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憶해 두어야 할 이야기

기억은 어떻게 역사를 향해 솟구쳐 오르나

이강기 2020. 5. 30. 21:07

기억은 어떻게 역사를 향해 솟구쳐 오르나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경향신문

입력 : 2020.05.30 12:03

 

 

 

기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다가도 계기만 생기면 언제든 땅 위로 솟구쳐 오른다.
기억이 흐르는 곳은 사건에 참여한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연대해 더 나은 기억의 미래를 여는 것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기억은 아직 전쟁의 포화를 맞고 있다. 꼭 70년 전, 한반도에 발발한 전쟁으로 아내 뱃속에 아들을 남겨둔 채 한 아버지가 명을 달리했다.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였다. 김복영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한국전쟁유족회) 회장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950년 7월로부터 넉 달가량 지나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당연히 죽었어야 했다’는 마을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본 적도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60년이 흘러 한 갑자가 도는 동안 줄곧 왜곡된 채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김 회장이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기억을 온전히 전해주지 못했다. 일가친척으로부터 아버지가 희생된 사연을 들었을 뿐이고, 아버지의 기억 대신 김 회장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마을 어디서나 날아오던 멸시와 공격뿐이었다. 아버지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새삼 느낀 계기는 김 회장이 나고 자란 충북 충주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면서였다. 그는 “서른 명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 열 명 정도가 죽은 우리 마을이 좀 별나서 그렇게 많이 죽었나보다 생각했는데, 비슷한 학살을 당한 전국의 유족들을 만나고 나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다른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들도 그랬듯 김 회장 역시 당장 살아남아야 했기에 기억은 우선순위에 놓이지 않았다.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와중에 억울한 죽음이라고 나서기라도 하면 더 큰 봉변을 당하는 시절이었다. 유족들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제 생존보다 기억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 때가 왔다. 속절없이 흐른 세월 속에서 과거사를 규명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유족들이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이미 돌아가신 유족도, 해마다 돌아가시는 유족도 셀 수 없는 형편인데 아직 선대의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하고 떠난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한국전쟁유족회 회원들이 841일 동안 이어온 릴레이 1인시위를 마치는 해단식이 열렸다. 이보다 앞선 21일에는 형제복지원과 서산개척단, 선감학원 등 과거 국가와 연관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역시 오랜 기간 이어온 농성을 중단한다고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국회 앞 천막농성은 927일 동안 계속됐다. 5월 20일 열린 20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마침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이들은 농성과 시위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국가가 나서서 묻혀 있던 기억을 꺼낼 수 있게 돕는 일은 2005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사건을 비롯해 국가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첫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 과거사위는 활동을 종료했다. 유족들의 요청과는 무관하게 조사 만료시점이 결정됐고, 아직 규명되지 않은 사건들을 남겨둔 채 과거사위는 사라졌다. 그리고 10년 뒤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한 과거사법 덕분에 2기 과거사위가 출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5년 당시만 해도 이미 50년이 훌쩍 넘은 과거인 한국전쟁 당시의 국가폭력을 희생자 유족이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다 앞서 일제강점기인 1941년부터 해방 후 30여 년이 지난 1982년까지 ‘부랑아 수용’ 명목으로 운영됐던 선감학원 사건, 1960년대 전국 남녀 1700여 명을 강제 동원해 서해안 간척사업에 투입한 서산개척단 사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역시 부랑인을 선도한다며 3000명이 넘는 수용인들을 강제 감금·노역시킨 형제복지원 사건 역시 당사자나 유족들이 내막을 밝혀내기는 어려웠다.

광주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한 유족이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우여곡절 끝에 출범 앞둔 2기 과거사위

 

1987년 수용인들이 단체로 탈출하며 실상이 알려진 부산 소재 당시 국내 최대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은 결국 문을 닫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인을 일제 단속하라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국고 지원까지 받으며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점을 감안하면 국가가 앞장서 ‘부랑인’ 딱지를 붙이고 이들을 보이지 않게 감금해둔 셈이다. 그러나 시설이 운영된 12년 동안 사망한 인원만 500명을 넘는 것으로 밝혀진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사라졌다. 박인근 당시 원장이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을 뿐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오랜 기간 주목받지 못한 이들 피해자의 실상은 25년 만인 2012년 이곳에 수용됐던 피해자 한종선씨(45)가 국회 앞 1인시위를 시작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활동을 종료한 과거사위가 다시 움직이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피해의 기억을 외치는 목소리에 책임을 다짐하는 메아리를 돌려주기 위해서도 국가기관의 공적인 조사와 진상규명은 더욱 절실했다. 아직도 뼈에 새겨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이들의 피해가 또 망각 속에 묻힐 수 있기에 무엇보다 입증자료가 필요하다. 한씨는 “어딘가 숨겨져 있을 자료부터 찾는 게 시급하다”며 “피해자들 가운데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등 여러 사건에 중복으로 얽힌 이들도 있어 이 같은 문제도 풀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짓밟힌 인생과 기억이 진상규명 보고서상의 건수로만 파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 과거사위가 얼마나 많은 사건을 접수했고, 또 미처 다 밝히지 못하고 접어뒀는지를 보면 숫자 역시 기억의 책임에 무게를 더한다.

 

1기 과거사위가 항일운동 시기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공권력이 국민의 삶을 짓밟은 것으로 밝혀낸 건수는 조사를 개시한 1만1075건 중 8450건에 달했다.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전체의 73.4%를 차지했다. 접수기간이 1년에 불과했고, 조사에 들인 시간은 4년 2개월 남짓이었다. 당시 규명이 완료되지 못한 피해자의 수만 4000명을 넘었는데, 접수하지 못했거나 최소 10만 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해 애초에 집계조차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컸던 보도연맹 사건까지 더하면 다음 과거사위가 다룰 사건의 건수는 짐작조차 어렵다.

 

이러한 숫자도 공식적인 진상규명이 뒷받침된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등이 제외됐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된 역사와는 달리 아직도 울분에 처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맥을 같이한다. 서산개척단 사건 진상규명대책위의 정영철 회장은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소식이 들렸음에도 “우리에겐 명예가 없다. 짐승에게 명예가 있겠냐”고 말했다. 고통의 기억이 단지 개인의 잘못이나 불운 때문이 아니라 국가까지 개입한 막강한 체제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그 국가가 발 벗고 나서지 않는 한 명예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과거사법은 통과됐지만, 이들 단체 피해자·유족들의 요구와 달리 배상·보상 조항은 빠진 상태여서 ‘반쪽 입법’이라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2019년 12월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국전쟁유족회 회원들이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울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건들

 

기억이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 기록되고 명예를 되찾은 뒤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해마다 5월이면 찾아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군 개입설과 폭동설 등은 가짜뉴스의 오랜 뿌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기억도 전쟁을 맞는다.

 

“5·18이든 4·3이든 대구폭동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인간의 역사 속에 사건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러는 인간성과 야만성, 아니면 거짓과 진실이라고 그럴까요… 이런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드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그래서 전쟁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연극 연출을 하던 고 박효선 극단 토박이 대표의 증언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5월 당시 시민군의 홍보부장을 맡았던 그는 이후 한동안 5·18에 대해선 오직 연극으로만 증언을 대신했었다. 전남대 5·18연구소가 출간한 <5·18항쟁 증언자료집>에 실린 이 증언은 199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야 나왔다. 그의 증언은 5·18을 비롯해 현세대가 기억을 공유하는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지점들 속에서 어떤 인식이 공유되고 또 어떤 인식은 치열하게 맞부딪치는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던 당사자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억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굳이 말로 하자면 모두를 위해 한 몸이 되어 나섰다는 그 일 말고 그 일을 겪고 난 뒤에 어떤 대접을 받았느냐, 그것에 따라 당시의 기억도 조금씩 변하는 걸 느꼈어.” ‘전라도 광주’가 역사의 한가운데 있기 9년 전인 1971년 ‘경기도 광주’에서 벌어진 큰 규모의 봉기도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의 기억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한사코 실명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증언한 60대의 시민단체 관계자 ㄱ씨는 어린 시절 광주대단지사건을 겪었다. 지금은 이름부터 전혀 다른 성남시가 된 이곳에 서울에서 쫓겨나다시피 밀려온 이주민들이 이사를 왔지만, 그들을 반긴 것은 아무런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허허벌판뿐이었다. 집이 지어질 때까지 천막생활을 하며 서울로 향하는 시외버스 한 대에 꾸역꾸역 몸을 싣고 출퇴근을 해야 했던 시민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

 

ㄱ씨의 말대로 당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기억보다 더 깊게 ㄱ씨의 뇌리에 박힌 기억은 이후 광주대단지사건을 바라보는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상반됐다는 데 기인한다.

 

‘8·10사건’으로도 불린 이 사건은 2011년 들어 논란이 됐다. 역사적 재평가를 받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40주년을 맞아 당시 성남시와 성남시의회에서는 40년 전 사건을 기념하고 성남시의 역사적 정체성으로 당당하게 기념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기념사업과 사건 발발 당시의 증언을 모으는 사업에 들어갈 예산은 모두 삭감되고 말았다.

“알잖아요, 분당은 성남시 분당구가 아니라 그냥 경기도 분당이라는 거.” ㄱ씨의 말처럼 성남 구도심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분당 쪽 여론 때문에 도시빈민들의 자발적 봉기로 기념될 만한 광주대단지사건 역시 어정쩡한 상태의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ㄱ씨는 “심지어는 진보진영 쪽 사람들도 8·10사건에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느냐’며 ‘분란만 키우지 말고 다른 데 집중하자’고 수군거리는 걸 듣고 내 기억에 회의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광주대단지 키즈’라고 불릴 만한 일부 세력이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며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임미리 고려대 교수는 통합진보당 당권분쟁 사태에서 부각되기 시작해 해당 정당의 해산사태에 이르기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던 ‘경기동부연합’ 세력이 바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규합의 동력을 얻었다고 봤다. 임 교수는 “이런 기억의 정치화는 두 광주, 즉 전라도의 광주(光州)와 경기도의 광주(廣州) 모두 일어났지만 한쪽에서는 도시의 정체성에 자연히 들어갔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양분된 입장을 낳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사태에 대한 기억과 상반된 역사적 평가

 

임 교수는 기억이 정치적으로 강화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광주대단지사건과 경기동부연합과의 관계가 단편적인 기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억압과 승리의 기억 모두를 공유했기 때문에 더 끈끈한 결합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런 관계는 다른 정치세력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출발한 억압과 저항의 기억뿐만 아니라 1987년 민주화로 인한 승리의 기억이 특히 NL계 학생운동 세력에게 집단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고 보는 임 교수는 “현재 586 일부 집단이 갖는 강고한 진영논리의 기반도 바로 억압·저항·승리의 집단기억을 배경으로 한다”고 말했다.

 

결국 기억은 한동안 숨겨져 지하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다가도 언제든 계기만 생기면 땅 위로 솟구쳐 정치적 지형을 뒤흔드는 요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셈이다. 이 경우 기억이 흐르는 곳은 사건에 참여한 이름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다. 국가폭력에 신음하거나 고통을 당한 보통 시민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며 운동이 촉발되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좌절하면서도 시행착오 역시 교훈으로 남는다. 50주년을 맞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중심에 있던 청계피복노조에 몸담았으면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안재성 작가는 기억을 이렇게 표현한다.

 

“광주에서도 지도자 없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고, 청계노조도 전태일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있었지만 이후 80년대 민주화를 맛보기까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끌며 기억을 공유했거든요. 위대하고 노련한 지도자가 업적을 이뤄낸 기억 대신 소박한 사람들의 기억이 더 부각됐으면 하네요.”

 

결국 피해를 입은 자도, 그리고 함께 연대해 더 나은 기억의 미래를 여는 것도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는 말을 보태며 안 작가는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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