부터 제자되기를 제안 받았던 런던 칼튼 호텔 자리에 붙은 블루플라크.[사진 오픈 블루플라크]

 

미국 GM 공장과 런던 호텔에서 일했던 호찌민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호찌민은 다시 배에 승선해 프랑스는 물론 알제리·콩고 여러 곳을 다녔다. 미국에도 가서 뉴욕과 보스턴 등에서 살았으며 GM 공장 등에서 일했다. 1913년 영국에 건너가 런던 칼튼 호텔에서 주방 보조로 일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에드윈 키스터 주니어는 자신의 저서인 『그들이 세상을 바꾸기 전(황소자리)』에서 이 호텔과 호 주석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한다. 미식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 셰프인 오거스트 에스코피에가 부지런히 일하는 이 베트남 청년이 마음에 들어 이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남은 음식을 걸인에게 나눠주는 ‘자선 습관’만 버리면 요리를 가르쳐주겠다고 말이다. 제자로 삼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호찌민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 근처에 있던 칸튼 호텔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폭격으로 무너져 전후 새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현장을 찾았더니 그가 이곳에서 일했다는 내용의 블루플라크(역사적인 유적이나 유명인이 살거나 일했던 곳에 이를 알리려고 붙이는 공식 안내판)가 남아있었다.  
 
호찌민은 1919년 파리에 가서 사회당원을 거쳐 공산당원이 됐으며 1921년 마르세유에서 열린 프랑스 공산당 전당대회에 인도차이나 대표로 참석해 연설했다. 1923년에는 소련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공산혁명에 뛰어들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파리강화회담장으로

1919년 호찌민이 파리로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18일부터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회담이 그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인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당시 서명에 쓴 이름이 응우옌아이꾸옥(玩愛國)이다. 한자 그대로 애국이라는 뜻이다. 이 청원 편지는 비서에게 전달됐지만, 윌슨 대통령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공산주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이 소련 모스크바에서 해외 혁명가 양성을 위해 운영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의 모습.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베트남을 세운 호찌민(뒷줄 맨왼쪽)이 보인다.[중앙포토]

공산주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이 소련 모스크바에서 해외 혁명가 양성을 위해 운영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의 모습.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베트남을 세운 호찌민(뒷줄 맨왼쪽)이 보인다.[중앙포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선 한인과 접촉도  

그 뒤 공산당원이 된 호찌민은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이 식민지 혁명가를 양성하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시 그곳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와도 만난 사진이 남아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유명 변호사 허헌(나중에 북한의 초대 총리)의 딸 허정숙(나중에 북한 최고재판소장)도 호찌민과 같은 해 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 뒤 호찌민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리떠이(李瑞)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호찌민(胡志明)은 1945년 이후 건국 작업을 지휘할 때 처음 사용했다. ‘남을 깨우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친근하고 소박하며 유연한 이미지 덕분에 ‘호 아저씨’라는 뜻의 박호(伯胡)로도 불렸다. 호 주석은 생전에 160개 이상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굴곡진 베트남 현대사와 궤적을 나란히 한 호 주석의 삶은 그가 사용했던 수많은 이름과 별명 속에 녹아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50주기 맞은 베트남 국부 호찌민, 21살 때 무일푼으로 프랑스 유학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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