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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식민지 조선을 찾은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

이강기 2020. 6. 10. 21:46

100년전 영국 여성이 이순신 초상화 그렸다?

 

조선일보

2020.06.10

 

1919년 식민지 조선을 찾은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

 

엘리자베스 키스의 '이순신 초상화'(추정) /책과함께

 


20세기 초 방한한 英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올드 코리아' 복원판 출간

눈빛이 매섭고 수염을 길게 기른 조선시대 무관(武官)이 오른손에 지휘봉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다. 뒤편 병풍에는 여러 척의 배가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배들은 거북선이다. 그렇다면 이 인물은 혹시 이순신 장군이 아닐까? 우리가 알던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강렬하고 다부진 풍채에 좀 당혹스럽다는 반응도 없지 않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100년 전 한국을 찾아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다채로운 일상을 따뜻한 터치로 그려냈던 영국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Keith·1887~1956)다.

 

일본 화가 이토 신수이가 그린 엘리자베스 키스의 초상화. /책과함께

 



이 수채화는 최근 ‘완전 복원판’이란 이름을 달고 출간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책과함께)에 수록됐다. 송영달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대 명예교수가 2006년 처음 번역 출간한 것에다 키스의 한국 관련 그림을 추가하고 화질을 보강해 다시 내놓은 것이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완전 복원판) 표지. /책과함께

 




◇'이순신 추정 초상화' 실려…전문가 "충무공 모습은 아닌 듯"

추가된 그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순신 장군 초상화’(추정)다. 송 교수는 2007년 캐나다 에드먼턴에 살고 있던 키스의 조카 애너벨 베러티의 집에서 처음 봤고, 몇 년 뒤에 매입했다고 한다. 키스는 늘 실물을 보면서 사진기로 촬영하듯 그렸던 데다 가로 55㎝, 세로 77㎝로 키스 그림 중 가장 크기 때문에 ‘특별한 인물의 초상화’임이 틀림없다는 얘기다. 만일 이 그림이 20세기 초 이순신 사당에 남아 있던 초상화를 보고 그린 것이라면, 현존하는 이순신 장군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 섞인 추정인 셈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미술사)는 “병풍의 거북선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양식으로, 이순신 장군과는 무관한 인물화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초상화가 남아 있는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1676~1728)의 얼굴과 흡사하다”며 “키스가 이순신 장군인 줄 알고 그렸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이봉상 역시 이순신 장군처럼 무신이며 수군통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무관 복장을 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연 날리는 아이들'. /책과함께

 



◇애정 담은 그림 85점, 한 세기 전 조선의 모습 경탄 자아내

이 그림의 모델이야 누구든, 키스가 이 책에서 85점의 그림을 통해 선사하는 한 세기 전 조선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낸다. 시정(市井)의 모습과 떠들썩한 굿판, 시골 결혼식, 아기를 업은 아낙, 연 날리는 아이들, 담배를 물고 중국 고전을 이야기하는 노인…. 제국주의적 시선을 걷어내고 식민지 조선인의 남루한 삶 뒤에 감춰진 여유와 멋을 화폭에 담아낸 그림들이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어느 골목길 풍경'. /책과함께

 


키스는 진흙 바닥 위에서 파리들을 쫓아내며 식사를 하는 주막 문 앞에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이란 글귀가 있음을 놓치지 않았고, 골목길에 나타난 여인이 ‘녹색 저고리에 크림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단이 땅에 닿지 않도록 허리끈을 동여맨’ 것을 그림으로 세세하게 짚어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장기 두기'. /책과함께

 


키스는 캔버스를 펼치기만 하면 몰려드는 구경꾼 때문에 숙소로 줄행랑을 놓았다가 해 뜨기 전 다시 나오기도 하고, 신부 행차를 쫓아가다 물에 빠지거나 궁중음악에 취해 그림 그리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훗날 다시 이 나라를 찾더라도 이토록 멋진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한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아기를 업은 여인'. /책과함께

 


겉으로 드러난 한국의 아름다움에만 빠진 것이 아니라, 3·1 운동 당시 조선인의 저항과 일제의 탄압을 생생히 기록했다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책의 가치다. 언니인 엘스펫 스콧과 함께 책의 본문을 쓴 키스는 이런 기록도 남겼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서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들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들은 초라해 보였다…. 3·1 만세운동은 놀라운 발상이었고 영웅적인 거사였다.”

3·1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8일 한국을 방문했던 키스는 19 21년 서울은행집회소에서 목판화 작품을 전시했고, 1934년에는 서울 미쓰코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 본점)에서 두 번째 전시를 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영국 여류 화가의 손으로 재현되는 조선의 향토색”이라고 보도했다. 키스는 “한국인들은 그림 속 자신들의 모습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다가 하나하나 음미하기도 했다”며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0/2020061003170.html