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1.21 03:00
결혼하려 왕위 걷어찬 큰아버지, 갱두목 등과 염문 뿌린 여동생… 英여왕, 여론 악화전 재빨리 수습
WP "역시 위기관리 달인" 호평
"여왕은 역시 위기 관리의 프로페셔널이었다."(미 워싱턴포스트)
"오해 여지가 없는 명확한 조치로 왕실을 지켰다."(영 텔레그래프)
엘리자베스 2세(93) 여왕이 해리(35) 왕손과 메건 마클(38) 부부의 독립 선언, 이른바 '메그시트(Megxit·메건의 왕실 탈퇴)'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하자 영·미 여론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여왕은 지난 18일 두 사람의 공무와 존칭, 재정 지원 등을 박탈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해리 부부가 8일 기습적 '독립 선언'으로 영국을 충격에 빠뜨린 지 불과 열흘 만이다. 인디펜던트 등 영 매체들은 여왕의 결단이 빨라진 건 바람 잘 날 없던 왕실이 숱하게 겪은 시행착오 덕이라고 분석한다.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8세
"오해 여지가 없는 명확한 조치로 왕실을 지켰다."(영 텔레그래프)
엘리자베스 2세(93) 여왕이 해리(35) 왕손과 메건 마클(38) 부부의 독립 선언, 이른바 '메그시트(Megxit·메건의 왕실 탈퇴)'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하자 영·미 여론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여왕은 지난 18일 두 사람의 공무와 존칭, 재정 지원 등을 박탈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해리 부부가 8일 기습적 '독립 선언'으로 영국을 충격에 빠뜨린 지 불과 열흘 만이다. 인디펜던트 등 영 매체들은 여왕의 결단이 빨라진 건 바람 잘 날 없던 왕실이 숱하게 겪은 시행착오 덕이라고 분석한다.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8세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실 위기 트라우마'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 전 국왕에게서 시작됐다.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안 돼 갑자기 물러났다. 미국 여성 월리스 심프슨과 하려는 결혼을 국민이 반대하자 당시 세계 최강국의 왕 자리를 걷어찬 것이다. 심프슨은 두 번째 이혼을 진행 중인 유부녀였다. 열 살이었던 여왕은 아버지 조지 6세가 갑자기 왕위에 올라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왕위를 얼마나 무겁게 다뤄야 하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1937년 프랑스에 망명해 심프슨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왕실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윈저공 전하'란 호칭만 받고 세계를 유랑했다. 2차 대전 때 나치를 옹호해 영국을 경악시켰고 "돈 떨어졌다" "심프슨에게 작위를 달라"며 동생을 졸라 구설에 올랐다. 데일리메일은 "해리가 미국 이혼녀(메건) 때문에 왕실을 등진 과정이 에드워드 8세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며 "여왕도 큰아버지의 기억 때문에 해리를 하루빨리 정리하려 했을 것"이라고 했다.
◇골칫덩이 동생 마거릿 공주
여왕의 유일한 형제 마거릿 공주는 '세계의 연인' 소리를 들은 미인이었지만 내내 왕실의 골칫덩이였다. 언니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마거릿은 16세 때부터 17세 연상 이혼남인 시종 무관(경호원)과 6년간 사귀었다. 이 결혼이 무산되자 1960년 왕실 전속 사진가와 결혼했다. 이후 정원사, 갱단 두목, 배우 등과 염문을 뿌렸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 마거릿의 작위와 왕위 계승 서열을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여왕과 어머니는 끝까지 마거릿을 감쌌다.
◇왕실에 최대 타격, 다이애나
왕실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존재는 여왕의 큰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왕실의 아이콘 같은 인물인데 왕실이 배척한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는 윌리엄·해리 두 왕손을 낳았지만 결혼은 11년 만에 파탄 났다. 1992년 별거에 들어갔다. 1994년 찰스가 카멀라 파커볼스와 저지른 불륜을 공식 인정한 날, 다이애나는 노출이 파격적인 검은 '리벤지 드레스(revenge dress)'를 입고 나타났다. 끝없는 추문 보도로 왕실은 만신창이가 됐다.
다이애나는 1996년 이혼 당시 작위와 존칭을 모두 버렸다. 이듬해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영국 국민은 런던 버킹엄궁이 조기(弔旗)를 달지 않고 모르는 척하자 분노했다. 민심을 놓친 것을 알아차린 여왕은 이틀 만에 국장에 준하는 장례를 지시하고, 다이애나의 관에 직접 머리 숙여 조의를 표했다.
◇성추문으로 사퇴, 앤드루 왕자
지난해 11월엔 여왕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차남 앤드루 왕자(59)가 공직에서 물러났다. 미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어울리며 10대 소녀들의 성접대를 받았다는 추문 때문이다. 처음 의혹이 제기된 건 5년 전인데, 왕실은 은폐에 급급했다. 그러나 2019년 엡스타인이 수감 중 자살하면서 성노예 피해자들의 분노가 앤드루를 향했다. 앤드루는 BBC에 나와 의혹을 부인하면서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더 이상 들끓는 여론을 덮기 어렵다고 판단한 여왕은 BBC 인터뷰 닷새 만에 아들의 사과와 사퇴 성명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메그시트'가 터졌다.
에드워드 8세는 1937년 프랑스에 망명해 심프슨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왕실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윈저공 전하'란 호칭만 받고 세계를 유랑했다. 2차 대전 때 나치를 옹호해 영국을 경악시켰고 "돈 떨어졌다" "심프슨에게 작위를 달라"며 동생을 졸라 구설에 올랐다. 데일리메일은 "해리가 미국 이혼녀(메건) 때문에 왕실을 등진 과정이 에드워드 8세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며 "여왕도 큰아버지의 기억 때문에 해리를 하루빨리 정리하려 했을 것"이라고 했다.
◇골칫덩이 동생 마거릿 공주
여왕의 유일한 형제 마거릿 공주는 '세계의 연인' 소리를 들은 미인이었지만 내내 왕실의 골칫덩이였다. 언니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마거릿은 16세 때부터 17세 연상 이혼남인 시종 무관(경호원)과 6년간 사귀었다. 이 결혼이 무산되자 1960년 왕실 전속 사진가와 결혼했다. 이후 정원사, 갱단 두목, 배우 등과 염문을 뿌렸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 마거릿의 작위와 왕위 계승 서열을 박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여왕과 어머니는 끝까지 마거릿을 감쌌다.
◇왕실에 최대 타격, 다이애나
왕실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존재는 여왕의 큰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왕실의 아이콘 같은 인물인데 왕실이 배척한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는 윌리엄·해리 두 왕손을 낳았지만 결혼은 11년 만에 파탄 났다. 1992년 별거에 들어갔다. 1994년 찰스가 카멀라 파커볼스와 저지른 불륜을 공식 인정한 날, 다이애나는 노출이 파격적인 검은 '리벤지 드레스(revenge dress)'를 입고 나타났다. 끝없는 추문 보도로 왕실은 만신창이가 됐다.
다이애나는 1996년 이혼 당시 작위와 존칭을 모두 버렸다. 이듬해 파리에서 파파라치에게 쫓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영국 국민은 런던 버킹엄궁이 조기(弔旗)를 달지 않고 모르는 척하자 분노했다. 민심을 놓친 것을 알아차린 여왕은 이틀 만에 국장에 준하는 장례를 지시하고, 다이애나의 관에 직접 머리 숙여 조의를 표했다.
◇성추문으로 사퇴, 앤드루 왕자
지난해 11월엔 여왕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차남 앤드루 왕자(59)가 공직에서 물러났다. 미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어울리며 10대 소녀들의 성접대를 받았다는 추문 때문이다. 처음 의혹이 제기된 건 5년 전인데, 왕실은 은폐에 급급했다. 그러나 2019년 엡스타인이 수감 중 자살하면서 성노예 피해자들의 분노가 앤드루를 향했다. 앤드루는 BBC에 나와 의혹을 부인하면서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더 이상 들끓는 여론을 덮기 어렵다고 판단한 여왕은 BBC 인터뷰 닷새 만에 아들의 사과와 사퇴 성명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메그시트'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