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韓, 南北關係

‘전쟁광’ 김정은, 흡수통일 위한 全面戰 계획했었다

이강기 2020. 1. 22.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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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광’ 김정은, 흡수통일 위한 全面戰 계획했었다

김정은 2015년 南侵 검토, 기계화부대 등 軍부대 부실로 포기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2020년 2월호


척추질환을 앓고 있던 황병서는 김관진 실장을 화장실까지 따라와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는 김 실장 앞에서 전투복 상의를 벗었다. 허리 쪽에 시커먼 때가 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황병서가 말했다. “김 선생, 나 좀 살려주시오.”

⊙ 김정은, 2015년 ‘통일대전 완성의 해’ 선언하고 전면전 검토
⊙ 목함지뢰 등 도발로 틈틈이 기회 엿보던 김정은, 軍부대 시찰 중 탱크 절반 고장 난 사실 알고 절망
⊙ “탱크 몰아보라”는 김정은 지시 이행하지 못한 탱크병들
⊙ “북한 탱크병 중 실제 탱크 몰아본 병사 거의 없다”
⊙ 김정은, “자존심 상하지만 남한에 통 크게 양보하는 척하며 시간 끌라” 지시
⊙ 軍 고위층 “장군님, 우리 군사력이 南보다 훨씬 강하다”며 물러서면 안 된다 의견
⊙ 박근혜·김관진 호락호락하지 않자, 웃통 벗어 허리 쪽에 붕대 감은 모습 보여준 황병서
⊙ 김정은, 적화 흡수통일 목표 전혀 변하지 않아… 문재인 정부는 평화 성큼 다가왔다 주장
         

  북한 김정은이 2015년 ‘준전시(準戰時) 상태’를 선언하고 전면전(全面戰)을 검토했지만 전투태세를 검열하는 과정에서 전혀 준비가 안 된 기계화부대 실체에 실망하고 꼬리를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최근 고위 탈북자는 이 같은 정보를 문재인 정부에 제공했다. 그는 이외에도 효용 가치가 있는 정보를 다수 알렸다. 통일부는 이 고위 탈북자에게 국가 안전보장과 관련한 정보를 수사·정보기관에 알리거나 북한 무기나 장비 등을 가져온 이들에게 지급하는 ‘보로금(報勞金)’을 지급했다. 이 탈북자는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액수(1억3000만원 상당)의 보로금을 받았다. 그만큼 이 탈북자의 정보가 사실이거나, 팩트(fact)에 가깝다는 뜻이다.
 
  《월간조선》은 정보 당국이 이 고위 탈북자의 주장을 정리한 문서 내용을 토대로 여러 고위급 탈북자와 북한 전문가를 다수 접촉해 당시 상황을 정밀 추적했다.
 
 
  2010년부터 北 주민 사이에서는 ‘전쟁광’으로 알려져
 
  김정은은 김정일이 죽기 한 해 전인 2010년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은 젊은 독재자를 ‘전쟁광(戰爭狂)’으로 평가했다. 김정일이 살아 있었지만,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대남 도발을 주도한 게 김정은이기 때문이었다.
 
  열린북한방송은 자강도 강계시의 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밝혔다.
 
  “주민들 사이에서 ‘김정은이 2010년 10월 10일 당 창건 기념일 행사에서 열병식을 하자마자 연평도 사건이 터졌다’는 말들이 돈다. 북한 당국이 ‘김정일보다 담력과 배짱이 있는 김정은이 총대로 남조선을 통일할 것’이라는 선전을 하고 있다.”
 
  실제 김정은은 ‘총대로 남조선을 통일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식 집권 1년 뒤인 2013년 2월 3차 핵실험 후 한반도 주변 정세가 매우 급하게 돌아가자, 그해 3월 ‘준전시 작전계획’을 만들었다.
 
  《도쿄신문》이 입수한 작전계획 문건을 보면 황해남도의 군(郡) 인민보안서가 작성한 극비 문서로, 상부 기관인 황해남도의 인민보안국 국장이 승인한 것이다. 이 작전계획 서두에는 ‘전시 동원령이 내려지면 즉시 전시 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조직적인 대책을 세운 문서를 준비해야 한다’는 김정은(당시 군 최고사령관)의 말이 소개돼 있다.
 
  이 문서는 보안서의 첫 번째 임무를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태양궁전과 당 중앙위원회 사수’라고 규정하고 있다. 적의 공습을 격퇴하고, 인민군과 협력해 적의 특수부대와 스파이에 의한 파괴 공작과 ‘불순 적대 분자’를 철저히 소멸한다는 내용도 있다.
 
  ‘김정은 동지 결사 옹호 사업’ 항목에선 ‘파괴 공작 분자’의 목표가 될 수 있는 주요 도로와 철도, 중요 지역을 현지 조사하고 호위 사업의 안전성을 확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부 치안 기관인 분주소(파출소)가 체제에 불만이 있거나 유사시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을 철저하게 파악·감시·통제하도록 하고 있다. 위험 대상자는 멀리 추방하라는 내용도 있다.
 
 
  호시탐탐 기회 엿본 김정은
 
  남한을 흡수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김정은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김정은은 2014년 말 2015년을 ‘통일대전 완성의 해’로 선포하고 전면전 준비를 했다.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서를 보면, 북한군은 2015년 하계훈련을 예년 대비 2배로 늘렸다.
 
  2014년 북한 무인기 침투, 2015년 8월 4일 비무장지대(DMZ) 내 목함지뢰 도발과 8월 20일 서부전선 기습포격 도발 등도 목표 달성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목함지뢰 도발의 경우 북한은 군사분계선 남쪽 우리 측 지역을 440m나 넘어 들어와 지뢰를 묻어놓았다. 이 도발로 우리 군의 21세, 23세 청년이 각각 두 다리와 한쪽 다리를 잃었다. 5년 전 북한이 심야에 잠수정을 서해 북방한계선 남쪽으로 몰래 내려보내 물밑에서 천안함을 폭침(爆沈)한 수법을, 이번엔 땅밑에서 똑같이 써먹은 것이다.
 
  합동참모본부는 “현장에서 수거한 철제 용수철 등 잔해물 43점이 북한제 목함지뢰 부품과 일치했다”며 “사고 지역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북측 지역 지뢰가 빗물 등에 휩쓸려 우리 쪽으로 흘러올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미국·뉴질랜드·콜롬비아 등 유엔 군사령부도 공동 조사를 벌여 같은 결론을 내렸다.
 
 
  큰 충격 받은 김정은
 
김정은이 ‘조선인민군 땅크병경기대회-2016’을 참관했을 때 모습. 김정은은 2015년 남침(南侵)을 염두에 두고, 군을 점검했는데, 탱크 절반이 고장 난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김정은을 참수(斬首)하는 것과 국가정보원을 통해 북한의 반(反)체제 세력을 지원해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가만있지 않았다.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북은 ‘전면전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며 준전시 상태를 선언하고 전군에 무장 명령을 내리는 등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김정은은 최전방 DMZ 인근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확성기로 인해 북한군이 김정은 폭정(暴政)과 은밀한 가족 관계, 인권 탄압 등을 깨닫는 경우가 많아서다. 북은 외부 정보에 노출되면 버틸 수 없는 가짜 체제, 연극 체제다. 김정은은 미국 폭격기보다 확성기 진실이 더 무서울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준전시 상태 선포로 북한 주민들은 피란길에 오르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고위급 탈북자는 “당시 김정은이 준전시 상태를 선포한 후 북한 접경 지역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며 “평양~나진행 열차가 도착하자 황해남도와 황해북도, 강원도 지역에서 피란 온 어린 학생과 노인들이 열차방통(열차 차칸)이 미어질 정도로 쏟아졌다. 사실상 전시 상태를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당시 남침(南侵)을 염두에 두고 군을 점검했다. 그런데 이때 일이 터졌다. 김정은이 방문한 기계화부대 내 탱크 절반이 고장 난 상태였고, 그나마 절반뿐인 탱크도 제대로 운전할 수 있는 병사가 없었다.
 
  “탱크 절반을 가동할 수 없다는 점에 절망한 김정은이 병사들에게 탱크 운전을 시켰는데, 한 명도 제대로 조작하지 못했습니다. 김정은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탱크병들이 탱크 운전하는 시간은 한 해 3시간뿐
 
  북한 최정예 전차부대인 ‘105탱크사단’ 장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다.
 
  “북한군 탱크병들이 탱크를 가지고 훈련하는 것은 한 해 10시간도 채 안 될 것입니다. 이마저도 탱크 정비가 끝나고 나서 문제가 없는지 잠깐 발동(시동) 걸어보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지요. 순수하게 발동을 걸고 움직이는 시간만 계산한다면 3시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군 복무 10~12년 동안 기동훈련에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하는 운전사가 수두룩합니다. 탱크 운전은 운전병만 하는데, 자신이 운전병일 때 기동훈련이 없어 못하다가, 계급이 올라 부분대장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북한군 탱크부대에서 15년을 복무했는데 탱크를 몰고 기동훈련을 한 것은 세 번뿐이었습니다. 운전 경험이 너무 없다 보니까 간혹 있는 훈련 때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다리를 건너가다 전복된다든지, 길을 가다가 차와 충돌한다든지 하는 것이지요. 북한에서 탱크병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대부분 북한 탱크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 탱크의 철갑은 웬만한 포탄으로는 뚫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탱크병들은 잘 죽지 않는다는 식이지요.”
 
 
  탱크 배터리 TV 보는 데 사용하는 북한군 간부
 
흡수통일이 목표인 김정은은 허술한 군에 실망한 뒤 측근들에게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군 출신 탈북자는 “군 간부들은 탱크 배터리를 TV 보고 조명 켜는 데 사용한다”고 폭로했다.
 
  “배터리의 경우 탱크 1대에 4개가 들어가는데 각각의 배터리는 12V(볼트)에 180A(암페아)입니다. 기본적으로 북한에는 전기가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탱크 배터리를 이용해 부족한 전기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부대 주변의 농장마을 반장급 이상 되는 사람들 집에 가보면 탱크 배터리 없는 집이 없습니다.”
 
  그는 “북한군 장교들은 코앞에 닥친 고민이 먹고사는 문제인 만큼 군사력, 작전, 전술에 관한 고민보다 먹고살려는 고민이 더 앞선다”며 “어디에 가면 (군 용품을) 더 많이 빼앗아올 수 있을지만 궁리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탱크부대에 애착이 강했다. 6·25 당시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북한군 부대는 105탱크여단 소속으로, 북한군 3사단과 4사단에 각각 배속됐던 107탱크연대와 109탱크연대였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한 공로를 인정해 1950년 7월 5일 105탱크여단에 ‘서울’ 칭호를 수여했다. 2001년 5월 23일에는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명령으로, 서울 점령 당시 여단장이던 류경수(1915~1958년)의 공적을 기려 부대 이름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그래서 그 뒤로 이 부대는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탱크사단’으로 불리고 있다.
 
  북한군의 실체에 큰 충격을 받은 김정은은 고위층만 모인 회의에서 “지금 당장은 전면전이 어려우니, 시간을 끌자”고 했다.
 
  당시 몇몇 간부들은 “장군님, 우리의 군사력이 훨씬 강한데 확 밀어버리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말했다.
 
  “나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군을 정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이 상황을 우리가 통 크게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해결하라.”
 
  2015년 북한이 지뢰·포격 도발을 한 후, 우리 군이 북 지역으로 155mm 자주포 29발을 동시 사격하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먼저 협상을 제안한 데에는 실제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全軍을 지휘했던 사람이요”(김관진)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관진 전 실장은 과거 북이 도발하면 겉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실효성 있는 대북 응징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던 역대 정부의 군 통수권자, 외교·안보 책임자와는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일관되게 북에 밀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2015년 8월 22일 북한은 조선인민군 서열 1위인 황병서 총정치국장을 협상 대표로 내보냈다. 북한의 비무장지대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 도발로 초래된 한반도 군사적 긴장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이 시작됐다. 아무리 김정은이 통 크게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했어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지뢰 도발에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시종 도발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우리는 다른 건 포기하더라도 북측의 유감 표명만은 받아내야 했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과거 북한이 저지른 도발을 언급했다. 그는 “북측은 도발하고 어물쩍 넘어가는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남측이 먼저 무력 도발을 한 적이 있느냐”고 따졌다.
 
  황병서는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잘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김 실장은 직접 사고 현장의 지형과 토질 등을 설명하며 “이것은 누가 봐도 물에 휩쓸려 온 게 아니라 누군가 매설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1명이든 2명이든 10명이든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북측의 도발로 우리 젊은이 2명의 인생이 비틀린 것을 우리 국민이 용납 못 한다”며 “북측은 이에 상응한 조치를 분명히 취하라”고 했다. 하지만 북측 대표들은 “남측의 주장일 뿐이다. 와서 본 것도 아니고 잘 모르는 일인데 자꾸 과거를 들춰내 따지지 말라”며 화제를 바꾸려 했다. 우리 측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것이 과거냐. 지뢰 건이 정리돼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맞섰다.
 
  결국 북측은 우리 측이 제시한 문안 뒤에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북남 간에 공동 노력한다’는 표현을 넣는 데까지는 합의를 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대표단에 ‘수용 불가’ 지침을 내렸다. 지뢰 사고가 남북 공동의 책임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포격 도발에 대해서도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 실장은 “내가 전군(全軍)을 지휘했던 사람”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김 실장은 우리 군 장비(대포병 레이더)의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이 장비에 어떤 궤적이 기록됐는지, 왜 북측의 소행일 수밖에 없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관진 전 실장은 과거 북이 도발하면 겉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실효성 있는 대북 응징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던, 역대 정부의 군 통수권자, 외교·안보 책임자와는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일관되게 북에 밀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김 선생, 나 좀 살려주시오”(황병서)
 
북한의 포격 도발로 인한 대치상황과 관련해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역사적인 타결을 한 2015년 8월 25일 새벽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우리 측 대표 김관진(오른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북측 대표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제공
  척추질환을 앓고 있던 황병서는 김관진 실장을 화장실까지 따라와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는 김 실장 앞에서 전투복 상의를 벗었다. 허리 쪽에 시커먼 때가 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황병서가 말했다. “김 선생, 나 좀 살려주시오.”
 
  애틋했지만 김 실장이 누군가.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군인 아닌가.
 
  “황 선생, 좋은 날 오면 내 좋은 병원 소개해드리리다. 그래도 협상은 양보할 수 없소. 북한이 잘못한 것 아니오.”
 
  사실 김 실장은 기자에게 비보도(非報道)를 전제로 사석에서 이 비화(祕話)를 공개했다. 비보도 이유는 황병서가 건재한데 이런 말이 새어나가면 그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현재 황병서는 처형됐을 가능성이 크기에 공개하는 것이다.
 
  참고로 여러 정보를 종합하면 북한 군부의 최고위직인 총정치국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던 황병서는 2017년 10월부터 진행된 당 조직지도부 주도의 검열로 해임됐다. 이후 김일성 고급당학교에서 사상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19년 5~6월경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北 휴전 후 최초로 자신 도발 시인
 
  2015년 8월 22일부터 25일 새벽까지 4일간 43시간의 마라톤 협상을 진행한 끝에 남북은 극적으로 접점을 찾았다. 협상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 측이 핵심 요구 사항을 관철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이 휴전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도발을 사실상 시인하고 유감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북은 그동안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명백한 자신들의 도발 행위 자체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자작극’이라고 몰아왔다. 이런 행태에 비춰 보면 이번 ‘유감 표명’은 유감 표명의 주체가 북한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했다는 점에서 북이 우리 측 요구를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김 실장의 이야기다.
 
  “당시 회담에서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김정은, 어느 부대 시찰했다가 충격받았나?
 
  북이 휴전 이후 최초로 자신들의 도발을 사실상 시인하고 유감을 표명한 데에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가 박근혜·김관진의 북에 밀리지 않는 뚝심 있는 태도 고수였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군 부실로 인한 김정은의 충격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짚어봐야 할 게 있다. 바로 김정은이 어느 부대를 방문했을 때 무력감을 느끼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이다.
 
  《월간조선》은 《로동신문》,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김정은이 2015년 한 해 공식적으로 방문한 모든 군부대를 살펴봤다. 김정은은 2015년 1월 13일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부 시찰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4일 제526대 연합부대, 제671대 연합부대 쌍방기동 훈련 참관까지 총 40곳의 군부대를 찾았다.
 
  여기서 김정은이 군부대를 방문한 뒤 충격을 받은 시기는 호기롭게 목함지뢰를 매설한 후부터 남북 고위급 회담 제의를 하기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목함지뢰 매설 시기는 2015년 7월 26일부터 8월 1일로 추정된다. 군은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150mm 호우가 내렸고, 북한군 GP 병력이 같은 달 25일 교대한 것으로 미뤄 이같이 분석했다.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은 8월 22일에 있었으니, 김정은이 7월 말부터 8월 22일 전까지 방문한 군부대를 분석하면 실마리가 풀릴지 모른다.
 
  해당 시기에 김정은이 방문한 군부대는 7월 30일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 성원들의 전투비행술 경기대회와 8월 13일 제810군부대 산하 1116호 농장 두 곳뿐이었다. 모두 탱크와는 관련 없는 부대다.
 
  다각도로 취재한 결과, 김정은은 2군단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믿었던 탱크부대에 절망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2015년 8월 22일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 직후인 8월 말 2군단장이 김상룡에서 방두섭으로 교체됐기 때문이다.
 
  2군단은 최전방에 배치된 4개 군단(서쪽부터 4·2·5·1군단) 중 하나로 중서부 전선을 관할한다. 총병력은 10만명으로 추정된다. 최전방 경계소초(GOP)를 담당하는 6사단·15사단 등 보병사단 4~5곳 외에 기갑·포병·공병·항공 부대 등 7~8개 사단급 전력으로 구성돼 있다. 군 관계자는 “인접 5군단과 함께 중부 전선을 담당하는 한편 전시(戰時) 최선봉 부대로서 북한군 주력(기계화부대)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김상룡이 교체된 것은 북한이 지뢰·포격 도발에 이어 준전시 상태를 선포했을 때 2군단이 화력 배치를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 문제가 됐다고 박근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설명했다.
 
  당시 2군단에 검열을 나온 상급부대 요원이 작전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올린 것으로 전해졌는데, 김정은이 직접 검열을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상룡에 대해선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다. 2014년 4월 김정은이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로 전방 군단장을 물갈이할 때 등장했다. 김상룡은 그해 정전협정 체결 61주년인 7월 27일 육해공·전략군 결의대회에 토론자로 나와 “가소롭게도 흡수통일과 평양 점령을 꿈꾸는 미제와 청와대 얼간 망둥이들에게 진짜 전쟁 맛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남녘 해방의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10월 경기도 파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벌어진 총격전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의 목표는 여전히 적화 흡수통일
 
  김정은의 대한민국 적화·흡수통일의 야욕은 현재도 진행형일까. 문재인 정부는 대표 업적으로 치켜세우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들이대며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양측이 종전을 선언한 만큼 김정은의 남침 계획은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당시 판문점에서 양측은 2018년에 종전을 선언하기로 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게다가 2019년에는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탄도미사일 시험만 13차례 했다. 김정은은 폐쇄를 약속한 ‘미사일 실험장’에서 신형 엔진에 불을 붙이더니 ‘충격적 행동’ 운운하며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핵무기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있고 없음’이 중요하다. 추정치지만 북한에는 25기 정도의 핵탄두가 있다. 이게 동시에 날아오면 100% 요격은 불가능하다. 요격을 피해 우리 땅에 떨어지는 한 발의 핵탄두가 문제다. 북한은 그래서 “우리는 잃을 게 없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그의 선대(先代)보다 경제 발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정의의 보검’이라고 불러온 핵무기 개발에 여전히 몰두하는 이유다.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김정은의 남침 야욕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는데, 문재인 정부는 아무 대책도 없이 평화가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7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 여건이 하루빨리 갖춰질 수 있도록 남북이 노력하자”고 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노력” “남북 철도·도로 연결” “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도 언급했다. “우리 정부 들어 평화가 성큼 다가왔다”는 말까지 했다. 대통령 신년사만 들으면 한반도에 드리웠던 북핵 먹구름이 걷히고 남북 평화 시대가 활짝 열린 듯하다. 하지만 현실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14일에도 “남북관계는 우리의 문제”라며 “우리가 좀더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 수준으로 남한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북한의 메시지를 잘 보면 비핵화 대화는 북·미 간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남북관계 발전이나 남북 협력을 위한 대화를 거부하는 메시지는 아직 전혀 없는 상태”라며 말한 것이다.
 
 
  김정은이 終戰 선언에 매달리는 이유
 
  김정은이 종전(終戰) 선언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 종전 선언이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면, 이는 북한 정권 체제 안보에 큰힘이 된다. 또 북한의 오랜 목표인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를 향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는 측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종전 선언이 성사되면, 이를 계기로 북한은 국제사회에 대북(對北) 제재 완화를 공식 요구할 수 있다.
 
  김정은이 ‘착한 남자’라고 무조건 믿으면서 국민에게도 믿으라 강요하는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남북관계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남북관계 어젠다를 바탕으로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국민은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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