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나당전쟁

이강기 2020. 2. 4. 17:21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나당전쟁



고성혁의_역사추적

조선일보, 2020-02-03


우리 민족사에서 선제공격으로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적이 있었을까? 딱 한번 있었다. 바로 7년간 이어진 나당전쟁이다. 좌편향된 국사교육에서 신라는 항상 폄하되었다. 신라는 외세를 끌어들여서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케 했다는 일종의 ‘민족의 반역자’라는 굴레를 덧씌워 놓고 있다. 오늘날에는 미국을 외세로, 북한을 고구려로 치환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나당전쟁에 대해선 제대로 가르치지도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통일전쟁에서 신라가 보여준 외교술과 군사전략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 남북통일을 민족의 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는 신라의 통일과정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 최후진국이던 신라가 한반도 패권을 차지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군사외교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신라처럼 동맹을 기반으로 급성장을 했다. 그런데 이제와선 상황이 달라졌다.  신라가 당시 초강대국이던 당나라에 맞서 싸웠던 전술을 지금은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670년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당군을 선제공격했다. 당나라의 주력군인 설인귀 부대가 서역 토번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었다. 신라가 피 흘려 얻은 백제와 고구려 땅을 오히려 당나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통해서 말이다. 때를 기다리던 신라가 먼저 요동도호부를 공략했다.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 부대와 신라의 설오유 부대가 압록강 건너 당군의 주둔지인 오골성(단동시)를 공격했다. 7년 나당전쟁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를 즉각 응징할 수 없었다. 당나라의 주력군이 서역 토번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당나라가 한반도에 집중하던 시기 토번(티벳)이 그 틈을 이용해서 군사적으로 급성장했다 토번은 실크로드인 서역남로를 점령하여 무역로까지 확보했다. 당나라로서는 교역의 길이 끊긴 셈이다. 결국 동북아에 있던 당의 주력을 서역인 티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對토번전에 670년 설인귀를 투입한데 이어 강각까지 투입시켰다. 당나라의 주력군은 신라의 안동도호부 공략에도 어쩔 수 없이 토번과의 전쟁에 몰두했다. 그 이후에는 소사업으로 하여금 서역지역을 재탈환케 하였다. 결국 지속적인 토번과의 전쟁에서 당나라는 675년에 가서야 토번이 점령하였던 톈산남로를 재탈환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를 신라는 놓치지 않았다. 당나라에 유학간 승려를 통해서 신라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당나라는 설인귀가 빠진 당군에 말갈족 기병으로 보충했다. 당 고종은 672년 4월, 토번의 화친제의에 굴욕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토번과의 전쟁에서 병력 11만 명을 잃은 데다가 동아시아에선 신라와도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672년 4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 고종은 눈을 신라로 돌렸다.  672년 7월에 당의 군대가 평양 지역으로 밀려왔다.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말갈 출신 이근행이 이끄는 3만 기병이 신라와의 전쟁에 급파되었다. 당과 말갈기병은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고 있는 평양 부근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바로 황해도 석문지역으로 남하했다. 당시 황해도지역은 신라군이 지키고 있었다. 기병이 아닌 보병 위주인 신라군은 기병에 맞서 장창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급히 내려온 말갈 기병은 석문일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라의 장창부대에 걸려들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따르면 3000명의 말갈기병을 신라의 장창부대가 무찔렀다고 한다. 이에 문무대왕은 말갈 선도 기병 3000명을 사로잡은 장창부대에 큰 상을 내렸다.



당나라의 토번 전쟁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신라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던 신라는 더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황해도 석문지역에 신라 주력군을 배치했다. 석문지역은 너른 평야지역이다.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일대로 추정되며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길목이다. 석문 같은 넓은 평야지역은 기병에게는 유리하지만 보병위주의 신라군에는 불리한 곳이다. 그런 곳에  전공(戰功)에 눈이 먼 신라 주력군이 진을 친 것이다. 게다가 진영까지 흐트러지고 말았다. 3만의 당과 말갈 기병이 들이 닥치자 신라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였다. 신라 조정은 한마디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가문에서 파문당한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 이야기도 바로 석문전투 패배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조정은 급히 사죄 사절단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나라가 신라에 집중하면 토번이 또 다시 당나라를 건드렸다. 신라보다 토번이 당나라에는 더 위협적이었다. 신라는 당의 변방에 불과하지만 토번은 당의 무역로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토번 때문에 당 고종은 신라의 사죄 사절단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당의 군사적 압박이 느슨한 사이 신라는 또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궤멸된 주력군을 보충하기 위해 남자 대부분이 징집될 정도였다. 성 쌓는 일은 아녀자가 담당했다. 산성 이름 중에 ‘할미산성(老姑山城)’이라는 지명이 많은 이유다. 전열을 가다듬은 신라군은 당군을 또 다시 압박했다. 신라는 당군에 맞서서 지구전으로 방향을 바꿨다. 군사적으로는 선제공격을 하고 외교적으로는 사죄사절단을 보내는 화전양면(和戰兩面)을 구사했다. 한마디로 나당전쟁은 신라가 국제관계를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신라의 이 같은 국제관계를 이용한 전략은 오늘날 북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지 W.부시대통령은 이란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금방이라도 북한을 타격할 것처럼 나섰다. 당시 우파진영은 부시대통령에 환호했다. 그러나 2002년 9.11사태는 미국의 군사외교전략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1994년 10월 미-북 제네바 회담에서 핵개발 포기를 선언했던 북한은 북핵동결 파기를 선언했다 9.11 사태로 미국이 북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틈을 탄 것이다. 그렇게 북한은 핵개발 재개를 선언하고 시간을 벌었다. 미국이 빈라덴을 잡기 위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북한은 꾸준히 핵개발을 진행하고 결국 2016년 수소폭탄 실험까지 감행했다. 2017년 7월에는 북한은 화성14호 ICBM까지 발사했다. 이에 미국은 화들짝 놀랐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 강공책으로 선회했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중동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미국이다. 게다가 이미 빈라덴까지 사살하고 대테러전은 일단락 된 상태다. 트럼프는 중국과 북한에 눈을 돌렸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하는 듯 했다. 하노이회담에서 김정은은 트럼프에 완전히 농락당했다. 김정은은 화풀이를 대한민국에  하지만 아직 미국에 대해서는 말뿐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낼 듯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직 배달되지 않았다.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김정은의 북한식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