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이어령(李御寧·87) 선생은 빈자의 제단을 밝히는 작은 촛불 앞에 기도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신과 영혼, 죽음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월간조선》과 두 번째 촛불을 밝혔다. 순례자의 맨발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李秉喆·1909~1987) 회장이 던진 24개의 질문에 하나씩 다가섰다.
제단 앞에 선 이어령 선생의 머리칼은 비록 두건을 쓰고 허리띠를 질끈 맨 순례자는 아니었으나 머리 위에 재를 뿌린 듯 백발이었다. 백발의 노(老)선생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투병 중인 환자의 음성이 아니었다. 여전히 짱짱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긴 소매 속에 설교 원고를 집어넣고 말하는 자신만만한 말투가 아니었다. 쉽게 예로 들며 때로 진지하게, 때로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평생 맞춰온 거대한 해도(海圖) 조각들을 기자에게 얼핏 설핏 보여주었다.
선생은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 자신이 그린 해도가 외롭고 황량한 사막일 수도, 늑대와 승냥이가 아우성치는 정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벌겋게 달군 쇠붙이처럼 치열한 사색의 길을 걸어 결국 유신론자가 되었다. 조물주의 현현(顯現)하심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진 길이었다”고 선생은 고백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지난 9월 5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였다. 그가 밝힌 제단 위 두 번째 촛불이, 시들지 않은 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병철 회장 하면 ‘재벌’, 이어령 선생 하면 ‘지성’이라는 말이 떠오르기에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부자가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화두부터 꺼내 보았다.
― 성경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이 있어요. 가진 것이 많은 부자가 모든 것을 비우고 진리를 향해 달려가기가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 같은데요.
“아!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 말인가요. 솔직히 말해 처음 성구(聖句)를 접하고 나는 부자가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고 한 그 비유에 더 관심이 쏠렸죠. 글을 쓰는 사람이라 당연히 재미있고 신기하게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그게 오역이라는 거야.
원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람 말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밧줄(gamta)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였는데 그리스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그 말과 아주 비슷한 낙타(gamla)로 둔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조금 다른 설로는 그리스 말로 밧줄을 뜻하는 kamilos를 낙타의 kamelos와 혼동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고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낙타냐, 밧줄이냐 하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된 적이 있었던 거죠.”
‘낙타냐, 밧줄이냐’ 혼동? 오역?
“그런데 뜻밖에 예수님 말씀을 모독했다고 항의와 반론이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지. 마태(마태오), 마가(마르코), 누가(루카)의 세 복음서에 나오는 성구란 그리 흔한 게 아니죠. 30~40년 전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 없고 정보 접근도 어려워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요즘 말로 ‘멘붕’이 일어난 겁니다.”
― 그래 그 뒤에 어떻게 되었나요.
무신론자로서 한창 지성의 전도사 역할을 하던 그때의 이 선생 모습이 궁금해 말을 재촉했다.
“뭐, 지적 호기심에 불이 붙게 된 거지.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계속 낙타 비유와 씨름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고는 지적 호기심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향해가는 역정이 펼쳐진다.
“원래 낙타를 뜻하는 아람 말 ‘감라’에는 네 가지 다른 뜻이 있다고 해요. ‘낙타’ ‘배의 밧줄’ ‘큰 개미’ 그리고 ‘서까래’까지….”
― 그렇다면 예수님은 낙타와 밧줄이 동시에 내포된 다의적인 수사법을 쓴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거죠.
“자료를 찾다 보면 히브리어, 헬라어(고대 그리스어)까지 등장하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된 성서에는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밧줄이 바늘귀(구멍)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저를 헷갈리게 한 것은 낙타와 바늘구멍의 관계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거였어요. 예루살렘에는 밤이 되면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을 닫고 좁은 쪽문으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좁은 문을 ‘바늘구멍’(The Eye of the Needle Gate)이라고 불렀어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낙타의 안장과 짐을 다 내려놓아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해요. 부자가 모든 재산을 내려놓고 낙타처럼 두 발을 꿇지 않고서는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따지고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역사책이나 고문헌에서도 ‘바늘구멍’이라는 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겁니다.”
걱정이 들었다. 이 서두만으로 몇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자 스스로 결론을 냈다.
―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결국 도달한 것이 믿음의 영성에서 해답을 찾으셨다는….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지성은 낙타냐 밧줄이냐’를 따지다가 막상 본질은 놓쳐요. 중요한 것은 과연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데…,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이 도달한 결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낙타는 동물원으로 가면 된다’이지요. 낙타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사풍과 갈증과 작렬하는 태양 아래 허덕이지 않아도 되니까. 이게 바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천당이라는 것이지요.”
선생은 웃으며 농담을 했지만 그 안에 진실의 뼈가 숨겨져 있었다.
이어 선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늘귀의 좁은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주저하고 있던 낙타는 동물원이 아니라 전설의 몽골 초원으로 간다.
“낙타에 관한 몽골의 전설이 있지요. 원래 낙타에게는 뿔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슴이 와서 빌려달라기에 인심 좋게 자기 뿔을 빌려줬다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뿔을 돌려주지 않는 거예요. 낙타는 이제나 그제나 사슴이 오나 하고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금도 사막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낙타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등에 잔뜩 짊어진 채 삶이라는 황량한 사막에서 무언가를 기다리지요. 우리가 상실한 뿔 같은 것…. 그 옛날 에덴동산의 추억일 수도, 영원한 삶을 사는 천국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현세의 것들을 찾아 등짐을 지기 바빠서 하나님이나 진리를 보지 못해요. 우리는 슬픈 눈으로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낙타와 같습니다. 그게 종교를 향한 마음, 영성을 향한 마음이겠죠.”
그러고는 뜸을 들이던 결론을 냈다.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부자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왕이든 걸인이든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낙타와 바늘귀 대목만 읽고 바로 다음 구절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마치 부자의 경우만 꼭 집어 이야기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심지어 교회의 교직자까지 말이다. 그리고 선생은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26절까지 직접 읽어준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낙타 비유가 끝나자 제자들이 놀라 ‘그렇다면 누가 천당에 들어갈 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요. 여기에서 하늘나라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데 가난한 자도 부자도 걸인도 왕도 말이죠.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낙타와 바늘귀 비유는 꼭 부자만을 꼭 집어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든 인간의 힘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다만 지상의 가치를 버려야 하는데 부자는 가진 것이 많아 버리기가 남보다 힘들다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까지 포함해서 ‘부’ 자체를 비난한 대목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사로 나타나 있지요. 하지만 그 부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선생은 낙타와 바늘의 비유를 통해 이병철 회장의 24개의 질문 중 16번째 질문,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에 대해 이미 답을 했다. 동시에 아홉 번째 질문(‘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도 일부 답한 셈이다.
그에게 단답형으로 묻고 답을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하나의 답변이 다른 질문의 답변과 이어지고, 그 이어진 질문이 다시 처음으로, 혹은 또 다른 답변과 씨줄과 날줄로 연결돼 있었다. 기자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선생은 답답했던지 “반박을 해달라”고 했지만 온전히 경청하며 침묵했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30여 년 전 이병철 회장이 말한 진화론은 현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진화론이란 과학 자체가 그때와 달라져버렸어요. 그땐 양자역학(量子力學)이라는 말도, 뉴사이언스(new science)라는 단어도 없었어요. 지금은 과학 자체가 상식이 되었죠.
이 회장이 말씀하신 ‘과학’은 영어로 사이언스인데 18세기 이후의 학문이잖아요. 실험으로 증명 가능한 자연과학을 뜻하는 말이지만 번역을 잘못한 거야. ‘지식’이라 번역해야 옳은 거예요. 안 그래요?
서양 말로 사이언스는 그냥 지식이라니까. 과학이 별거야? 지식이지. 옛 신화 시절의 지식이나 휴먼 사이언스, 테크노 사이언스 같은 이 시대의 사이언스는 다 같은 지식이에요. 번역을 과학으로 할 뿐이죠.
성경으로 돌아가서, 에덴동산에서 따 먹은 선악의 열매는 과학의 열매이자 지식·지혜의 열매잖아요. 지식을 갖추면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니 선악과(善惡果)는 지식의 열매죠. 그걸 따서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판단할 줄 알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선악을 판단하는 게 왜 나쁜 거야? 얼마나 나쁘기에 하나님이 그 이후 에덴동산 동쪽에 번쩍이는 화염 검,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을까요?
바로 선악과에서 인간의 지식이, 과학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 자체가 원죄(原罪)인 것이죠.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가 선악과를 먹고 호모 데우스가 된 것이에요. 호모(Homo)는 사람 속(屬)을 뜻하는 학명이고, ‘데우스(Deus)’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신’이라는 뜻이니,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란 뜻이죠.
그런데 인간은 신은커녕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 낳는 데 산파가 있어요, 없어요? 산파 없이 아이를 낳아? 소크라테스 엄마가 누구여. 산파였어. 하하하.”
善惡果, 바벨탑, 호모 데우스, 프로메테우스의 罪
“소크라테스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능력대로 태어났어요? 산모 옆에서 산파가 애를 받아내지 않으면 태어나지 못해, 인간은…. 제 엄마가 산파여도 (산파 없인) 소크라테스도 못 태어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버린 거야. 돼지나 소에게 산파가 있어요? 없어도 잘도 낳잖아요. 동물은 스스로 낳고 살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요. 이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예요.
호모 사피엔스들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에 의해 신이 된다는데, 선악과를 따 먹던 그 시절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어요. 인간이 인공지능(AI)을 발명해 방대한 양의 빅 데이터를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인간이 호모 데우스가 된다고?
이 이야기는 창세기 시절,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 이야기와 똑같다고요. 돌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역청과 벽돌 굽는 지식만 있으면 사람이 하늘까지 바벨탑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늘까지 올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된다는 거예요. 저 높은 곳에 사는 신처럼 인간도 높은 데 가서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바벨탑을 쌓은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에덴에서 인간을 쫓아냈듯 또 한 번 내친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이 당신처럼 되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하셨을까. 화염 검,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을까? 그걸 답변해야 돼. 노예들이 시민계급이 못 되게 막는 것과 똑같잖아. 하나님이 그런 사람이야? 그런 신을 인간이 왜 믿어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줬잖아요. 신의 불을 인간에게 갖다줬는데 누가 더 인간을 생각한 거겠어요? 프로메테우스예요? 제우스예요?
다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제우스가 볼 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야. 신 같은 완전한 존재에게나 불이 필요하지, 저것들한테 왜 불이 필요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인간에게 불을 줘서 어떻게 됐어요? 밤낮 불 지르고 전쟁을 일으키며 미사일이나 쏘고…. 결국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어요. 프로메테우스가 나쁜 놈이지. 인간을 위하는 척하면서 (불을) 훔쳐다 주니까 우리가 고맙다고는 했지만 그게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과 같은 존재지.
맥이 풀려 안 풀려. 풀리지? 사탄이 신을 거역하기 위해 선악과를 먹으라고 권한 거잖아.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골탕 먹이려고 불을 갖다준 거잖아. 아가리(아귀)가 딱 맞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잘 생각해봐요.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존재인데 하나님과 대등한 지능, 지식을 가졌으니까 신처럼 된다? 인간이 만든 AI가, 로봇이 어느 날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인간을 조종하려 든다고 가정해봐요. 내가 만든 놈인데…, 우리가 만든 AI가, 예측할 수 없이 우리가 모르는 짓을 하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지혜의 열매를 따 먹은 것과 컴퓨터에다 AI를 집어넣었더니 그놈들이 우리(인간)가 모르는 짓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에요?”
“욕망에 가득 찬 불완전한 피조물이 지식만으로 조물주처럼 된다고?”
“내가 만든 놈인데, 저놈이 내 의지대로 안 움직이고 제멋대로 하는데 저걸 그냥 둬요? AI는 도덕도 정의감도 없는 기계야.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마찬가지로 흙으로 빚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지식을 가진다고 하나님이 될 수 있어요? 욕망에 가득 찬 불완전한 피조물이 지식만으로 조물주처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법원에 가보세요. 얼마나 많은 재판을 엉터리로 하고 있나요? 인간이 선악을 어떻게 알고 판정해요?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재판 자체를 부정한 겁니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없다!’ 왜냐?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니까. DNA 오류로 무고한 사형수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몰라.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럼, 판사가 나빠서 죽였겠어요? 인간의 한계가 그렇다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죄를 잘 아시지. 불쌍하니까 대신 예수님을 보내신 거잖아요.
사람들은 말(馬)이 처음 나타났을 때 놀랐지. 그런 말과 인간이 뜀박질 경쟁에서 이겨요? 못 이겨요. 그래서 말을 천리마(千里馬)니 에쿠스, 페가수스라고 불렀죠. 한마디로 신이란 얘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이 말을 뒤쫓아 가봤어요. 뒤쫓다가 발에 차여 죽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말 등에 올라타게 됐어요. 이후 고삐를 채우고 재갈을 물리면서 말은 인간에게 큰 미덕이 되었죠.
AI도 마찬가지야. AI가 아니라 세상 무엇이 나와도 인간이 제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올라타지 못하면 발길에 차이는 거야.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2040년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초(超)인공지능이 출현한다고 보았죠. 정답은 인간이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에 올라타느냐 여부에 달려 있어요.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를 영국의 딥마인드(DeepMind)사가 개발할 때 그 팀에 처음부터 목사가 있었다고 해요. 목사와 같이 개발하니까 나쁜 짓을 못 한 거죠. 이 기술을 구글에 팔았을 때도 이 목사가 사인을 안 하면 절대 개발할 수 없게 위원회를 만들면 팔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거야.”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면서 왜 전쟁과 질병, 죽음을 주셨을까요. 신을 부정하는 진화론자들은 생명을 경쟁, 적자생존 같은 단어로 표현하죠.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인구를 조절하도록 돼 있다고 합니다. 사실 과거엔 인간을 엄청나게 죽였어요. 죽이는 게 상식이었죠.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덜 죽였어요. 그리고 낙태…, 인간은 아이를 낳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죽이기도 했어요. 왜 그랬겠어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레밍이란 쥐가 있어요. 3~4년에 한 번씩 레밍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결국 먹을 것이 없게 된다고 해요. 그때 레밍 한 마리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데 그걸 보고 다른 레밍이 뒤를 따르고, 뒤쫓는 레밍의 뒤를 다시 수많은 레밍이 따라간다는 겁니다. 앞선 레밍이 죽기 싫어도 뒤에 줄지어 오는 수많은 레밍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계속해서 뛰어내립니다.
모든 생물이 한 환경에서 개체 수가 갑자기 늘면 죽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자비야. 안 죽이면 다 죽으니까. 그러니까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개인 대 개인을 보면 잔인한 것 같지만 원래 생명진화의 전략은 인구를 낳기도 하지만 억제하기도 한다’고 말했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자연은, 모든 생물은, 그 개체 수가 늘면 억제하도록 하셨죠. 인간의 입장에선 낳는 것은 자연의 일부인데 왜 죽이냐고? 죽이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요.
가령 인간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못 하도록 돼 있잖아요. 인간만 근친상간을 못 하게 막은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묘한 게… 꽃은 암술, 수술이 있습니다. 이 암술과 수술이 만나 씨앗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면 놀라워요. 지(자기)들끼리 만들지 않고 먼 데 날아가 암술은 다른 꽃의 수술과 저 수술은 다른 꽃의 암술과 수정이 된다, 이 말이에요. 생물은 한 지역에서만 자라면 작은 기후 변화에도 적응을 못 해 다 죽고 말아요. 되도록 멀리 가서 다른 환경의 동식물과 만나야 유전자가 달라지는 겁니다.”
진화론의 進化
“유명한 미국의 국립공원 옐로스톤(Yellowstone National Park) 이야기가 있어요. 이 공원에는 토끼들이 늑대(Silver wolf)의 밥이었어요. 물어뜯기면서도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참 불쌍한 토끼들이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늑대를 옐로스톤에서 전부 몰아내고 불쌍한 토끼를 보호했더니 토끼들이 자꾸 새끼를 치고 개체 수가 초원의 풀밭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아졌어요. 결국 풀을 전부 뜯어 먹어 초원 전체가 사막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실버 울프 50마리를 다시 ‘모셔다가’ 풀어놓으니 자연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그걸 인간이 아는고…. 그러니까 지식 가지고는, 정보 가지고는 안 돼. 빅 데이터로도 안 돼요.
이젠 진화론도 진화하고 있어요. 과거엔 약육강식, 포식이 진화라고 믿었죠. 숲의 왕인 사자 같은 우등한 개체가 진화한다고 생각했어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은 진화론으로 보면 ‘포식주의’를 의미하죠.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자가 센 놈이 아니야. 사자의 개체 수는 주는데 쥐들은 여전하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사자가 약한 놈이네. 토끼가 없으면, 영양이 없으면 사자는 죽어요. 그러니까 사자가 기생(寄生)한 것이죠. 모든 초식동물은 풀에 기생하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이 없으면 다 죽죠. 실제 강한 놈은 식물이고 그게 원형인 셈이지요. 그러고 보니 영화제목처럼 다 ‘기생충’이네….
패러사이티즘(parasitism·기생)이란 말처럼 모든 생태계가 기생관계로, 먹이사슬이 기생으로 연결돼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죠. 여태까지 귀족이 센 줄 알았는데 농민에게 기생한 거야? 그러니까 숙주관계란 얘기죠. 농민이 없으면 귀족은 못 살아요. 그렇게 1980년대 들어 진화를 포식의 관계에서 보던 관점이 ‘기생체계’로 바뀌었어요.
그러나 진화론은 또다시 바뀌고 있어요. 심바이오시스(symbiosis), 공생(共生)관계로 봅니다. 모든 생물은, 생물에 기생하는 세포조차, 그냥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생한다 봐요. 모든 생물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니까요. 겉으론 잡아먹히는 것 같아도 토끼가 늑대를 ‘고용’한 겁니다. 자기 개체 수가 많으면 다 죽으니까 늑대가 나타나 병들고 약한 토끼들을 잡아줘야 강하고 튼튼한 놈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공생은 생물학적, 진화론적 전략이란 겁니다.”
레밍, 近親相姦, 옐로스톤, 암흑에너지, 암흑물질
“어찌 우리 지혜로 하나님의 뜻, 자연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꼬…. 우리도 자연물의 하나인데 어떻게 알까요.
정부가 계획 경제를 세우면 국민이 다 잘살 것 같지요? 여기서 만지면 저기서 터지고, 저기 터진 곳을 만지면 여기서 다시 터져.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다 실패하는 거야. 시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자생력으로 서로 얽혀서 생태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걸 애덤 스미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손을 신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시장 하나도 인위적으로 안 되는데,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이해가 안 되는데, 그 기술로 삼라만상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우주는 물질로 돼 있다고 유물론자는 말하죠.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 증명이 된다고 말해요. 블랙홀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보통의 물질은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의 73%가 암흑에너지(dark energy)이고, 23%가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해요. 이 4%도 대부분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먼지나 기체라고 해요. 지구와 태양, 그리고 별과 은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전체 에너지의 0.4%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0.4%에 지나지 않은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칠흑같이 검은 우주를 탐사해야만 하죠. 신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과학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말하죠.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100개의 문이 있고, 그 100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또 다른 1000개의 문이 나온다고요.
과학이 덜 발달하면 무신론자가 되고, 오히려 더 발달하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어! 신이 정말 존재하네’ ‘우리가 몰랐는데 이런 데까지 신의 손이 닿아 있네’. 과학으로 신이 증명되는 간단한 예가 인터넷이에요. 하나님은 여기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어요. 그것도 동시에. 인터넷도 그렇잖아요.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접속이 돼서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댓글도 입력하며 수많은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죠. 또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연락이 끊긴 친구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거 너 봤어?’ 하고 따지는 이들에게 인터넷의 가상 세계를 이용해 설명하면 알지 않겠어요?”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證明)할 수 있는가?
“세계적인 기업인 이병철 회장은 돈을 ‘증명(證明)’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돈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은 증명이 안 돼요. 예를 들어 5만원과 5000원의 가치를 설명하려면 물질적으로 둘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과거 금태환 시절에는 가능했죠.
‘태환(兌換)’은 화폐를 금(金)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태환 화폐는 금과 교환이 가능했던 1971년 이전의 달러를 의미합니다.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더는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줄 수 없다고 선언했지요. 금으로 못 바꾸는 불(不)태환 화폐는 종이 쪼가리야. 뭘로 믿어요. 물질을 믿는 거예요? 금융 시스템을 믿는 거지요. 종교도, 하나님도 시스템이지 물질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병철 회장은,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어도 돈의 가치는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불태환이 되니 물질도 증명할 수 없게 됐어요. 미국 달러를 안 쓰는 사람에게 달러화는 그냥 종이 쪼가리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역시 (믿을 수 없는) 쪼가리에 불가해요. 화폐개혁을 하면 순간, 지폐는 휴지 조각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돈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냥 믿고 사는 게지요. 믿을 게 못 되죠.
하나님은 돈보다 훨씬 더 시스템적이에요. 사랑의 체계, 가치의 체계시잖아요. 다른 비유를 안 들더라도 사랑만은 돈보다 믿을 만합니다. 황금을 믿는 마음만큼만 있어도 사랑을 믿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자식 앞에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잖아요. 자식을 돈으론 증명할 수 없어요.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와 같은 덕목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돈보다 확고한데도 사람들은 안 믿고, 돈은 전혀 증명이 불가능한데도 숫자를 믿으려 하죠.
원래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지 물질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인 거지요. 양자역학에 들어가면 물질인 ‘컵’도 설명이 어려워요. 양자의 입자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입니다. 무(無)야, 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존재를 어떻게 믿어요? 그러니까 뉴턴은 ‘모든 물질이 원자라는 입자로 이뤄졌다’고 밝혀냈지만, 이 원자에서 핵(核)으로 깊이 들어가면 소립자는 파동과 입자가 어우러져 있고 관찰자에 의해서 변하지요. DNA도 그래요. 아무것도 몰라요. 못 풀게 봉인이 돼 있어요.
오히려 사랑은 증명이 되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철길로 막 뛰어들잖아요. 사랑은 그렇게 증명할 수 있지만 물질은 증명할 수 없어요.”
수수께끼의 배꼽과 虛數
“프로이트는 그걸 ‘수수께끼의 배꼽’이라 불렀죠. 분명히 우리는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세상에 나왔어요. 배꼽만 봐도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에게 태어난 분명한 증거지요. 그런데 어머니의 탯줄에서 잘려 나왔는데 배꼽만 보면 어머니가 어딨어요?
또 배꼽이 있다는 것은 뭐야? 폐로 숨 쉬지 않았다는 증거를 팍 찍은 것 아닙니까. 양수 속에서 살았으니 바다에서 살았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물고기였다는 거잖아. 바다와 양수는 같으니까. MRI로 산모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없어요? 볼 수 있잖아요. 과학으로 설명이 되는데도 안 믿는 거예요? 어머니 자궁 안에서 아이는 막 운동을 하고 발길질을 하지요. 심지어 지문도 있어요. 인간과 똑같아요. 그런데 폐로 숨 쉬지 않고 아가미로 숨 쉬어요. 태어나기 전 아기는 태로 연결되어 어머니와 한 몸이었지요. 그러나 탯줄을 끊었는데도 이렇게 살고 있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된 시간들이 가위로 싹둑 잘려 배꼽의 흔적만 있을 뿐이죠.
자연과학에서 숫자는 믿을 수 있다고 하지만 숫자에도 허수(虛數)라는 게 있어요. 숫자는 아닌 허수라는 게 없으면 계산이 안 돼요. 하나님은 허수 같은 것이라니까. 수학의 세계에 조금 더 들어가도, 물질의 세계에 조금 더 들어가도 하나님이 계시네,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게 섬씽 그레이트(something great)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섬씽’에 들어가 보면 엄청난 질서가 있고 ‘그레이트(위대함)’가 있어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잖아요. 옛조상들은 억울한 일을 해명하고 증명하려고 해도 안 될 때 자신의 마음을 ‘버선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라고 말했죠. 그러나 증명하라는 말은 항상 물질주의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내가 범죄자가 아닌 것을 증명을 못 하면 나는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증명이란 말처럼 과학적인 무기가 없고, 동시에 증명이란 말처럼 허망한 말도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면 분명히 현실에 있는데도 없는 것으로 치는 거야. 그런데 그 증명이란 것이 우리의 지능 범위 내에서 가능한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존재 밖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 지능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제 어머니, 아버지를 증명할 수 있어? 못 하지. 아버지 마음과 어머니 마음을 아이 능력으로 어떻게 알아요?
‘잘 때 사탕 먹으면 안 돼?’ 그러면 아이는 ‘왜 안 돼요?’ 하고 따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 ‘너 그런 짓을 하면 나중에 나쁜 사람 돼’라고 하면 ‘왜 나쁜 사람 돼요?’라며 눈을 흘깁니다. 아이 지능으로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바락바락 대드는 거야. 아이한테 진실을 얘기해도 몰라요.”
無知의 知, 피조물은 항상 ‘만든 이’의 의도를 모른다
“《월간조선》과의 첫 만남에서 ‘신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無知의 知), 이 말이 정답’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안다면 신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잖아요. 종이가, 종이를 만든 인간을 알겠어요? 종이는 누가 종이를 만들었는지도 몰라. 사람에 따라 종이는 받아쓰는 도구지만 (종이를) 접어 하늘에 날릴 수도 있어요.
종이를 만든 이의 모티베이션, 즉 동기(動機)를 정작 종이 스스로는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피조물은 항상 ‘만든 이’의 의도를 몰라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미국에서 깡통 따개를 만들어서 유럽에 가져갔더니 아무도 뭣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대요. 깡통 따개라는 금속 물질을 분석이야 하겠지만 분석한다고 알아요? 그 따개를 미국 어린이들에게 줘 봐요. 단번에 그걸로 캔을 따지.
물질을 가지고 100번을 이야기해도 증명이 안 되는 거야. 어떤 기능을 가지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증명이 돼야 알 수 있는 것이죠. 고대 유물 박물관에 가보세요. 옛 유물 중에 어떤 기능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유물이 수두룩해요. 기껏 분석해봤자 산소가 몇 %, 탄소가 몇 %, 길이가 몇 cm인지 알 뿐 어디에 쓰인 물건인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물질의 기능이나, 그 물건을 썼던 선대인의 욕망을 모르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피조물에, 종이에 자유를 줘보세요. 조물주가 물을 마시려고 컵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컵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 컵 안 할래요.’ 꽃이 가득한 화병이 부러워서 ‘나도 꽃 꺾어줘요’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게 바로 반역하는 거야.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찻잔 안 해. 꽃 꺾어줘’라고 하면 신이 만들어놓은 모든 용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거야. 텔레비전에서 물이 나오고, 수도꼭지에서 불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계속)⊙
제단 앞에 선 이어령 선생의 머리칼은 비록 두건을 쓰고 허리띠를 질끈 맨 순례자는 아니었으나 머리 위에 재를 뿌린 듯 백발이었다. 백발의 노(老)선생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투병 중인 환자의 음성이 아니었다. 여전히 짱짱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긴 소매 속에 설교 원고를 집어넣고 말하는 자신만만한 말투가 아니었다. 쉽게 예로 들며 때로 진지하게, 때로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평생 맞춰온 거대한 해도(海圖) 조각들을 기자에게 얼핏 설핏 보여주었다.
선생은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 자신이 그린 해도가 외롭고 황량한 사막일 수도, 늑대와 승냥이가 아우성치는 정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벌겋게 달군 쇠붙이처럼 치열한 사색의 길을 걸어 결국 유신론자가 되었다. 조물주의 현현(顯現)하심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진 길이었다”고 선생은 고백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지난 9월 5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였다. 그가 밝힌 제단 위 두 번째 촛불이, 시들지 않은 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병철 회장 하면 ‘재벌’, 이어령 선생 하면 ‘지성’이라는 말이 떠오르기에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부자가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는가” 하는 화두부터 꺼내 보았다.
― 성경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이 있어요. 가진 것이 많은 부자가 모든 것을 비우고 진리를 향해 달려가기가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 같은데요.
“아!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 말인가요. 솔직히 말해 처음 성구(聖句)를 접하고 나는 부자가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고 한 그 비유에 더 관심이 쏠렸죠. 글을 쓰는 사람이라 당연히 재미있고 신기하게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그게 오역이라는 거야.
원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람 말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밧줄(gamta)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였는데 그리스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그 말과 아주 비슷한 낙타(gamla)로 둔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조금 다른 설로는 그리스 말로 밧줄을 뜻하는 kamilos를 낙타의 kamelos와 혼동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고요. 그래서 나는 이따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낙타냐, 밧줄이냐 하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된 적이 있었던 거죠.”
‘낙타냐, 밧줄이냐’ 혼동? 오역?
1983년 故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 故 정주영 현대 회장, 故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서울의 한 미술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현대차 제공 |
― 그래 그 뒤에 어떻게 되었나요.
무신론자로서 한창 지성의 전도사 역할을 하던 그때의 이 선생 모습이 궁금해 말을 재촉했다.
“뭐, 지적 호기심에 불이 붙게 된 거지.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계속 낙타 비유와 씨름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고는 지적 호기심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향해가는 역정이 펼쳐진다.
“원래 낙타를 뜻하는 아람 말 ‘감라’에는 네 가지 다른 뜻이 있다고 해요. ‘낙타’ ‘배의 밧줄’ ‘큰 개미’ 그리고 ‘서까래’까지….”
― 그렇다면 예수님은 낙타와 밧줄이 동시에 내포된 다의적인 수사법을 쓴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거죠.
“자료를 찾다 보면 히브리어, 헬라어(고대 그리스어)까지 등장하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된 성서에는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밧줄이 바늘귀(구멍)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저를 헷갈리게 한 것은 낙타와 바늘구멍의 관계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거였어요. 예루살렘에는 밤이 되면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을 닫고 좁은 쪽문으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좁은 문을 ‘바늘구멍’(The Eye of the Needle Gate)이라고 불렀어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낙타의 안장과 짐을 다 내려놓아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해요. 부자가 모든 재산을 내려놓고 낙타처럼 두 발을 꿇지 않고서는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따지고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역사책이나 고문헌에서도 ‘바늘구멍’이라는 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겁니다.”
걱정이 들었다. 이 서두만으로 몇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자 스스로 결론을 냈다.
―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결국 도달한 것이 믿음의 영성에서 해답을 찾으셨다는….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지성은 낙타냐 밧줄이냐’를 따지다가 막상 본질은 놓쳐요. 중요한 것은 과연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데…,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이 도달한 결론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낙타는 동물원으로 가면 된다’이지요. 낙타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사풍과 갈증과 작렬하는 태양 아래 허덕이지 않아도 되니까. 이게 바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천당이라는 것이지요.”
선생은 웃으며 농담을 했지만 그 안에 진실의 뼈가 숨겨져 있었다.
이어 선생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늘귀의 좁은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주저하고 있던 낙타는 동물원이 아니라 전설의 몽골 초원으로 간다.
“낙타에 관한 몽골의 전설이 있지요. 원래 낙타에게는 뿔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슴이 와서 빌려달라기에 인심 좋게 자기 뿔을 빌려줬다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뿔을 돌려주지 않는 거예요. 낙타는 이제나 그제나 사슴이 오나 하고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금도 사막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낙타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등에 잔뜩 짊어진 채 삶이라는 황량한 사막에서 무언가를 기다리지요. 우리가 상실한 뿔 같은 것…. 그 옛날 에덴동산의 추억일 수도, 영원한 삶을 사는 천국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현세의 것들을 찾아 등짐을 지기 바빠서 하나님이나 진리를 보지 못해요. 우리는 슬픈 눈으로 뭔가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낙타와 같습니다. 그게 종교를 향한 마음, 영성을 향한 마음이겠죠.”
그러고는 뜸을 들이던 결론을 냈다.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부자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왕이든 걸인이든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아버지 이병승에게 안긴 이어령 선생의 여섯 살 무렵 모습이다. |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낙타 비유가 끝나자 제자들이 놀라 ‘그렇다면 누가 천당에 들어갈 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요. 여기에서 하늘나라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데 가난한 자도 부자도 걸인도 왕도 말이죠.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낙타와 바늘귀 비유는 꼭 부자만을 꼭 집어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든 인간의 힘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다만 지상의 가치를 버려야 하는데 부자는 가진 것이 많아 버리기가 남보다 힘들다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까지 포함해서 ‘부’ 자체를 비난한 대목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사로 나타나 있지요. 하지만 그 부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선생은 낙타와 바늘의 비유를 통해 이병철 회장의 24개의 질문 중 16번째 질문,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에 대해 이미 답을 했다. 동시에 아홉 번째 질문(‘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도 일부 답한 셈이다.
그에게 단답형으로 묻고 답을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하나의 답변이 다른 질문의 답변과 이어지고, 그 이어진 질문이 다시 처음으로, 혹은 또 다른 답변과 씨줄과 날줄로 연결돼 있었다. 기자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선생은 답답했던지 “반박을 해달라”고 했지만 온전히 경청하며 침묵했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30여 년 전 이병철 회장이 말한 진화론은 현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진화론이란 과학 자체가 그때와 달라져버렸어요. 그땐 양자역학(量子力學)이라는 말도, 뉴사이언스(new science)라는 단어도 없었어요. 지금은 과학 자체가 상식이 되었죠.
이 회장이 말씀하신 ‘과학’은 영어로 사이언스인데 18세기 이후의 학문이잖아요. 실험으로 증명 가능한 자연과학을 뜻하는 말이지만 번역을 잘못한 거야. ‘지식’이라 번역해야 옳은 거예요. 안 그래요?
서양 말로 사이언스는 그냥 지식이라니까. 과학이 별거야? 지식이지. 옛 신화 시절의 지식이나 휴먼 사이언스, 테크노 사이언스 같은 이 시대의 사이언스는 다 같은 지식이에요. 번역을 과학으로 할 뿐이죠.
성경으로 돌아가서, 에덴동산에서 따 먹은 선악의 열매는 과학의 열매이자 지식·지혜의 열매잖아요. 지식을 갖추면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니 선악과(善惡果)는 지식의 열매죠. 그걸 따서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판단할 줄 알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선악을 판단하는 게 왜 나쁜 거야? 얼마나 나쁘기에 하나님이 그 이후 에덴동산 동쪽에 번쩍이는 화염 검,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을까요?
바로 선악과에서 인간의 지식이, 과학이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 자체가 원죄(原罪)인 것이죠.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가 선악과를 먹고 호모 데우스가 된 것이에요. 호모(Homo)는 사람 속(屬)을 뜻하는 학명이고, ‘데우스(Deus)’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신’이라는 뜻이니,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란 뜻이죠.
그런데 인간은 신은커녕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 낳는 데 산파가 있어요, 없어요? 산파 없이 아이를 낳아? 소크라테스 엄마가 누구여. 산파였어. 하하하.”
善惡果, 바벨탑, 호모 데우스, 프로메테우스의 罪
“소크라테스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능력대로 태어났어요? 산모 옆에서 산파가 애를 받아내지 않으면 태어나지 못해, 인간은…. 제 엄마가 산파여도 (산파 없인) 소크라테스도 못 태어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버린 거야. 돼지나 소에게 산파가 있어요? 없어도 잘도 낳잖아요. 동물은 스스로 낳고 살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요. 이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예요.
호모 사피엔스들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에 의해 신이 된다는데, 선악과를 따 먹던 그 시절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어요. 인간이 인공지능(AI)을 발명해 방대한 양의 빅 데이터를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 인간이 호모 데우스가 된다고?
이 이야기는 창세기 시절,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 이야기와 똑같다고요. 돌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역청과 벽돌 굽는 지식만 있으면 사람이 하늘까지 바벨탑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늘까지 올라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된다는 거예요. 저 높은 곳에 사는 신처럼 인간도 높은 데 가서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바벨탑을 쌓은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에덴에서 인간을 쫓아냈듯 또 한 번 내친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이 당신처럼 되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하셨을까. 화염 검,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을까? 그걸 답변해야 돼. 노예들이 시민계급이 못 되게 막는 것과 똑같잖아. 하나님이 그런 사람이야? 그런 신을 인간이 왜 믿어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줬잖아요. 신의 불을 인간에게 갖다줬는데 누가 더 인간을 생각한 거겠어요? 프로메테우스예요? 제우스예요?
다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제우스가 볼 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야. 신 같은 완전한 존재에게나 불이 필요하지, 저것들한테 왜 불이 필요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인간에게 불을 줘서 어떻게 됐어요? 밤낮 불 지르고 전쟁을 일으키며 미사일이나 쏘고…. 결국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어요. 프로메테우스가 나쁜 놈이지. 인간을 위하는 척하면서 (불을) 훔쳐다 주니까 우리가 고맙다고는 했지만 그게 선악과를 따 먹게 한 뱀과 같은 존재지.
맥이 풀려 안 풀려. 풀리지? 사탄이 신을 거역하기 위해 선악과를 먹으라고 권한 거잖아.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골탕 먹이려고 불을 갖다준 거잖아. 아가리(아귀)가 딱 맞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잘 생각해봐요.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존재인데 하나님과 대등한 지능, 지식을 가졌으니까 신처럼 된다? 인간이 만든 AI가, 로봇이 어느 날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인간을 조종하려 든다고 가정해봐요. 내가 만든 놈인데…, 우리가 만든 AI가, 예측할 수 없이 우리가 모르는 짓을 하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지혜의 열매를 따 먹은 것과 컴퓨터에다 AI를 집어넣었더니 그놈들이 우리(인간)가 모르는 짓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에요?”
“욕망에 가득 찬 불완전한 피조물이 지식만으로 조물주처럼 된다고?”
1959년 경기고 교사 시절의 이어령. |
지금 법원에 가보세요. 얼마나 많은 재판을 엉터리로 하고 있나요? 인간이 선악을 어떻게 알고 판정해요?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재판 자체를 부정한 겁니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수 없다!’ 왜냐?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니까. DNA 오류로 무고한 사형수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몰라.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럼, 판사가 나빠서 죽였겠어요? 인간의 한계가 그렇다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죄를 잘 아시지. 불쌍하니까 대신 예수님을 보내신 거잖아요.
사람들은 말(馬)이 처음 나타났을 때 놀랐지. 그런 말과 인간이 뜀박질 경쟁에서 이겨요? 못 이겨요. 그래서 말을 천리마(千里馬)니 에쿠스, 페가수스라고 불렀죠. 한마디로 신이란 얘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이 말을 뒤쫓아 가봤어요. 뒤쫓다가 발에 차여 죽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말 등에 올라타게 됐어요. 이후 고삐를 채우고 재갈을 물리면서 말은 인간에게 큰 미덕이 되었죠.
AI도 마찬가지야. AI가 아니라 세상 무엇이 나와도 인간이 제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올라타지 못하면 발길에 차이는 거야.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2040년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초(超)인공지능이 출현한다고 보았죠. 정답은 인간이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에 올라타느냐 여부에 달려 있어요.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를 영국의 딥마인드(DeepMind)사가 개발할 때 그 팀에 처음부터 목사가 있었다고 해요. 목사와 같이 개발하니까 나쁜 짓을 못 한 거죠. 이 기술을 구글에 팔았을 때도 이 목사가 사인을 안 하면 절대 개발할 수 없게 위원회를 만들면 팔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거야.”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면서 왜 전쟁과 질병, 죽음을 주셨을까요. 신을 부정하는 진화론자들은 생명을 경쟁, 적자생존 같은 단어로 표현하죠.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인구를 조절하도록 돼 있다고 합니다. 사실 과거엔 인간을 엄청나게 죽였어요. 죽이는 게 상식이었죠.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덜 죽였어요. 그리고 낙태…, 인간은 아이를 낳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죽이기도 했어요. 왜 그랬겠어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레밍이란 쥐가 있어요. 3~4년에 한 번씩 레밍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결국 먹을 것이 없게 된다고 해요. 그때 레밍 한 마리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데 그걸 보고 다른 레밍이 뒤를 따르고, 뒤쫓는 레밍의 뒤를 다시 수많은 레밍이 따라간다는 겁니다. 앞선 레밍이 죽기 싫어도 뒤에 줄지어 오는 수많은 레밍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계속해서 뛰어내립니다.
모든 생물이 한 환경에서 개체 수가 갑자기 늘면 죽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자비야. 안 죽이면 다 죽으니까. 그러니까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개인 대 개인을 보면 잔인한 것 같지만 원래 생명진화의 전략은 인구를 낳기도 하지만 억제하기도 한다’고 말했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자연은, 모든 생물은, 그 개체 수가 늘면 억제하도록 하셨죠. 인간의 입장에선 낳는 것은 자연의 일부인데 왜 죽이냐고? 죽이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요.
가령 인간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못 하도록 돼 있잖아요. 인간만 근친상간을 못 하게 막은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묘한 게… 꽃은 암술, 수술이 있습니다. 이 암술과 수술이 만나 씨앗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면 놀라워요. 지(자기)들끼리 만들지 않고 먼 데 날아가 암술은 다른 꽃의 수술과 저 수술은 다른 꽃의 암술과 수정이 된다, 이 말이에요. 생물은 한 지역에서만 자라면 작은 기후 변화에도 적응을 못 해 다 죽고 말아요. 되도록 멀리 가서 다른 환경의 동식물과 만나야 유전자가 달라지는 겁니다.”
진화론의 進化
이어령 교수는 구체적 세부의 깊이를 탐색하는 촉수를 가졌다. 동시에 정보와 기술혁명의 미래를 내다보는 先見의 눈을 가졌다. |
그래서 실버 울프 50마리를 다시 ‘모셔다가’ 풀어놓으니 자연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그걸 인간이 아는고…. 그러니까 지식 가지고는, 정보 가지고는 안 돼. 빅 데이터로도 안 돼요.
이젠 진화론도 진화하고 있어요. 과거엔 약육강식, 포식이 진화라고 믿었죠. 숲의 왕인 사자 같은 우등한 개체가 진화한다고 생각했어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은 진화론으로 보면 ‘포식주의’를 의미하죠.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자가 센 놈이 아니야. 사자의 개체 수는 주는데 쥐들은 여전하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사자가 약한 놈이네. 토끼가 없으면, 영양이 없으면 사자는 죽어요. 그러니까 사자가 기생(寄生)한 것이죠. 모든 초식동물은 풀에 기생하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이 없으면 다 죽죠. 실제 강한 놈은 식물이고 그게 원형인 셈이지요. 그러고 보니 영화제목처럼 다 ‘기생충’이네….
패러사이티즘(parasitism·기생)이란 말처럼 모든 생태계가 기생관계로, 먹이사슬이 기생으로 연결돼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죠. 여태까지 귀족이 센 줄 알았는데 농민에게 기생한 거야? 그러니까 숙주관계란 얘기죠. 농민이 없으면 귀족은 못 살아요. 그렇게 1980년대 들어 진화를 포식의 관계에서 보던 관점이 ‘기생체계’로 바뀌었어요.
그러나 진화론은 또다시 바뀌고 있어요. 심바이오시스(symbiosis), 공생(共生)관계로 봅니다. 모든 생물은, 생물에 기생하는 세포조차, 그냥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생한다 봐요. 모든 생물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니까요. 겉으론 잡아먹히는 것 같아도 토끼가 늑대를 ‘고용’한 겁니다. 자기 개체 수가 많으면 다 죽으니까 늑대가 나타나 병들고 약한 토끼들을 잡아줘야 강하고 튼튼한 놈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공생은 생물학적, 진화론적 전략이란 겁니다.”
레밍, 近親相姦, 옐로스톤, 암흑에너지, 암흑물질
1991년 10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된 스키타이 황금전을 둘러보고 있는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 오른쪽부터 소콜로프 소련대사, 이 장관,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신현확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정부가 계획 경제를 세우면 국민이 다 잘살 것 같지요? 여기서 만지면 저기서 터지고, 저기 터진 곳을 만지면 여기서 다시 터져.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다 실패하는 거야. 시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자생력으로 서로 얽혀서 생태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걸 애덤 스미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손을 신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시장 하나도 인위적으로 안 되는데,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이해가 안 되는데, 그 기술로 삼라만상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우주는 물질로 돼 있다고 유물론자는 말하죠.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 증명이 된다고 말해요. 블랙홀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보통의 물질은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의 73%가 암흑에너지(dark energy)이고, 23%가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해요. 이 4%도 대부분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먼지나 기체라고 해요. 지구와 태양, 그리고 별과 은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전체 에너지의 0.4%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0.4%에 지나지 않은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칠흑같이 검은 우주를 탐사해야만 하죠. 신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과학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말하죠.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100개의 문이 있고, 그 100개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또 다른 1000개의 문이 나온다고요.
과학이 덜 발달하면 무신론자가 되고, 오히려 더 발달하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어! 신이 정말 존재하네’ ‘우리가 몰랐는데 이런 데까지 신의 손이 닿아 있네’. 과학으로 신이 증명되는 간단한 예가 인터넷이에요. 하나님은 여기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어요. 그것도 동시에. 인터넷도 그렇잖아요.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접속이 돼서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댓글도 입력하며 수많은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죠. 또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연락이 끊긴 친구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거 너 봤어?’ 하고 따지는 이들에게 인터넷의 가상 세계를 이용해 설명하면 알지 않겠어요?”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證明)할 수 있는가?
“세계적인 기업인 이병철 회장은 돈을 ‘증명(證明)’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돈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은 증명이 안 돼요. 예를 들어 5만원과 5000원의 가치를 설명하려면 물질적으로 둘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과거 금태환 시절에는 가능했죠.
‘태환(兌換)’은 화폐를 금(金)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태환 화폐는 금과 교환이 가능했던 1971년 이전의 달러를 의미합니다.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더는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줄 수 없다고 선언했지요. 금으로 못 바꾸는 불(不)태환 화폐는 종이 쪼가리야. 뭘로 믿어요. 물질을 믿는 거예요? 금융 시스템을 믿는 거지요. 종교도, 하나님도 시스템이지 물질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병철 회장은,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어도 돈의 가치는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불태환이 되니 물질도 증명할 수 없게 됐어요. 미국 달러를 안 쓰는 사람에게 달러화는 그냥 종이 쪼가리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역시 (믿을 수 없는) 쪼가리에 불가해요. 화폐개혁을 하면 순간, 지폐는 휴지 조각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돈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냥 믿고 사는 게지요. 믿을 게 못 되죠.
하나님은 돈보다 훨씬 더 시스템적이에요. 사랑의 체계, 가치의 체계시잖아요. 다른 비유를 안 들더라도 사랑만은 돈보다 믿을 만합니다. 황금을 믿는 마음만큼만 있어도 사랑을 믿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자식 앞에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잖아요. 자식을 돈으론 증명할 수 없어요.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와 같은 덕목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돈보다 확고한데도 사람들은 안 믿고, 돈은 전혀 증명이 불가능한데도 숫자를 믿으려 하죠.
원래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지 물질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인 거지요. 양자역학에 들어가면 물질인 ‘컵’도 설명이 어려워요. 양자의 입자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입니다. 무(無)야, 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존재를 어떻게 믿어요? 그러니까 뉴턴은 ‘모든 물질이 원자라는 입자로 이뤄졌다’고 밝혀냈지만, 이 원자에서 핵(核)으로 깊이 들어가면 소립자는 파동과 입자가 어우러져 있고 관찰자에 의해서 변하지요. DNA도 그래요. 아무것도 몰라요. 못 풀게 봉인이 돼 있어요.
오히려 사랑은 증명이 되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철길로 막 뛰어들잖아요. 사랑은 그렇게 증명할 수 있지만 물질은 증명할 수 없어요.”
수수께끼의 배꼽과 虛數
1961년 세계 일주를 위해 출국하기 전 김포공항에서 부인 강인숙(오른쪽)씨와 함께. 왼쪽은 강씨의 여고 동창인 고(故) 전혜린씨다. |
또 배꼽이 있다는 것은 뭐야? 폐로 숨 쉬지 않았다는 증거를 팍 찍은 것 아닙니까. 양수 속에서 살았으니 바다에서 살았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물고기였다는 거잖아. 바다와 양수는 같으니까. MRI로 산모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없어요? 볼 수 있잖아요. 과학으로 설명이 되는데도 안 믿는 거예요? 어머니 자궁 안에서 아이는 막 운동을 하고 발길질을 하지요. 심지어 지문도 있어요. 인간과 똑같아요. 그런데 폐로 숨 쉬지 않고 아가미로 숨 쉬어요. 태어나기 전 아기는 태로 연결되어 어머니와 한 몸이었지요. 그러나 탯줄을 끊었는데도 이렇게 살고 있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된 시간들이 가위로 싹둑 잘려 배꼽의 흔적만 있을 뿐이죠.
자연과학에서 숫자는 믿을 수 있다고 하지만 숫자에도 허수(虛數)라는 게 있어요. 숫자는 아닌 허수라는 게 없으면 계산이 안 돼요. 하나님은 허수 같은 것이라니까. 수학의 세계에 조금 더 들어가도, 물질의 세계에 조금 더 들어가도 하나님이 계시네,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게 섬씽 그레이트(something great)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섬씽’에 들어가 보면 엄청난 질서가 있고 ‘그레이트(위대함)’가 있어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잖아요. 옛조상들은 억울한 일을 해명하고 증명하려고 해도 안 될 때 자신의 마음을 ‘버선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라고 말했죠. 그러나 증명하라는 말은 항상 물질주의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내가 범죄자가 아닌 것을 증명을 못 하면 나는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증명이란 말처럼 과학적인 무기가 없고, 동시에 증명이란 말처럼 허망한 말도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면 분명히 현실에 있는데도 없는 것으로 치는 거야. 그런데 그 증명이란 것이 우리의 지능 범위 내에서 가능한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존재 밖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 지능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제 어머니, 아버지를 증명할 수 있어? 못 하지. 아버지 마음과 어머니 마음을 아이 능력으로 어떻게 알아요?
‘잘 때 사탕 먹으면 안 돼?’ 그러면 아이는 ‘왜 안 돼요?’ 하고 따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 ‘너 그런 짓을 하면 나중에 나쁜 사람 돼’라고 하면 ‘왜 나쁜 사람 돼요?’라며 눈을 흘깁니다. 아이 지능으로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바락바락 대드는 거야. 아이한테 진실을 얘기해도 몰라요.”
無知의 知, 피조물은 항상 ‘만든 이’의 의도를 모른다
지난 9월 5일 비 오는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테라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의 영적 아카이브다. |
종이를 만든 이의 모티베이션, 즉 동기(動機)를 정작 종이 스스로는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피조물은 항상 ‘만든 이’의 의도를 몰라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미국에서 깡통 따개를 만들어서 유럽에 가져갔더니 아무도 뭣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대요. 깡통 따개라는 금속 물질을 분석이야 하겠지만 분석한다고 알아요? 그 따개를 미국 어린이들에게 줘 봐요. 단번에 그걸로 캔을 따지.
물질을 가지고 100번을 이야기해도 증명이 안 되는 거야. 어떤 기능을 가지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증명이 돼야 알 수 있는 것이죠. 고대 유물 박물관에 가보세요. 옛 유물 중에 어떤 기능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유물이 수두룩해요. 기껏 분석해봤자 산소가 몇 %, 탄소가 몇 %, 길이가 몇 cm인지 알 뿐 어디에 쓰인 물건인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물질의 기능이나, 그 물건을 썼던 선대인의 욕망을 모르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피조물에, 종이에 자유를 줘보세요. 조물주가 물을 마시려고 컵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컵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 컵 안 할래요.’ 꽃이 가득한 화병이 부러워서 ‘나도 꽃 꺾어줘요’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게 바로 반역하는 거야.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찻잔 안 해. 꽃 꺾어줘’라고 하면 신이 만들어놓은 모든 용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거야. 텔레비전에서 물이 나오고, 수도꼭지에서 불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