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방송에서 한국정치학회와 국회미래연구원이 주최한 특별학술세미나가 열렸다. 4·15총선으로 거대 양당체제가 심화되면서 진영 정치, 지역주의 문제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2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우리 정치의 현 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짚어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사회는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 토론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김세중 연세대 명예교수, 장동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룡 여당'의 출현이다. '다당제 정착'을 위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결과는 거꾸로 거대 양당 체제의 공고화, 제3정당의 실종, 그리고 양극화의 심화로 나타났다.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양극화의 심화를 한국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으로 진단하면서 민주주의가 다수의 전제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경계와 함께 정치 세력 간의 대화와 합의를 통한 협치와 겸손한 정치를 강조했다. 세미나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 주].
김세중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압축 민주화의 성공이 오히려 이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진단했다. 민주화-산업화 세력 간 공공 정책을 둘러싼 토론보다는 파당적인 갈등이 심했고, 진영정치가 심화되면서 반대 정파는 공존과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하고 배제되어야 할 전투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현 386세대 중심 집권층의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성적 공론의 장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넉넉한 의석을 확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협치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했다.
장동진 교수는 민주주의가 결함을 갖고 있는 정치 제도임을 지적했다. 민주정치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은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절제 없이 운영되면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억압 기제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 헌법은 삼권분립과 함께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제약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는데, 민주정치는 바로 이런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또한 장 교수는 정책 결정이 시민들 대다수의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상식이란 것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폭넓게 합의할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한다. 따라서 민주적 결정(다수결)을 할 때 반대당의 지지자도 수긍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제도적 절제를 바탕으로 모두가 수긍할 만한 정책이 제시되어야 건전하고 내구성 있는 민주정치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양극화의 심화 현상을 꼽았다. 이는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 대통령 권력의 초(超)집중화다. 대통령을 향한 권력의 집중화는 삼권분립 균형의 원리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이 다시 행정부 권력의 확장, 국가권력의 강화와 병행되면서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적 발전을 저해한다”는 게 최 교수의 해석이다. 둘째, 정치적 갈등의 심화다. 승자에게 과도한 혜택이 주어지고 패자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주어지는 정치 조건 속에서, 정치 세력 간 힘의 균형이 깨지면 격렬한 갈등이 표출된다. 셋째, 여당과 야당 사이의 협력이 약화되면서 민주주의의 재생산이 위협받는다.
최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먼저 60~70년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강한 국가’라는 한국적 특성과 경제운영 방식에 있어서 국가 영역이 확장되며 사적 부문에 국가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넓어진 점을 선천적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같은 조건 아래서 “시민 의사를 대표하는 결사체인 정당의 약화와 행정부의 권력 강화가 동시에 진행”됐고 결국 민주정치의 핵심 메커니즘인 정당은 대통령의 종속 변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시민사회의 정치화 역시 대통령 권력 강화의 한 원인으로 봤다. 시민운동이 과거 우리 사회 민주화의 원동력이었지만, 민주화가 제도로서 안정화된 이후 시민사회의 역할이 과도하게 정치화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과의 결탁은 시민사회의 자율성 약화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와 함께 최 교수는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화가 촛불집회 이후 집권한 386세대의 ‘운동론적 민주주의관’과 맞물려 정치 극단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은 운동이 주도해 민주주의를 쟁취하면서 제도보다는 운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각이다. 촛불집회 이후 직접민주주의적 시각을 통해 이해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면서 포퓰리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린 반면, 사회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문화는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진영 정치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란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이어 적극적 지지자의 우상 숭배 현상과 정치의 도덕화 및 관념화에 대한 경계를 주문한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제한적 국가 개념과 사회적 다원주의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발제가 끝난 후 진영정치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진행자인 고세훈 교수는 진영정치의 폐해는 심각하지만 한국정치의 문제는 진영정치 자체가 아니라 진영의 내용은 없고 논리만 난무하는 진영 없는 진영정치라 진단하면서, 특히 지금과 같은 양극화는 이념이 아닌 감정의 양극화로, 상대를 공존하는 경쟁자가 아닌 제거해야할 적으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건전한 진영정치를 위한 정책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행자의 질문에 토론자들은 정파 간 경쟁이 아닌 정책 대결 중심의 정치가 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김세중 교수와 장동진 교수는 중간층, 중산층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특정 계층에 초점을 맞춘 정당 활동이 아닌 중도층 확장을 통해 균형을 맞추는 안정적 정치로 나가야한다고 조언했다. 최장집 교수는 정당들이 대통령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일관된 비전을 확립하고 선거로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자들은 이와 함께 법안과 정책을 놓고 타협하고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진영정치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이어 이번 총선이 민주당에 단독 과반 압승을 안겨주었는데, 강자의 제도적 절제가 가능한지, 보수 세력은 향후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최장집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실질적으로 총선을 지휘한 뒤 선거가 끝나자 당을 떠날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해, 이것이야말로 정당의 취약성을 드러내 보이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나중에 통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최 교수는 한국 대통령의 권력 행사 자제 역시 정당의 강화와 연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세중 교수는 현재의 권력 구조에서도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권력 분산은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검찰, 국세청 등 권력 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동진 교수는 정당 간의 균형이 무너져 한 정당이 지배적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이후 집권 세력의 실책이 쌓일 경우 촛불 집회처럼 국민과 정당이 직접 맞닿게 되는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한 평가는 세 명의 토론자가 비슷한 의견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 이후 성립된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총괄하는 ‘적폐청산’이란 모토는 굉장히 잘못된 방향”이라며 “비민주적 언어, 심하게 말하면 반민주적 언어. 전체주의적 언어”라고 비판했다. “적폐를 말하고 생각하는 게 개혁자의 자의적인 기준을 통할 뿐 범위나 대상이 광범위하고 경계도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이유다. 그러면서 적폐청산은 권력자의 자의적인 권력 의지 실현을 목표로 한 것에 불과하며, “이 말 자체가 갈등과 적대를 심화, 확대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반대하기 어려운 항일 정신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말로 시작하여, 이를 친일-반일 프레임으로 끌고 나가는 것도 도덕적으로 무결한 세력 대 척결 대상으로 갈등 구조를 치환하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김세중 교수는 “적폐청산을 2~3년 했는데 어리석은 방향”이라며 한국 사회가 그토록 사악하고 이룬 게 없고 불의로 가득한 사회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적폐청산이 진영정치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고, 미래를 향해 써야할 에너지를 과거의 일에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사 정리 과정에서도 심대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 국한하여 어느 정도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장동진 교수는 과거의 부정의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원, 보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처벌은 합의가 어려운 문제라고 보았다. 적폐청산은 도덕과 정치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고 일상 속에 전제의 위험을 확산시킨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질문은 조국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으로 이는 공수처 설치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발제문에서 “공수처법이 대통령의 전제정(専制政)화를 가능케 할 수 있다”며 공수처 설치법에 이의를 제기한 최장집 교수는 미국, 헝가리 등 최근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한 서구 사회를 언급하며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들이 법을 하나씩 고쳐나가며 대통령·총리 등 집행부 권력이 너무 강화되는 상황, 즉 천천히 이루어지는 권위주의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대통령 권력이 과도하게 확장돼있고, 지금도 권한 행사를 자제하는 규범이 없는데 또다시 강력한 법을 새로 만드는 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최 교수는 이를 ‘끓는 물 속의 개구리’(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 넣으면 깜짝 놀라 뛰쳐나가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다는 이야기)에 비유하며, 공수처가 그렇지 않아도 강한 대통령 권력을 더욱 강화하여 민주주의에 위험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세중 교수와 장동진 교수도 검찰 권력의 분산이라는 방향은 바람직하지만, 그 수단이 공수처 설치인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 했다. 장동진 교수는 마지막 발언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를 통해 균형 정치를 모색하자고 했다.
4·15 총선을 압승한 여당에 대한 조언도 있었다. 사회를 맡은 고세훈 교수는 “4·15 총선 이후 보수진영이 극도의 빈사 상태에 빠지면서 집권 여당의 역사적 책임은 그만큼 무거워졌다”며, 민주주의가 독단과 억압으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겸손한 정치가 필요함을 상기시켰다. 이어 “온전한 하나를 위해 아홉을 야당에 내줄 수 있는 비장함이 절실하다. 독단이 만든 선한 체제보다 지루하고 긴 합의를 거친 미진한 개혁, 즉 포용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에 더 긍정적일 수 있다”는 조언을 끝으로 세미나는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