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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풍자한 만문만화 - 키스걸·마네킹걸·스틱걸·핸드걸… '모던경성'을 만화로 풍자하다

이강기 2020. 2. 17. 14:12

키스걸·마네킹걸·스틱걸·핸드걸… '모던경성'을 만화로 풍자하다

    입력 2020.02.17 03:30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0] 1920~30년대 풍자한 만문만화

점점 커지는 종로경찰서 그림엔 좀도둑만 잡았으면 이리 번창할까
일제의 식민통치 겨냥해 비판도

'스틱껄쯤이야 간판 붓치고 해먹지는 안엇지만 조선에도 잇섯다고 볼 수 잇고 마네킹껄은 협찬회의 소개로 구경도 하엿지만 박람회에서 '키스껄'이 생길 줄은 뜻밧기다.'(조선일보 1929년 9월 22일 자)

1929년 가을 경복궁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총독부가 식민 통치를 선전할 목적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일본과 만주, 대만까지 참여시킨 박람회에서 스물 안팎 여성 수백명이 안내를 맡았다. 고등보통학교 졸업 이상 고학력 여성까지 앞다퉈 지원할 만큼 인기였다. 그런데 '일금 오십전에 키스를 팔다가 내쫓긴 여자'(이하 현대어로 옮김)가 있었던 모양이다. 양복 차림 남자가 50전을 내미는 그림과 함께 짧은 글이 실렸다. '조선서 이런 새 유행이 생기리라고는 누구나 뜻도 못한 일이었겠지. 듣도 못한 일이 곧잘 생기는 곳은 조선이라 할까?' 총독부가 주최한 박람회와 '모던 걸'의 탈선을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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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28년 2월 5일 자에 실린 '모던 걸의 장신(裝身)운동'(왼쪽). 황금 시계와 보석 반지로 치장한 모던 걸을 그렸다. 이틀 뒤인 1928년 2월 7일 자 '모던 보이의 산보'(오른쪽). 나팔바지 차림에 모자를 쓰고 할 일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모던 보이의 허영을 꼬집었다. 아래 왼쪽은 1929년 가을 열린 조선박람회에서 키스를 일금 50전에 팔다 쫓겨난 '키스걸'을 소재로 한 만문만화(1929년 9월 22일 자). 일제 통치 선전을 위한 대규모 행사인 박람회의 탈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오른쪽은 경찰서 확장과 일제 통제 강화를 연결한 '종로경찰서 대대 확장 이전'(1929년 8월 25일 자)
1920~1930년대 경성은 신문물과 소비문화가 밀려온 전시장이었다. 박람회에서 50전에 키스를 파는 '키스걸', 백화점에서 상품 광고를 들고 마네킹처럼 판촉 활동을 하는 '마네킹걸', 돈 많은 남편을 위해 손발 노릇 하며 시중드는 '핸드걸'이 잇따라 등장했다. 1927년부터 조선일보에서 10년간 근무하고 학예부장(현 문화부장)을 지낸 안석주(1901~1950)는 휘황찬란한 근대와 맞닥뜨린 모던 보이, 모던 걸의 부조화를 '만문만화(漫文漫畵)'에 담았다. 한 컷 만화에 짧은 글을 덧붙인 형식이다. 1928년 2월 5일 자에 실린 만문만화 제목은 '모던 걸의 장신운동(裝身運動)'. 요즘 말로 '신여성의 패션'이다. 똑같은 머리 모양과 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신여성들이 전차 손잡이를 잡고 섰다. 팔뚝마다 황금 시계, 손가락엔 보석 반지로 장식했다. '황금 팔뚝시계와 보석 반지, 현대 여성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지 못하면 무엇보다 수치인 것이다.'

도쿄 긴자엔 '스틱걸'이 유행했다. 번화가를 산책하는 남성의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지팡이를 대신하는 '모던 걸'에 붙인 이름이다. 안석주는 조선엔 '핸드걸'이 유행한다고 썼다. '그의 남편은 이달에도 '따이아몬드' 반지에 겹양산에 순칠피구두에-'(1929년 6월 4일). 아내는 바가지 긁는다. '남편의 다리만 주물러주겠습니까? 면도도 해주고 발도 씻겨주고 밥도 먹여주고…' 돈만 주면 남자가 해야 할 사소한 일까지 모두 해주는 '핸드걸'이다. 안석주는 '스틱걸'이나 '핸드걸'이나 '사나이의 겨드랑이 밑에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모던 보이'의 허세와 위선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고물상에서 산 5원짜리 중고 양복을 걸치곤 미녀(美女)와 탱고, 왈츠를 떠올리는 모던 보이의 허영을 다룬 '고물상 양복'(1933년 10월 20일)이 그렇다. 나프탈렌 냄새 밴 양복을 걸친 인텔리는 노동자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지식이 있다' '그래도 나는 너희를 지도할 흉도(胸度·도량)를 가졌다'며 큰소리친다. 안석주는 한 방 더 날린다. '왜 지금 그대는 고물상에서 양복을 사입고선 술집을 기웃거리느냐. 겨울이 온다. 그대는 김장 때문에도 아내의 그 여윈 얼굴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언짢으리.' 서양식 모자에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를 향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있는 조선의 거리에 그네들이 산보할 때에 그는 외국의 풍정(風情)인듯 느끼리라'(1928년 2월 7일)고 비꼬았다.

만문만화는 1920년대 후반 일제 통치를 직접 비판하던 시사만화가 검열 때문에 사라지면서 대안으로 등장했다. 대표 주자인 안석주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을 과녁 삼아 일제에 의해 이식(移植)된 근대의 부조화를 위트 있게 그렸다. 총독부 통치를 직접 겨냥해 검열 당국을 긴장하게 한 작품도 많다. 하루는 경찰서 건물이 점점 커지면서 식민 당국의 감시와 처벌을 상징하는 수갑도 점점 커지는 그림을 실었다. '종로서 대대 확장 이전'(1929년 8월 25일)이란 제목 아래 '좀도둑만 잡았으면 이렇게 번창은 아니하였겠지'라고 일격을 날린다. 파고다공원에 모여든 실업자들을 스케치한 그림 아래 '언론의 자유는 파고다공원에 한했으니 싫도록 이야기나 하소'(1930년 4월 13일)라며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안석주가 1936년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신문사를 떠날 때까지 만문만화는 조선일보를 무대 삼아 전성기를 누렸다. 문화예술계는 2000년대 들어 안석주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모던 경성' 붐을 일으켰다. 안석주 만문만화를 연구한 신명직 일본 구마모토가쿠엔대 교수는 "밀려오는 근대와 자본주의를 마음껏 누리고 싶지만, 식민지라는 억압적인 상황에 손발이 묶여 있던 그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을 잃지 않고 날카롭게 풍자했다"('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고 평가했다.


[만문만화 주도한 안석주,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사]

안석주
연극배우, 가수,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기자…. 석영(夕影) 안석주(1901~1950·사진) 조선일보
학예부장은 다재다능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휘문고보를 다니며 고희동으로부터 서양화 수업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배우로 먼저 이름을 날렸다. 스물둘이던 1923년 최초의 신극단체 토월회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역으로 인기를 얻었다. 카추샤 역을 맡은 여배우 이월화와 함께 부른 '카추샤 애처롭다' 노래는 장안의 히트곡이 될 정도였다. 소설가 나도향과 함께 잡지 '백조'를 이끌었다.

안석주는 동아·시대일보를 거쳐 1927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듬해 연재한 홍명희 소설 '임꺽정'에 삽화를 그리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28년부터 연재한 만문만화는 모던 유행이 불어닥친 1920~ 30년대 경성의 변화를 날카롭게 풍자한 사회비평으로 주목을 받았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모집 부문에 만문만화를 포함시킬 만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영화 '심청전'을 감독한 그는 19 36년 8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퇴사했다. 일제 말기 지원병 제도와 침략 전쟁에 협력했다는 논란도 있다.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부위원장, 대한영화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안석주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원래 제목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장남 안병원이 여기에 곡을 붙여 만들었다. 6·25 전인 1950년 2월 세상을 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7/20200217002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