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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e)북이 저 책을 죽이리라

이강기 2020. 4. 10. 22:23


[중앙시평]

이(e)북이 저 책을 죽이리라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사제가 중얼거린다. 그의 앞에 책이 놓여 있고 창 너머에 대성당이 보인다. 이 발언은 예언인가 협박인가.
 

책은 지식 정보의 전통적인 매체
이전 매체를 대체했던 종이향 책
종이책을 위협하는 이(e)북의 힘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도서관

성서는 필사로 생산되었고 라틴어에 포박된 희귀·유일본이었다. 무지렁이들에게 성서를 설명하려니 성당 벽에 천국과 지옥이 빼곡히 조각되었다. 사제들은 비문(秘文)의 뜻을 읽어 천국과 지옥의 구분선을 그었고 백성들은 구원과 처벌의 무게 아래 돌을 쌓았다. 광기라고 표현되어 마땅한 집념의 시대였다. 그게 중세 유럽의 대성당이다. 그런데 일상어로 번역된 성서는 인쇄술이라는 숙주를 얻어 창궐하는 바이러스처럼 세상에 번져나갔다. 그리하여 결국 책이 성당을 죽이리라.
 
저 거대한 구조물을 붕괴시키는 이 작은 것은 무엇인가. 메소포타미아문명 시절 문자의 매체는 점토판이었다. 교환과 계약의 증거자료로 시작한 쐐기문자는 결국 『길가메시서사』의 장대한 문장 기록에 이른다. 그럼에도 점토판은 다만 문자가 새겨진 물체였다. 중국의 죽간(竹簡)처럼 이건 국지현상이었다.
 
스크롤이 등장했다. 이것이 인류 공유의 첫 책 형식이라 봐야 할 것이다. 베수비우스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덮인 헤르쿨라네움 문서들도, 이스라엘 사해 근처 쿰란동굴 문서들도 모두 스크롤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문서들도 스크롤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두루마리다. 그런데 스크롤은 검색이 불편하다. 문서의 앞뒤로 가려면 이전 부분을 돌돌 말아가야 한다. 헤르쿨라네움 스크롤은 눕혀서, 사해 스크롤은 세워서 보관했다. 변형 위험도 공간 소모도 크니 보관도 쉽지 않다.
 
종이나 양피지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제본한 것이 코덱스다. 이것은 스크롤의 검색·보관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모서리에 쪽수를 적었으니 펼쳐 검색했고 적당한 곳에 적당히 놓아 보관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책이 코덱스고 도서관은 코덱스의 바다다. 코덱스가 스크롤을 죽였다.
 
이(e)북이 등장했다. 이 매체는 스크롤을 죽인 코덱스의 칼을 돌려 잡았다. 그리고 코덱스의 목에 칼날을 들이 밀었다. 네게는 있느냐, 수 만 권 꽂힌 책장 사이를 순식간에 헤집는 검색의 힘, 대성당 공간이라도 가득 메울 내용을 손톱 크기 칩에 몰아넣은 저장의 능력.
 
이(e)북에는 절판·희귀본 개념이 없다. 출판사의 고민인 인쇄부수 결정과 판매부수 집계의 난관도 없다. 배달요구도 없고 침대 곁 독서 조명등도 필요없다. 이(e)북은 저 책을 죽일 것인가. 이에 맞선 코덱스신도들의 신앙 고백은 이렇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종이를 넘기는 손맛과 몸을 감싸는 종이향을 이(e)북이 어찌 흉내 내랴. 이 발언은 희망인가 회한인가.
 
코덱스가 스크롤을 대체하는 데 몇 백 년 걸렸다. 스크롤의 흔적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기는 하다. 우리의 중장년층이 받아든 빛나는 졸업장이 두루마리였다. 컴퓨터 모니터 높이를 넘는 긴 문장을 아래로 넘길 때 우리 손의 검지가 마우스휠을 굴린다. 스크롤이라 부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생전에 코덱스 멸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웹툰은 이미 만화책을 죽였다.  
 
필사본 시절 도서관은 수도원의 구석방이었다. 제국주의 유럽에서는 박물관의 방 한 칸이었다. 인쇄술로 빗장이 풀리고 시민사회가 되면서 도서관은 건물로 독립하고 공공공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새 매체의 시대에 저 도서관은 어찌 될 것인가. 성당도 철거된 건 아니다. 더는 그런 방식으로 지어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미래의 도서관은 박물관 혹은 미디어센터에 가까워질 것이다. 코덱스가 하루아침에 모조리 이(e)북으로 변환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식저장소로서 도서관은 아직은 유효하고 여전히 필요하다.
 
산업화시대에 카네기기금으로 세운 공공도서관이 2,500개가 넘는다. 정보화시대의 선구자 빌게이츠는 그 공공도서관이 자신을 키웠다고 짚는다. 선순환 생태계다. 바이러스가 행정부의 민낯을 들춰냈으나 세계를 장악한 정보유통의 플랫폼들은 여전히 미국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선거가 가깝다. 세계는 심리와 경제의 복합공황 상태에 들어섰다. 결국 공공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책이 시동을 걸겠다. 대상에 랜드마크 건립은 빼고 동네 도서관은 포함시켜야 한다. 도서관은 건물양식이 중요하지 않다. 책은 누워서도 읽는다. 창고, 주택 고쳐서 책 쌓아도 도서관이 된다. 다른 기능과 결합해도 된다. 거점 도서관은 책의 성당이고 시간축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네 공공도서관은 지금 시장에 유통되는 책들을 구입해서 곳곳에 만들 수 있다.
 
지식 생산 유통에도 언어사용 집단 규모의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시장 규모다. 한국은 도서관의 서적 구입만으로는 저자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작은 나라다. 그럼에도, 혹은 그러기에 더욱 도서관은 지식 생태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고 지식 생산을 국가가 장려하는 증거다. 지식 생태계는 21세기 사회기반 시설이다. 그 육성은 작은 나라가 작은 지구 위에서 사는 길이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이(e)북이 저 책을 죽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