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 질투와 열등감의 왕, 인조

이강기 2020. 5. 19. 12:25

 

 

"이 책들을 들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입력 2020.05.12 03:13 | 수정 2020.05.13 13:52

 

[박종인 歷史] "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A28면 봉림대군 세자 책봉 회의 1645년 2월 20일 심양을 떠난 소현세자 일행이 엿새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6일 세자가 급사했다. 5월 14일 심양에 있던 둘째 봉림대군이 귀국했다 오피니언 > 사내칼럼박종인 선임기자 2020.05.26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효종이 등극하고 5년째인 1654년 조선에 변괴와 재난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는 대낮에 금성이 수시로 나타나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영남에는 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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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歷史] "걱정거리가 될 터이니 기필코 제거하고자 한다" A30면 그때 인조는 강화도에 있었고, 소현세자는 전주에서 '분조(分朝·비상시 조정을 대신한 임시정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오피니언 > 사내칼럼박종인 선임기자 2020.05.19

"이 책들을 들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A28면 조선 왕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한 고위급 부부 극적이고 불우한 일생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단했던 심양 생활 3월 30일 세자 일행이 압록강을 건넜다. 오피니언 > 사내칼럼박종인 선임기자 2020.05.12

[박종인의 땅의 歷史 - 212] 극적이고 불우했던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①

병자호란 막바지에 볼모를 자청한 소현세자
8년 볼모 생활 동안 피로인 속환… 농장 경영… 전쟁터에서 현실 목격, 새로운 세상 느껴
선교사 아담 샬 책 선물 "조선이 놀랄 것"이라며 부푼 기대 안고 귀국… 조정 반응은 냉담
아버지 인조 "학문은 팽개치고 재물만 탐한 놈"… 두 달 뒤 의문사

                  

"각자 진중하라."

1637년 정축년 1월 22일 아버지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던 세자가 선언했다. "누가 나라 운명을 굳건히 하겠는가. 나는 동생과 아들이 종사를 받들 수 있으니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다." 소현세자가 인질을 자청하며 협상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여드레 뒤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

2월 5일 세자가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이들을 데리러 온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에게 인조가 말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도르곤이 화답했다.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조가 아들에게 일렀다.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는 신하들에게 세자가 말했다. "진중하라." 마침내 세자가 말에 올라 떠났다.(1637년 1월 22일, 2월 8일 '인조실록') 세자는 스물다섯 살, 아내 강빈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때 최고사령관 김류가 "같이 끌려가는 내 아들 김경징은 벼슬이 높고 어머니상을 당했으므로 빼 달라"고 청했다. 강화도 수비대장 김경징은 밀려오는 청나라 군사 앞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워 섬을 내준 자였다. 총융사 구굉이 고함을 질렀다. "네 아들이 세자보다 높은가! 중전 상도 1년(初朞·초기)이  겨우 지났거늘!"('연려실기술'26, 인조조고사본말)

8년 뒤 통곡 속에 떠났던 소현세자와 아내 강빈이 귀국했다. 두 달 뒤 세자가 죽었다. 1년 뒤 강빈이 사약을 받았다. 세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아버지 인조는 며느리를 '개새끼'라 불렀다. 조선 왕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한 고위급 부부의 극적이고 불우한 일생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단했던 심양 생활

3월 30일 세자 일행이 압록강을 건넜다. 들판 노숙 여행 끝에 일행은 4월 10일 심양에 입성했다. 그 다음 달 완공된 심양관 관사로 입주를 마치고 세자는 홍타이지를 만났다. 8년 동안 여섯 아이가 태어났다. 딸 하나는 요절했다. 젊은 부부로서 겉은 평이해 보였으나 고된 생활이었다.

심양관은 조선의 무역대표부이자 대사관이었다. 끌려온 포로 송환 협상, 명나라 공격을 위한 징병 요구, 군량미 징발 요구, 공물 숫자와 종류 협상 같은 두 나라 사이 현안은 모두 심양관에서 조정됐다. 청 정부는 세자에게 요구를 수용하라고 우겼고 조선 정부는 왜 요구를 수용하냐고 질책했다. 심양관에서 작성한 일지 '심양일기'와 조선으로 보내는 보고서 '심양장계'에는 세자 부부가 갖가지 질병에 시달린 날들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세자는 매월 세 번 열리는 청 황실 아침회의에 참석했고, 황제가 사냥을 떠나면 동생 봉림대군과 동행했다. 아직 살아 있는 명나라 숨통을 끊기 위해 청 정부가 군사를 일으키면 소현세자는 그 전쟁에도 동행해야 했다. 그 가운데 세자의 세계관을 흔든 세 가지 일이 있었으니, 농장 경영과 명나라 현실 목격과 유럽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이었다.



세자, 노예 해방 농장주가 되다

1641년 12월 대기근이 휩쓸었다. 청 정부는 심양관에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대신 1000일을 갈 수 있는 밭을 주며 자급자족하라고 요구했다. 심양관은 "대국(大國)이 소국에게 시킬 일이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거듭 올라오는 반대에 청 황제는 "그렇다면 450일 갈이 좁은 밭을 준다"고 규모를 줄여버렸다.(1641년 12월 23일 '심양장계') 그러자 소현세자는 심양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주인에게 돈으로 사서 풀어주고 이들에게 밭을 갈게 했다. 속환과 노동력 확보를 동시에 이룬 것이다. 2년 뒤인 1643년 말 심양관은 939일 갈이 농장에 씨앗 233석을 뿌려 곡식 5024석에 목화 620근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1643년 12월 14일 '심양장계') 심양관은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1645년 6월 27일 '인조실록')

 

 

전쟁 속에서 현실을 보다

세자와 그 일행이 기록한 '심양장계'는 적나라하다. 명이 망한 이유가 권력자들의 사치라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명 황제의 패악을 있는 그대로 조선에 전하며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바로 알리려고 했다. '황제가 술을 좋아해 술주정을 하여 정사가 어긋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작년에 청나라에서 화친을 위해 사신 셋을 보냈는데 황제가 술에 취해 그들을 죽이라고 했다. 다음 날 그 사신들 행방을 묻는 황제에게 "명에 따라 죽였다"고 하니 사형을 집행한 자를 또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청에 화친사를 뽑아 보내라고 명했다. 사람들이 머뭇대자 화친사를 또 목 베어 죽였다.'(1643년 12월 22일 '심양장계')

세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저런 일들이었다. 주자성리학의 나라에서 온 왕자였으니, 소현세자 또한 본능적인 사대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대명 전투에서 목격하고 전해 들은 소식은 조선에서 배운 바와 너무나도 달랐다. 세자는 물론, 함께 심양 생활을 한 관료들도 느낌은 비슷했다.

사서(司書)로 세자와 동행했던 김종일은 1639년 귀국 후 이렇게 말했다. '군 기강은 엄하고 백성에게는 관대하다. 관리 임명은 능력으로 한다. 이들이 천하를 얻지 못한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治軍嚴 御衆寬 任人專其所施爲 安知其不得天下耶·치군엄 어중관 임인전기소시위 안지기부득천하야)'(김종일, '노암선생문집'3, 야성문답, 1639)

조선에 피어나는 먹구름

세자는 조선과 청 정부 사이에 앉아 병에 걸려가며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인조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세자가 끌려갈 때 동행했던 박황이 1639년 7월 인조에게 넌지시 보고했다. "신이 심양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은밀히 전해 주기를 '성에서 나왔을 때에 왕을 아들로 바꾸어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나이다."(1639년 7월 14일 '인조실록') 1643년 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인조가 이렇게 말했다.

"청나라 사람들이 나에게 입조(入朝·속국 지도자로서 조정에 와서 인사함)를 요구한 적이 있다. 저 나라 사람들이 옛날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활에 한번 상처를 받은 새는 으레 이런 법이다."(1643년 10월 11일 '인조실록') 어느 틈에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늙은 아비 눈에 아들은 호랑이로 자라나 있었다.

 

 

최고 경영자 부부의 귀국

심양 생활 끝 무렵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명나라 정벌 전투에 소현세자를 동행시켰다. 그때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 대화하고, 수학과 천문학 서적을 선물받고 세자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돌아가면 사람들이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학문의 궁전으로 옮겨져 크게 놀랄 것이다."(아담 샬, '중국포교사', 1672, 안재원, '아담 샬, 순치제, 소현세자', 인간-환경-미래, 2012 재인용) 소현세자 육성이 남은 마지막 기록이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소현세자 부부가 귀국했다. 심양에는 수확한 곡식이 4700석 넘게 남아 있었다. 가져온 재물 가운데 은 1만650냥, 황금 160냥은 강빈 개인 재산이었다. 강빈에게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사찰에 시주한 황금 260냥도 있었다.

광속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품고 압록강을 건넜지만 반응은 이상했다. 사람들은 소현세자가 '학문 강론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재(理財)만 일삼았다'고 했다. 실록은 '북경의 물화(物貨)를 많이 싣고 왔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실망했다'고 기록했다.(1645년 3월 9일 등 '인조실록')

사람들을 놀라게 할 지식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김종일이 천하를 얻으리라 예언한 오랑캐 나라 정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귀국 두 달 만에 세자가 죽었다. 온몸은 시커멓게 변하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는 선혈이 낭자했다.(1645년 6월 27일 '인조실록')



아버지의 치사한 기억과 '개새끼'

이상하게도 아버지 인조는 아들 죽음에 적대적이었다. 인조는 세자 관을 왕실 관인 '재궁(梓宮)'이라 부르지 말고 그저 '구(柩)'라 부르라고 했다. 1년상도 7일상으로 줄였다. '원(園)'이라 불러야 할 세자 묘역은 '묘(墓)'라고 격하하라 명했다.(1645년 4월 27일 '인조실록') 며느 리 강빈까지 죽였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듬해까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자 인조가 이렇게 말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 자식이라고 칭하는구나(狗雛强稱以君上之子·구추강칭이군상지자)!"(1646년 2월 9일 '인조실록') 인조는 며느리를 '개새끼(狗雛·구추)'라고 불렀다. 실록에 유일무이하게 등장하는 '개새끼'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걱정거리가 될 터이니 기필코 제거하고자 한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19 03:12 | 수정 2020.05.19 05:02

[213]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② 질투와 열등감의 왕, 인조

가족 복수 별러온 능양군, 권력 복귀 노리는 서인과 연합해 반정 성공
소현세자는 정묘호란 때 분조 지휘, 병자호란 후 심양 볼모… 국정 스스로 판단, 결정
권위 완전 추락한 인조, 심양시절부터 세자 감시 지시… 첫번째 귀국할 때는 공식 마중도 금지
며느리 부친상도 참석 금지, '맏며느리' 권한 가진 강빈 끝내 죽여
반정 명분이 허구임을 스스로 드러낸 패륜 군주 인조

불안에 떠는 지도자, 인조

 

1627년 정묘년 1월 13일 후금 기병대 3만 병력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 의주성 밖에서 항복을 요구할 때 부윤 이완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다. 이순신의 조카로서, 정유재란 노량해전에서 총에 맞은 삼촌을 이어 지휘했던 용장이었다. 그 무공이 무색했다. 이완이 북을 치며 군사를 모았으나 '오랫동안 이완이 군사들로부터 마음을 잃어 적병이 강을 건너자 군사와 백성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이완은 분전 끝에 전사했다.

2월 나라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우리(후금)는 오로지 옛 왕 일을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今日之事 專爲前王復仇·금일지사 전위전왕복구).' 4년 전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반정의 부당함을 따지고, 나아가 군사들을 징집 해제하고 10년 동안 집으로 돌려보내겠다(十年復戶·십년복호)고 했다.('조야기문·朝野記聞' 권5 정묘노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인조에게는 독화살 같았다. 자기 권력의 불안한 정통성과 돌아선 민심을 정통으로 저격한 소문이었으니까. 그때 인조는 강화도에 있었고, 소현세자는 전주에서 '분조(分朝·비상시 조정을 대신한 임시정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복수 더하기 복수,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은 능양군 이종과 서인 세력의 연합 쿠데타였다. 능양군의 복수극이요 서인이 벼르던 권력 복귀전이다.

1615년 광해군은 서울 새문안에 있는 정원군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며 집을 빼앗았다. 정원군은 광해군 동생이자 인조 친아버지다. 그해 광해군은 정원군의 친아들이자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역모 혐의를 씌워 유배 보냈다.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광해군은 정원군이 살던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지었다.(1615년 11월 17일 '광해군일기') 그 궁궐이 지금 경희궁이다. 집을 빼앗기고 동생이 강제 자살 당한 능양군 이종은 이를 갈았다.

그 능양군을 앞세워 선조 말기에 몰락했던 서인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 인조반정이었다. 인조는 실질적인 주도자임을 자처하며 반군을 앞에서 지휘했다. 복잡하고 불우한 가정사를 일거에 만회한 복수극이었다.

하지만 경운궁(덕수궁)에 11년째 유폐돼 있던 인목왕후가 정권 교체를 허락해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날 밤 경운궁으로 가 왕후를 창덕궁으로 데려왔다. 대비가 된 왕후가 입을 열었다. "내 손으로 광해와 그 아들 목을 잘라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려 한다(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원친작거부자지두 이제망령)."(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권위 없는 반정 정권

인조는 왕권이 목적이었고, 인목대비는 광해의 목이 목적이었고, 서인은 권력이 목적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인목왕후 폐위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의 패륜과 사대 본국 명나라에 대한 배신 심판 같은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복수와 복수, 그리고 권력에 대한 오랜 갈증이 결합한 쿠데타에 불과했다. 목적이 죄다 달랐으니 정권도 엉망진창이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왕을 바꾸었다는 소리에 모두 놀라 동요했다. 정권은 이를 힘으로 누를 수 없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래서 남인 원로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하자 그제야 인심이 안정됐다.(김장생, '사계전서·沙溪全書' 부록 연보) 그런데 4년 뒤 정묘호란이 터진 것이다.

정묘호란과 세자의 분조

호란 때 소현세자는 열다섯 살이었다. 개전 직후 인조는 대신들 청을 수용해 분조(分朝)를 허락했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분조에 이은 두 번째 분조다. 인조는 체찰사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한 조정 관료 26명을 대거 분조에 포함시켰다. 자신은 강화도로 도망갔다.

그해 1월 24일 서울을 떠난 세자는 3월 23일 강화도로 복귀할 때까지 이들과 함께 민심 안정이라는 비상 대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아버지 명에 따라 세금 부과의 근거가 되는 호패를 불태우고 노동 징발도 되도록 줄여줬다. 대신들과 경서를 읽는 세자 교육도 빼지 않았다.(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와 세자의 역할', 규장각, 2007)

조선의 세자 교육은 시강원(侍講院) 소관이다. 소현세자는 이동식 시강원 교육은 물론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장 교육까지 체험한 권력 후계자가 되었다. 전쟁은 두 달 만에 끝났다. 세자는 후금의 동생 나라가 된 조선 조정으로 복귀했다.

세자빈 강씨와 물실국혼(勿失國婚)

그리고 그해 7월 인조가 남인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했다. 서인들이 벌떼처럼 반대했다. 사간 이상급은 "역적의 친척 딸이니 국혼(國婚)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인조가 "이미 정혼(定婚)이 내 뜻인데 어찌 감히!"하며 화를 냈다. 이상급이 말했다. "신(臣)을 파직하시라." 인조는 파직시키지 못했다. 김자점, 심명세, 윤방, 이정구 같은 반정 공신을 포함한 서인 전원이 반대했다. "혼인은 반드시 그 부모가 주관한다"고 인조가 반박했다. 서인들은 "국혼은 대신과 반드시 상의한다"고 재반박했다.(1625년 7월 28일 '인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