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네마리 용(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 어디로 가고 있나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은 '아시아 네마리 용'으로 불렸다. 초고속 경제 기적으로 한때 전 세계를 경탄케 했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이들 4개국은 두자릿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농부와 노동자로 땀흘려 일한 세대들은 손주들이 세계에서 가장 학력이 높은 세대로 커가는 걸 지켜봤다. 네마리 용들은 무명셔츠나 플라스틱 조화, 가발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했다. 머지않아 메모리칩과 노트북, 금융파생상품 등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4개국의 성공 원천을 놓고 전 세계 학계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강력한 정부 정책을, 다른 측에서는 경쟁 시장의 치열함을 꼽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세상이 변했다. 아시아 외환위기로 네마리 용의 신화는 스러졌다. 상당 부분 네마리 용의 전철을 밟은 중국이 새로운 스타로 발돋움했다. 아시아 용들은 발전 동력을 잃은듯 보였다. 올해 미국은 이들 4개국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다.
네마리 용 모두 고질적인 문제에 직면한 상황이다. 대만에서는 임금 정체가, 한국에서는 재벌 지배가, 싱가포르에서는 값싼 수입 노동자의 하층민화가, 홍콩에서는 정부와 시민 간 갈등 폭발이 있다.
하지만 네마리 용이 실패했다고 보는 건 실수다. 경제기록을 면밀히 보면 이들은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보면 감탄할 만하다. 이른바 '중진국 함정'은 오래 전에 통과했다. 한국은 곧 제국주의 침략자였던 일본을 추월할 4번째 용이 될 전망이다.
미국도 따라잡을 기세다. 싱가포르는 2000년대 미국을 추월했다. 홍콩은 2010년대 들어 미국과 대등한 수준이 됐다. 대만과 한국도 점차 미국과의 격차를 줄이고 있다.
경제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네마리 용의 장점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이들 역시 서구를 괴롭히는 동일한 이슈에 직면했다. 소득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할지, 생산성을 어떻게 높일지, 고령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등이다. 모든 문제에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이들은 참신하고 교훈적인 접근법을 갖고 있다.
영국 저명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판에서 아시아의 네마리 용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4가지 지점에 주목했다.
첫째 네마리 용의 당면 문제는 경제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는 임금과 임대료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년 동안 글로벌 수출 점유율을 어떻게든 지켰다. 하지만 이제 글로벌 수요보다 더 빠르게 수출을 증대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많은 산업 부문에서 기술적 한계에 직면했다. 추가적인 개선이 어려워졌다. 이들 나라는 더 이상 글로벌 최고 기업들을 따라잡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싱가포르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 초대 총리는 아시아적 가치의 중심엔 '조화'와 '안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네마리 용은 여전히 조화와 안정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조화와 안정의 전제조건으로 '공정함'을 꼽고 있다. 이는 두 번째 지점으로 이어진다. 성숙한 시민이 민주주의를 갈망할 때, 이를 좌절시키는 것은 위험한 국면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대만과 한국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고위직의 부패, 의회의 주먹다짐, 극도로 양분된 언론 등과 결합하면서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같은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 홍콩사태에서 분명한 건 민주주의의 억압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민들 사이에 불만과 불신의 씨를 뿌리게 된다.
셋째 지점은 얇팍한 복지체계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네마리 용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으로 재분배와 사회적 지출이 국민의 일할 동기를 감소시킨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사회적 불안은 국민이 기술적 격변에 대처할 의지를 지레 꺾어놓을 위험이 있다. 네마리 용의 국민이 노령화할수록 정부는 연금과 의료복지에 더 많이 지출해야 할 부담을 갖게 된다.
또 젊은이들이 경제적 부담에 아이를 낳지 않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성장만 집착하는 개발국가 모델을, 성장 친화적인 복지국가 모델로 바꿔야 한다.
넷째 네마리 용이 전 세계 경제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술과 금융 지정학과 관련한 글로벌 경제 주기에 깊이 노출돼 있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한국과 대만은 기술 공급망의 틈새를 장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초고속 5G 이동통신 네트워크와 빅데이터 프로세싱에 필수적인 기술과 반도체 등이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금융 중개지로 각인시켰다. 중국의 성공과 좌절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네마리 용 모두 현존 최대 패권국인 미국과 새로운 패권국 중국이 벌이는 지정학적 갈등의 틈새에 있다.
이런 주기는 네마리 용이 주체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 심지어 상황이 좋을 때도 그렇다. 금융과 기술의 호황기엔 국가의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 한국의 재벌 기업이나 홍콩의 부동산 거물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침체기엔 위협이 더 커진다. 지난 4반세기 동안 네마리 용들은 두 차례 금융위기에 노출됐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쓰이는 반도체산업이 오랜 호황을 누렸지만, 최근 상황이 반전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이 타격을 입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가장 우려스러운 건 지정학적 도전과제다. 미국과 중국이 네마리 용의 번영과 안정의 기초를 뒤흔들게 될 새로운 냉전을 벌이고 있다.
한편 4개 국가를 한데 묶는 게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다. 반면 대만은 인구 2000만명, 한국은 5000만명의 중간 규모 국가다. 또 한국과 싱가포르는 UN 회원국이다. 반면 홍콩은 중국 영토이고, 대만은 외교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나라다. 한국과 대만은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유권자에 대한 신뢰가 덜하다. 한국과 대만은 여전히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고, 싱가포르와 홍콩은 고급 서비스업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교역국들이다. 따라서 외부 요인으로 인한 변동성이 크다. 그럼에도 고용률이 높다. 삶의 기준이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근검절약 정신이 강하다. 정도는 다양하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처지다. 4개국 모두 복잡한 사회 문제를 갖고 있다. 이는 지난 반세기 유례없는 경제성장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네마리 용 모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번영을 일궜고 쉼없이 부를 축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전히 선두에 서고자 하는 네마리 용의 노력이 향후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한다"면서도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다른 나라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전했다.
수출 통한 경제번영 더 어려워져
세계 최대 자전거 제조업체 '자이언트'의 여성 CEO 보니 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맺힌 게 많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때문에 회사의 공급망이 엉망이 돼 비용이 크게 올랐다. 70세 열혈 사이클리스트인 보니 투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활동인 자전거 타기에 세금을 붙였다"고 한탄했다. 자이언트는 중국 생산량을 줄여 대만으로 옮겼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자이언트뿐 아니다. 수십개의 대만 기업들이 최근 중국에서 본국으로 되돌아왔다. 컴퓨터 제조업체 '콤팔', 전력부품 공급업체 '델타 일렉트로닉스', 제지업체 '롱첸' 등이 대표적이다. 2018년 대만 정부는 '인베스트 타이완'(Invest Taiwan) 사무소를 열었다. 대만 재이전 비용을 저리로 대출하는 기관이다. 이미 150개 이상 기업들로부터 대출 신청이 쇄도했다. 얼핏 보면 대만이 미중 무역전쟁으로 혜택을 본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싱가포르와 한국 역시 미국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을 가져간 나라다. 하지만 무역전쟁이 아시아 네마리 용에 도움이 된다고 결론 내리는 건 실수다. 전반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4개국이 긴밀히 의존하고 있는 3가지 측면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첫째 개방적인 교역 시스템, 둘째 아시아 기반 제조업 네트워크, 셋째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이다. 골드만삭스는 아시아 13개국을 놓고 올해 잠재성장률과 실제성장률을 비교했다. 네마리 용 모두 하위에 속했다.
무역갈등으로 4개국이 불안에 떠는 건 당연하다. 수출은 네마리 용의 경제성장 엔진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양철과 합판, 섬유 수출로 시작했다. 한국 수출기업들은 저렴한 신용, 수입관세 면제, 1964년 원화 평가절하 등에 큰 도움을 받았다. 미국이 원화의 절하를 요구한 건 역설적이었다. 1965년 2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매달 수출진흥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다. 제품 샘플링이나 기업인과의 오찬도 자주 했다. 1964년 11월 30일 수출액이 1억달러를 넘자, 한국은 기념으로 '수출의 날'(훗날 무역의 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대만 역시 수출기업들에 저렴한 신용과 세제혜택을 제공했다. 기업가들이 곧 등장했다. 자이언트의 보니 투는 회사 창립자인 삼촌 킹 류가 1972년 "미국이 현금을 싸들고 와 자전거를 구매하려 한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삼촌은 대만의 부품 공급업체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봤다. 자전거에 끼우는 고무타이어가 종종 바퀴에서 빠졌다. 규격이 제각각이었기 때문. 삼촌은 대만 전역을 돌며 자전거 부품 제조사들에게 '수치를 통일하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호소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화물 집산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한때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전형이었다. 1970년대 한동안 홍콩은 세계 최대 장남감 제조지였다.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도 제조업 기지가 되고자 했다. 처음부터 홍콩과 경쟁을 벌였다. 싱가포르의 첫 수확 중 하나는 GE를 유치한 것이었다. GE는 시계 겸용 라디오 생산 공장을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 두었다. 당시 중국 문화혁명의 거센 여파가 홍콩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서였다.
네마리 용은 훨씬 부유해졌지만, 수출은 이들 국가의 경제 DNA에 깊이 각인됐다. 4개국 기업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교하고 복잡해졌다. 정부의 재촉도 한몫했다. 한국에서는 경공업 성공 10년 후 정부 관료들이 조선이나 화학 등 중공업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과학단지를 만들어 광전자공업이나 반도체 등 선진산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1981년 국립컴퓨터위원회를 설립해 하이테크 노동자를 집중 훈련시켰다.
지난 20여년 동안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중국에 점유율을 빼앗겼다. 하지만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 글로벌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하게 1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4% 아래로 하락했다. 2000년의 절반 수준이다.
주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4개국 역시 기초 제조업 대부분을 중국으로 이전했다. 가장 상징적인 기업이 대만의 폭스콘이다. 아이폰 제조업체로 잘 알려진 폭스콘은 1988년 중국에 첫 공장을 열었다. 30여년이 지난 현재 중국에서 대략 100만명을 고용중이다. 하지만 단순노동을 중국으로 보내면서 4개국은 고부가가치의 업스트림(upstream) 사업으로 이동했다. 한국은 세계 최대 메모리칩 제조국이고 대만은 최대 반도체 조립 국가다. 그 결과 두 나라 모두 중국의 전자, 컴퓨터 제품 수요의 1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교역국의 2배 정도다. 단순히 말해 한국과 대만은 중국이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네마리 용 모두 중국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타고 있다. 기업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합종연횡하면서 아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조업 지역이 됐다. 부품에 대한 글로벌 교역에서 아시아 비중은 2000년 19%에서 2016년 30%가 됐다. 전 세계 물동량이 가장 많은 7대 항구 중 중국이 4개를, 싱가포르와 한국 부산, 홍콩이 나머지 3개를 차지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세계의 공장 아시아'의 관리허브로서 역할을 강화했다. 40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이 아시아 본사를 싱가포르에 두고 있다. 홍콩엔 그보다 적은 1500개 기업의 지역 본사가 있다. 하지만 중국 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키는 측면에선 싱가포르를 크게 앞선다. 홍콩 증시의 시가총액은 4조달러를 넘는다. 반면 싱가포르 증시 시가총액은 7000억달러에 약간 못 미친다.
상호연결성은 부유함을 낳았지만 취약점을 만들기도 한다. 미국이 벌이는 무역전쟁은 중국에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다. 네마리 용은 많은 측면에서 중국보다 더 피해에 노출돼 있다. 규모가 적고 더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수출의 GDP 비중은 대략 20%다. 한국은 45%, 대만은 65%, 싱가포르와 홍콩은 200%에 육박한다.
공급망을 흐트러뜨린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은 네마리 용의 글로벌 제조업 모델에 특히 위협적이다. 이들 나라는 타국의 원료나 부품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또 고객이 전 세계에 걸쳐 있다. 미국의 불신을 받는 고객 기업도 수두룩하다. 대만의 파운드리 산업은 미국의 기업들은 물론 트럼프 정부가 비난하는 중국 화웨이도 고객으로 삼고 있다. 대만 TSMC의 한 간부는 "우리는 모든 기업을 위해 파운드리를 한다. 어느 기업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불확실성에 직면해 아시아의 네마리 용은 두 가지 선택권을 갖고 있다. 하나는 고객과 제품의 다변화다. 대만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 이외의 신흥국을 발굴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 정부는 제품군을 다양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 문재인 대통령은 전기자동차와 로봇 자동화 같은 신산업을 독려했다.
또 다른 방법은 글로벌 교역질서를 수습하는 것이다. 2000년 이전 네마리 용은 5개의 지역 무역협정에 속해 있었다. 이제는 49개의 무역협정에 참여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그 경쟁자 격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모두 창립회원국이다. 또 세계무역기구(WTO)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 미국 간의 타협을 중재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네마리 용은 미중 갈등이 전면화할 경우 이를 피할 방법이 거의 없다. 홍콩이 가장 취약하다. 미국법상 홍콩은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중국 본토와는 관세법상 다른 지역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현재는 양국의 무역전쟁 포화를 비켜가고 있다. 일부 기업들이 이를 노려 홍콩 중개상을 통해 제품의 원산지를 바꿔 관세폭탄을 피하고 있다. 미국은 향후 홍콩이 원산지인 상품의 검사를 대폭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문제는 자생적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갈등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조선 병합에서 기인한 것으로 21세기 무역갈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칩에 필수적인 제품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글로벌 노동분화는 정교하게 이뤄지고 있기에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대체물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논란의 결론은 기업들이 어디에서 영업할지, 누구와 거래할지 결정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대만 자이언트의 CEO 보니 투가 내린 결론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그는 "우리는 효율성과 자동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네마리 용 모두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자동화는 이를 달성할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아시아 네마리 용, 미래혁신 스스로 찾아 나섰지만 …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II
2019-12-10 12:32:48 게재
음침하고 유혈이 낭자했다. 잭과 49명의 일행은 수송기에 탑승했고 한 섬에 낙하했다. 임무는 단순했다. 죽느냐 죽이느냐다. 잭과 일행은 수류탄을 집어들고 인근 공장으로 어렵사리 진입했다. 잭은 적의 눈을 피해 쭈그리고 앉아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발각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긴 침묵이 흘렀다. 잭은 또 다시 레벨 1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모바일 배틀그라운드 '프리 파이어'의 한 장면이다. 올해 전 세계 가장 많은 이용자가 다운로드 한 휴대폰용 게임 중 하나다. 개발업체는 싱가포르의 '시그룹'(Sea Group). 10년 전 창립한 인터넷회사다. 시가총액이 170억달러에 달한다. 시그룹은 프리 파이어 외에 전자상거래 애플리케이션 '쇼피'(Shoppee)도 운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아마존보다 훨씬 인기가 높은 쇼핑앱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시그룹의 성공은 아시아 네마리 용의 경제가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전했다.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네마리 용의 경제가 한창 좋을 때 성장한 대기업들은 정부 정책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한국의 재벌은 저렴한 신용과 세제 혜택의 덕을 톡톡히 봤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은 정부 연구기관의 자회사였다. 홍콩의 재계 거물들은 관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토지정책 등에서 큰 혜택을 봤다. 싱가포르의 거대 기업들은 결국 정부 소유가 됐다.
시그룹은 그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기업의 성공은 정부 정책과는 별 다른 연관이 없다. 싱가포르의 테크노크라트, 즉 경제계획을 촘촘하게 입안하던 과학기술관료들은 다수의 플레이어가 죽고 죽이는 게임, 아름다운 여왕이 무기중개상으로 탈바꿈하는 캐릭터가 포함된 게임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고 리콴유 총리가 봤다면 분명 재미없는 게임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산업정책은 네마리 용의 비상을 가능케 한 요소였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정부 주도 경제개발 모델의 성공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IMF는 전통적으로 정부 주도 모델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 효과가 있다고 해서 선진국에서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네마리 용은 다른 나라의 우수 모델을 따라할 수 있었다. 중공업에 집중키로 한 한국은 일본을 본보기로 삼았다. 대만이 반도체 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네마리 용은 선진기술 부문 진입을 면허제로 운영하기도 했다. 또 경쟁국으로부터 우수 연구자들을 빼내오기도 했다.
선두 이끌기에서 배후지원으로
하지만 현재의 도전과제는 다르다. 정부와 기업이 미래를 예측할 때 뚜렷함보다 흐릿함이 앞을 가린다. 인공지능(AI)이나 양자컴퓨팅 부문에서 국가전략을 개발하는 게 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베낄 기술이 없다. 아직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혁신이란 본래 미리 내다보고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업들이 밀어붙이고 돌파구를 포착하도록 적절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네마리 용들의 현재 계획은 때로 구식 산업정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은 '5+2 혁신산업 계획'을 내세웠다. 녹색에너지와 스마트기계 같은 부문을 눈여겨보고 있다. 싱가포르는 23개 산업전환 계획을 짰다. 식음료 제조에서 항공산업까지 모든 부문을 망라했다. 한국은 30조원을 투자해 향후 5년 동안 8개 신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AI와 자율주행차 등이 핵심이다.
자세히 보면 과거와 차별성이 확연하다. 톱다운 방식이라기보다 기업과 전문가가 심사숙고한 결과다. 이런저런 부문에 보조금을 내거는 게 아니라 어떤 구성요소가 필요한지 고민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무역산업부 사무차관 게이브리얼 림은 "계획을 구체화하는 과정은 최종 완성품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요소는 명확하다. 항구에서 인터넷까지 질 좋은 인프라, 교역 개방성, 교육 정도가 높은 노동력,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 투자 등이다. 네마리 용이 혁신을 촉진하는 방법도 혁신적이다.
대만은 아이디어는 풍부하나 자원은 거의 없는 중소기업 대출 촉진과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기업실적 정보공유 시스템과 신용보증 기능을 결합했다. 은행들이 보다 자신감을 갖고 대출에 나설 수 있다. 대만 최대 금융기관인 '케세이 파이낸셜 홀딩스' 대표 리창켄은 "우리 시스템을 다른 나라 금융인들에게 설명하면 곧바로 군침을 흘린다"고 말했다. 현재 대만 민간기업에 대한 은행 대출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은 64%다. 2005년 41%에서 껑충 뛰었다.
싱가포르는 거대한 전시공장을 만들었다. 중소기업들이 이곳에서 최첨단 3D 프린팅과 로봇 장비 등을 직접 써볼 수 있다. 홍콩도 비슷한 시설을 운영한다. 괜찮은 사업구상을 가진 기업가는 과거처럼 물주가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네마리 용의 기술관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요즘 굵직굵직한 결정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 중역회의에서 이뤄진다. 폴더블 스마트폰에 대한 삼성의 과감한 투자, 싱가포르 시그룹과 같은 스타트업의 등장, 생산설비 증설에 대한 TSMC의 대규모 투자, 아시아 일류 금융시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홍콩 증시 노력 등이 적절한 사례다. 경제 부문 기술관료들은 자신의 역할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기술진보 위한 사회지지 결집 과제
서울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화성에는 새로운 마을이 들어섰다. 초고속 5G네트워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다른 도시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학교나 세차장, 식당 등 생활편의시설에 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건물들은 모두 가짜다. 정확히는 마을 자체가 가짜다. 한국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시험하기 위해 실제와 비슷하게 만든 곳이다. 최근 기아자동차 자율주행팀은 마을 일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평균 시속 7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였다. 눈부신 햇살과 혼란스런 도로표지판 등 각종 장애물이 있었지만 기아의 자율주행차는 이에 무난히 대처했다는 평가다. 운전석에 앉은 안전 기술자는 차가 스스로 달리는 동안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한국은 자율주행과 관련해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반도체 제조사와 자동차 제조사, 빠르게 늘어나는 5G네트워크 등이다. 정부는 시험장에서 통과한 자율주행차가 실제 도로에서 달리는 것을 허용하는 등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적 컨설팅 기업 KPMG가 선정한 자율주행 최적의 나라 순위에서 13위에 그쳤다. 이유가 뭘까.
이코노미스트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기술발전과 관련한 한국의 양면적 감정 때문이라고 봤다. 대표적 사례가 차량 공유 서비스다. '카카오 모빌리티'나 '타다' 등은 택시 운전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다. 현재까지 4명의 택시 기사가 차량공유 서비스에 항의하는 의미로 분신했다.
기업과 정부가 독려하는 기술혁신은 대중들에 널리 퍼지기까지는 경제 생산성에 보탬이 안된다. 스탠포드대 폴 데이빗 교수가 오래 전에 이를 지적했다. 토머스 에디슨이 첫 번째 발전소를 내놓은 게 1880년이었다. 하지만 제조사들이 이를 전력생산의 킬러앱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40여년이 걸렸다. 결국 1920년대가 돼서야 미국에 다이너모 발전기 조립라인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차량공유 앱에 대한 한국의 경계심은 네마리 용에게 부족한 사회보장 인프라와 대조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자율주행과 같은 새로운 기술에서 발전을 견인할 핵심요소는 어쩌면 고성능 5G 네트워크가 아닐 수 있다. 더 개선된 연금시스템일 수 있다. 기술진보에 뒤처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사회 완충망이 없다면, 기술 진보를 견인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결집시키기 어렵다.
네마리 용은 인적·물적 자원을 신속히 동원하는 데 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데도 점차 능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 불안감을 알리는 신호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결집시키는 걸 어렵게 한다.
홍콩 사회불안 어떻게 봐야하나
한때 발전의 도시로 이름 높았던 홍콩이 이제는 시위의 도시로 바뀌고 있다. 벽돌과 화염병, 최루탄 등이 전 세계 가장 비싼 부동산 값을 자랑하는 곳에 난무한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은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와 프라다 매장 앞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홍콩 정부를 포함한 많은 전문가들은 시위의 근본 이유를 경제적 고통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값, 임금정체, 질식할 것 같은 재벌의 존재 등이다.
홍콩은 각종 불평등의 집산지다. 불가리 매장에 전시된 시계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한달 동안 버는 돈으론 엄두도 못낸다. 시위대가 벽돌을 나르는 데 쓰는 카트는 원래 등이 굽은 가난한 노년 할머니들이 재활용 종이박스를 모아 싣던 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높다. 한 부부가 최근 고급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 한 면을 76만달러(약 9억원)에 팔았다. 1일 주차권 1만4000장(매일 써도 38년 넘게 이용가능한 분량) 가격보다 비싸다.
홍콩 시위의 근본 이유가 경제라면, 시위대나 중국 본토나 안심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신속한 주택 건설 정책이나 보다 누진적인 세제로 중국 정치체제를 훼손하지 않고 홍콩의 불만 요소를 잠재우면 된다. 이는 결국 홍콩을 중국 본토와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홍콩의 친중국 국회의원들이 민간 개발업자들로부터 700헥타르(약 211만7500평)의 부지를 사들이는 제안을 발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싱가포르식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애초부터 '자가주택 비율이 높아야 사회적 안정이 가능하다'고 봤다. 인구 80% 이상이 정부 기관이 지은 주택에 산다. 집을 살 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 싱가포르 경영대 팡속용 교수는 "주거와 관련, 토마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언급한 이상적인 사회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싱가포르"라고 말했다. 소득 하위 50% 가계가 싱가포르 총 주택가치의 약 4분의 1이나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의 문제가 최근 불거진 건 아니다. 오래된 고질병이다. 과거엔 지금과 같은 아수라장을 촉발하지 않았다. 왜 지금인가.
경제적 고통이 시위를 촉발했다면, 시위대들은 진짜 동기를 숨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시위대들은 일자리나 경제 불평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경찰의 폭력성, 홍콩 자치권의 붕괴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홍콩중문대학에 재학중인 한 시위 학생은 "우리는 정부의 어두운 면을 봤다"며 11월 11일 경찰이 직업학교 학생을 총격한 것에 분개했다. 홍콩중문대학에 다니는 프랜시스 리와 동료들이 수천명의 시위대를 상대로 시위 발생 첫 3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의 시위대가 자신을 중산층 이상 출신이라고, 75%의 응답자가 대학 재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중국은 불쾌하겠지만 홍콩 불안은 대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대만은 지난 20년 동안 임금이 정체됐다. 대만 타이베이는 아시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대만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 중 하나는 2014년 '해바라기 시위'였다. 중국과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 대만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만이 중국과 별개의 국가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경제적 측면이 홍콩 시위의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고 해도, 상당한 타격은 불가피하다. 시위대는 대의명분에 동정을 표하지 않는 기업들을 집중 공격했다. 최근엔 시위대의 사보타주가 대상을 가리지 않는 방향으로 변했다. 한 시위학생은 "우리는 정부에 경제적인 압력을 넣고 싶다"고 말했다.
물리적 피해보다 더 심각한 건 심리적 피해다. 이는 경제적 피해를 심화시킨다. 지난 9월 홍콩의 소매 판매는 전년 대비 5분의 1 이상 줄었다. 관광객 수는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 식당과 술집의 매출은 2003년 사스 바이러스 창궐 이후 최대폭 하락했다.
만약 시위가 진정된다면 물리적 피해는 신속히 복구될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 피해, 감정의 앙금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홍콩 관광객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본토인들이 자신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도시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돈을 쓰는 것을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
홍콩은 그럼에도 금융허브라는 역할을 지켜야 한다. 홍콩 증시, 채권시장, 금융시스템은 홍콩의 GDP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요하다. 지역 경제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다. 중국 본토 기업들은 홍콩에서 발행하는 채권의 70%, 항셍지수 가치의 55%를 차지한다.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금융 도관으로서 홍콩의 역할은 시위로 파괴되거나 저지될 수 없는 별개의 인프라에 의존한다. 시위대가 분노에 하늘을 찔렀지만,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는 홍콩 증시 기업공개를 통해 110억달러 이상을 모았다. 2010년 이후 최대 액수다. 홍콩 항셍지수도 시위보다는 미중 무역전쟁에 훨씬 민감하다. 지난 10월 홍콩의 인지세 수입이 280% 폭등했다. 외국인들은 여전히 홍콩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다. 외국인들은 아시아 최고 부자 리카싱의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리카싱은 1960년대 좌파 운동으로 홍콩이 불안할 때 이곳의 부동산을 대거 매입하면서 떼돈을 번 인물이다.
일부 다국적 기업들에겐 싱가포르의 안정성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금융 허브로서 홍콩과 싱가포르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수년 전 홍콩에 진입한 한 싱가포르 금융중개인은 "우리는 홍콩이 아니라 중국에 들어가 경쟁하는 것"이라며 "반면 싱가포르는 중국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곳"이라고 말했다. 즉,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성격이 크다는 것. 그는 싱가포르 금융 전문가들을 양떼를 이끄는 목동에 빗댄 반면 홍콩 금융 전문가들은 거래라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냥꾼에 더 가깝다고 비유했다.
시위대는 홍콩의 특별 지위를 활용해 국제적 이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 의회는 국무부가 매년 홍콩의 자율성을 평가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관세, 세법, 상법 등에서 홍콩은 별도 지위이기 때문에 이 자격을 계속 부여해도 되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다.
반면 중국 본토의 많은 이들은 홍콩인이 본토인보다 훨씬 많은 특권을 누리면서도 불평불만이 그렇게 크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 본토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홍콩의 정치적 야심은 사실 경제적 번영에서 온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홍콩은 중국 본토보다 훨씬 진전된 자유를 누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슷한 경제력을 갖춘 사회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정치적 권리 측면에서 제한이 크다. 어쩌면 홍콩의 현재 상황은, 1인당 GDP가 높지만 민주주의 지표가 낮은 중동 산유국에 비하는 게 타당할 수 있다. 홍콩의 시위가 사회발전에 위협을 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홍콩인의 현재는 사회발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을 돕는가, 막는가
대만해협은 잠재적 발화점으로 불린다. 좁은 바닷길 건너 중국은 수천기의 미사일을 대만을 겨냥해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설 풍력발전소 '포모사 1'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만해협은 전혀 다른 것이다. 최근 한 엔지니어는 청록색 바다 위 터빈클러스터에서 밖을 내다보며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람이 부는 곳"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완전 가동에 돌입하면 대만 포모사 1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첫 번째 상업용 해상 풍력발전소가 된다. 대만 정부는 향후 여러 기의 풍력 발전소를 계획중이다. 대만의 풍력 활용은 핵발전소를 차츰 줄여나간다는 정책과 맞물린다.
대만의 많은 기업들은 이 정책이 국가 전력, 나아가 경제를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의원들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관련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했다. 2017년엔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해 대만 북쪽 지역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차이잉원 총통은 2025년까지 핵발전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측에서는 '목소리만 큰 사회운동가 출신 총통이 정치 시스템을 입맛에 맞게 좌우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이는 명쾌한 해답이 없는 문제를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경제번영에 득이 되는가 실이 되는가.
이런 의문은 중국에서도 들려온다. 중국 학자 장웨이웨이는 한 에세이에서 "대만이 민주주의 20년 동안 무엇을 보여줬는가. 결국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네마리 용 자체적으로도 나온다. 한국과 대만의 노인세대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장징궈 전 총통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적잖다.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 시기 철권을 휘둘렀던 정치인들이다. 대만 폭스콘의 창립자 궈타이밍은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주느냐"고 말했다.
네마리 용 가운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한국과 대만의 정치 환경이 언제나 자부할 만한 건 아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대통령 7명 가운데 3명은 부패로 기소됐고 한 명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1996년 이후 대만의 총통 4명 가운데 3명은 부패에 연루됐다. 그중 한 명은 19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늘 논란을 일으켰던 영국 정치인 에녹 파월은 한때 "모든 정치적 삶은 실패로 끝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처럼 결말이 안 좋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97년 중국에 넘겨진 이후 홍콩 지도자들의 결말도 민주적 진통을 보여준다. 첫 번째 행정장관은 일찍 사임했고, 2대 장관은 수감됐다. 3대 장관은 너무 인기가 없어 재임하지 못했다. 현재 행정장관인 캐리 람은 시민의 반감을 많이 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성격이 희박했던 지방선거가 최근 열렸는데, 사실상 캐리 람에 대한 찬반 투표 성격을 변했다.
싱가포르는 실적중시주의 전통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의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엘리트 중심 정치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시아 네마리 용이라는 별칭을 처음 얻을 당시엔 어느 나라도 자유경쟁 선거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이후 활발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하지만 나머지 두 곳은 여전히 민주적 정도가 약하다. 대만과 한국의 좌충우돌 민주주의와 싱가포르의 관리된 민주주의, 홍콩의 대표성 약한 정치체제를 비교할 수 있다. 그같은 비교로 알 수 있는 건 뭘까.
한국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까지의 수십년의 기간이 그 이후의 기간보다 경제성장이 빨랐다. 하지만 홍콩과 싱가포르도 현재보다 과거에 더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때문에 네마리 용이 현재 겪고 있는 경제성장 둔화를 민주주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지난 수년 간을 놓고 보면, 싱가포르는 민주화된 한국과 대만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반면 홍콩의 성장률은 더 낮았다.
이와 관련 1996년 기념비적인 보고서가 나왔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로버트 배로가 지나친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재분배 공약이 유권자 다수의 입맛에 맞기 때문에 이를 대거 내세운 후보가 당선되고 그 결과 기업의 투자와 노동자의 근로 동기를 희석시킨다고 추론했다. 그의 통계실험을 보면 중간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최적이다. 싱가포르가 현재 허용하고 있는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가장 적절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MIT의 경제학 교수 대런 애쓰모글루 팀은 민주주의가 한 나라의 1인당 GDP를 장기적으로 약 20% 이상 상승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민주주의가 개방성, 교육·건강에 대한 헌신을 장려한다는 점이었다. 그같은 점을 고려하면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우는 개방적이고 교육과 건강에 많이 투자하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오는 경제적 장점을 일부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애쓰모글루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또 다른 측면은 사회적 불만을 희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마리 용의 최근 경험은 그가 옳다는 걸 증명한다. 2016년 한국인들은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비선 실세 조직에 좌우된다는 걸 알았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수백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왔다. 올해 6월 이후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에 분노한 홍콩 시민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온 것과 비슷하다.
민주적인 한국의 정치체제는 그같은 문제에 대처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의회는 공식 탄핵절차에 돌입했고,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통해 탄핵을 확인했다. 박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수감됐다. 그리고 대선이 치러져 후임 대통령이 선출됐다. 반면 홍콩 캐리 람 행정장관은 스스로 물러날 권한마저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가 기업인들과의 대화하는 도중 힘든 직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던 내용이 유출되기도 했다.
홍콩의 정치체제는 시위대의 분노를 받아안는 데 실패했다. 때문에 경찰이 이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민과 정부의 교착국면은 홍콩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고 있다. 내년에도 갈등은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을 돕느냐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주의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경제에 해를 끼치는 건 확실하다.
네마리 용의 민주주의는 이제 20대가 됐다. 아직 청년기인 이들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려울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대만해협 풍력발전소 포모사 1은 지역 언론으로부터 너무 값비싸다고 계속 혹평을 받고 있다. 게다가 8가지의 환경검토를 거쳐야 한다. 풍력개발 프로젝트 최대 주주인 '외르스테드 아시아 퍼시픽' 대표 마티아스 바우센바인은 "풍력개발과 관련한 언론과 환경 검증 과정이 유럽보다 혹독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통과하면 풍력발전에 대한 대만의 지지는 공고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따라갈 리더는 없다 … 이제는 스스로 앞서 날아야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III
2019-12-11 11:33:17 게재
새벽 4시30분이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서울 남구로역 앞 도로에 모인다. 열차를 타러 온 게 아니다. 운행은 1시간 더 있어야 한다. 순대나 샌드위치 등 야식을 사러 나온 것도 아니다. 일당 노동을 하러 나온 이들이다. 주로 건설공사 일용직이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거나 쭈그려 앉거나 기침을 한다. 대부분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대개 걸걸한 중국어를 쏟아낸다.
한국은 한때 순 노동수출국이었다. 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도로를 건설했다. 손전등을 켜고 밤샘작업도 마다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구로역에는 중국인을 포함한 이민노동자들이 모인다. 이들이 한국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
아시아 네마리 용들도 일자리를 걱정한다. 하지만 이들 나라의 실업률은 질투가 날 만큼 낮다. 4%가 채 안된다. 대신 중장기적 우려가 크다.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일을 할 젊은이의 부족이다. 전통적으로 노동가능인구로 분류되는 15~64세의 인구가 4개국 모두 빠르게 줄고 있다. 네마리 용 모두 예외없이 2040년이 되면 65세 이상 인구 대비 노동가능인구 비중이 현재의 일본보다 낮아지게 된다.
네마리 용의 출산률은 전 세계 하위 10위권에 속해 있다. 각국 정부는 이런 흐름을 반전시키려 애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일부 나라에선 정부가 결혼주선에 나서기도 한다. 싱가포르 사회개발네트워크는 결혼 적령기 독신 남녀들이 참여하는 저녁식사와 영화 감상, 보드게임 이벤트를 마련한다. 대만에선 정부가 여러 사람을 돌아가며 만나는 스피드데이트나 자전거 여행 등을 주선한다. 하지만 대만의 한 고위관료는 "전혀 소용이 없다"고 냉정히 평가했다.
이유 중 하나는 네마리 용의 근로문화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광고홍보일을 하다 최근 잦은 야근에 지쳐 일을 그만둔 조이스 양은 "나라가 국민을 직장에 묶어두고자 하는데, 출산율이 낮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반문했다. 한국 정부는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조이스 양은 보다 과감한 방법을 택했다. 호주 이민이다. 그는 현재 호주에 살면서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SNS 친구들에게 '일중독에서 빠져나오라'고 선동한다. 그는 "대만인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산을 막는 첫째 제약요소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비용이다. 사회 전체가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이들의 활동에서 혜택을 본다고 하지만, 이들을 키우는 비용은 정확히 한 집단에 지워진다. 바로 가임연령기 여성이다. 남편의 도움도 쥐꼬리, 국가의 보조도 쥐꼬리인 상황에서 초보 엄마에게 가해지는 가사와 육아, 맞벌이의 하중은 버거워도 너무 버겁다. 때문에 한국의 많은 여성들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되도록 늦게, 만약 아이를 갖는다 해도 1명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들의 어려움은 네마리 용이 가장 자신있게 내세우는 '그 어떤 것' 때문에 더 가중된다. 바로 높은 교육열이다. 네마리 용 모두 상당히 괜찮은 공교육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많은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값비싼 사교육에 돈을 아끼지 말라는 유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물론 이런 노력과 투자가 자녀의 지적 수준이나 미래 생산성 고양에 보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은 단지 간판, 즉 학벌을 노린 것이다. 유명대학에 입학시켜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어떤 면에서 네마리 용의 사교육 열풍은 '군비확장 경쟁'과 유사하다. 어떤 부모가 사교육에 돈을 쓰면 다른 부모도 이유를 불문하고 따라 한다.
한국 정부는 무분별한 사교육 열풍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대학을 단일 네트워크로 묶어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고용주들에겐 대학 간판을 근거로 직원을 뽑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는 아직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측에선 '능력주의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능력'과 '능력으로 보이려는 시도'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며 "능력은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능력으로 보이려는 시도는 해롭다. 네마리 용 부모들은 용의 활력을 꺾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간 줄이고 노동연령 늘여야
인구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네마리 용은 노동시간 줄이기와 노동연령 늘이기를 혼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싱가포르인 네오 퀴 렝은 환갑을 앞두고 중소 상공인으로서의 인생을 포기했다. 대신 노인복지기관인 '러빙하트센터'에서 인생2모작을 일구고 있다. 은퇴한 게 아니라 관리자로 합류했다. 앞선 직업에 비해 일거리가 수월한 것도 아니다. 매일 100여명의 노인을 상대하고 관리한다. 노인들은 각기 다른 요구사항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건강검진을 위해, 또 다른 이는 우쿨렐레를 배우러 센터에 온다. 대화 상대가 필요해 센터를 찾는 노인도 많다.
네오 씨는 센터 관리 기법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엑셀과 데이터 분석을 공부중이다. 시력이 약해진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는 노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는 세미나도 운영한다. 정부가 노인의 평생학습을 장려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네마리 용에서의 평생은 정말 길 수 있다. 출산율이 낮기 때문에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현재 60세라면 평균적으로 또 다른 25년을 살 수 있다. 엑셀과 우쿨렐레를 익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네마리 용이 고령화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은 보다 많은 이민을 허가하는 것이다. 대만의 외국인 노동자 비중은 6%다. 한국은 3.3%다. 서구 기준에선 크게 낮다. 하지만 일본 기준에선 높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비중은 2%에 불과하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우 이민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다. 홍콩 인구의 39%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 중국 본토 출신이 220만명에 달한다. 외국 출생자들은 법원과 정부기관, 경찰 등에서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38만여명이 가정부와 보모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비중은 전체 노동자 중 8% 이상이다.
싱가포르엔 14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전체 노동자 중 3분의 1이 넘는다. 저숙련 일자리를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2013년 정부백서에 따르면 2030년 싱가포르 인구는 69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는 570만명 수준이다. 이민에 개방적인 싱가포르라지만, 이민 급증에 점차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프라와 공공서비스에 과도한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다. 싱가포르에서 거리 시위는 매우 드믄 광경이다. 하지만 이민과 관련해 수천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싱가포르인을 위한 싱가포르를 만들자'는 구호를 외쳤다.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 노동수입, 즉 이민만은 아니다. 자본수출도 있다. 네마리 용은 해외에 빌려주고 투자하면서 자본을 수출할 수 있고, 또 수출하고 있다. 4개국은 외국 노동력의 산출물에 대한 청구권을 차곡차곡 축적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 외국 투자자산에서 나오는 연간 순수입이 시민 1인당 2500달러에 육박한다.
네마리 용은 무역수입보다 수출이 많다. 해외 투자를 위한 자본을 많이 쌓아뒀다. 지난해 싱가포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18%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아직 비난을 던지거나 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곧 변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아시아 용 네마리를 주시하고 있다.
뒤에서 나는 거위들
아시아 네마리 용이 한창 잘 나갈 때에도 이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25년 전인 1994년 12월 미국 경제학자 폴 그루그먼은 포린어페어스 기고 '아시아 경제기적의 미신'에서 "아시아의 역동적 경제가 보여주는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효율성이 개선됐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4개국 경제성장은 노동과 자본의 투입을 급속히 늘려서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땀'(perspiration)에 기반한 경제기적이었다는 것. 크루그먼은 특히 싱가포르의 경우 소련의 스탈린이 무덤에서 기뻐할 정도로 자원을 강제 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땀을 통한 성장 모델은 자연스런 한계에 부닥쳤다. 크루그먼 교수는 "고용률이 계속 늘 수는 없는 법, 자본축적은 결국 이윤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며 "네마리 용의 경제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장둔화에 대한 그의 지적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았다. 4개국은 2010년대 들어 평균 3%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90년대 초 8%에서 하락했다. 하지만 '땀'과 '영감'의 혼합은 크루그먼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노동 투입이 점차 줄면서 '총요소 생산성'이 보다 큰 기여를 했다. 총요소 생산성은 정해진 노동, 자본, 원자재 등 '눈에 보이는' 생산요소 외에 기술개발이나 노사관계, 경영혁신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부문이 얼마나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는가를 나타내는 생산효율성지표다. 일본 도쿄 소재 아시아생산성기구(APO)에 따르면 2000~2017년 네마리 용의 총요소 생산성은 미국 대비 최소 2배 이상 높았다.
네마리 용이 가장 두려워하는 비교는 소련의 스탈린식 산업화가 아니다. 일본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경제침체다. 구매력 기준 일본의 1인당 GDP는 1990년 기준 미국의 85%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70%로 하락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 이유 중 하나는 고령화다. 모나코를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늙은 나라다. 하지만 다가올 30년 네마리 용은 일본보다 더 빨리 고령화된다. 이들 나라는 많은 부분 일본의 경제모델을 따랐다. 한국과 대만은 서비스보다 제조업이 강하다. 또 네마리 용 모두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성공을 따른 것처럼 일본의 실패도 되풀이할 것인가.
물론 일본처럼 표류한다고 해도 이를 실패로 보긴 어렵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은 중진국 함정을 걱정한다. 일본식 침체에 빠지는 것조차 이들에겐 부러움이다. 하지만 네마리 용은 여전히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또 네마리 용은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은 만큼 다른 점도 많다.
일본의 버블 시기와 비교하면, 네마리 용은 금융 보수주의를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시장의 붕괴를 경험한 덕분이다. 네마리 용은 은행들을 상대로 두터운 자본 완충망을 다그쳤고, 대출과 관련한 거시건전성 정책을 개척했다. 게다가 네마리 용은 글로벌 교역 시스템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고 글로벌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대단한 결의를 보이고 있다. 세계경제포럼 선정 '글로벌 경쟁력 지수'나 세계은행 선정 '사업하기 쉬운 나라' 순위에서 네마리 용은 모두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네마리 용이 휘청거린다면, 일본의 실수를 되풀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재적인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만의 경우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히는 것을 줄이려 한다. 하지만 중국은 명실상부 아시아 경제의 중심에 있다. 대만의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경제권력이 소수 기업에 집중돼 있다. 공평한 시스템으로의 요구가 거세지만 정부의 대응법은 효과가 없었거나 반 생산적이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관리적 정치체제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민에 대한 반발을 보면, 싱가포르조차 전 세계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포퓰리즘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홍콩은 후퇴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용이다. 홍콩 시민들은 성공했고 세련됐다.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그럴 마음이 없다.
네마리 용에 필요한 건 현실감각 유지다. 잘못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지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들이 그만큼 많다. 네마리 용 각자 풍부한 장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개발 발전소로 등장했다. 스마트폰에서 아이돌 가수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대만은 지정학적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지만, 스스로를 글로벌 공급망의 필수요소로 만들었다. 또 중소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안팎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홍콩은 명실상부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금융도관이다. 싱가포르는 네마리 용 중 으뜸을 달린다. 소규모 도시국가임에도 경제다각화에 성공했고, 부동산과 관련해 전 세계 곳곳에서 치솟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네마리 용의 미래는 전 세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들의 경제성장 기적은 다른 개발도상국에게 생생한 참고서가 된다. 지난 20년 네마리 용의 경험은 중진국이 어떻게 더 높은 위치로 상승하는지 보여줬다. 선진국들도 네마리 용이 미래를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관심이 많다.
네마리 용은 미래를 개척하는 시험지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동시에 선진국을 두렵게 하는 수많은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갖고 있다. 자동화의 영향에서 노동자를 어떻게 보호할지, 생산성 증대를 어떻게 되살릴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지, 임금정체와 치솟는 부동산 가격 문제를 어떻게 헤처나갈지 등이다.
'네마리 용'이라는 별칭을 얻기 전 4개국을 가리키는 비유는 '일본 뒤를 따르는 기러기들'(flying geese)이었다. 기러기들은 리더의 뒤를 따르는 게 훨씬 쉽다. 리더의 날개가 만들어내는 추가 부양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의 비유가 망각한 게 있다. 기러기들은 리더와 추격자 역할을 교대한다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홍콩과 싱가포르, 대만과 한국은 선진 경제의 뒤에서 안락하게 수십년을 날았다"며 "네마리 용에게 좋으면서 나쁜 소식은 이제 그런 리더는 없다. 스스로 앞서 날아야 한다"고 전했다.
- 끝 -
(내일신문에서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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