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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파구리'를 '람동'으로 바꿨더니… 전세계서 빵빵 터지네요

이강기 2019. 12. 26. 14:31

'짜파구리'를 '람동'으로 바꿨더니… 전세계서 빵빵 터지네요

조선일보
    입력 2019.12.26 03:00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14] 한국어 말맛 살리는 번역의 힘 - 영화 '기생충' 번역가 달시 파켓

칸 황금종려상 수상의 일등공신… 한국어 의미 살린 신조어 만들어
'곡성' '아가씨' 등 100여편 번역
"'거시기' 같은 사투리 앞에서는 아직도 머리를 쥐어뜯죠, 하하"

'한국말을 번역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 가령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에서 '거시기가 거시기여?'라는 대사를 보고 저 대사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보수를 잘 받았길 속으로 빌었다. 나라면 '거시기'란 말 때문에 번역을 포기했을 것 같아서였다.'

영화평론가 겸 번역가 달시 파켓(47)이 최근 한 매체에 쓴 칼럼의 일부다. 파켓은 한국 사람보다 한국 영화를 더 사랑하는 미국인이다. 1997년 한국에 와서 우리말을 배웠고 우리나라 여성과 결혼했다. 한국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번역 일을 시작했다. '옥자'를 제외한 봉준호 감독의 대다수 작품과 나홍진 감독의 '곡성',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등 100여편이 그의 손을 거쳐 번역됐다. 올해는 파켓의 번역이 전 세계 사람들을 울고 웃긴 한 해였다. 그가 번역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골든글로브상 후보와 아카데미상 예비 후보에 오른 데다, 북미에서도 인기몰이를 계속했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25일까지 '기생충'은 미국에서만 2135만달러(약 248억원)를 벌어들였다. 올해 북미에서 개봉한 외국어 영화 흥행 1위다. 파켓은 "내 번역이 누를 끼치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달시 파켓에게 ‘자신의 번역 중 가장 잘한 것’을 묻자 영화 ‘히말라야’의 한 대사를 꼽았다. 엄홍길(황정민)이 밤늦게 집에서 혼자 소주 마실 때 아내가 “안주도 없이”라고 말한 것을 “at least eat something(뭐라도 먹지)”으로 번역한 것. “술 마실 때 안주를 빼놓지 않는 한국 문화를 몰라도, 영화 속 상황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압축적인 번역이죠.”
달시 파켓에게 ‘자신의 번역 중 가장 잘한 것’을 묻자 영화 ‘히말라야’의 한 대사를 꼽았다. 엄홍길(황정민)이 밤늦게 집에서 혼자 소주 마실 때 아내가 “안주도 없이”라고 말한 것을 “at least eat something(뭐라도 먹지)”으로 번역한 것. “술 마실 때 안주를 빼놓지 않는 한국 문화를 몰라도, 영화 속 상황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압축적인 번역이죠.” /이태경 기자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 조금씩 배워나갔다. 파켓은 "한국어의 말맛을 어느덧 깨닫기 시작했고 번역까지 하게 됐다. 외국인이지만 한국말을 배워서 번역한 것이 또 다른 강점이 된 것 같기도 하다"라고 했다. 요즘도 그는 한국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웹사이트(Koreanfilm.org)를 운영한다.

'기생충'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영어 번역은 송강호가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냐?"라고 한 것을 "옥스퍼드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냐?(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로 바꾼 것. 달시 파켓은 "일단 자막은 짧을수록 좋다. 서울대(Seoul National University)는 단어부터 길었다"고 했다. "한국인 아니면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 모를 수도 있고. 하버드는 늘 나오는 이름이니 좀 다르게 가려고 옥스퍼드를 골랐다. 그 자체로 대사에 숨겨진 웃음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고 봤다."

'짜파구리'를 '람동(ramdon·ramen+udon)'으로 번역한 것도 화제였다. 파켓은 "영화에서 충숙이 짜파구리를 끓일 때 양옆에 라면과 짜파게티가 있었다. 그것을 활용해서 화면에도 라면·우동이라고 써줬다. 한국을 잘 모르는 이도 영화 속 공기와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번역의 묘미라고 믿는다"고 했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한국말의 매력에 더 눈이 뜨였다. "러시아어를 7년 넘게 공부했고 다른 나라 말도 많이 공부해봤지만 한국말은 좀 더 유연하다. 주어를 생략하거나 어순을 바꾸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새 뜻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말의 억양도 재밌었다. "말을 얼마나 올리고 내리느냐에 따라 뜻이 전혀 달라지고 더 풍성한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니까."

그래도 번역은 쉽지 않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할 땐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나 이화여대 나왔어(I'm an Ewha Womans University graduate)'로 할지, '나 명문대 나왔어(I'm a gra duate of a prestigious university)'로 할지, 아예 미국 명문 '웰즐리 여대'로 해야 하나 고민했다"는 것. 결국 맨 처음 번역을 선택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은 '정(情)'이나 '소나기'처럼 그가 쉽게 번역할 수 없는 단어다. "소나기를 레인샤워(rainshower)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말이 훨씬 더 예쁘니까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26/20191226001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